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3,1-8ㄱㄷ.13-15; 1코린 10,1-6.10-12; 루카 13,1-9
+ 찬미 예수님
지난 일주일도 마음 졸이며 지내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습니까? 요즈음 불면증을 호소하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헌법재판소가 빨리 올바른 판결을 내려, 잠 좀 편히 자고, 또 갈라진 국민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날이 어서 오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산불로 인해 돌아가신 영혼들과 고통 중에 계신 분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오늘은 사순 제3주일입니다. 제1독서에서 탈출기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모세는 동족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인들에게 억압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날 이스라엘 사람을 때리는 이집트인을 죽였는데, 파라오가 그 사실을 알고 자기를 죽이려 하자 미디안 땅으로 달아났습니다.
모세는 양을 치다가 호렙산에서 신비로운 광경을 보게 되는데요, 떨기나무가 불에 타는데도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떨기나무는 뜨거운 지역에서 자라던 가시나무 중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떨기’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스네’라고 하는데, 호렙산의 다른 이름인, ‘시나이’와 발음이 비슷합니다.
이 떨기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이집트 왕 파라오는 태양의 아들이라 불렸는데, 사막 지역에서 태양의 존재는 무시무시했습니다. 약한 떨기가 태양열에 불이 붙어 타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이 붙었는데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는, 파라오의 억압 속에서도 스러지지 않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과 닮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나타나셨다는 것은, 고난받는 사람들의 연약한 삶 한가운데에 나타나셨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에 하느님께서 관심이 있으신 건가’ 하고 의구심을 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고난을 보았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고난받는 그들이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이름을 묻자 하느님께서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표현을 3인칭으로 바꾼 것이 ‘야훼’입니다. 하느님의 이름 ‘야훼’에 대해서는 작년에 ‘거룩한 독서’ 강의 때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나는 있는 나다’로 번역해 왔지만, ‘나는 너희와 함께 있을 나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자신을 죽이려 한 파라오가 있는 이집트로 되돌아갈 수 있었던 것도,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도, “나는 너희와 함께 있을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는 너희의 고난을 보았고, 너희의 울부짖음을 들었고 너희는 내 백성이다.”라고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힘을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따라 길을 떠납니다. 이어진 광야에서의 4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말합니다. 그들은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는 곧 그리스도셨다고 바오로 사도는 해석합니다. 이는 과거와 오늘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도 과거와 오늘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의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서로 또한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알립니다. 이들이 큰 죄인이었기에 그런 일이 생겼을 거라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사람들도 더 큰 잘못을 저질러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사회적 참사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 같은 말씀을 하시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사의 원인을 해설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을 ‘남의 일처럼 여기는 사람들’ 혹은 ‘그것을 죄와 연결시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너와 관련된 일로 여기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포도밭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포도밭은 무화과나무도 잘 자라는 비옥한 땅입니다. 그런데 포도밭 주인이 삼 년째 와서 보아도 열매가 없자, 그는 재배인에게 나무를 잘라 버리라고 말합니다. 포도 재배인은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복음은 여기서 끝이 납니다. ‘그래서 주인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든가, ‘이듬해에 무화과가 열렸다’라든가 하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맺으심으로써,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에게 회개가 그만큼 긴박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간 공생활을 하시며 회개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회개는 단순히 죄에서 돌아서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오심을,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일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3년에 걸친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3년간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 실로암 탑에 깔려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의 일로 여기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은, 기원후 70년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살할 때, 더욱 절절한 경고로 사람들의 기억에 떠 올랐을 것입니다.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은, 예수님의 수난과도 연결됩니다. 예수님 역시 갈릴래아 사람으로, 빌라도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으시고, 그리하여 제물이신 예수님의 몸이 피로 물들게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시인이며 성공회 사제였던 ‘존 던’(John Donne)이 쓴 시의 한 대목을 헤밍웨이가 인용하여 책을 썼고, 영화화 되기도 하였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구절입니다.
존 던은 모든 인간이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대륙이 그만큼 작아지듯, 누군가의 죽음도 나를 줄어들게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장례식의 조종이 울릴 때,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종은 바로 나를 위해 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사람들과 우리가 연결되어 있고,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의 회개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며, 우리 안에, 인류 안에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한 걸음 더 가까이 오게 하는 역사적인 일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들여다보면, 포도 재배인과 포도밭 주인이, 무화과나무에 희망을 걸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희망을 둡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희망을 품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품고 계신 희망이 이루어지시기를, 하느님께서 우리나라에 품고 계신 희망이 이루어지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는 내 백성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