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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2. 묵상글 들 ( 부활 7주 토요일-아무것도 상관치 않는 자유로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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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2.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7주 토요일-아무것도 상관치 않는 자유로움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부활 시기의 마지막 날이고,
오늘 독서와 복음은 사도행전과 요한복음의 제일 끝부분입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가 로마에서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그리고 아주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는 얘기로 끝을 맺습니다.
사도행전의 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와 바오로가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는 열어놓은 채로 얘기를 끝내는 겁니다.
이는 사도행전의 저자가 베드로나 바오로보다 일찍 죽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일부러 이렇게 마감을 한 것일 겁니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는 계속되어야 하고 이어져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오늘 요한복음도 이런 면에서 비슷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자기가 기록한다고 기록했지만
하신 일들을 다 기록하자면 온 세상도 그 책들을 담아낼 수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못다 한 얘기가 많다고 열어놓은 채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 또한 예수께서 하신 일들에 대한 기록은 이어져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면에서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다른 제자의 죽음에 대해서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는 일에나 신경 쓰라는 투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선을 긋거나 딱 자르는 단호함 같은 것이 보이는데,
다른 사람 문제는 상관치 않는 이 단호함은 제자들,
그중에서도 베드로에게 더 많이 요구됩니다.
그러니까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의 엄격함은 병자나 죄인들에게도
율법의 준수를 엄격히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데 비해
주님의 사랑은 이들에게는 무한히 너그러우시고 자유를 주시지만
제자들에게는 매우 엄격하고 단호하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당신을 따름이나 복음 선포와 상관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모든 것을 다 팔고 자신마저 버려야 한다거나
주님을 따르려면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거나
주님을 따르려면 죽은 자의 장례도 죽은 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하시고,
복음 선포를 위해 나서는 제자들에게도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거나
가는 길에 누구를 만나도 노닥거리지 말고 서둘러 가라 하심이 그 예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따르는 일과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너무도 중요하고
긴박하니 그 일 외에 다른 일들은 아무리 중요해도
상관치 말고 끊으라는 단호함입니다.
그런데 바오로가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선포한 것도 같은 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외부적 방해가 왜 없었겠습니까?
외부적 방해는 분명 있었을 텐데 그것을 방해로 여기지 않는
내부적 자유로움이 있었던 것인데 그것이 바로 상관치 않음일 것입니다.
북한 사람들과 상대하다 보면 '일없슴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고,
그럴 때 우리의 호의를 매우 단호하게 끊는 차디참이 느껴져 놀라는데
이 말 안에는 그럴 일 없다거나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다는 뜻이 있지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주님과 우리 사이에 아무도 끼어들어서는 안 되고,
주님의 복음을 즉각적으로 선포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일로 인해서도
지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함이 우리에게 요구되는데,
요구를 받기보다는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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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김레오나르도 김찬선
내일 성령강림 대축일인데 제가 내일은 강론을 올릴 수 없는 곳에 있어서 부득이 강론을 올리지 않겠습니다.
앙해해주시기를 바라고, 성령강림 대축일 미리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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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2.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내일 성령강림대축일을 앞두고 부활시기를 마무리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호숫가에서 나타나시어 아침을 차려 먹이시고, 베드로에게 세 번이 사랑을 확인하신 후에 사명을 맡기시고, 베드로의 장래를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곧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 21,18)라고 하시며, 그가 순교 당하여 죽게 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은 사도 요한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장래에 대한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장래에 대해서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할지라도 ,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해를 불러일으켜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으로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사가는 초대교인들에게 그 진원지를 밝히면서 이러한 소문이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참 아이러니하고 재미난 내용을 드러내줍니다. 곧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랑을 확인까지도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다른 제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베드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오랜 고향 친구입니다. 그러니 그의 장래가 궁금한 것은 당연할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혹은 찬구를 경계하거나 비교하거나 경쟁하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여기서 베드로는 요한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곧 “요한을 위해서 묻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요한을 무척 사랑했고, 또한 그들의 친밀한 관계는 사도행전 2-4장과 요한복음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본문에서 베드로는 전에 최후만찬에서 배신자에 대해 예수님께 직접 묻지 못하고 요한을 시켜서 물었기에, 이제 요한을 위해서 호의로 직접 묻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고 하십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일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베드로는 벌써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목숨을 내놓고까지 따르겠다고 하고서 이미 세 번이나 배신하고 도망가지 않았던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를 호숫가에서 제자로 부르실 때에도,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올라갈 때에도, 부활하시어 나타나셔서도, 오늘 <복음>에서도 여전히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죽을 것입니다. 곧 베드로는 증거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증언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활동의 사목직을 요한에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관상의 역할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한 베드로에게는 교회를, 당신이 사랑하신 요한에게는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주님!
길을 가다가 멈추지 않게 하소서! 멈추다가 떠밀려가지 않게 하소서!
떠밀리다가 뒤로 휩쓸리지 않게 하소서! 휩쓸리다가 가야할 길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을 따라 가게 하소서! 눈길을 돌리느라 옆길로 새지 않게 하소서!
자신을 따르느라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고, 당신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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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2.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성모 마리아께서 사도들의 모후가 되신 사연
오늘은 성령강림을 하루 앞둔 부활시기 마지막날입니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에는 성령께서 강림하시기 전에 성모 마리아께서
수행하신 매우 중요한 역할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 역할로 말미암아 마리아께서는 사도들의 모후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고, 곧이어
스승의 비극적인 죽음에 슬퍼하지도 않고 자신들도 잡혀갈까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유다교 당국이 예수에 이어 그 제자들도 체포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그들에게 죽으신지 사흘 후에 그분이 부활하셨다고
여인들이 알려주었어도 설마 하는 마음에 그 전갈도 믿을 수 없었고 또 엠마오로 가다가
그분을 만나 뵈었다는 동료 제자들의 전갈을 들었어도 죽은 사람의 부활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숨어 있던 예루살렘 다락방에까지
직접 나타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손과 발 그리고 창에 찔리신 옆구리까지
보여주셨습니다. 이 자리에 빠진 토마스 때문에 이 발현은 한 번 더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충격과 두려움이 어느 정도 가시기는 했지만 그때뿐이었습니다.
부활을 믿기가 이토록 어려웠던 겁니다. 그 무렵 제자들의 믿음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주는 상황이 그들이 예루살렘을 아예 떠나서 각자 부르심을 받기 이전의 처지로
뿔뿔이 흩어져 버린 데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이렇게까지 제자들이 좀처럼 믿음과 용기를 지니지 못하니까
이번에는 아예 제자들이 어부 시절로 돌아가서 물고기를 잡고 있던
갈릴래아 호수까지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는 배가 가라앉을 지경으로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기적을 보여주셨고, 특히 베드로에게는 따로 일대일로 독대를 하시며
배신의 죄책감과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며 신앙의 고백을 받아 내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혼비백산하다가 뜻을 잃어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버린 제자들을
기억하시며 성모 마리아께서는 흔들림 없이 예루살렘을 지키고 계셨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머지않아 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간신히 믿음을 회복한 제자들이 하나둘씩 성모 마리아 주변에 모였습니다.
어쩌다가 나타나시는 예수님과 달리 성모님께서는 한결같이 그들과 함께 계셔주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처럼 느껴졌을 것이고 믿음도 아직 뜨거워지지는
못해도 흔들리지는 않고 차분해 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오늘 입당송이 알려주는 것처럼, 제자들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성모 마리아 주변에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강림하시는 성령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성령은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것이었고,
그제야 비로소 제자들은 마음이 뜨거워졌으며,
믿음이 담대해지고 용기가 굳세어져서 사도로서 세상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세 차례나 제자들에게 발현하시고 공생활 동안의
기억을 되살려주시며 성령을 보내주시기까지, 흩어지고 약해진 제자들의 믿음을 보듬어
주신 두 가지 힘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의 힘이요 어머니의 힘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모 마리아께서 오늘날 ‘사도들의 모후’로 불리시게 된 사연입니다.
교우 여러분,
지나간 부활시기 동안에도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나 성찬으로나
때로 일상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발현하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눈이 가리워져서
알아보지 못했을 수는 있겠으나 그분은 우리에게 나타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 보내고 있는 이 성모성월에 사도들의 모후이신 마리아를 공경하는 마음은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간직할 수 있도록 강림하시는 성령을 맞이하는 좋은 준비입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기도하며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 하느님을 성모님과 함께
맞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세상에 나아가서 성령의 기운으로
힘차게 복음을 선포하는 부활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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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2.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1,20-25: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
예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따라라”(19절) 하셨을 때 베드로가 돌아다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절) 하고 물었을 때,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2절) 라고 하신다.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나를 따라라.”라고 하신다. 행동적인 신앙은 주님의 수난의 본을 보고 완전하게 배웠으니 주님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지금 막 시작된 관상은 주님께서 오셨을 때 완전하게 될 것이기에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견디어 내는 신심은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따르지만, 지식의 충만함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채워지며 그때야 완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한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있으리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요한은 죽었다. 요한은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뒤로 73년을 더 살며 트라야누스 황제 때까지 살다가 다른 사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 평화롭고 평온하게 하늘나라로 떠났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요한이 오래 살아 내가 올 때까지 지상에 남아있기를 내가 바란다 해도 너는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마라. 너는 너의 것, 곧 네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나를 따르기나 하여라.’ 하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온 세상도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 많은 일을 기록할 수 있었지만, 단 한 권의 복음서만을 남겼다. 요한은 묵시록도 썼으며, 또한 매우 짧은 서간도 한 편 남겼다. 지금 성경에 있는 세 편의 서간은 모두가 요한의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세 편을 다 합쳐도 100줄이 되지 않는 글이다. 이 복음을 자신이 썼다고 드러내는 이유는 그는 복음을 제일 마지막으로 썼고 복음을 쓴 이유가 그분이 자기를 사랑하셨고 자기 기록이 믿을만한 것이며,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25절)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만물을 지혜로 창조하셨으며 그분의 지혜는 한계가 없으므로(시편 147,5 참조) 한계가 있는 이 세상은 무한한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자기 안에 다 담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한계가 있는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 하느님의 지혜를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말씀을 읽고 실천해야 한다. 끊임없이 말씀을 실천할 때 우리는 궁극적인 유익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것들을 잘라 버리고 선을 실천하여 성숙해짐으로써 자신을 밝게 하고 시야를 넓혀야 한다. 그리하여 구원 자체이신 주님을, 하느님을 차지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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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2. 부활 제7주간 토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 22)
앙심(怏心)과
신앙심 사이에
우리가
살고있다.
더 중요하고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은
주님과
우리자신의
관계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부르심에
필요한 것은
순명하는
믿음뿐이다.
소명과
정체성은
교만이 아닌
겸손으로
재발견된다.
우리모두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다.
정직하게
내면을 비추어
주시는
말씀이다.
관계의 눈을
다시금
진실되이
열어주신다.
스스로 만든
형제를 향한
판단이다.
먼저
우리자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이다.
은총으로
새롭게
변화되어야 할
대상은 언제나
우리자신이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깨닫게된다.
은총의 빛으로
우리자신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메시아가
아니다.
우리자신이
우리자신을
못보는
영적 장애인이다.
주님 앞에서
큰소리 칠
입장이 아니다.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은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은총뿐이다.
피조물이라는
우리 위치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다.
여전히
은총과
도움이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판단이 아닌
새로운 변화이다.
가장 아름다운
오월(五月)도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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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2.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주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를 제자로 부르시자,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섭니다(마태 4,18-22 참조). 오늘 복음에서는 이처럼 모든 것을 지체없이 버렸던 베드로의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집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앞날이 궁금했는지 아니면 자신과 비교하고 싶었는지 베드로는 그 제자의 미래에 관하여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처음 따라 나설 때 가졌던 단순함과 성실함으로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남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저마다의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경쟁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질까봐 두려워하고, 끊임없이 비교하며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고유한 탈렌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다 보면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만 하다가 길을 잃게 됩니다. 비교는 그만 멈추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연연하지 말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처럼 그분 곁에서 나에게 주신 은총과 사랑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 되돌아보고 감사해야 합니다.
생존 경쟁이 일상화된 현대의 삶에서 남과 비교하여 고통스러워하며 불안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늘 성찰하며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저마다의 소명에 따라 기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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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2.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화 박하사탕에서 주인공은 철길 위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나 돌아갈래!’ 지금의 현실이 풍요롭지만, 원하는 것을 얻었지만 그것이 행복함의 이유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드라마가 인기가 있었습니다. 과연 2021년이 33년 전보다 모든 면에서 발전하였습니다. 인터넷으로 실시간으로 지구촌의 모든 이와 소통이 됩니다. 카톡으로 국제전화를 무료로 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원하는 정보를 쉽게 검색할 수 있게 합니다. 생수를 들고 다니며 마십니다. 여행이 자유로워져서 지구촌 곳곳을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33년 전보다 행복해졌다는 이유가 될까요?
저만해도 꿈과 같은 유년시절의 낭만,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동네에서 해질녘까지 친구들과 놀 수 있었습니다. ‘자치기, 팽이치기, 구슬치기, 비석치기, 말뚝박기, 술래잡기, 다방구, 땅따먹기’와 같은 놀이가 있었습니다. 누구나 친구가 되었고, 매일 놀 수 있었습니다. 성당에 가면 주일학교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성탄에는 연극도 하고, 여름방학에는 수련회도 가고, 교리를 배웠습니다. 공부에 찌들지 않았습니다. 기타들고, 라디오 들고, 배낭 메고 강촌에도 가고, 일영에도 갔습니다. 문명과 발전이, 풍요와 자본이 행복과 비례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신앙은, 부활의 삶은 어쩌면 끊임없이 ‘나 돌아갈래!’를 꿈꾸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예전처럼 우물가에서 물을 구하지는 않을 겁니다. 예전처럼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이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원두막에서 수박을 먹지도 않을 겁니다. 청량리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동해바다를 가지도 않을 겁니다. 동네 만화가게에서 꿈을 찾지도 않을 겁니다. 학교를 마치고 운동장에서 늦게까지 농구를 하지도 않을 겁니다. 우리는 애벌레가 되어서 끊임없이 어딘가 모를 목적지를 향해서 올라가려 합니다. 발전과 성장 그리고 풍요와 자본은 우리에게 여유와 쉼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벌레는 죽음과 같은 쉼이 있어야 합니다. 고치가 되어서 움직임을 멈춰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가 생깁니다. 날개가 있어야 애벌레는 나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7주간 부활시기를 지내왔습니다. 절망의 끝에서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토마사도는 의심을 버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엠마오에서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착한목자이십니다. 착한목자는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가지에 붙어있으면 결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로 세상이 변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제자들이 변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변한만큼 세상이 변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였습니다. 부유한 자도, 가난한 자도 모두 함께 자유로웠습니다.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승천은 우주 너머로 날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승천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다시금 삶의 자리에서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고,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발전과 성장의 패러다임에서 나눔과 섬김의 패러다임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창조질서로 돌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땅으로 내려온 사람만이 하늘로 오를 수 있습니다.’ 군대에 가면 포복훈련이 있습니다. 철조망 아래에는 진흙탕입니다. 철조망 위로는 실탄이 날아다닙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군인은 낮은 자세로 철조망을 통과해야 합니다. 머리를 들면 철조망에 다치기 쉽고 옷이 찢겨 질 수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총알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낮은 자세로 기어가야 합니다. 삶의 시련도 그렇습니다. 결국은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겸손하게 땅을 향하면 언젠가 하늘로 들어 높여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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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2. 부활 제7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쓸모없는 호기심은 걸림돌이다
“남의 떡은 더 커 보인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 것보다도 남의 것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 는 말입니다. 자기 것에 만족하고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과 비교하며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허세를 떨기도 하고 분수없이 지낼 때가 있습니다. 잘 보이려 하지 말고 지금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이 아름답건만 그것이 마음 같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삶을 사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그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해 주면 속을 끓일 이유가 없건만 안타까움이 큽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운명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던 사람입니다(요한21,20). 그런데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21,21)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일생이고 너는 너의 갈 길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나를 따라라.”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 제자가 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비교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각자가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이 있고 탈랜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의 운명에 관심을 가진 것은 동료애를 발휘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쓸모없는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기서 영원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지나친 호기심은 걸림돌일 뿐입니다. 그것은 상관을 넘어서서 간섭과 참견을 합니다. 우리와 상관없는 일을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루카9,62) 되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는 나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걷는 발걸음에 복이 넘치시길 기도합니다. 요한복음의 핵심주제는 “서로사랑하자.”로 요약됩니다. 우리 삶을 사랑으로 물들이고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구원은 다른 사람의 삶에 끼어들어 비교하고 험담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라”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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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2.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운동경기에서 팀워크는 매우 중요합니다. 선수 개인의 기량도 중요하지만, 팀워크가 깨져서 패배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 조직력을 위해 합숙 훈련도 하면서 손발을 맞추는 것이지요.
운동경기만이 아닙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 해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먼 곳을 여행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이 대중교통을 운전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식사해주는 식당 주인이 필요합니다. 잠을 잘 수 있도록 숙박시설을 운영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조금만 주위를 바라보면 이 세상은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모임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나’가 아니라, ‘우리’로 모인 조직입니다. ‘개인’이 아닌, ‘공동’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함께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하셨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하셨으며, 세상의 모든 사람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야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믿으면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참 행복의 길로 모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 자주 ‘나’만을 이야기합니다. 나만 잘되고, 나만 잘 지내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나 혼자 있는 세상이라면 맞는 말이지만,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함께하는 세상에서는 잘못된 생각이 아닐까요?
베드로가 사랑하는 제자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랑하는 이 제자를 사도 요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베드로는 사도 요한의 미래를 물어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미래를 굳이 말씀해 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요한이 죽지 않으리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의 미래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보다 필요한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을 궁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는 잘되고, 누구는 못 되는 삶이 아닌, 우리 모두가 잘 되는 삶, 우리가 모두 참 행복을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함께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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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은 모든 것을 얻고자 욕심내어서 도리어 모든 것을 잃게 한다(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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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처럼.
스페인의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를 잘 아실 것입니다. 제가 학창 시절 때,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냥 성의 없이 대충 그린 것만 같았고, 그런데도 그 가격이 엄청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었습니다.
피카소가 했던 말을 책을 통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가인 라파엘로처럼 그리기 위해 4년이라는 시간이 들었지만, 어린이처럼 그리기 위해서는 평생을 바쳤다.”
어린이 본연의 감성과 예술성을 살리기 위해 그는 평생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어린이 본연의 감성과 예술성이 원래는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없어졌고, 잊어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젖어 들면서 순수성을 잃었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어린이와 같은 사람만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어린이와 같은 감성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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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2.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공동체의 아름다움
- 균형, 조화, 상호보완의 일치 -
모두가 소중하고(precious), 가치있고(worthy), 환영받아져야 하고(welcome), 아름답다(beautiful).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교황님이 보낸 메시지의 내용중 한 구절입니다. 사람 하나하나가 그러합니다. 하느님의 신비요 선물이며 말 그대로 ‘신의 한 수’와 같은 공동체의 형제들입니다. 그 누구도 절대적인 사람은 없고 모두가 한계와 약점을 지닌 상대적인 사람들입니다.
절대가 있다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인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비와 부요와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서로 다름에 대해 겸손하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 다르기에 공동체의 균형과 조화와 풍요의 아름다움이요 상호보완에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내일은 대망의 성령 강림 대축일이고 엊그제 아랫집 수녀님으로부터 성령칠은 카드를 받고, 주고 받은 덕담입니다.
“감사합니다. 수녀님, 성령칠은 선물 가득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신부님께서도 성령 충만한 여정 되세요.”
성령칠은 역시 성령 공동체의 풍요와 신비,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흡사 하나이자 일곱인 무지개의 빨,주,노,초, 파,남,보의 일곱가지 색깔을 연상케 합니다. 세상에 성령칠은 은총을 모두 받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곱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성령께서 믿는 이들의 성화聖化를 위해 베풀어 주시는 일곱가지 선물에 대해 살펴봅니다.
1.지혜(sapientia);구원에 필요한 일에 끌리어 맛들이게 하는 은혜
2.통달(intellectus);주님의 신성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은혜
3.의견(consilium);우리가 행해야 할 선과 악을 분별케 하는 은혜
4.지식(scientia);영생을 얻기 위해서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될 것을 분별케 하는 은혜
5.굳셈(fortitudo);구원을 가로막는 온갖 장애를 용감히 이겨내고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은혜
6.효경(pietas);하느님을 참 아버지로 알아 사랑하게 하는 은혜
7.두려움(timor;경외敬畏);전능하신 하느님 앞에 경외감을 가지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하는 은혜
참 아름답고 풍요롭고 신비로운 성령칠은입니다. 얼마전 읽은 ‘각자는 타인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고 모두는 성령께 귀를 기울여야 한다(One listening to the others; and all listening to the Holy Spirit)는 말마디도 마음에 와닿습니다. 성령聖靈의 은총이야 말로 인간 무지無知와 허무虛無에 대한 근본처방根本處方임을 깨닫습니다.
그대로 교회공동체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성령칠은입니다. 어느 것 하나만을 절대라 할 수 없는 일곱이자 하나인 성령칠은입니다. 이런 자각이 깊어질수록 성령께 대해, 공동체에 대해 더욱 감사한 마음, 겸손한 마음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어제 금요강론중 나눈 마지막 고백같은 내용도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공동체 일치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똑같은 견해를 나누지 않고도 친구로 머물렀다. 우리는 논쟁이 된 주제에 대해서는 ‘논쟁이 된 문제들에 대해서는 자유(libertas), 모든 것 안에서 애덕(chartas)’이라는 원칙을 준수했다. 하여 우리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정이 손상되지 않을 수 있었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획일성의 폭력적, 강제적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의 균형과 조화의 일치가 아름답습니다. 이래야 모두가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이렇게 달라도 다양성의 일치를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애덕입니다. 애덕이 없다면 공동체는 분열로 공중분해될 것입니다. 애덕 부재의 분열이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습니다.
어떤 공동체도 좌파적 성향과 우파적 성향, 보수적 성향과 진보적 성향, 관상적 성향과 활동적 성향, 이상적 성향과 현실적 성향의 사람들이 공존하게 마련입니다. 서로 간 애덕 안에서 존중과 배려, 인내와 경청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새가 좌우로 날 듯이 공동체 역시 좌우로 납니다. 좌우 둘인 손, 발, 눈, 귀가 하나이자 둘로 공존해야 함을 알려주는 결정적 표지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대하면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베드로가 활동적 성향이라면 애제자 요한은 관상적입니다. 사랑의 관상입니다. 애제자의 예수님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어찌보면 애제자 요한은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관상가들을 상징한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후 발현하신후 고기잡이 하던 제자들중 가장 먼저 ‘주님이시다!’ 하며 주님을 알아 본 이가 애제자요한이었습니다. 빈무덤 소식을 듣고 앞서 수제자 베드로에 앞서 달렸던 이가, 빈무덤을 보는 순간 예수님 부활을 직감한 이가 애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아래 끝까지 서있던 이가 애제자 요한이었고 예수님은 이런 애제자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성모님을 맡겼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성모님을 사랑하는 우리 하나하나는 익명의 관상가이자 애제자인 요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애제자가 누군지 분명치 않지만 교회의 가르침대로 요한이라 명명합니다. 그러니 베드로의 몫과 역할, 애제자의 몫과 역할이 다를 수 뿐이 없습니다. 서로 비교하여 경쟁하거나 질투할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의 처지에 서로 감사해야 하고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기민하게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베드로의 중심을 잡아 주는 모습이 참 적절합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어제에 이어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라라’ 말씀하십니다. 애제자에 대한 불필요한 관심은 접고 나를 따르는 일에 전념하라는 충고입니다. 불필요한 간섭에 대해 흔히 따끔한 일침이 되는 말마디, ‘니나 잘해!’ ‘니가 뭔데?’란 두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관상의 애제자 요한과 활동의 수제자 베드로가 상호보완의 좋은 조화를 이루듯 보수의 베드로와 진보의 바오로가 또 좋은 상호보완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바오로의 역할과 베드로의 역할이 엄연히 다르고 천지차이입니다. 오늘로서 사도행전은 끝납니다. 진보의 바오로의 열정적인 선교활동의 결과 마침내 갈릴래아 변방에서 시작된 교회가 이제 세계의 중심인 로마로 이동합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생략됐지만 바오로가 로마에 도착하는 과정이 얼마나 파란만장했는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슬로 바오로를 묶어 놓을 수 있겠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묶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바오로는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이며,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칩니다.
마침내 바오로가 세계의 중심지 로마에 불붙인 선교의 불길은 전유럽으로 번집니다. 이 일은 전통의 사도 베드로나, 관상의 사도 애제자 요한이 할 수 없는 바오로 사도 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부단히 균형과 조화, 상호보완의 아름답고 신비롭고 풍요로운 다양성의 일치 공동체로 성장시켜 줍니다.
"주님의 사랑 우리 위에 굳건하고,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시편117.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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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2.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사도행전 저자는 아그리파스 임금에게 자신을 변론한 사실을 전합니다.(사도 26장)
여기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은 유다인들에게 단죄를 받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아그리파스 임금은 바오로의 변론을 다 듣고 퇴장하면서 페스투스에게 바오로가 사형을 받거나
투옥될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가 황제에게 상소하였기 때문에 로마로 보내기로 결정하고 그 일을 ‘황제의 부대’의
율리우스라는 백인대장에게 넘겨집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로마로 향하는 천신만고의 항해를 하다가 몰타섬에 도착합니다.(사도 27장)
드디어 로마에 도착합니다. 로마인들도 바오로가 사형을 받을 아무런 죄가 없음을 인정했지만
유다인들의 반대로 자유인이 되지 못하고 황제에게 상소한 것 때문에 죄수의 몸이 됩니다.(사도 28장)
그는 자신을 지키는 군인 한 사람과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교적 자유롭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아 자신이 조상들이 관습도 거스르는 것도 없었는데
로마인들의 손에 넘어가 로마까지 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시 말합니다.
“로마인들은 나를 신문하고 나서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나를 풀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인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나는 내 민족을 고발할 뜻이 없는데도 하는
수 없이 황제에게 상소하였습니다.”(사도 28,18-19)
사도 바오로의 로마에서의 마지막 순교의 삶에 대해서 성경의 어디에도 자세하게 전하는 자료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 바오로가 죄인의 몸인데도 따로 지내며 사람들과의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고 전해
주고 있습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전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로 사도행전은 마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베드로처럼 로마에서 순교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사도 바오로는 참수로 순교하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에 미래가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사도 요한의 미래가 궁금해서
주님께 질문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나무라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요한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사람들의 말을 덧붙여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요한 21,23)
요한복음 저자는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복음을 마무리 합니다.
그는 두 가지로 나누어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 저자인 요한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이름으로 이 복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요한 21,24)
또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많지만 저자는 구전의 여러 자료들 중에 선택해서 자신의 복음을
썼다는 사실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요한 21,25)1)
사도 요한도 박해가 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복음서를 쓰고 스승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의 로마에서의 마지막 활동을 전해주고 있고 요한복음의 끝부분에서 베드로의
마지막 삶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가 로마에서 마지막 삶을 순교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두 분 다 그리스도에게 모든 삶을 걸고 충직한 사도 직분을 다 했습니다.
그분들은 사랑하는 주님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이 두 사도를 기초로 이 천년 세월 동안
구원의 역사를 이룩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약속하셨던 ‘내 교회는 반석 위에’라는 것과 세상의 어떤 힘도 누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성실히 지키시는 것입니다.
두 사도는 온 삶을 바쳐 주님의 “너는 나를 따라라.” 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았고 우리도 그분들의
삶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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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성경에 있는 대로만 믿고,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라는 원칙이 있다. 여기에 비해 가톨릭은 글자 그대로를 믿지만 집필할 때의 공동체의 상황, 공동체가 전해 받은 구전의 자료들, 비록 정경에는 채택이 되지 않았지만 소위 위경이라는 것도 ‘성전’이라고 해서 존중한다. 요한 저자가 ‘예수님께서 하신 여러 행적과 말씀 중에 선택해서 전한다.’라는 이 표현에는 요한의 공동체에 이미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들의 여러 자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경전의 원칙에서 선택되지 않는 것도 존중해야 하는 것이, 요한복음이 20장으로 끝나는 것을 다시 덧 붙여서 이미 공동체에 전해지는 자료 중에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만나신 장면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과 차이가 있는 ‘글자 그대로’라는 원칙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가톨릭 폭 넓게 또 온건하게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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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2.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온전한 자기다움으로 초대하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야? 너는 나는 따라라."(요한 21,22)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목소리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자기에게 닥칠 일에 대해 들은 베드로가 이번에는 요한이 어떻게 될지 궁금했나 봅니다. 예수님은 다른 이에 대해 묻는 베드로에게 아주 간결하고도 냉정하게 답을 주시지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사실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은 서로 상관이 있습니다. 서로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느님의 창조 세계를 이어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먼저 각자가 저마다 하느님과 고유한 관계성 안에 존재하고, 이어서 서로간에 관계가 생겨나는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먼저 주목하라고 이르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너는"에서 "는"은 주어 뒤에 붙이는 일반적인 주격 조사라기보다, 대상을 특정하고 강조하는 대조의 의미를 지닌 보조사로 보입니다. 다른 이가 어떻게 되든, 무엇이 되든 너는 그와 상관 없이 너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당신을 따르라는 의미지요.
사실 사람들은 다른 이가 어떤지 살피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정작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어떤 은총을 받고 있는지 헤아리기보다 남이 무엇을 누리는지 곁눈질하고 비교합니다. 그러다 보면 시기와 질투, 분노 아니면 열등감의 늪으로 빠져들기 십상이지요. 그런 줄 알면서도 자꾸만 남에게 관심을 가지고 하느님의 편애의 흔적을 눈에 불을 켜고 찾으려 헛수고를 합니다. 자신이 받은 귀한 선물은 제쳐두고 말이죠.
실제로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길을 갑니다. 베드로는 열정적으로 교회의 기초를 놓으며 그리스도를 증언하다 순교하고, 요한은 자신이 절절히 체험한 사랑의 주님을 글로 꾹꾹 담아내어 세상에 그 사랑을 현재화하지요. 누구나 서로 비교할 필요 없이 각자의 고유한 부르심과 소명이 있는 겁니다. 비교와 질투는 그토록 소중한 소명을 훼손하고 약화시키는 무서운 악이지요.
성인은 온전히 자기다움을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인은 하느님께서 창조 때 각자에게 심어 주신 모상성을 최대로 충만히 누리면서 이웃을 위해 발휘하고 사는 사람일 겁니다. 타인의 옷을 입고 타인의 가면을 쓰고서는 충만한 자기다움의 경지에 이르기 어렵지요.
제1독서는 사도행전의 끝부분으로 사도 바오로의 로마 체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사도 28,20)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의 희망인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다 동족 유다인들의 질투로 인해 결국 수인의 신분이 되었지요. 잘 나가는 출충한 바리사이였던 그로서는 꿈에도 예상 못했던 처지겠지만, 이미 하느님께서 당신 계획 안에 마련해 두셨던 그만의 소명이었던 겁니다.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사도 28,31)
사도들은 저마다 부르심 받은 곳으로 파견되어 열렬히 주님을 선포하다가 장렬한 순교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를 통해 구원은 로마를 발판 삼아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갑니다. 각자의 소명이 저마다의 발걸음으로 주님의 빛을 온 세상에 퍼뜨리는 놀라운 여정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부활시기가 막바지를 향해 가는 오늘, 우리는 누구의 얼굴로, 누구의 기대에 맞춰, 누구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지 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서 다른 이의 모습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온전한 자기다움을 꽃피워 자기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성이 충만할 때 우리는 성인이 되어 간답니다. 거룩한 성성의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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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2.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21,21)
'사랑의 사도가 되자!'
오늘 복음은 요한이 전하는 복음의 끝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와 베드로에 관한 말씀과 엮은이의 맺음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요한 사도의 삶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요한(12.27)은 12사도 중에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요왕'이라고도 불린 사도이고,
요한 복음과 요한1.2.3서와 요한 묵시록의 저자입니다.
갈릴래아 출신 어부이고,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사도 중 대야고보(7.25)의 동생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김 사도이며, 예수님께서 타볼산에 오르실 때나 겟세마니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처럼 예수님의 중요한 때에 함께 했던 사도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모두 도망간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끝까지 예수님을 지킨 사도이고,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19,26) 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성모님의 아들이 된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때 사마리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은 격분하며,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9,54) 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과격한 두 형제의 성격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을 지닌 '보아네르게스(Boanerges)' 라는 별명을 지어주셨습니다.
12사도 대부분은 순교했다고 전해지는데,
요한 사도는 12사도 중에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천수를 누리다가 자연사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요한 사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한 요한 사도!
사랑 실천을 강조한 요한 사도!
요한 사도처럼 우리도 '사랑의 사도'가 됩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8)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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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2.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람마다 지닌 그릇의 크기가 다르고, 주어진 몫이 다르고, 각자 걸어가야 할 길이 다릅니다!
오래 전 한 수도원에 공공의 적처럼 살아가는 수사가 한명 있었습니다. 이름은 베드로였습니다. 몸집이 육중하다보니 동작도 굼뜨고, 공동 작업 시간에 사고만 치지 별 도움이 안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가?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들 조용히 침잠해있는 묵상 시간에 코까지 골면서 잠들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식사 시간만 되면 얼굴에 활기가 되살아났습니다. 다른 수사들은 더 먹고 싶어도 꾹 눌러참고 딱 밥 한 공기만 먹는데, 이 수사는 평생토록 삼시세끼 단 한번도 안빠지고 꼭꼭 밥 두공기씩 챙겨먹었습니다.
겉으로 대놓고 말하지 못했지만 다른 수사들은 주님 앞에 이렇게 여쭙곤 했습니다. “주님, 저 베드로 수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은 쥐꼬리만큼 하고 밥은 나발처럼 흡입하는 베드로 수사에게 구원이 가당한 일입니까?”
세월이 흐르고 흘러 다들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토록 주님 안에 갖은 고행과 보속을 다해온 까닭에 삐쩍 마른 다른 수사들이, 그 결과로 천국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데, 깜짝 놀랄 일이 발생했습니다. 저멀리 맞은 편에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오는데, 얼굴이 낯이 익은 것입니다. 가까이서 봤더니, 아니 글쎄, 베드로 수사였습니다.
화가 벼락같이 난 수사들은 하느님께 따졌습니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사람마다 지닌 그릇의 크기가 다르고, 주어진 몫이 다르고, 각자 걸어가야 할 길이 다르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살아있을 때 저 베드로 수사는 사실 매끼 네 공기씩 밥을 먹어야 할 사람이었는데, 절제하고 또 절제해서 두 공기씩만 먹은 것이란다. 평생 그런 노력한 베드로 사도가 천국에 오지 않으면 누가 천국에 오겠느냐?”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 서서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제 공생활의 절정기도 지나가고 예수님의 행렬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 많던 사람들이 다들 떠나가고,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몇명 남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와 경쟁 관계 속에 살아가던 예수님의 애제자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를 지목하며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이 시원시원합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사랑받는 제자의 운명에 대해 베드로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시선은 언제나 이웃들의 결핍과 실수에 가 있습니다.
이웃을 향했던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어 우리 자신의 발끝을 유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남의 인생은 본인에게 대폭 맡겨두고, 우리 각자의 인생을 더 적극적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예수님 추종의 방식도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동일한 방식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사랑받는 제자의 경우 평생토록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추종했지만, 성모님의 노년을 동반해드리면서, 순교가 아니라 자연사하였습니다. 모든 길이 다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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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2.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신부님.
오늘을 충실히 살게 만드는 것은 꿈보다 정체성이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마지막 때에는 순교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요한의 미래도 궁금해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요한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요한도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의 결말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고 본인들도 헛갈릴 정도로 모호하게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삶의 끝을 아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만을 믿고 현실에 충실하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운명론의 폐해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운명을 알고 살기를 원치 않으시고 ‘오늘’을 충실하게 살길 원하십니다.
전에 EBS 지식 채널 중 이러한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파리 여행을 다큐 형식으로 찍은 것입니다. 자녀들을 위해 평생 미술 교사를 하다 은퇴하여 이제 마지막으로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아내와 함께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떠난 것입니다.
그는 오랜 계획을 세우고 많은 돈을 써 그림 도구들을 사고 준비합니다.
그러나 막상 파리에서의 화가 생활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소매치기도 당하며 돈을 다 잃습니다. 길거리에서 비도 맞으며 매일 그림을 그립니다. 그것은 기쁘지만 이미 손은 무뎌질 대로 무뎌져서 그림은 한 점도 팔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였지만,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화가의 꿈이 그분께는 생계를 위한 수단 외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너는 꿈이 뭐니?”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꼭 되고 싶은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여기고 그런 꿈을 이야기합니다. 꿈이 크면 어른들은 칭찬을 해 줍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가졌던 꿈을 이루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성공한 사람 중에 하루하루 그냥 열심히 살았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유재석 씨 같은 경우입니다.
미래의 꿈보다 오늘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 꿈이 오늘을 충실하게 살게 할 힘을 잃었다면 그 꿈은 망상이 되고 맙니다.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한 스님과 제자가 가난한 집에 묵은 적이 있습니다.
그 가난한 집은 암소 한 마리에서 나오는 젖으로 여러 식구가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다음 날 떠나면서 제자에게 몰래 그 암소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는 깜짝 놀랐지만 순종하였습니다.
10여 년이 지났을 때 제자는 다시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은 이전과는 다르게 활기가 넘쳤고 부유해졌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전까지 암소에게 의존하며 살았는데 암소가 사라지자 어떻게 해서든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더니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꿈도 이렇습니다. 그 꿈이 너무나 명확하면 그것이 지금을 열심히 사는 원동력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오늘을 허투루 살게 만드는 핑계가 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미래에도 부자로 살 수 있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부모가 물려줄 재산에 대한 명확한 보장이 있다면 오늘을 허송세월로 보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부자들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미리 선언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미래에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주님은 운명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충실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아이가 어떤 질문에도 머뭇거림이 없이 현명한 답을 하는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자신의 손에 참새 한 마리를 들고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이 새는 살아 있나요, 죽어있나요?”
만약 살아 있다고 말하면 꽉 눌러 죽일 생각이고 죽었다고 한다면 하늘로 날려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스님은 대답했습니다.
“그 새의 살고 죽음은 너에게 달렸지.”
아이는 스님의 현명함에 놀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어제 엄마가 점을 보고 왔는데 제 운명이 아주 안 좋대요.”
스님은 아이에게 손을 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재물선과 운명선 등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주먹을 쥐어보라고 했습니다.
“네 운명선은 어디 있지?”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제 손안에 있네요.”
구약의 요셉이 꾼 꿈은 가족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열린 결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분명 가족까지도 그를 존경하는 결실을 볼 것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꿈이라기보다는 정체성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면 분명 세상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정체성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주님께서 원하셨던 꿈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류시화 시인은 오갈 데 없어서 대학 때 판자촌에서 버틴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많이 와서 물이 새고 심지어 떠내려갈 정도로 위에서 물이 많이 흘러내려 왔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그는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시인이다. 이 순간은 두려워할 순간이 아니라 시를 위한 영감을 찾아내야 할 때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천둥 번개도, 바람도, 새는 비도, 흘러 내려오는 물도 모두 시를 위한 영감을 주는 소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유명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존경받는 삶,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도록 예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삶이 오늘의 십자가를 지고 나가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나의 꿈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정체성만 명확하면 주님께서 바라시는 꿈에 반드시 도달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꿈이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도록 만드느냐입니다.
꿈은 모호해도 좋습니다. 자녀에게 심어주어야 하는 것은 그 꿈으로 오늘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게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입니다.
피카소의 말을 들어봅시다.
“내 어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가 군인이 된다면 장군이 될 것이고 네가 성직자가 된다면 너는 교황이 되겠지.’ 대신에 나는 그림을 그렸고 피카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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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2. 부활 제7주간 토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길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대표적으로 두 가지의 의미로 많이 사용됩니다. 흥미로운 건 영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두 개의 다른 언어가 명사의 의미로, 의미적인 측면에서 이런 공통점이 있다는 건 사실 희박한 경우입니다. 먼저 길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도로가 대표적인 의미입니다. 그다음으로는 방법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길이라는 의미는 추상적인 의미로도 많이 사용됩니다. ‘나의 길’이라고 했을 때 길은 어떤 의미인가요? 바로 자기가 걸어가야 하는 방향이라든지, 인생의 향로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의미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과정을 보면 이해가 좀 잘 될 것입니다.
처음엔 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그런 자격을 계속 유지하면서 가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에 어떤 사람은 하느님께 자신의 존재를 봉헌하기 위해서 신품성사를 통해서 성직자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머지는 혼인을 하거나 아니면 독신을 유지하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길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정해져 있다면, 사제가 되어서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서 다시 환속을 하는 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해져 있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도 하느님의 소관은 아닌 것으로 해석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렇게 유추할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린 인간은 어떤 경우에서도 하느님께서 ‘자유의지’를 태초에부터 부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르고 그 책임만 지면 될 일입니다. 불교에서는 책임을 다른 표현으로 ‘과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비슷한 의미이지만 조금 뉘앙스가 차이납니다. 과보는 마치 사필귀정처럼 거의 당연히 그렇게 될 경우가 많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실한 불자는 자신이 한 행위에 따라 어떤 과보가 따를지 알고 있기 때문에, 이미 어떤 일은 선택할 때는 과보를 생각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대개 보면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는 그걸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이미 결과가 나왔을 때, 그냥 그때 인정하고 수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천주교에서 대세를 줄 때도 기본적으로 알려주는 교리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상선벌악’입니다. 이건 머리로 다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분명히 벌이라는 수단이 따른다는 걸 알지만 말입니다. 왜 그걸 알면서 그런 선택을 할까요? 이미 그 벌이 지금 당장 눈앞에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유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혹은 순간이지만 고통은 영원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유혹에 넘어가는 게 사람이라는 탈을 쓴 나약한 인간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 사도를 향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요지는, 다른 사람이 가는 길은 신경을 쓰지 말고 자기가 갈 길이 있으면 자기의 길만 잘 가면 된다는 그런 요지로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의미로 사용된 것일까요? 남이야 죽든 말든, 내 갈 길만 가면 된다는 그런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남도 생각해야 하지만 우선은 자기가 가야 하는 길을 제대로 가면서, 남을 배려하고 사랑하고 도움의 손길을 주는 것은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 남의 길, 여기서는 문맥적인 의미로 봐서는 신앙의 길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신앙의 길은 각자 자기만의 고유한 길이 있을 거라서 목적지는 같아도 가는 루트가 다 다르기 때문에, 굳이 남의 그 루트가 어떤지는 알 필요도 없다는 그런 의미로 이해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십자가가 다 있습니다. 다만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은 저마다 다 다릅니다. 이처럼 신앙의 길은 자기가 가야 하는 자기만의 길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가야 할 길만이라도 잘 이탈하지 않고 가는 게 우선일 것입니다.
적십자 활동을 중학교 때부터 성인이 되도록 하면서, 특히 성인이 된 이후에는 인명구조 활동에 봉사를 하면서 교육을 받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남의 생명도 구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차적으로 자신의 생명에 안전조치를 제일 우선해야 하는 것을 교육을 통해 많이 습득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생명도 안전해야 남도 구조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지도 완전히 이와 같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를 한다고 해도 크게 무리는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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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2. 부활 제7주간 토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제1독서 (사도28,16-20.30-31)
그래서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20)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의 오해를 받아 쇠사슬에 매인 죄수가 된 것은 바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망하고 있던 것을 전파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 유력자들을 자신이 기거하는 곳으로 청한 것도 일차적으로는 그들과 함께 '그 이스라엘의 희망'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함이었다.
이 '희망'이라고 번역된 '엘피도스'(elpidos)라는 용어의 개념은 사도 바오로가 유대아에서 재판을 받는 과정 중에 여러 번 사용한 적이 있는데 (사도23,6; 24,15; 26,6.7), 그것은 곧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희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주신 '구약 성경 약속들의 성취'를 의미한다(사도26,6.7).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결정적으로 완성되었다고 주장하였으나, 나자렛 예수에게 그 희망이 성취될 수 없다고 믿는 유대인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 희망'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고소당해 죄수의 몸이 된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만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점들을 해명하고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부활 제7주간 토요일 복음(요한21,20~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25)
요한복음 21장 25절은 과장법에 의한 수사학적 표현인데,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요한복음 사가가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님께 대한 지식조차도 모두 기록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복음서 저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그대로를 다 기록했다면, 그 내용이 엄청나게 방대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4복음서 저자들에게 그 책을 기록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주셨고, 각 저자들은 자신들의 직접적인 경험과 간접적인 지식과 능력을 사용해서 많은 내용들 중에 꼭 필요한 내용만을 취사 선택하여 하느님의 의도대로 기록한 것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영적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온전히 담기에는 부족했다고 알아들을 수 있다.
세째로, 자신의 한계이자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의 일을 기록하는 작업의 한계를 인정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 자체가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 아니며, 또한 자신이 기록한 요한복음의 내용이 부분적이므로, 요한 복음사가가 함께 했던 교회 공동체가 요한복음에만 한정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이해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 왜 한 제자에 의해 단 한권의 책으로 기록하게 하지 않으시고, 세 권의 공관복음서를 쓰게 하시고 난 뒤에 다시 요한 복음사가를 통해 요한 복음서를 기록하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한다.
사실 사도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늘 예수님과 동행했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70년 정도를 더 살면서,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많은 사목을 하였다. 그러한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21장 25절을 통해 요한 복음서를 다 기록한 뒤에 보여 주는 모습은 하느님 역사의 광대무변함과 그분의 크신 사랑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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