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석법영(釋法穎)
법영의 성은 삭(索)씨며, 돈황(燉煌) 사람이다. 열세 살에 출가하여, 법향(法香)의 제자가 되었다. 양주(凉州)의 공부사(公府寺)에 머물렀다. 동학인 법력(法力)과 더불어 모두 율장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법영은 스승에게 배운 이후, 배움을 두 번 청하는 일이 없었다. 한 번 들은 것은 그대로 기억하였다. 율부를 정밀하게 연구하고 경론도 널리 섭렵하였다. 원가(元嘉) 연간(424~452) 말기에 서울로 내려가 신정사(新亭寺)에 머물렀다.
효무제(孝武帝)가 남쪽으로 내려와, 이 절을 고쳐 수리하였다. 법영은 학업에서 자신은 물론이고 남까지 밝게 함을 겸했다. 그러므로 칙명을 내려 도읍의 승정(僧正)으로 삼았다. 후에 직책을 내놓고 다보사(多寶寺)로 돌아왔다. 한적한 방에서 항상 선정을 익히고, 때로 계율의 법석도 열었다.
북제의 고조(高祖)황제가 즉위하였다. 다시 칙명으로 승주(僧主)가 되었다. 일마다 내리는 공양물이 보통 규정된 것의 갑절이나 되었다.
법영은 들어온 보시물로 경전과 불상 및 약장(藥藏)을 만들어 장간사(長干寺)를 채웠다.
북제의 건원(建元) 4년(482)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7세이다. 『십송계본(十誦戒本)』과 『갈마(羯磨)』를 지었다.
∙혜문(慧文)
당시 천보사(天寶寺)의 혜문율사도 여러 부(部)의 율법에 뛰어났다. 낭야(瑯琊)의 왕환(王奐)이 섬기는 바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