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고문’이라는 몹쓸 말
예전에 ‘희망사항’이라는 가요가 있었습니다. ‘청바지가 잘어울리는 여자/ 머리에 무스를 바르지 않아도 윤기가 흐르는 여자/ 웃을 때 목젖이 보이는 여자/ 멋내지 않아도 멋이 나는 여자/ 그저 바라만 봐도 위로가 되는 여자... 나는 그런 여자가 좋더라’ 이런 가사죠. 그런데 그런 희망사항을 채워줄 수 있는 여자가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건 ‘희망고문’이 되는 것일까요? 종종 ‘희망고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걸 보게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좀 고약한 말입니다. ‘희망’이 고문이 되다니! 이 말이 프랑스 소설가 빌리에 드릴라당이 쓴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에서 나왔다는데요, 이루어지지 않을 ‘거짓 희망’이 한 인간에게는 잔혹한 고문이 된다고 쓰였답니다. 종종 누군가를 억압하고 착취하고 이용해 먹으려는 속셈으로 희망을 미끼로 던져줄 때 ‘희망고문’이라는 말을 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우리는 이 말을 너무 남용하는 것 같습니다. 주식이 오르고, 회사에 취직을 하고, 빠진 머리가 다시 나고, 뭐 이런 희망들이 이뤄지지 않을 때, 괴로움을 고문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래도, 어떻게 희망이 고문이 될 수 있습니까! 앞의 노래는 그렇게 희망사항을 읊는 남자에게 여자가 이렇게 조언을 하며 끝납니다. ‘여보세요 희망사항이 정말 거창하군요/ 그런 여자한테 너무 잘 어울리는/ 난 그런 남자가 좋더라’고요. 어떤 희망이 있다면 그 희망에 어울리는 사람이 먼저 되라는 거죠. 내가 어떤 희망을 품고 노력하고 있다면 설사 그 희망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그 동안 나의 삶은 부정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그 희망이 이뤄지지 않았더라도, 그 시절이 아련하게 추억될만큼 내 인생은 더욱 풍성해졌고 아름다워진 것입니다.
희망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그것을 고문으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평생 불행할 겁니다. 왜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희망이 더 많으니까요. 왜냐하면 삶이란 과정이지 결론이 아니니까요. 결론이 되는 순간 인생은 끝난 것이죠. 과정을 즐기며 감사하며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희망 없던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영원한 희망을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사는 게 힘들더라도, 절대로 ‘희망고문’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비록 이뤄지지 않더라도! 절망 속에 있더라도, 그 인생을 품위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처럼요☺
(2024년 3월 17일 주일 주보에서)
첫댓글 희망은 언제나 아름답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