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의 안부 / 최유정
과수원 울타리를 넘어온 바람이
포도알마다 따스한 낮달을 전해 준다
햇살은 잎사귀의 실핏줄을 타고 내려와
흙 속에 잠든 씨앗의 귀를 간지럽힌다
우리는 밭이랑 사이에 서서
꽃이 피워 올린 땅의 안부를 전해 받는다
소식을 들은 나비가 공중의 결을 따라 유려하게 휘어진다
곁에 선 소나무는 일제히 종을 울리듯 솔방울을 흔든다
나는 답장 대신 손바닥 위에
잘 익은 포도 한 송이를 올려둔다
어느 오후의 소나기를 견뎌낸 약속
빗줄기가 씻어준 말간 얼굴을 마주한다
밤새 맺힌 이슬이 툭, 하고 떨어지자
무성한 숲이 파르르 흔들리기 시작한다
흔들림이 멎은 자리마다 짙은 고요가 쌓인다
비로소 제 이름을 얻는 시간
바닥에 떨어진 계절 하나가 땅을 누르는 듯 묵직하다
잘 익은 노을이 마을의 담장을 넘는다
일렁이는 어스름이 저마다 자리를 찾아 눕는다
32회 ‘지용신인문학상’ 시상식…최유정씨 수상 - 동양일보
32회 지용신인문학상 당선자 최유정(34·사진·경북 포항시)씨가 한국문단에 ‘시인’으로 이름을 올렸다.16일 오후 4시 옥천상계체육공원에서 열린 시상식에는 때이른 더위에도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이헌창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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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혼자 읊조리던 시어들이 차창 너머 누군가에게 꿈처럼 닿아”
어느 오후, 소나기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 햇살을 머금고 눈부시게 차오르는 생명들을 보았습니다. 그날의 풍경은 마치 온 세상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비의 날갯짓과 나무의 떨림이 우연이 아닌 서로를 향해 건네는 안부 인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때는 높은 곳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이 생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긴 고뇌 끝에 바닥에 내려앉아 흙과 맞닿으며 묵직하게 땅을 누르는 그 낮은 시간 또한 귀중한 생의 조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땅에 닿은 열매 역시 나무 위의 열매와 똑같은 소나기를 견디고 똑같은 햇살을 나누어 가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나누는 안부 인사를 바라보며 저 또한 조심스레 그 곁에 서서 안부를 물었습니다. 이 시는 제가 보내는 소박한 답장입니다. 이 시를 통해 자연이 전해 주는 '계절과 시간의 무게'를 기억하려 합니다.
해가 뜨면 새벽에 썼던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종이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지우곤 하였습니다. 쌓여 있던 투박한 글들을 꺼내어 마주 보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혼자 거실에 앉아서 나지막이 읊조리던 시어들이 차창 너머의 누군가에게 닿았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정지용 시인의 드높은 문학 정신을 기리는 '지용신인문학상'을 받게 된 것이 너무도 감격스럽습니다. 제게 당선 소식은 더 겸허하게 살라는 가르침으로 다가왔습니다. 앞으로도 겸손한 자세로 읽고 쓰겠습니다.
저는 사계절이 뚜렷한 곳에서 자라난 많이 흔들리는 나무였습니다. 잎이 떨어지는 순간도 묵묵히 견뎌준 가족들이 있어 한 글자 또 한 글자 써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문장 속에 숨겨진 진심을 읽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지용신인문학상을 주최·주관하신 동양일보와 옥천군, 옥천문화원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인터뷰/ 32회 지용신인문학상 최유정씨 “‘괜찮다’고 다독여 주는 시 쓰고 싶어요” - 동양일보
“해가 뜨면 새벽에 썼던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종이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지우곤 했습니다. 쌓여 있던 투박한 글들을 꺼내어 마주 보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혼자 거실에 앉아서 나지막이 읊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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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포도밭’을 통한 ‘시간의 적층’ 그려낸 명편 자연의 수런거림을 세상에 전하는 안부 인사로 역동의 고요 포착 형상화해낸 짧지 않은 적공
이번에 32회를 맞는 지용신인문학상에는 예년에 비해 더 많은 분이 응모해주었다.
세대와 지역을 넘어 많은 분이 투고작을 보내오신 이면에는, 그동안 동양일보가 쌓아온 매체적 역량과 그에 대한 신뢰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지용신인문학상의 위상이 제고되는 이러한 순간이 더욱 균질적이고 지속적인 진경을 얻어 매우 중요한 지표들을 만들어가리라고 생각해본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예심을 통과해온 작품들을 읽어가면서 심사위원은 언어적 형상화 능력과 주제 의식의 성취에서 개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보여준 시편들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완결성과 지속 가능성과 진정성을 두루 보여준 시편을 호의적으로 읽어나갔다. 그러한 작품들은 다양한 경험과 견고한 사유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는 원숙한 언어를 충실하게 견지하면서, 그 안에 매우 개성적인 상상의 활력을 담아내는 역량을 함께 보여준 가편들이었다. 그 가운데 심사위원은 최유정 씨의 <포도밭의 안부>를 이번 지용신인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포도밭의 안부>는 ‘포도밭’이라는 공간의 비유를 빌려 오랜 ‘시간의 적층’을 고전적 언어로 담아 보여주었다.
흙 속에 잠든 씨앗이 전해준 시간의 흐름과 흔적들을 바라보고 그것에 귀 기울임으로써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자연에 대한 새로운 상상적 경험을 각인해 주었다.
포도밭에서 자연 사물들이 수런거리며 서로 안부를 묻는 시간을 구성해 낸 명편이다.
그렇게 이 작품은 삶의 뒤안길에 놓인 시간 감각을 내장하면서, 모든 사물이 저마다 자리를 찾아가는 역동의 고요를 잘 포착하고 형상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오랜 기억 속에 쌓여가는 시간에 대한 형상화 과정은 수상자의 짧지 않은 적공(積功)을 충실하게 알려주었다.
수상의 기쁨을 함께하지 못한 응모자들의 정진을 기원하면서, 수상자가 개성적 필력과 경험적 구체성을 바탕으로 하여 신인다운 지속 가능성을 한 차원 높이 구현해가기를 마음 깊이 기대해 본다. 더불어 지용신인문학상에도 풍성하고도 빛나는 성과가 있을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 심사위원 이길원(시인, 전 국제펜한국본부 이사장)·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출처] 제32회 지용신인문학상 / 최유정|작성자 ksujin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