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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순명의 서사, 트임과 열림의 공간
- 문정희의 수필세계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수필의 매력은 작가의 디테일한 내면 풍경을 보는 데 있다. 자신도 모르고 있던 내면의 그림자와 조우해서 솔직하게 자기 안의 모습을, 심저에 숨어있던 풍경을 서정어린 그림처럼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이 수필이 갖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문정희 수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그린 풍경화라 할 수 있겠다. 문정희는 사막의 쨍쨍한 햇볕 속으로 순명하며 걸어가는 작가다. 그녀가 자신이 직접 다자인하고 건축했던 인생 파노라마를 내어놓았다. 인생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리움을 품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풍경일 것이다. 자연과 역사의 흔적이 손짓하기를 기다려온 여행작가 문정희는 여유가 생길 때마다 세계의 여러 곳을 찾아 나섰고, 문명과 원시의 현장과 조우하기 위해 한반도를 곧잘 벗어나곤 했다. 그녀가 이렇게 수필집을 내어 놓게 된 데에는, 이와 같이 아내와 어미라는 자리를 홀가분하게 박차고 서정적 자아 상태에서 한 마리 자유로운 새가 되어 낭만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리라.
주부로서의 여성은 떠나고 싶을 때 마음대로 떠날 수 없는 것이 한국적 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배려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자주 여행을 한 결과로 인해서 수필의 소재를 많이 얻었던 게 사실이다. 각지로의 여행은 결국 작가에게 한 편의 수필을 선사한 것이 아니라 한 권의 멋진 에세이집을 남긴 셈이 되었다. 이번에 낸 처녀 수필집에 실린 글의 주된 현실적 공간은 가정과 여행지다. 성실남세자상을 받은 남편과 남자로 태어나고 싶은 그녀는 환상적 궁합이다. 자녀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살면서, 가까이는 동남아부터 멀리 남미까지 전 세계를 넘나들 수 있었다. 온갖 것의 유혹에 반응해 보고 싶은 여심은 간절한데 시간과 사회의 관습이 발목을 잡고 있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보고 싶은 반도의 산야와 가고 싶은 이국 유적지들을 그리워해야만 한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작가에게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데 큰 방해물이 없었던 것은 그 자체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문정희 수필집의 가장 큰 특성은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책장이 잘 넘어간다. 그뿐만이 아니다. 감동적 사연이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이는 구어체적 글쓰기의 영향도 있지만, 그녀의 이야기꾼적 자질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부산 출신으로 동백수필문학회에서 열심히 동인 활동을 하다가, 창작에의 욕구와 의지를 반영하기 위해 수필집을 출간하기로 했다. 문단활동보다도 시간이 나면 해외로 나가 ‘여행’에 관한 수필을 써서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그녀의 수필이 재미가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타자에 대한 깊은 배려와 측은지심의 결과라 하겠다. 이런 타자-되기는 수필 작품 속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무엇보다도 인정이 많고 마음씨가 고와 언제 어디서 보아도 미소를 품고 있는 모습이다. 더하여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아내로서의 책임감은 그녀의 인간적 향기를 키워주었다고 하겠다. 아름다운 서정과 감동적 서사, 운명적 헌신과 따가운 풍자, 그리고 솔직담백한 고백이 녹아있는 그녀의 수필 속으로 들어가 보자.
II. 문정희의 작품세계
문정희의 수필을 형성하고 있는 거대한 물줄기는 무엇일까? 이를 밝혀내는 일은 문정희의 수필세계를 바로 바라볼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고 하겠다. 문정희는 심기 속에 전류처럼 정이 따듯하게 흐르는 작가다. 그녀의 수필세계는 한마디로 진솔함을 기저로 한 사랑과 감동의 서사, 트임과 열림의 공간이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때로는 지성과 예리한 인식을 기저로 해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따끔한 충고를 가하면서 비판의 메시지를 담는가 하면, 어떤 작품에서는 따스하면서도 인정스런 눈길로 타자를 품어 안는 휴머니즘적 경향을 띤다. 전자의 측면으로 보면, 사회 참여의 강한 의지와 지성적 용기를 드러내는 특징을 보이지만, 후자의 차원에서는 인도주의적인 세계가 성자 이미지를 열고 있다고 하겠다. 이뿐만 아니다. 그녀 수필세계의 또 다른 한 축에는 모성의 따스함이 스며나는 인정의 미학이 구축되기 있기도 하다. 이처럼 트임과 열림 그리고 헌신과 배려가 큰 강물을 이루고 있는 문정희의 수필세계는 순수와 지성이 잘 조화되어 있다.
모든 수필이 지녀야 하는 공통적 요건 중에 하나가 대상을 바라보는 긍정적 안목이라면, 이런 요소는 문정희 수필에 차고 넘친다. 수필은 어떤 문학보다 정을 요구하는 글이므로 수필가는 인정이 풍부한 사람이라야 한다. 무심한 사물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정은 인간의 심리 중에서 가장 원시적 요소다. 그러나 그것이 물상을 사랑하는 데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객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가능한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가 긍정적인 마인드로 그림자의 인격화 차원에서 소재를 문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필 <진주 여인>이란 작품은 자아실현의 가치를 독서와 결부시켜 삶의 진정한 의미를 파헤치려 했다는 점에서 수필의 문학화에 성공했다. 문학은 절실함에서 비롯되고, 그를 자양분으로 해서 커나가는 것이기에 절절함이 있어야 감동의 조건이 충족된다. 이 작품은 인생을 바라보는 작가의 진지한 안목이 ‘플라스틱 조그만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조개를 파는 여인’의 독서하는 모습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 말을 전해 듣는 나는 얼마나 부끄러웠던가. 동서남북 자유로이 어딘들 다 쏘다닐 수 있는 내가 그녀에 비해 잘났다고 혹여 생각했던 건 아닐까. 내 차에 내 마음대로 방향을 지시하며 앉아 바깥풍경에 놀라고 감탄하고 영화 보고, 산에 가고, 맛난 거 먹을 수 있는 내가 한 번도 자리를 털고 일어설 날 없이 앉아 조개를 파는 그녀에 비해 삶을 풍족히 누린다고 생각하진 않았던지 혼자 부끄러워진 밤이다.
- <진주 여인> 중에서 -
진정한 삶의 가치는 물질을 통해 획득되고 정신에 의해서 결실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진면목은 자아실현의 가치에 그 뿌리를 서려 두며, 이를 근간으로 하여 잎을 피우고 꽃을 만들어내야 한다. 문정희의 수필은 이런 강인한 생명정신과 반성적 성찰을 근간으로 한다. 이 작품은 그저 순종하고 복종하며 최선을 다해 어른을 모셔야 하는 고단한 하루 속 시어른 밥상을 차리기 위해 장 보러 가는 길목에서 ‘진주 여인’을 만나면서 전개된다. 난전에서 조개를 까서 파는 여자의 이야기다. 이 여인의 감동스토리를 스캔하면서 가슴에 서리는 서정어린 정감을 수필화한 것이다. 여자의 일생에 대한 공감과 연민, 반성과 성찰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쓴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하나의 기록이 아니라 본연의 순수성 회복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순수로의 눈뜸은 상승 작용을 일으켜 작가로 하여금 측은지심에 이르게 하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새로운 꿈을 꾸게 한다. 한 달에 책 대여비로 십만 원을 넘게 쓰는 그 시장 여인을 ‘진정한 삶의 승리자’의 자리에 배치시키는 작가는 ‘모진 풍파와 시련 속에 영롱한 진주를 품고 죽을 힘을 다하는 조개의 형상을 연상할 정도다. 문정희의 시선은 강한 삶의 의지와 반성적 성찰과 밀착되어 있다. 이는 타자와 동화되어 ’우리-되기‘가 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인 것이다.
온통 흙바닥은 지저분하고 무질서한데다 스레트집이 최고였던 대한민국이 막 도약하던 시절에 하야리아부대의 정경은 너무나 질서정연했고 깔끔했으며 도대체 사람이 다니는 길이 초원으로 깔려 있는 것이 신기했고 마치 무릉도원 같았다. 그 어린 나이에도 외국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었다. 그날, 짧았지만 내 유년의 가장 쇼킹했던 한 조각으로 추억을 회상하기엔 충분했다. 그 옛날 부대 안 모습의 기억은 오래갔다. 어린 아이의 눈에는 천국 아니었을까.
- <하야리아> 중에서 -
인간이란 원래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 시대적 상황에 대해 일체 무관심하거나 초연한 상태로 살아가기가 어려운 존재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 그 자체가 역사적 시대적 상황의 한 부분이며, 그것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역사적 시대적 상황의 영향을 받으며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곧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항 속에 들어와 있는 물이 역사적 시대적 상황이라면 그 속에서 살아가는 물고기와도 같은 존재가 바로 작가인 것이다. 문정희의 수필 <하야리아>는 바로 인간의 존재 조건, 실존을 겨냥하고 있는 수필이라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부산에서 태어나서 부산의 공기를 마시며 살아온 그녀에게 ‘하야리아부대’가 갖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 특히 중요한 건 자신의 집에 세 들어 살던 양공주에 대한 인간적 견해다. 어떻게 수필에 감동성을 놓을 것인가 하는 점은 수필에 어떤 인물을 놓을 것인가와 관계가 있다. 무엇보다도 수필의 문학적 성취는 문학적으로 가치 있는 재료를 선택해서 어떻게 형상화하는가에서 좌우된다. 이런 차원에서 이 수필의 화제인물인 양공주는 독자로 하여금 세상과 소통하는 존재방식에 대해 되짚어보게 하는 호소력이 짙은 인물이라 하겠다.
양공주는 그녀가 바라던 대로 국제결혼을 하여 미국으로 갔고, 언젠가 한국으로 와서 작가의 어머니를 찾아뵙고 많이 울었다고 한다. 작가는 그녀와 함께 처음 들어갔던 그 하야리아부대 자리에 들어선 시민공원을 걸으면서 그 여인을 생각하고 있다. 현실이 각박하여 여유를 즐기고 있지 못할 뿐,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인간의 순수한 숨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곳이 적지 않다. 작가는 수필 <하야리아>에서 타자에 대한 이해를 찾고 인간의 향기 속에서 그 느낌을 만끽하고 있다. 국제무대에 당당히 서리라는 당찬 각오를 추억이 켜는 기지개에 견주어 정서를 객관화할 줄 아는 작가이기에 그녀의 글은 향긋한 풀내음을 풍긴다. 눈과 귀를 열어 한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희생타가 되었던 양공주의 삶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음으로써 그녀는 문학의 사명이 상처를 위무하고, 타자가 안길 곳을 마련해 주는 것임을 말해준다. 누구에게나 인간의 가슴 속에는 유년의 향수가 서려 있다. 그동안은 시부모 봉양, 아이들의 양육 문제 등으로 어쩔 수 없이 숨죽여 살고 지냈지만, 그녀는 따뜻한 의지의 한국여인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추억 속으로의 진입을 통해 새로 전개될 삶의 따뜻한 체온과 향기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남편이 가슴 속으로 간절히 열망했던 마당 넓은 집을 가지게 된 건 그 꿈으로부터 50년이 훨씬 넘게 걸린 세월이다. 참 오랜 세월이 걸린 셈이다. 그 십대 때의 꿈을 육십대에 이루었으니 그는 참 행복할 듯하다. 거기다 지금은 친구들까지 불러 모아 함께 놀 공간도 만들었으니 어느 정도 남편의 삶은 성공한 듯하다.
(중략) 결혼해서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의 꿈에 그저 편승해서 살고 있는 건 틀림없다. 지금은 마치 오래 전부터 잔디 깔린 마당에 텃밭과 꽃나무 있는 집에 사는 게 내 꿈이었던 것 같아 아침에 눈을 뜨면 마당에 나가 꽃들과 인사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나도 이 꽃나무와 노는 게 즐거우니 마치 내 꿈이 이루어진 듯 착각한다. 꿈도 슬쩍 전염되나 몰라.
- <꿈> 중에서 -
작가의 남편 꿈은 정원을 가꾸면서 인생을 즐기는 것이었다고 한다. 마당이 있는 집에 잔디를 깔고 나무 심고 꽃 가꾸고 텃밭 두어 평 가꿔 보는 게 소원이었다. 이 사실을 작가는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 알게 되었다. 수필의 재미는 바로 발견에 있다. 남들은 환금 가치와 생활의 편리에 따라 아파트를 선호하지만, 작가의 남편은 ‘집’을 재산 축적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깃들어 살며 보살피는 대상으로 인식한다. 물신주의에 대한 거부는 정원을 가꾸며 생활하는 자연친화적 태도에서 그대로 묻어난다. 사랑과 함께한 시간의 흐름은 작가에게도 이러한 인식을 갖게 한다. 다만 그 상황에서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의 고통에서 더 큰 고통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고, 그 시기에 맞는 새로운 의욕을 설계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문정희는 후자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그녀는 남편이 피땀 흘려 만들고 가꾸어 놓은 정원의 초록 축제 속에서 건강한 생명력을 보면서 인생의 새로운 의욕과 활기를 되찾는다. 자연의 모든 물상에는 하나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속에는 삶의 환희와 생명력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오묘함을 깨닫지 못해 방황을 거듭하며 아픔의 늪을 헤매고 있다. 때 묻지 않은 삶, 그 무엇을 힘껏 치닫는 생명력이 번득이는 잔디가 있는 마당의 싱그러운 녹색 축제 속에서 작가는 남편의 꿈을 마신다. 마치 자신의 꿈이 이루어진 듯 착각하며 사니, 행복이 물결친다. 이 수필은 <남편 칠순>과 함께 부부애의 극치를 보여준다. 한 점 감추어 챙기는 것 없이 진솔하게 풀어내는 차분한 묘사와 남편의 꿈이 바로 내 꿈이라고 여기는 긍정의 인생관은 포근한 여인의 따사로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모래 썰메타기, 거의 경사가 80도는 될 듯한 가파른 모래언덕을 썰매 하나에 몸을 싣고 내려오는데 스릴만점이다. 몽골여행은 다른 어떤 관광지보다 특별했다. 8월 한 달이 최적의 여행이라 전세기가 뜨고 다른 계절은 갈 수가 없다. 밤 하늘에 달이 완전 몸을 사리는 2시쯤에 하늘을 바라 보라. 쏟아지는 별이 바로 내 가슴으로 떨어지는 환상을 보게 될 것이다. 별, 바람, 사막, 낙타, 말 평소 잊고 있었던 이 언어들이 살아 훨훨 날아다니는 이곳 몽골, 살아있다는 자체에 가슴 저리게 감사하게 되는 나라다.
- <몽골> 중에서 -
문정희는 여행작가다. 여행기가 수필집의 한 축을 장식한다. 그녀는 세계를 한 권의 책으로 보고 있으며, 여행을 발로 하는 독서로 여긴다. 작가의 표현대로 ‘익숙한 삶에서 벗어나 낯선 곳 낯선 현지인을 만나는 여행이란 것은 생각과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키는 작업’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열망 중의 하나는 낯선 곳을 삶의 주변으로 끌어들여 동행을 이루는 일이다. 산과 들을 자기 주변으로 끌어들여 함께 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사람은 저마다 집 안 한 모퉁이에 작은 화단을 만들기도 하고, 산 속 깊은 곳에 머물고 싶은 욕망 때문에 화초를 기르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연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안정을 찾을 수 없다. 사람이 곧 자연이다. <몽골>은 이런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연과 동행이 되고자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에의 귀의, 참다운 인간미의 회복이다. 몽골의 밤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을 만나며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함을 갖는 작가의 전도에는 밝은 빛만 가득하다. 몽골의 자연 속에서 서정적 자아 상태로 몽환적 세계로 빠져들 수 있기에 이런 좋은 여행글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작가의 생태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이 작품의 묘미는 동심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염원에서 작가가 펼치는 상상의 나래를 엿보는 데 있다. 문정희는 몽골에 도착하여 ‘전혀 기대하지 못한 자연의 극렬한 환영이 온 몸을 휘감았다’고 적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초원에서부터 큰 대지를 휘감아 불어오던 그토록 달디 단 바람 맛은 처음이었다.’고 한다. 어떤 다른 나라 여행보다 몽골이 특별했던 것은 자연 속에서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겠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작가는 여행을 통해서 이미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인지 깨달았다고 보겠다. 이처럼 문정희 수필세계의 한 축에는 자연친화적 서정의 푸른 축제가 항상 열리고 있다. 작가는 대상을 바라보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것에 자기 삶을 대입시켜 승화를 시도한 사람이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구경하면서 낙타에게 미안해서 자꾸 엉덩이를 들게 되었다는 작가의 여린 여심에 정감어린 시선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순수의 축제가 우리에게도 평화로운 안식을 안겨주기에 여행의 자연 서정을 기반으로 축조된 그녀의 수필들은 하나같이 특별한 감동을 준다.
젊은 아이들의 결혼관은 덕 보겠다는 마음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이 기막힌 현실의 벽 앞에 나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맞다. 결혼은 양보가 아니고 치열한 투기다. 그게 현실인 게다. 아무리 우리 세대가 아이들을 앉혀 놓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협력하여 하나 둘씩 이뤄가야 하는 것이라고 말해본들, 딸은 유능하길 바라고 며느리는 순종하길 바라게 된다. 결혼은 내가 상대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면 후회할 것도 바랄 것도 없다는 걸 얘기한다고 먹힐 리가 있으랴. 오로지 그들의 계산법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 <나 장가 못 갈 것 같아> 중에서 -
문정희의 수필세계가 보여주는 또 다른 한 모습에는 모성의 따스함이 스며나고 있으며, 진솔한 고백적 자책감이 반성적 성찰의 원리로 승화되어 순수한 인정의 미학으로 구축되기 있다. 수필 문학이 지닌 특징 중의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가공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소재가 특별해서라기보다 작가의 진솔함이 인정에 뿌리내려 있어서일 경우가 많다. 문정희 수필의 최대 강점은 체험의 진실성이요, 진한 모성 원리의 표백에 있다. 이것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으로서의 가치와 문학성을 담보해 주는 것이다. 특히 수필을 읽는 독자들은 작가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나 단점 등을 애써 감춰버리거나 미화시킬 때 심한 거부감을 느끼며 그 작품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수필 독자들이 수필을 통해 만나려는 사람은 빈틈없이 완벽하고 단점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처럼 부족한 면도 있고 단점도 있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의 모습을 엿보게 됨으로써 오히려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바로 성찰의 원리로부터 나오는 글맛이요, 손맛이다. 이 작품은 아들의 ‘아무래도 장가를 못 갈 것 같다’는 말을 듣고 난 후 부모로서 자책감에서 조상님께 용서를 구하는 심경이 참으로 감동을 준다. 아들에 대한 진한 애정 그리고 집에 들어올 며느리에 대한 이해가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끼리 싸움이 나서 딸들이 호소해 오면 입 밖으로는 딸이 잘못했다고는 하지만 마음 속까지 그렇진 못하다. 논쟁의 옳고 그름은 쌍방과실이다. 그럼에도 여자 마음을 하나 다독이지 못하는 사위에게 설핏 원망을 하는 나를 보면서 별 수 없이 지 속으로 난 새끼는 편을 드는 나를 본다. 그래도 지각잇는 장모인 나는 겉으로는 사위 편을 든다. 그들이 잘 살아가는 모습만큼 우리가 편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딱 하나, 그런 장모의 역할만이 가정의 평화에 도움을 줄 뿐이기 때문이다.
- <나는 장모다> 중에서 -
문정희는 정말 솔직한 사람이다. 다른 글에서도 위의 수필에서도 알 수 있다. 그녀는 인간 사이를 강물처럼 흐르는 정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까이 하려는 따뜻한 사람이다. 그녀의 글에서 유난히 촉촉한 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주체자의 의지만에 의해서 주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은 우리들의 기대와 희망과는 무관하게 전개될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은 시작된다. 위 글은 장모의 입장에서 딸과 사위 사이에 다툼이 있을 때 겉으로는 사위 편을 들지만 속으로는 딸 편을 들게 된다는 진솔한 고백이 있어서 감동을 준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장모로서 겉으로는 무조건 사위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는 호소가 설득으로 다가오게 엮은 글이다. 문학적 성취는 형상화나 상관화에서 나오는 법이다. 작가는 결말부에 가서 자신의 입장을 아들사랑에 견주어 풀어내고 있어 맛을 더한다. ‘내 아들의 흉을 딸이 보더라도 살갑게 사위 편을 들어줄 그런 장모를 만났으면 좋겠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작가적 저력을 다시 한 번 더 보여주고 있다. 이 수필은 사위 편들기의 심정을 아들사랑으로 전환함으로써 수필의 묘미를 잘 보여준다. 장모이기에 겪는 안타까운 순간을 솔직한 표현으로 잘 펼쳐나가고 있다. 어디를 가도 자식 걱정은 식을 줄 모른다.
인연이란 무엇인가. 영사관을 떠났던 그 일본인 사케가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도 미혼이란 말은 흔들리는 바람결에 묻어있는 꽃향기 같이 왜 그리 기분이 좋았던지 모른다. 실낱 같은 희망, 바위 같은 불안함이 동시에 엄습해왔다. 부산대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수가 되려고 한국으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는 사케. 그 일본인 남자. 상희가 혼자 열병처럼 사랑한 그 정열을 보듬고 일본어를 2년 만에 완파하게 만든 그 남자가 다시 왔다. 한국에서 머물 시간은 2년이라고 한다.
- <어떤 사랑> 중에서 -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의미있고 소중한 것이 부부의 인연이 만들어내는 사연이다. 특히 편견이나 한계를 극복한 숙명의 연으로 이어진 관계 속의 그 절절한 사랑은 무엇에 비교할 수 없다. 문정희 수필은 주로 인간을 둘러싼 끈끈한 삶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형상화시키는 것을 특색으로 한다. <사랑을 본다>뿐만 아니라 많은 수필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인연을 축으로 그려지고 있다. 삶의 영역에서 갖는 사랑과 행복, 만남과 인연의 가치를 적절한 제재로 형상화하여 수필미학이라는 고지로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중증 소아마비 장애인과 일본 청년 사케의 사랑 이야기는 수필이 되어 그녀에게 등단의 영광을 안겨주기도 했고,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그녀는 수필로 말해 주었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주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국경을 뛰어넘는 두 청춘 남녀의 운명적 사랑을 시작에서부터 결혼까지 풀 스토리로 엮어 감동미학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방송대 국문과를 같이 다니면서 장애우 상희의 발이 되어준 그녀의 헌신과 희생도 상희와 사케의 운명적 사랑 못지않게 감동을 준다. 작가의 말대로‘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런 초월적인 힘을 가진 것이 사랑이기에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로 뽑혔다고 하면서 그녀는 사랑의 무한 가치를 이 두 남녀의 결합에서 깨닫는다. 작가는 대학에 만학도로 진학하여 공부하면서 보았던 한 여자가 짝사랑으로 인해 겪는 갈등과 고뇌의 단면, 그리고 사랑을 찾아 행복을 느끼는 모습까지 그 빛나는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야기꾼의 기질이 없이는 결코 그려낼 수 없는 것이다.
성실 납세자, 성실한 가장이기도 한 남편이 받은 상은 애국자상이기도 할 게다. 한 푼이라도 덜 내려고 발버둥치는 게 국가에 내는 세금이고 서민으로서는 그 돈이 여간 아깝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벌이는 족족 다 내 주머니로 다 들어오는 돈이면야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사업하는 사람들이 내는 세금은 꽤 많다. 서민 경제에 세금이 높으면 살기가 빠듯해진다.
남편도 내가 듣기로는 많은 세금을 내는 듯하다. 많이 벌면 많이 내는 게 민주국가에서 잘 살기 위한 소득분배의 원칙이라는 데 수긍한다. 그 말에 따르고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일환이라 생각하고 낸 세금에 국가가 개인에게 주는 상을 받은 사람이니 민주시민으로서 자격을 취득한 셈이다.
- <남편이 성실 납세자상을 받던 날> 중에서
인용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글에는 작가의 남편이 성실하게 세금을 내고 성실 납세자상을 받는 데 대해 민주시민으로서 해야 할 도리와 사회정의를 실천하려는 몸부림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수상 소식을 듣고 지금까지 남편에게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존경스럽다.’는 말까지 한 작가다. 생활 속의 작은 실천에서 오는 기쁜 소식을 행복의 원천으로 연결하는 그녀의 여유에 찬 삶이 주는 감동은 안식의 문학이라는 수필 고유의 특성을 잘 말해준다. 지혜의 보고서라 할 만한 이 수필은 가족의 힘을 보여준다. 국가에 잘 낸 세금 덕분으로 상을 받았으니, 남편은 민주시민으로서 자격을 취득한 셈이라 여기는 작가의 올곧은 시민의식은 감동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민주시민의 자격에 대한 성찰의 가치를 전해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독자와의 공감대 확보를 위해 작가는 결말부에 남편과 같은 성실한 납세자가 ‘바보 인생납세자’가 안 되도록 국가가 노력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런 설득적 논리는 공감과 감동을 위한 필수적 장치로서 기능한다고 하겠다.
한 번도 세어 보지 않고 넣어두었던 복채를 세어보니 60만원이 된 탓에 연말에 고민을 했다. 어디에 어떻게 이 돈을 유용하게 쓸 것인가 생각하던 차, 마침 어느 지리산 골짝 조그만 암자에 평생을 곧게 돈하고 담쌓고 사시는 스님 한 분이 계시는데 그쪽으로 시주하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듣고는 친구들을 차에 태우고 하루 소풍 삼아 그 절을 찾아가서 인사를 하고 봉투째 시주를 하고 돌아왔다.
- <타로> 중에서 -
이 수필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밝게 살아가려는 작가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잘 녹아있다. 베풀고 나누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누구나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게 그녀의 작은 바람이다. 함께 익어가면서 삶이 향기가 난다면 참으로 아름답고 축복된 일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녹녹치 않는 삶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이 축복만 주는 것이 아님을 안다. 이만큼 살다보니 사는 것은 거창하게 소리치거나 어깨에 힘주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한 두어 달 만에 타로로 벌인 돈이 지갑에 두둑하다. 그건 따로 모아서 한 푼도 안 썼다. 좀 모이면 불우이웃돕기를 할 요량으로 모았다.’는 언술은 작가가 어떤 사람인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타자-되기를 통해 우리-되기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문정희의 인간됨에 고개가 숙여진다.
수필은 일상을 소재로 해서 정서와 그를 통해 획득되는 깨달음을 유감없이 기술할 수 있는 글이다. 이 수필은 이러한 고유 영역과 특성을 구체적인 체험을 가지고 제대로 살렸기 때문에 향기를 지닐 수 있다. 사랑이 떠난 인간세상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시로 잘 말해주고 있다.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고, 선택이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의 품격이 달라진다. 살아오면서 우주 앞에 인간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를 실감하고 타로를 배우고, 그것을 타자를 돕는 일에 활용하니 이보다 더 멋진 수필적 소재로 어디 있겠는가. 이런 차원에서 수필가가 그려내야 할 수필적 주제는 인간애의 정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인간이면 가져야 할 인간적인 자세가 어떤 것임을 엿볼 수 있게 해서 인식 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귀찮고 하기도 싫으실 텐데 휴일날 국수는 어머님이 하신다. 당신이 하시는 게 손자 입맛에 더 맞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대충 하시지요.’하면, 그러신다. ‘몇 가지 재료를 빼니까 와 그리 맛이 엄노’ 하신다. 입맛이란 그렇다. 길들여지는 게다. 입 말을 다 들으려면 천석 만석꾼 가지고도 안 된다. 우리 어머님은 늘 그러시면서도 정작 당신은 맛있게 만들려고 많이 노력하신다. 시아버님이 당신 아들한테 물려주지 않아도 될 유산을 남기시고 가셨는데 그게 입맛이다. 시절을 잘 타고 나신 어른이시다. 부모 봉양의 마지막 세대인 나로선 한밤 중에 국수를 삶은 마지막 며느리 군단에 속할 터, 나는 내 며느리에게 국수를 삶아 달라고 하긴커녕 내가 국수를 삶아준다 해도 먹기 귀찮다고 할 세대와 함께 갈 것이 아닌가.
- <시어른과 국수> 중에서 -
문정희는 시어른을 오랫동안 모시고 대가족으로 살아왔다. 위의 작품은 가족의 의미를 천착해 나가는 수필이다. 작가는 이 수필의 제목을 ‘시어른과 국수’라 정하고, 서두 첫 마디를 외출하고 현관에 들어서면서 시아버지가 일갈하는 ‘간딴하게 국수 쫌 살마라’로 시작하고 있다. 주어진 시간을 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우리 기억의 한켠에 속해 있는 체온보다 더 뜨거운 것으로 자리했던 도리와 자세를 긍정적으로 그려내는 일이 아니겠는가. 시어른의 존재의미를 ‘국수’로 의미화해 가면서 마지막에 가서는, 그 까다로우셨던 시아버님이 가시고 안 계신 지금, 깐깐한 입맛을 물려받은 남편이 던지는 ’이거 간이 딱 맞네.‘하는 말로 연결시켜낸다. 글솜씨가 보통이 넘는다. 전개부로 가면서, 차례차례 시아버지, 시어머니, 아들, 마지막으로 남편 순서로 각자의 특성을 묘사하면서도 은근하게 남성중심주의 사회를 정조준하는 등으로 수필의 맛을 낸다. 발단과 결말을 상관화하는 구조로 볼 때, 문정희는 기본기가 튼튼한 작가라 하겠다. 수필은 찬란하고 정결한 정신의 축제라 할 수 있다. 삶을 통한 선택된 체험의 미학적 형상화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시어른에 대한 진솔한 내면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학생들 얼굴을 나는 다 안다. 하나하나 성질까지도 나는 다 안다. 누가 나한테 진심으로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누가 언제 나한테 자기가 먹던 소세지를 조금 잘라 던져주었는지, 어떤 놈이 여학생한테 퇴짜 맞고 그것과 아무 상관없는 나를 발로 찼는지 모두 기억하고 있다. 밀양에서 온 수복이가 나는 마음에 제일 안 든다. 이상하게 그놈은 나를 미워한다. 학교 갈 때 올 대 늘 내 배를 생각 없이 툭툭 찬다. 나도 그놈만 보이면 잽싸게 도망간다.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그냥 내가 피한다. 그래도 대체로 모두가 나를 다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내가 제일 사랑하는 이는 주인 아주머니다. 내 식성과 내가 좋아하는 음식, 내가 낮잠 자는지 그냥 햇빛에 꼬박꼬박 조는지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아주머니다.
- <똥개> 중에서 -
앞의 작품에 등장인물이 사람이었다면, 이번 작품에 등장한 주동인물은 동물이다. 똥개의 입장에서 쓴 우화적인 수필이다. 단편소설로 발표해도 될 만큼 재미있게 잘 쓴 수필이다. 주인에게 맞고 분해서 단식투쟁을 하다가 결국 죽게 되는 똥개의 비참한 최후를 감동적으로 그려내었다. 시어머니와 똥개에 얽힌 애증의 관계를 콩트처럼 썼다. 이 수필이 주는 가치는 상상력의 공간이 광대하다는 점이다. 상상력은 곧 문학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감동으로 가는 통로로써 읽는 재미를 준다. ‘오기’를 부리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는 똥개의 마지막 독백, ‘개는 개일 뿐이예요.’가 따갑게 가슴을 찌른다. 인간적인 면모를 가슴이 찡하게 울려오도록 마지막까지 주인의 입장을 생각해주는 충성스런 개의 특성을 잘 보여주면서, 개와 인간의 정의적 관계를 문학적으로 진지하게 그려내는 솜씨가 대단해 보인다. 이 수필의 백미는 마지막 개의 독백이다. 주인에게 ‘미안해하지 말아요.’라고 하는 개의 말이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수필은 가장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담는 그릇에 비유된다. <똥개>는 시어머니의 인품과 덕성이 거울에 비치듯 드러나 있는 글이다. 애완견과의 시어머니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큰 감동을 준다. 어떤 작품보다도 이 작품은 정서의 객관화를 통해 시어머니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서 미적 울림통을 울렸다고 하겠다. 말 못하는 똥개지만 개에게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전달하려고 하는 작가의 시어머니도 훌륭하고,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주인의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의 죽음을 주인에게 전가하지 않고 자기 탓으로 돌리고 편안한 죽음을 맞는 똥개의 모습에 독자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집에 키우던 개를 그렇게 보내고 그 충격으로 그 후로 개를 키우지 않았다고 하는 시어머니의 사연을 마지막으로 전하면서 독자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마땅히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이 아닌가 여겨진다. 글은 곧 그 사람 자신이다. 인연은 소중한 것이다. 이 수필의 풍경화처럼 마음을 열고 고부간 살갑게 호흡하며 맺은 인연으로 얻은 글감 정보를 우화로 엮어 그려가는 이런 재미나는 글들이 문정희 수필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하겠다.
III.
수필은 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인생을 보다 낫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보다 충실한 삶의 길을 찾기 위해 생활 속에서 인정을 흘리고, 비평적 의식을 갖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문정희의 첫 작품집은 그 지향성이 열림과 트임에 맞닿아 있어서 맛있게 읽혀진다. 해외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기행문을 문학으로 끌어올리는 문제는 과제로 남지만 그녀는 구어체와 재미로 우리 수필이 잃어버린 독자를 찾아오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는 수필을 많이 써냈기 때문이다. 문정희는 해 뜨는 밝은 날을 예고하는 눈부신 희망의 작가다. 그녀는 수필의 특성인 진솔함으로 바탕으로 수필에 맛을 더하고 있기에 우리 수필의 접근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다루지 못한 여러 편의 수필들은 삶의 지향점을 향해 묵묵하게 걸어가는 생활인의 자세와 인생의 정점에서 지나간 세월을 성찰의 자세로 돌아보는 마음의 여유를 풍경화로 그려낸 것들이 아닌가 여겨진다.
문정희는 자기희생을 근본으로 하고 소임을 빈틈없이 처리해 나가는 작가다. 그녀의 작품은 나름대로 존재와 삶에 대한 자각과 어우러져 잔잔한 감동을 준다. 우리 사회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드러내고 인간의 삶에 필연적으로 따르기 마련인 희노애락을 담고 있는 그녀의 수필은 자신의 삶에서 부딪치고 체득되어지는 여러 가지 역사적, 시대적 상황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 투입시켜 주제의식으로 잘 구체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인생의 새로운 기점에서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다음에는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한 수필에서부터 또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하면서 힘들었던 세월을 수필로 극복하고자 하는 작품까지 모든 수필에는 수필적 삶의 실천을 통해 관객이 있는 인생 무대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작가정신이 녹아있다. 앞으로 문정희의 수필은 세계시민의 시선 위에 인간적 향기가 더해질 것이라 믿는다.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 펜을 들고 세계여행을 떠나는 여행작가 문정희는 결코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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