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되찾았으니 다시는 놓치지 말자.
그런 생각을 했던 나를 기억해. 무수히 싸우고 화해했던 그 순간을 기억해. 헤어지자는 말에 숨이 턱 끝까지 차서 야근해야 할 일도 집어던지고 네 집 앞으로 달려가던 그날들을 기억해.
이상하게 그런 날들이 모두 내 기억 속에선 너와 닮은 겨울이구나, 제이.
있잖아. 그때 난 우리가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단 한 번도 영원을 믿어본 일이 없는 사람인데 이상하지 않니. 너도 이상하다고 했었지. 우리가 영원을 말하다니 신기한 일이라고 키득거렸던 그 시간들을 기억하니.
그러던 우리가 언젠가부터 서로 다른 눈으로 시간을 훑기 시작하더라. 나는 미래를 살자고 걸어가고 있었고 너는 과거를 쓰다듬고 품으며 현재에만 머물러 있었지. 걷길 무서워하는 네 팔을 붙잡고 걷자고 끌고 가며 무거워 신음하던 그때의 내 울먹임이 아직도 마음속에 선하네.
나는 무엇에 그렇게 조바심을 냈을까.
당장 너와 살고, 당장 너와 무언가를 이루지 않으면 네가 증발해버릴 것만 같았어. 그리고 너와 내가 만들어 온 이 시간들이, 이 사랑 이야기들이 다 허상일까 두려웠어. 너는 그냥 사랑만 하자고 말했고, 나는 그냥 사랑만 하는 삶 따위가 있기나 하냐고 소릴 질렀지. 그렇게 서로 악다구니를 쓰며 너의 현실과 나의 미래는 반으로 쪼개져 버렸단다.
알아, 영원은 어디에도 없었지.
이제 30대인 내가 그렇게 말하면 특유의 입꼬리 한쪽만 올리고 씩 웃는 웃음과 함께 그러네, 없었지,라고 답할 제이 네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래 맞아, 영원은 없었어. 너와 내게 그토록 찾았던 영원도 없었고 우리 둘이 키우는 강아지 한 마리와 고양이 메이도 없었지.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그렇게나 아끼고 사랑하던 네 목소리를 내 머릿속 어디를 뒤적여도 찾을 수 없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기 때문이었어.
그 당시 우리는 치고받고 싸우는 우리의 사랑이 언젠가 어떤 합의점을 만나 함께 안정적으로 영원을 살 거라 믿었지만 그따위 것 다 허상이더라, 그치. 그런 기대 내려놓으니까 마음이 편하던데 너는 요즘 어떠니, 제이야. 요즘도 새벽에 잠을 못 이루고 울곤 하니. 울다가 음악을 틀고선 들으면서 더 크게 흐느끼곤 하니. 그럴 때 누군가 네 옆에 있니, 아니면 또 누군가에게 울음만 한참 이어지는 전화를 거니.
너는 요즘 어떠니.
내가 다시 사랑을 시작해버렸다는 그런 뻔한 소리 집어치울게. 너와 네가 아는 나는 그런 허울좋은 소리 되게 싫어하잖아. 그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야.
굳이 지금 네게 가닿지도 않을 이 얘기를 왜 꺼냈느냐면 지금 떠올려도 너와 함께 사랑에 담뿍 빠져있던 그 시절이 그렇게 춥고 그렇게 슬픈데, 그래도 그 시절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기고 마는 것이 가장 슬프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야.
있잖아, 제이야. 나는 너와 긴 시간을 우리 사이에서 흘려보내며 드디어 마침표를 찍게 되어서 기뻐. 사실 정말로 기쁘다. 한 10년을 졸졸 작은 틈새로 들이붓고 이어지던 우리의 연은 겨우 마침표가 콩 찍혔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단다. 그건 좀 많이 기뻤어.
이제 더 이상 너와 내가 사랑하니까 슬퍼도 된다고 자위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속에 살게 되어 나는 지금도 꽤나 기쁘구나.
나는 너 없이는 못 살 것 같았는데 이렇게 살아있더라. 타인 없이 못 살 것 같은 그 기분이 다 거짓이라고 알려줘서 고마워, 제이. 이건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이야. 그 시절이 없었다면 나도 몰랐을지도 몰라. 영원도,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다 깊은 바다 같은 기억 속에 가라앉을 수 있다고 알려줘서 네가 무척 고맙다, 제이야.
야, 꺼져, 이 망할 년아.
너 분명 그렇게 말할 걸 아니까 이 뭔지 모를 글도 제대로 마침표를 찍어볼게.
네가 싫어하는, 내가 싫어하는 허울좋은 소리 한 번만 하자면, 네가 조금은 덜 슬픈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좋겠구나. 내가 슬픈 삶을 그저 걷고 또 걷다가 스러져 갈 날만 기다리더라도, 너는 조금은 덜 슬펐으면.
왜, 네가 그랬잖아.
우린 글러먹었지만 그 좋다는 행복이 뭔지 담장 너머로 훔쳐보기라도 하자고. 그치?
추신)
겨울이 오면 한 번쯤은 네 목소리로 부른 노래가 머릿속에서 잠깐이라도 들린다면 좋으련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용서해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