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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가 증거하는 '믿음'(pis, tij)
<국문 초록>
믿음은 복음 및 칭의와 더불어 종교개혁의 핵심 신학 개념에 속하며 기독교 신 앙의 본질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본 논문은 믿음에 관한 중요한 진술을 남긴 신약 의 네 저자들(바울, 요한, 히브리서, 야고보서)에 국한하면서, 이들이 믿음을 어떤 의미로 이해했으며 그와 직결된 신학적 특징은 무엇인지를 밝히려 한다. 바울에 게 믿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수용하는 것이며, 하나님 의 약속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이며, 행위의 원리로 이해된 율법과 대립된 칭의신앙 을 뜻하며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규정짓는 개념이다. 요한의 경우, 믿음 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순종 을 뜻한다. 믿음은 신앙의 눈으로 깨닫는 인식으로서 예수의 음성을 듣고, 그를 바 라보고, 그를 아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아가 요한은 믿음을 영생의 삶에 참여하는 현재 종말론적 실존으로 이해한다. 이처럼 바울과 요한의 믿음 이해는 믿음의 대 상으로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면서 기독론적이며 구원론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특징을 띠며, 믿음을 은혜의 선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는 오히려 믿음의 주체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히브리서는 믿음을 고난에 처한 신앙공동체를 위한 권면의 문맥에서 주로 언급한 다. 이때 믿음은 오래 참음, 인내, 소망과 동일한 뜻을 지니며, 하나님의 약속에 대 한 확실성/보증이요 증거로 이해된다. 야고보서 역시 믿음의 주체와 관련된 다양 한 측면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신앙고백의 믿음, 신뢰의 믿음, 기적의 믿음, 기도 의 믿음, 행함이 없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에 관해 말한다. 특히 야고보서 2장 14절 에서 26절에서 저자는 바울의 칭의론의 형식화를 비판하는 가운데 믿음을 구원의 조건과는 무관한 지적 확신 정도로 이해한다.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의 믿음 이해는 수신자 교회가 처한 특별한 상황과 직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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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2012년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서 론
사회 구성원 상호 간에 믿고 신뢰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일상적 의미를 넘어서“믿음”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나타내며 기독교 신학의 핵심을 구성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에 걸맞게 믿음은 “복음” 그리고 “칭의”와 더불어 종교개혁의 핵심 신 학용어에 속한다. 한마디로, 믿음은 기독교적인 실존을 포괄적으로 규정짓는 개념 이다. 그래서 “믿는 자” 혹은 “신자”(pisteu,ontej / pisteu,santej, 살후 1:10; 고 전 1:21; 롬 1:16; 3:22; 4:11)라는 단어는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뿐만 아니라 오 늘날까지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행위이며(행 20:21), 그리스도인 됨(고전 2:5)을 뜻하고, 나아가 기독교와 동 일시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딤전 4:1, 6).
이처럼 중요한 개념인 믿음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케리그마를 수용하는 인간의 태도를 나타낸다. “그리스도를 믿는다”(pisteu,w eivj Cristo,n) 라는 표현도 사실상 케리그마에 선포된 하나님의 구원사역, 즉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켰다는 구원사역을 수용하는 압축된 표현에 불과하다. 이 런 의미에서 “믿다”(pisteu,w)라는 동사는 “고백하다”(o`mologe,w)란 동사와 유사 한 뜻을 갖는다(cf. 롬 10:9). 명사 pi,stij 혹은 동사 pisteu,ein이 신약성서에 각243회 나오는데,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에만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요한복음에는 단지 동사형만 나오고 있는 반면, 골로새서와 빌레몬서 그리고 베드로후서와 요한 계시록에는 오직 명사형만 나타난다. 명사 pi,stij에만 국한할 경우, 공관복음서 와 사도행전에 40회, 바울서신에 141회(7개의 바울친서에 90회, 이른바 제2바울 서신[엡, 빌, 골, 딤전/후, 딛]에 51회), 히브리서에 32회, 야고보서에 16회, 그리 고 요한일서에 1회 사용될 뿐, 요한복음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동사pisteu,ein이 요한복음 가운데 98회나 나타난다.1)
지금껏 우리 학계의 관심이 주로 바울과 야고보서의 믿음 이해를 둘러싼 논란 에 집중된 반면, 신약의 주요 저자들이 언급하는 믿음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 이 적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이 주제에 대한 신약성서적 접근이 요 청된다. 따라서 본 연구는 각 저자의 믿음 이해를 깊이 있게 연구하기에 앞서, 신약의 주요 저자들은 “믿음”을 어떤 의미로 이해했고 그와 직결된 신학적 특징은 무 엇인지를 종합적으로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지면관계상 믿음과 관련된 전승 사적 질문2)을 배제시킬 뿐만 아니라, 연구범위도 신약성서 저자 중 단지 네 저자 (바울, 요한, 야고보서, 히브리서)에 제한하려 한다. 이러한 제한은 두 가지 측면에 서 정당화될 수 있다. pi,stij 혹은 pisteu,ein이 신약성서 중 바울과 요한에게 가 장 많이 사용되고, 또한 가장 폭 넓게 발전된 믿음 이해가 나타난다는 측면에서 양 자의 믿음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영향사 측면에서 볼 때 믿음에 관한 정 의(히 11:1)를 담고 있는 히브리서와, 믿음과 행함의 담론(약 2:14-26)을 담고 있는 야고보서 역시 중요하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그간 서구학계의 연구 흐름에 대하 여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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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 Aland, Vollständige Konkordanz zum griechischen NT (Berlin/New York: de Gruyter, 1975),1129-32.
2) 예컨대, Bultmann/Weiser, “pisteu,w pi,stij ...,” ThWNT 6, 174ff; H. Wildberger, “!ma”,ThHAT I, München, 1978, 177-209; D. Lührmann, “Pistis im Judentum,” ZNW 64 (1973), 19-38을 참조하라
II. 연구사 개관
“믿음”은 신약성서를 해석하거나 신약신학을 묘사하려 할 때 반드시 다루는 중요한 주제에 속한다. 따라서 서구신학계는 오래 전부터 이 개념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다.3) 근대에 들어와 믿음에 관한 본격적인 학문적 연구는 슐라터(A. Schlatter)의 저서 “Der Glaube im Neuen Testament”(1885; 51963)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단순히 믿음이란 개념을 언어적으로 분석한 것이라기보다, 믿음에 관한 진술을 신약성서의 중심주제로 삼으면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묘사하려는 시도이다. 방대한 분량(621면)을 담은 이 책은 향후 이 개념 연구와 관
련된 고전으로 통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가르침과 새로운 문 서와 교회 질서 및 관습은 다름 아닌 믿음에서 생성된 것임을 서술하면서, 이 개념 이 갖고 있는 내적 통일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이때 믿음을 인간 의지의 과정을 나 타내는 개념으로 보면서, 믿음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며 인간의 내적 분열상태가 회복된다고 보았다.
“종교사학파”(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는 믿음을 “모든 종교의 태동점”으로 파악하는 가운데, “사랑과 경외와 신뢰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고양되 는 것” 혹은 “하나님을 향한 단순하며 소박한 순종”으로 이해하였다.4) 믿음을 개 인적인 차원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국가 종교나 제의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보았 다. 이런 의미에서 부셋(W. Bousset)은 유대 종교철학자 필로를 가리켜 “믿음의 첫 번째 신학자”로 불렀다(Kyrios Christos, 1913, 145). 불트만(R. Bultmann) 역시, 기 독교적 믿음은 역사적인 체험들에 근거하여 생겨난 구약의 민족적 믿음과는 결정 적으로 다르다고 보았다(ThWNT 6, 216f ). 그리하여 라이첸슈타인(R. Reitzenstein)을 따르는 가운데 불트만은 원시그리스도교 시대의 믿음을 ‘선교를 수행하는 헬레 니즘적 종교들의 전문용어’로 이해했다(같은 곳, 180f). 이러한 이해를 비스만(E. Wißmann)이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믿음이란 선교 때 선포되는 것을 수 용하며 그 자체로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신앙고백을 포괄한다. 복음, 즉 케리그마 를 믿어야만 한다. 정말 그 안에 담겨 있는 진리를 진리로 여겨야만 한다. 바로 그 것이 ‘믿는다’는 뜻이다. pi,stij는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 혹은 그의 죽음과 부활 에 대한 신뢰를 뜻하지 않는다”(Das Verhältnis von Pistis und Christusfrömmigkeit bei Paulus, 1926, 66f).
종교사학파의 이와 같은 시각에 대해 뤼어만(D. Lührmann)이 강하게 반기를 들었다. 그는 그리스어 pi,stij나 pisteu,ein을 히브리어 구약성서 번역에서 비롯 된 “의미 차용어”로 여기면서, 그것이 유대 문헌이나 기독교 문헌에서 종교적인 의 미로 사용될 때, 그것의 내용은 전적으로 구약성서적 전제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 다고 주장하였다(Glaube im frühen Christentum, 1976). 이러한 입장은 일부 수용되 었으나, 바르트(G. Barth)는 이에 대해 좀 더 세분화된 입장을 제시했다. 바르트의 견해에 따르면, 더 이상 불트만처럼 믿음에 관한 진술을 고대 세계의 선교적 종교 들의 당연한 문체로 간주할 수 없고, 그렇다고 뤼어만처럼 믿음을 유대교나 기독교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특별한 용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바르트는 유대교나 그리스 도교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고전 문헌과 이방 헬레니즘 문헌에서 이 단어가 종교 적인 의미에서 폭넓게 사용되었다고 주장했다(“Pistis in hellenistischer Religiosität,”ZNW 73, 1982, 110-126).
그러나 브란덴부르거(E. Brandenburger)는 헬레니즘 시대에 pi,stij가 종교적 인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전체적으로 볼 때 제한적이었고, 오히려 nomi,zein qeou.j ei=nai라는 표현을 통해 신들의 실재에 관한 확신을 나타냈으며, 신들을 향 한 인간의 관계는 euvse,beia로 불렀음을 강조했다. 그는 특히 헬레니즘 유대교에서pi,stij는 특정 상황과 관련된 하나님 신뢰를 뜻하기보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근 본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개념임을 밝혔고(욘 3:5; 유딧 14:10), 헬레니즘적 유대 원 시그리스도교가 그와 같은 언어사용을 수용하여 기독론적으로 첨예화시켜 구원의 길로서의 하나님/그리스도 관계를 특징짓는 개념으로 사용했음을 설득력 있게 제 시했다(“Pistis und Soteria”, ZThK 85, 1988, 165-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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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A.Schlatter,DerGlaubeimNT(Darmstadt:Buchgesellschaft,1963);Bultmann/Weiser,“pisteu,w pi,stij ...,” 174-230; R. Schnackenburg, “Glauben im Verständnis der Bibel,” in Christliche Ex- istenz nach dem NT I (München, Kösel, 1967), 61-85; D. Lührmann, Glaube im frühen Chris- tentum, (Gütersloh: Gütersloher, 1976); H. -J. Hermisson/E. Lohse, Glauben (Stuttgart/Berlin/ Köln/Mainz: Kohlhammer, 1978); F. Hahn/H. Klein eds., Glaube im NT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1982); G. Barth, pi,stij, EWNT 3, 1983, 216-31; E. Brandenburger, “Pistis und Soteria,” ZThK 85 (1988), 165-98. 그 밖에 주요 신학사전들은 모두 “믿음”이란 항목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RAC 11, 1979, 48-122; TRE 13, 1984, 275- 365; EKL 2, 1989, 186-205; LThK 4, 1995, 666-92; 4RGG 3, 2000, 940-85).
4) W. Bousset and H. Greßmann, Die Religion des Judentums im späthellenistischen Zeitalter (Tübin- gen: Mohr, 1926), 388, 193
III. 신약의 주요 증인들이 증거하는 믿음
1. 바울의 믿음 이해
신약성서 최초의 저자인 바울은 “믿음”(pi,stij)이란 개념을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했다. 이로써 그가 이 단어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 다. 실상 믿음은 바울이 선포하는 메시지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용어이다.5)바울은 이 개념을 인간의 종교적 심성이나 경건한 자세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 용하지 않고, 구원을 향한 예수의 길과 인간을 정죄하는 율법의 길을 구분하는 문맥에서 즐겨 사용한다. 믿음과 행위를 대립시키는 가운데, 이 두 용어를 통해 서 로 다른 두 가지 삶의 상황을 묘사하고자 한다. 한편에는 죄와 율법, 심판과 사망 이 있는 반면, 다른 편에는 의와 그리스도, 은혜와 생명이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 로 믿음은 바울신학의 핵심 개념을 이룬다.6)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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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바울은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당시 유대교에 널리 성찰되던 개념을 수용한다. 예컨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모세를 자기 동시대인에게만이 아니라 후대의 모든 세대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심은 사람으로 이해하면서 하나님 신앙에 의해 인도되는 경건하며 의로 운 인생의 모범으로 소개한다(Ap. II, 169). 필로(Philo)는 믿음을 지혜와 동일시하면서 지상적 인 것들에 대한 신뢰와 대립시킨다(All. II, 89). Sir 2:1-14는 믿음에 대한 찬양시로서 시련 중 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강조한다. 마카베오4서는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태도로서 믿음 에 대해 언급한다(4Makk 4:7; 7:19, 21; 8:7; 15:24; 16:22; 17:2 등); cf. syrBar 54:5; 4Esr 13:23
1) 복음에 근거한 믿음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본질은 심리학적인 차원과 관련된 인간의 마음상태에 있지 않고, 믿음의 대상이 되는 케리그마, 즉 복음선포와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한 마디로, 믿음은 복음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고 복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시 말 하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에 대한 사도적 복음선포에 근거한다(cf. 고전 15:1ff). 따라서 믿음은 “오는 것”(evlqei/n 갈 3:23) 이고, 복음선포를 통해, 즉 케리그마를 들음으로써 성장하는 것이다(h` pi,stij evx avkoh/j 롬 10:17). 이런 시각에서 바울은 “믿음의 들음”(avkoh. pi,stewj 갈 3:2, 5) 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이때 들음은 케리그마를 기꺼이 받아들임을 뜻하며, 자기 자신을 들은 것 아래에 내어맡김을 뜻한다. 따라서 바울은 “믿음의 순종”(u`pakoh. pi,stewj 롬 1:5)이란 표현도 사용한다. 이렇게 보면, 바울의 믿음 이해는 복음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복음에 종속된다는 점이 분명하다. 복음이 선포되고 들려지는 곳에서만 믿음의 응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 는 은혜의 선물이다(cf. 빌 1:29). 믿음은 복음선포에 근거할 뿐만 아니라, 선포된 복음 그 자체를 내용으로 가지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11절은 그와 같은 사실을 반영한다(ou[twj khru,ssomen ou[twj evpisteu,sate “우리가 이같이 선포하매 너 희가 이같이 믿었느니라”). 따라서 바울은 믿음을 “복음에 대한 믿음”(pi,stij tou/ euvaggeli,ou 빌 1:27)이라 부를 수 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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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Cf.O.Hofius,Paulusstudien,154.그러나G.Friedrich는빌1:27의표현pi,stij tou/ euvaggeli,ou을 “복음이 영향을 끼치는 믿음”으로 해석한다(Der Brief an die Philipper, Göttingen, 1985, 146)
2)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리킨다(살전 1:8h` pi,stij u`mw/n h` pro.j to.n qeo,n). 그러한 믿음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 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뜻한다(롬 4:17b). 그것은 구약 및 유대 전통적인 신앙고백과 다르지 않다(예컨대, 신 32:39; 삼상 2:6; 지혜서 16:13; Shmoneh Esreh의 제2기도).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무엇보 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리킨다(롬4:24; 8:11; 10:9).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을 향한 자신의 구원활동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 을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동시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pi,stij eivj Cristo,n)을 내포한다.8)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복음선포의 말씀은 십자가에 죽으신 분의 부활을 통해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 에 대한 믿음은 로마서 10장 9절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 다: “네가 만일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 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에 드러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님의 구원 사역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임을 강조한다. 바울의 기독론이 신 론과 직결되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 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본질적으로 같다. 이 경우 하나님 혹은 그리스 도 자신이 믿음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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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pi,stij Cristou/”라는 표현(갈 2:16c; 빌 3:9; cf. 롬 3:22; 갈 2:16a;3:22; 롬 3:26; 갈 2:20)은 주어적 소유격(Gen. subj.)이 아니라 목적어적 소유격(Gen. obj.)으 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와 같은 사실은 예컨대 갈 2:16에서 바울이 di.a pi,stewj vIhsou/ Cristou/를 eivj Cristo.n vIhsou/n evpisteu,samen이란 표현으로 다시 설명하는 데서 분명 히 드러난다. Cf. O. Hofius, Paulusstudien, 154f, 각주 51.
3)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서의 믿음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를 뜻한다. 이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동사 !ma의 히필(hiphil)형 ‘헤에민’(!ymah)과 일치한다.9) 이 믿음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뜻한다(cf. 창 15:6; 출 14:31; 민 14:11; 20:12; 신 1:32; 사 28:16; 53:1; 시 116:10등).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믿는 자의 전형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 이 인간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일말의 소망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에서도 바라고 믿 었기 때문이다(롬 4:18). 즉, “그가 백 세가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 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 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롬 4:19-21).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 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을 확신하는 소망으로 아브 라함의 믿음을 이해한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바로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상응한다(롬 4: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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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인 믿음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인간학적 관심은 대체로 하나님 중심적 관찰 배후에 나타날 뿐이다. 구약 및 유대적 의미의 믿음/신뢰에 대해 예컨대 A. Weiser, ThWNT 6, 182-218; H. Wildberger, ThWAT 1, 187-93을 참조하라
4) 칭의 신앙으로서의 믿음 / “율법의 행위”와 대립된 믿음
pi,stij는 바울서신 중에서도 특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집중되어 나타난 다. 로마서에 나오는 35구절 중 27구절,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21구절 가운데 18구 절이 칭의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서 바울의 “믿음” 개념은 하나님의 의가 갖고 있는 은혜의 성격을 강조하는 칭의론 문맥에 속한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바울이 믿음을 강조한 것은, 구원을 향한 예수의 길과 인간을 정죄하는 율법의 길 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믿음을 “율법의 행위”(e;rga no,mou)와 대립시키거나(롬 3:28; 9:32; 갈 2:16) 행위의 원리로 이해된 “율법”(no,moj)과 대립 시킨다(롬 3:21f; 갈 3:12; 빌 3:9).10)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윤리적 실천의 차원을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다.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훨씬 앞선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며 따라서 시내 산 율법이 수여되기 전 시대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유대 전승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뜻을 완 전히 파악하여 철저하게 순종한 사람으로 여겼다. 따라서 창세기 15장 6절에 나오는 관심은 대체로 하나님 중심적 관찰 배후에 나타날 뿐이다. 구약 및 유대적 의미의 믿음/신뢰에 대해 예컨대 A. Weiser, ThWNT 6, 182-218; H. Wildberger, ThWAT 1, 187-93을 참조하라.10) 바울의 “e;rga no,mou” 이해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다. 예컨대, U. Schnelle, Einleitung in das NT (Göttingen: V.&R., 31999), 120ff를 보라. 바울은 no,moj 개념의 내용과 범위와 의미를 정의내리지 않으나, 그 개념을 사용할 때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으로서의 “토라”와 그 에 합당한 해석을 염두에 두었으며 당시 헬레니즘적 유대교의 경우처럼 윤리적 계명과 제 의적 계명을 서로 구분하지 않았다(cf. E. Lohse, Der Brief an die Römer (Göttingen: V.&R.,2003), 210).
“믿음”을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을 때 보여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 종으로 해석했다(1Makk 2:52; 4QMMT). 이런 시각에서 고대유대교는 아브라함 을 경건한 자의 모범으로 이해했다(Sir 44:19-21; Philo, Virt. 216). 그의 삶은 행위 를 통해 보여준 순종의 삶을 입증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아브라함의 행위는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실행한 의로운 삶으로 여겨졌고, 그의 “믿음”은 하나님으로 부터 인정을 받은 여러 공적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었다(cf. Jub 23:10). 같은 선상에 서 하박국서 2장 4절에 대한 (쿰란)에센파의 주석을 담은 1QpHab 7:17-8:3에 따르 면, 하나님은 에센파의 설립자 의의 교사에 대해 순종하며 그가 요구하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자를 구원하리라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에 대한 이러한 유대 전통적인 시각에 반대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새롭게 해석한다(롬 4:3). 그리하 여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창세기15장 6절의 진술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믿음 가운데 아브라함은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의탁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그 무엇보다도 신뢰하였기 때 문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의 이러한 관계가 의로 간주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는 동시에 율법의 행위를 통한 길은 구원의 길이 아님을 뜻 한다. 결국, 바울에게 구원의 은사인 하나님의 의는 ‘믿음을 통해 주어진 의’를 뜻 한다(롬 1:17; 5:1; 9:30; 10:6; 14:23; 갈 3:7ff. 22. 24; 5:5; dia. pi,stewj 롬 3:31; 갈2:16; 3:14. 26; 빌 3:9).11)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칭의 신앙과 다르지 않으며 행위의 원리로 이해된 율법과 대립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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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바울의 “e;rga no,mou” 이해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다. 예컨대, U. Schnelle, Einleitung in das NT (Göttingen: V.&R., 31999), 120ff를 보라. 바울은 no,moj 개념의 내용과 범위와 의미를 정의내리지 않으나, 그 개념을 사용할 때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으로서의 “토라”와 그 에 합당한 해석을 염두에 두었으며 당시 헬레니즘적 유대교의 경우처럼 윤리적 계명과 제 의적 계명을 서로 구분하지 않았다(cf. E. Lohse, Der Brief an die Römer (Göttingen: V.&R.,2003), 210).
11) 케제만은 로마서 주석에서 롬 3:21-4:25의 표제를 “믿음의 의로서의 하나님의 의”로 삼으면 서 그 점을 강조했다(An die Römer (Tübingen: Mohr, 41980), 85)
5) 기독교적인 삶의 특징으로서의 믿음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규정짓는 특징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 가운데 구원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따라서 믿음은 “구원 영접과 구원 참여의 양태”(O. Hofius)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리켜 갈라 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 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cf. 갈 5:5f; 롬 14:22f; 고전 13:13). 이러한 믿음에는 연약하고 부족한 믿음이 있는 가 하면(롬 14:1; 살전 3:10), 진보하고 성장하는 믿음도 있다(빌 1:25; 고후 10:15).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적 삶의 특징인 믿음은 사랑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드러난다(갈 5:6). 또한 바 울은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가리켜 ‘보는 것 안에서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행하는 삶’(고후 5:7)으로 이해한다. 이에 걸맞게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 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말한다(cf. 고후 4:18). 즉, 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구원에 대해 인식하는 것은 부분적일 뿐이고, 미래 종말론적인 완성이 이루어 질 때 비로소 온전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한다.
2. 요한의 믿음 이해
믿음은 요한신학의 중심 주제에 속한다.12) 그것은 “믿으라”는 권면과(요 6:29; 12:36; 요일 3:23) 믿는 자를 위한 약속의 말씀이(요 6:35, 40, 47; 7:37, 38a; 11:25f; 12:44-46; 14:12; 요일 5:1; 10, 13)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를 관통하여 나타나는 데 서 드러난다. 이에 걸맞게 요한복음 20장 31절은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을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 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밝힌다. 또한 기독교 구원관을 요약하 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따르면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것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고 강조한다.
흥미롭게도 요한복음에는 명사 pi,stij가 전혀 사용되지 않고, 동사 pisteu,ein만 98회 나타난다. 신약성서 중 바울서신을 제외하면 요한복음에 이 동사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 또한 요한일서에는 명사형이 한 번 나오는 것을 제외하면(5:4) 역 시 동사형으로만 9회 나타난다. 동사형이 집중적으로 사용되는 사실에서 이 단어 가 요한신학에서 역동적인 관계를 나타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관복음에서 pisteu,ein이 하나님이나 예수의 권세 내지는 청원기도의 응답에 대한 개별적인 신뢰 행위를 강조하는 것과 달리, 요한의 경우에는 인격과의 결합을 통한 신뢰가 특징적이다.13)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주로 세 가지 방식으로 pisteu,ein이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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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경우는전치사eivj와함께사용되면서믿는대상과의인격적신뢰를드 러낸다. 그리하여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요 14:1 eivj to.n qeo.n), 예수를 보 내신 분을 믿는 것이며(6:29; 12:44 eivj to.n pe,myanta, me), 예수를 믿는 것이며(7:39; 12:11 eivj to.n Ihsou/n), 아들을 믿는 것이며(3:36 eivj to.n ui`o.n), 인자를 믿는 것이며(9:35 eivj to.n ui`o.n tou/ avnqrw,pou), 빛을 믿는 것이다(12:36 eivj to. fw/j). 이때 믿음의 내용은 예수가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 들”이시며(요 11:27),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20:31), “하나님 이 그리스도를 보내셨으며”(11:42; 17:8, 21), “그리스도가 아버지 안에 그리고 아 버지가 그 안에 계시며”(14:10),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셨다”(16:30; 17:8)는 사실을 가리킨다.
두 번째 경우는 접속사 o[ti를 통해 믿어야 할 대상을 제시한다 (6:69 o[ti su. ei= o` a[gioj tou/ qeou;/ 10:38; 11:27, 42; 13:19; 16:27; 17:8; 20:31;요일 5:1, 5 등). 세 번째 경우는 pisteu,w 동사가 여격형 목적어와 함께 사용되는 것으로 특별히 요한적인 용법에 해당한다(요 5:24, 38, 46; 8:31, 46 등). 가끔 아 무 수식어가 붙지 않는 절대적인 용법으로도 사용된다(요 6:47, 64; 19:35;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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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요한의 믿음 이해와 관련하여: R. Bultmann, pisteu,w..., ThWNT VI, 224ff; idem, 『신약성서 신학』, 허혁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81), 434-59; R. Bergmeier, Glaube als Gabe nach Johannes(1980); F. Hahn, “Sehen und Glauben im Johannesevangelium,” in NT und Geschichte, ed. H. Baltensweiler/B. Reicke (FS O. Cullmann), 1972, 125-41; idem, “Das Glaubensverständnis im Johannesevangelium,” in Glaube und Eschatologie, FS W. G. Kümmel, ed. E. Gräßer and O. Merk, 1985, 51-69; H. Schlier, “Glaunen, Erkennen, Lieben nach dem Johannesevangelium,” in idem, Besinnung auf das NT, 21964, 264-71; J. Zumstein, “Das Johannesevangelium: Eine Strategie des Glaubens”, ThBeitr 28, 1997, 350-63; F. Hahn, 『신약성서신학 I』 (서울: 대한기 독교서회, 2007), 740-756; 김문경, 『요한신학』 (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2004), 127-53.
13) F. Hahn, 『신약성서신학 I』, 740
1) 믿음과 따름
요한복음에는 “따름”을 뜻하는 동사 avkolouqei/n이 모두 19번 사용된다. 그 중 17번이 예수를 따르는 것과 관련된다. 백성의 무리가 예수를 따르는 경우가 한 번 나오고(요 6:2), 나머지 16번은 제자들과 관련된다(요 1:37, 38, 40, 43; 8:12; 10:4, 5, 27; 12:26; 13:36a,b, 37; 18:15; 21:19, 20, 22). 이 동사는 공관복음서에 사 용된 것보다(마태, 마가, 누가에 각각 5번) 압도적으로 요한복음에 많이 사용된다. 공관복음서의 경우, 예수를 “따름”(avkolouqei/n)이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규정하 고 제자 됨의 토대를 이루며, “믿는 것”은 사람들의 개별적인 신뢰 행위와 직결된 다. 그와 달리 바울의 경우,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규정하는 방식으로서 따 름을 대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요한에게서는 믿음과 따름의 내용이 서로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 점이 예컨대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예수께 나아가는 자 (o` evrco,menoj pro.j evme). , 즉 예수를 따르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하며, 예수를 믿는 자(o` pisteu,wn eivj evme). 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생명 의 떡인 예수께 나아가는 자와 예수를 믿는 자가 평행 구조 속에서 동일시되고 있 다. 또한 요한복음 8장 12절의 경우 세상의 빛인 예수를 따르는 자(o` avkolouqw/n evmoi). 는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한다. 여기서 예수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는 자, 곧 믿는 자를 가리킨다.
2) 믿음과 들음,봄,앎
요한복음에서 “들음”(avkouei/n)은 단순히 청각적인 인지를 넘어서 예수의 말 씀을 순종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요한복음 18장 37절에 드러나듯 이 진리에 속한 자, 곧 믿는 자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뜻한다. 반면 유대 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요 8:43). 그들이 예수의 말씀에 순종 하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다(요 8:45-46). 의도적으로 청각적 인지와 믿음의 수용, 두 가지를 함께 담고 있는 경우도 있다(예컨대, 요 5:25; cf. 5:28). 목 자와 양의 비유를 통해서도 설명한다. 양들은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요10:27; cf. 10:3, 16). 여기서 양은 진리에서 난 자로서 예수의 말씀을 듣는 자이며 예수를 따르는 자이다. ‘목자의 음성을 듣는 자’는 곧 예수를 믿는 자이다. 이처럼 요한의 경우 “듣는 것”(avkouei/n)은 “믿는 것”(pisteuei/n)과 동일하다.
그런데 “믿는 것”은 “보는 것”(o`ra/n, ble,pei/n, qewrei/n)과도 밀접하게 연결 되어 있다. 이 점은 무엇보다 요한복음 12장 44절에서 45절에 잘 나타난다: “44나 를믿는자는나를믿는것이아니요나를보내신이를믿는것이며45나를보는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두 문장이 평행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에서 “믿 는것”과“보는것”이하나임을알수있다.14) 여기서“보는것”은신앙가운데이 루어지는 영적인 인지 혹은 신앙적인 인지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 의 영광이 예수의 사역에서 발현하고 있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뜻한다. 그것은 요 한 특유의 어법이다. 또한 신앙 고유의 인식인 “보는 것”은 “아는 것”(ginw,skein) 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와 같은 점이 예컨대 요한복음 14장 7절 혹은 요한복 음 14장 17절에 잘 나타난다.15)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세상은 보혜사인 진리의 영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제자들은 그가 길이 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믿음을 통해 안다. 예수를 보는 것과 아는 것은 믿는다 는 차원과 동일하다. 따라서 요한문서에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나온다(요 6:69; 8:31-32; 10:38; 17:8; 요일 4:16).
들음과 봄과 믿음의 밀접한 관계는 요한서신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예컨대,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3절은, 저자가 선포하는 것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한것으로우리가들은바요눈으로본바요자세히보고우리의손으로만진것”과 일치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가 듣고 보고 만진 것”은 감각적인 인지 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깨닫는 인식을 뜻한다. 이 구절에 드러나듯 이 “듣는 것”과 “보는 것”은 같은 차원의 묘사로서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일치한다. 요약하면, 요한문서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avkouei/n)과 예수를 “보는 것”(qewrei/n) 혹은 예수를 “아는 것”(ginw,skein)은 서로 밀접히 연 결되거나 교체될 수 있는 개념으로서 “믿는 것”(pisteuei/n)과 같은 뜻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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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또한요6:40;cf.요1:14.50-51;14:19;16:16.Cf.H.Wenz,“SehenundGlaubenbeiJohannes”,ThZ 17 (1961), 17-25; K. Lammers, Hören, Sehen und Glauben im NT (Stuttgart: Kath. Bibel- werk, 1966); Hahn, “Sehen und Glauben im Johannesevangelium,” in NT und Geschichte (FS Oscar Cullmann), 1972, 125-41.
15) 그 밖에도 요 14:9와 요일 3:6; 또한 요 5:37과 8:55; 요 6:46과 17:25를 비교하라
3) 은혜로 선사된 종말론적 실존으로서의 믿음
믿음은 세상적인 척도들과 판단에 근거하여 지금까지 구축해 놓은 자기 이해 를 완전히 버릴 것을 요청한다. 세상과 대립된 결단으로서의 믿음은 탈세계화를 뜻 하고, 그것은 곧 종말론적인 실존으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16) 믿는 자는 세상 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세상적 존재를 넘어선 자이다. 신약성서 저자 가운데 요 한이특히이점을강조한다.요한의경우,믿는다는것은이세상에속해있으면서 이미 역사의 끝 종말에나 체험하게 될 차원을 이미 이 세상에서 체험하는 것을 뜻 한다. 따라서 믿는 자는 세상 안에 있으면서 이미 세상에 속해 있는 존재가 아니며 (요 17:11, 14, 16), 이미 심판을 극복하고 생명으로 넘어간 존재이고(3:18; 5:24f ), 죽음을 넘어서 이미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요 8:51; 11:25f; 3:36; 6:47; 요일5:12). 이처럼 변화된 차원을 가리켜 요한일서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 치고 있다”(2:8)고 말한다. 한마디로, 믿는 자는 죄와 사망과 어둠의 권세가 지배 하는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최후 종말에 얻게 될 영생의 삶에 현재 참여하고 있는 종말론적 실존의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cf. 요3:15-16).17) 결국,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믿는 자들을 영생으로 인 도하는 종말론적 실존을 가능하게 한다고 확신한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 역시 바 울처럼 믿음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로 이해했음이 분명하다(cf. 요 7: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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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Cf. R. Bultmann, Theologie des NT, 428: “믿음은 세상에서의 전환이고 탈세계화의 행위(Akt der Entweltlichung)이며 피상적 안전과 거짓된 삶의 포기이고 보이지 않는 것과 마음대로 이 용할 수 없는 것에 의해 기꺼이 살려는 것이다. 즉, 생과 사가 뜻하는 것에 관한 전적으로 새 로운 척도들을 받아들이고 예수가 제공하며 예수와 동일한(요 5:19ff; 11:25f) 세상에서 증명 될 수 없는 생명을 과감하게 영접하는 것이다.”
17) 요한문서는 현재 종말론적 사고를 강조한다(요 3:13-21, 31-36; 12:44-50; 5:20-29; 요일3:14). 현재를 구원의 시대로 규정짓는 요한의 종말론을 가리켜 C. H. Dodd는 “실현된 종말 론”(realized eschatology)이라 불렀다. 요한의 종말론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다. 불트만은 요6:39, 40, 44, 45와 같은 미래 종말론적 진술을 후대 교회의 첨가로 간주했다(“Die Eschatolo- gie des Johannes-Evangeliums,” in Glauben und Verstehen I, Tübingen, 1933, 134-52). 그러나 요 한신학의 범주 안에 미래 종말론적 진술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여러 학자들이 강조한다:L. Goppelt, Theologie des NT, 640-43; C. K. Barrett, Das Evangelium nach Johannes, Göttingen, 1990, 83-86; J. Frey, Johanneische Eschatologie III (Tübingen: Mohr, 2000), 85-87; F. Hahn,『신약성서신학 I』, 778-83; K. Wengst, Johannesevangelium I, 202f; U. Schnelle, Theologie des NT(Göttingen: V.&R., 2007), 706f. 그러나 J. Becker는 그러한 입장에 반대한다(“Die Hoffnung auf ewiges Leben im Johannesevangelium,” ZNW 91, 2000, 192-211).
3. 히브리서의 믿음 이해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대제사장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기독론을 표방하는 일 종의 신학적 논설 혹은 구약성서 여러 구절을 해석한 설교문으로 간주되는 히브리 서18)는 이미 박해를 체험했으며 머지않아 닥칠 새로운 고난에 직면하여(히 10:32- 36; 12:4; 13:3) 믿음을 저버릴 위험에 처한 교인들에게 위로와 권면을 하기 위해 제2세대에 속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히 2:3). 이 문서에는 명 사 pi,stij가 32번 나타나는데, 그 중 11장에만 24번 사용된다. 거의 전적으로(31번) 수식어가 따라 붙지 않는 절대적인 용법으로 사용된다(히 6:1만 예외). 그와 달 리 동사 pisteu,ein은 단지 2번만 사용된다(히 4:3; 11:6). 이처럼 절대적 용법의pi,stij가 강조되고 있는 것 외에도 믿음에 대한 정의가 히브리서 11장 1절에 나타 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믿음”이 히브리서에서 중요한 주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 다.19) 이런 의미에서 오토 쿠스(O. Kuss)가 히브리서를 가리켜 “믿음의 신학”을 보여주는 문서로 이해한 것은 정당하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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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이미 Ed. Reuß는 히브리서를 가리켜 “기독교 신학 일반에 관한 최초의 체계적 논문”이라 불렀다(Die Geschichte des heiligen Schriften Neuen Testaments, 61887). A. Vanhoye, O. Michel, Pokorny/Heckel 등은 “설교”로 이해한다.
19) E. Grässer, Der Glaube im Hebräerbrief (Marburg: Elwert, 1965); G. Dautzenberg, “Der Glaube im Hebräerbrief,” BZ N.F. 17 (1973), 161-77; D. Lührmann, “Pistis im Judentum,” ZNW 64 (1973), 19-38; idem, Glaube im frühen Christentum (Gütersloh: Gütersloher, 1976), 70-77;J. W. Thompson, “Faith in Hebrews,” idem, The Beginnings of Christian Philosophy, 53-80; K. Haaker, “Der Glaube im Hebräerbrief und die hermeneutische Bedeutung des Holocaust,” ThZ39 (1983), 152-65; M. Rissi, Die Theologie des Hebräerbriefes, Tübingen, 1987, 104-13; E. Bran- denburger, “Pistis und Soteria: Zum Verstehenshorizont von Glaube im Urchristentum,” ZThK85 (1988), 165-98.
20) O. Kuss, “Der theologische Grundgedanke des Hebräerbriefes,” MThZ 7 (1956), 257; cf. P. P. Saydon, “The Master-Idea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MTh 13 (1961), 19-26.
1) 권면의 문맥에 나타나는 믿음
명사형 pi,stij가 32번 절대적 용법으로 사용되는 가운데, 히브리서 6장 11절 (pi,stewj evpi. qeo,n)은 단 한 번 목적어를 동반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여기서 특 이한 점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cf. 히11:6). 이에 걸맞게 히브리서의 믿음 이해는 바울이나 요한의 경우와 크게 차이가 난다. 바울이나 요한의 믿음 이해가 주로 기독론과 관련된 것과 달리, 히브리서의 믿음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을 강조하는 기독론의 문맥이 아니라 신앙공동 체를 향한 권면의 문맥에 나타난다(히 3:7-4:13; 5:11-6:20; 10:19-13:17).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히브리서는 기독론적인 진술과 권면의 진술을 교대로 전하는 특 징을 갖고 있으며(히 2:1-4; 3:7-4:11; 4:14-16; 5:11-6:12; 10:19-39; 12:1ff; 12:12ff; 13:1ff), 또한 자신을 “권면의 말”(lo,goj th/j paraklh,sewj 히 13:22)로 이해한 다. 히브리서의 믿음 이해가 권면의 문맥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히브리서가 고난 가운데 있는 신앙공동체를 향해 쓴 문서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cf. 히 10:32- 36; 12:4; 13:3).
2) 오래 참음, 인내, 소망으로서의 믿음
히브리서는 믿음의 주체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믿음은 “오래 참음”(makroqumi,a 6:12, 15)과 나란히 나타나며 “인내”(u`pomonh, 10:36; 12:1)와 동일 시되고 있다. 히브리서 6장 12절(“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 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에서 믿음 은 오래 참음과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다(cf. 히 6:15). 또한 히브리서10장 36절에서 39절에 “인내”가 믿음과 관련하여 나타난다. 여기서 “인내”는 수동 적인 참아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담대한 인내라는 의미에서21) “종말론적 소망의 능력”을 나타내는 순수 기독교적인 모티브이다.22)
그 래서 인내로서의 믿음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큰 상(mega,lh mistapodosi,a)을 얻 는 일”, 즉 “약속(evpaggeli,a)을 받는 일”과 직결된다(히 10:35-36). 또한 히브리서12장 1절에서 2절의 경우, 예수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로 불리는 가운데, 신자들의 믿음은 인내를 통한 경주에 비유된다(diV u`pomonh/j tre,cwmen to.n prokei,menon h`mi/n avgw/na). 그리고 히 10:22-23에서는 믿음이 ‘소망을 향 한 고백을 굳게 잡는 것’(kate,cwmen th.n o`mologi,an th/j evlpi,doj avklinh/)으 로 이해된다. 이렇게 보면, 히브리서에서 믿음과 인내와 소망은 서로 긴밀하게 연 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한마디로 히브리서에서 믿음은 “본질적으로 소망 의 구조”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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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그러한 의미의 “인내”는 그리스·로마 문화권에 나타난다. 예컨대, 키케로(Cicero)는 인내 를 “정직과 유용성 때문에 어려운 일들을 자발적으로 지속적으로 참아냄”을 뜻하는 것으로 설명한다(Inv. 2,54,163).
22) E. Grässer, An die Hebräer III, 73.
23) Cf. F. 한, 『신약성서신학 I』, 503.
3) 확실성과 증거로서의 믿음
믿음이 소망의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 나오는 믿음에 대한 정의( ;Estin de. pi,stij evlpizome,nwn u`po,stasij, pragma,twn e;legcoj ouv blepome,nwn)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신약성서 중 믿음에 대한 유 일한 정의를 담고 있는 이 구절은 히브리서의 믿음 이해와 관련하여 많은 논란을 낳았다. 이미 종교개혁자들도 이 구절에 관심을 보였다. 칼빈(J. Calvin)은 이 구절 을 “믿음은 드러나지 않은 것들의 드러남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봄이요, 어두운 것의 밝아짐이요,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함이요, 감춰진 것의 나타남”으로 해석 했다.24) 루터(M. Luther)는 자신의 히브리서 강해에서 u`po,stasij를 다양한 개념 으로 해석했다: Substanz(실체), Ursache(원인), Grunlage(토대), Wesenheit(본질),Besitz(소유), Vermögen(능력). 그러면서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람들 이 가정하듯이, 소망해야만 하는 것들이 실재가 아니라면, 믿음은 그것들에 실재를 부여한다. 더 나아가 그것[=믿음]은 그것들에게 실재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것 이 그것들의 존재 자체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부활은 현실 속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나, 소망은 그것을 우리의 영혼 속에서 실재로 만든다.”25) 이런 시각에서 루터는 믿음을 일종의 감정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면서, 히브리서 3장 14절과 11장1절에 나오는 u`po,stasij를 “zuuorsicht”(= 확고한 신뢰)로 번역했다.
u`po,stasij를 철학적 전통에서 발전된 개념인 “실재”(Wirklichkeit)로 번역하 려는 시도가 여전히 확산되어 있다. 예컨대, 쾨스터(H. Köster)는 히브리서 1장 1절 에 나오는 u`po,stasij evlpizome,nwn을 본질상 저세상에 속한 “바라는 보화들의 실재”로 해석했고, 바우어·알란트의 『신약성서사전』 제6판도 그러한 해석을 따 르고 있다.26)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이미 고펠트(L. Goppelt)가 지적했듯이,27) 히브 리서의 종말론을 고려할 때 문제가 있다. 히브리서 저자에게 믿음이란 바라는 것이 완전히 성취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바라는 것들의 미래적 완 성의 실재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하늘 의 안식처(kata,pausij 히 4:1,3,10,11), 하늘의 선물(evpoura,nia 히 6:4; 9:23), 하 늘의 예루살렘(히 12:22)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u`po,stasij는 소망하는 것에 대한 “확실성” 혹은 “보증”이라고 말할 수 있다.28) 이는 평행 구조 속에 나오는 “증거”
(e;legcoj)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두 개념(u`po,stasij,e;legcoj)은 믿음에 대한 주관적인 행동 양식을 드러내는 개념이 아니라 믿음의 객 관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 에 대한 두 가지 특징을 나타내는 진술로 파악해서는 아니 되고, 믿음의 영향을 나 타내는 하나의 역설적인 진술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29)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 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며 동시에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의 표현이다. 믿음에 관한 이러한 정의는 신론적이거나 기독론적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인간론 적이다. 믿음은 그 자체 안에 이미 객관적 확실성을 갖고 있으므로 믿음의 대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동요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신앙공동체에게 권면하는 문맥(히 10:19 이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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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Institutio III 2,41. Cf. P. Brunner, Vom Glauben bei Calvin, (1925), 162.
25) Scholien 해당 부분(= WA 57,3, 1939, 228). O. Michel, Der Brief an die Hebräer, 379에서 재 인용.
26) H. Köster, “u`po,stasij”, THWNT VIII, 585; Bauer/Aland, Griechisch-deutsches Wörterbuch zu den Schriften des NT und der frühchristlichen Literatur, Berlin/New York, 1988, 1688.
27) L. Goppelt, Theologie des NT, 598.
28) Cf. O. Kuss, Der Brief an die Hebräer, Regensburg, 1966, 165(“Stehen”); H. -F. Weiß, Der Brief an die Hebräer, Göttingen, 1991, 559(“Befestigung”); E. Grässer, An die Hebräer III (Neukirchen- Vluyn: Neukirchener, 1997), 96(“Feststehen”); 가톨릭 『성경』 (2005) 히 11: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9) E. Grässer, An die Hebräer III, 94.
4. 야고보서의 믿음 이해
복음적 성격을 갖고 있지 않은 “지푸라기 문서”라는 루터의 혹평과 달리 오늘 날 야고보서는 초기 그리스도교 지혜 전통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담은, 특히 헬레 니즘적 유대 그리스도교의 유산을 물려받은 문서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리스 도교 2~3세대에 속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디아스포라에 흩어져 있는 전체 그리스 도인들을 위해 기록한 문서로 간주되는 야고보서에는 하나로 통일된 믿음 이해가 나타나지 않고, 믿음과 관련된 다양한 진술이 나타난다.30) “영광의 주인 예수 그리 스도에 대한 믿음”(약 2:1)에 대해 언급하는가 하면, “의심하지 아니 하는 믿음”(약1:6)에 대해, 또는 “믿음의 기도”(5:15)에 대해 말한다. 야고보서 1장 2절에서 4절 에선 시련이 믿음의 검증수단으로 언급되면서 시련은 인내를 만들고, 인내는 온전 한 행위를 낳는다고 말한다. 믿음과 인내가 히브리서의 경우처럼(cf. 히 6:12, 15) 나란히 나온다. 또한 야고보서 2장 5절에서는 가난한 자들이 “믿음에 부요한” 자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가난을 미화하고 있는 진술이 아니다. 신앙인은 가난에도 불 구하고 믿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마치 시험을 당하는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약 1:2)과 유사한 진술이다.
야고보서의 믿음 이해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단락은 믿음과 행위의 관 계를 다룬 야고보서 2장 14절에서 26절이다. 이 단락은 교회에 들어온 신참자가 믿음이 갖고 있는 구원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도록 권면할 목적에서 나온 진술로 보 인다.31) 여기서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 사람이 의로워지고 구 원받게 되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행함에 의한 것이며(약 2:14, 17, 24, 26), 행함으로 믿음이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논지를 표방한다(약 2:22). 이러한 입장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바 울의 가르침과 충돌하는 듯하다(갈 2:16; 롬 3:28).
그런데 바울과 야고보서가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간 과할 수 없다. 바울이 언급하는 “율법의 행위”(e;rga no,mou 갈 2:16; 3:2, 5, 10; 롬3:20, 28)는 온전한 삶을 위해 토라가 요구하는 할례 계명이나 절기 계명 혹은 정결 법 등을 행하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예수의 구원 의미에 비추어 그러한 것들을 더 이상 하나님 앞에 해당하는 의의 조건으로 여기지 않는다. 반면 야고보서가 말하는“행함”은 레위기 19장 18절에서 유래한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행위를 뜻하 거나(약 2:8), 또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에게 행하는 선행(약 3:13), 예컨 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과(약 1:27)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자매를 돌 보는 일을 뜻한다(약 2:15-16; 3:13). 사실상 바울 역시 자선 행위를 강조한다는 점 에서는 야고보서와 다르지 않다. 바울 역시 이웃 사랑을 토라의 성취로 여길 뿐만 아니라(갈 5:14; 롬 13:9),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모금을 “착한 일”, 즉 선 한 행위(e;rgon avgato,n 고후 9:8)로 부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아니 되는 점은, 바울은 토라가 요구하는 행위가 구원의 차원을 담고 있다는 사실 을 거부하고 있으며, 그가 말하는 믿음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 역사하는 믿음이라 는 것이다(갈 5:6; cf. 롬 13:8-10).
바울과 야고보서 사이에 나타나는 입장 차이는 각자가 대면한 전선이 서로 다 르다는 사실과 직결된다. 바울의 행위 개념은 칭의론을 둘러싼 논쟁에서 사용된 것 으로 구원론적이며 교회론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비롯된 개념인 반면, 야고보 서의 행위 개념은 신앙 공동체를 위한 권면의 문맥에서 기독교적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과 논쟁하는 가운데 이방 그리 스도인들을 교회의 온전한 성원으로 인정하기 위해 믿음을 그리스도인 됨의 유일 한 조건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야고보서는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 그에 합당한 행위 가 없이 맹목적 믿음 상태에 빠져있는 삶의 태도를 문제로 여긴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야고보서의 문제제기는 바울의 가르침이나 바울 자신을 직접 겨냥한 것이 아니 라, 바울 이후의 시기에 자라난 왜곡된 바울주의, 즉 바울적 칭의론의 형식화를 겨 냥한 비판으로 보아야 한다.32) 다시 말해, 야고보서는 바울의 칭의론 자체를 반박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공동체와 그리스도인에게 결핍된 기독교적 선행과 이웃사랑의 실천을 권면하는 문서이다.
바울은 믿음을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근본 행위로 이해하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인격적인 개념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믿음을 자기의 업적 에서 나온 부산물로 여기지 않는다. 바울 역시 믿음에서 나온 변화된 삶의 중요성 을 강조한다. 그러나 야고보서가 거론하는 믿음은 구원의 조건과는 무관한 순수한 지적 확신에 지나지 않으며, 단지 참된 것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뜻할 뿐이다. 따라 서 귀신도 한 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말할 수 있다(약 2:19). 그러한 믿음 은 삶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없이 그저 입술로만 외우는 죽은 믿음이고(약 2:17, 26) 아무 쓸모없는 허탄한 믿음(약 2:2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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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야고보서의 믿음 이해와 관련하여: H. Frankemölle, Der Brief des Jakobus (Würzburg, 1994), 222-31; E. Lohse, “Glaube und Werke - Zur Theologie des Jakobusbriefes,” ZNW 48(1957), 1-22; D. Lührmann, Glaube im frühen Christentum (Gütersloh: Gütersloher, 1976); R. Schnackenburg,Die sittliche Botschaft II, Freiburg u.a. 1988, 215-25; Th. Söding, “Zuversicht und Geduld im Schauen auf Jesus: Zum Glaubensbegriff des Hebräerbriefes,” ZNW 82(1991), 214-41.
31) Chr. Burchard, “Zu Jakobus 2:14-26,” ZNW 71 (1980), 27-45.
32) 그러나야고보서가직접바울과논쟁을벌이고있다고여기는사람도있다:M.Hengel,“Der Jakobusbrief als antipaulinische Polemik,” in Tradition und Interpretation in the NT, ed. G. F. Hawthorne, 1987, 248-78; M. Tsuji, Glaube zwischen Vollkommenheit und Verweltlichung, Tübin- gen, 1997, 202; F. Avemarie, “Die Werke des Gesetzes im Spiegel des Jakobusbriefes,” ZThK 98 (2001), 282-309.
IV. 결 론
우리는 위에서 신약성서의 믿음 이해에 관해 중요한 진술을 남긴 네 명의 저자가 증언하는 믿음의 의미와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다.
바울에게 믿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수용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이며, 행위의 원리로 이해된 율법과 대립된 칭의신앙을 뜻하며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규정짓는 개념이다.
요한의 경우 바울에게 특징적인 율법과 믿음의 대립구도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가운데, 믿음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며, 그러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뜻 한다. 동시에 요한은 믿음을 예수의 음성을 듣는 것, 그를 바라보는 것, 그를 아는 것과 동일한 차원으로 표현하면서 신앙의 눈으로 깨닫는 인식으로 이해한다. 나아가 요한은 믿음을 영생의 삶에 참여하는 현재 종말론적인 실존으로 이해한다. 이처 럼 바울과 요한의 믿음 이해는 믿음의 대상으로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 하면서 기독론적이며 구원론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특징을 지니며, 또한 양자 모 두 믿음을 은혜의 선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이와 달리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의 믿음 이해는 믿음의 대상보다는 오히려 믿음의 주체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믿음의 신학을 발전시킨 히브리서는 믿음을 기독론의 문맥이 아니라 고난에 처한 신앙공동체를 위한 권면의 문맥에 주로 언급한다. 이때 믿음은 오래 참음, 인내, 소망과 동일한 뜻을 지니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실성이자 증거로 이해된다.
야고보서 역시 믿음의 주체와 관련된 다양한 측 면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신앙고백의 믿음, 신뢰의 믿음, 기적의 믿음, 기도의 믿 음, 행함이 없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에 관해 말한다. 특히 야고보서 2장 14절에서26절에서 저자는 바울의 칭의론의 형식화를 비판하는 가운데 믿음을 구원의 조건 과는 무관한 지적 확신 정도로 이해한다. 믿음의 주체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의 믿음 이해는 이들 문서가 향하고 있는 수신자 교회가 처한 특별 한 상황과 맞물려 있다. 수신자 교회 상황이 믿음 이해에 끼친 사회적·공동체적 의미에 대한 연구는 다음 번 기회로 넘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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