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가 있는 골목 / 정호승
영등포역 골목에 비 내린다 노란 우산을 쓰고 잠시 쉬었다 가라고 옷자락을 붙드는 늙은 창녀의 등 뒤에도 비가 내린다 행려병자를 위한 요셉병원 앞에는 끝끝내 인생을 술에 바친 사내들이 모여 또 술을 마시고 비 온 뒤 기어 나온 달팽이들처럼 언제 밟혀 죽을지도 모르고 이리저리 기어다닌다 영등포여 이제 더 이상 술을 마시고 병든 쓰레기통은 뒤지지 말아야 한다 검은 쓰레기 봉지 속으로 기어들어가 홀로 웅크리고 울지 말아야 한다 오늘 밤에는 저 백열등 불빛이 다정한 식당 한구석에서 나와 함께 가정식 백반을 들지 않겠느냐 혼자 있을수록 혼자 되는 것보다는 혼자 있을수록 함께 되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 마음에 꽂힌 칼 한 자루보다 마음에 꽂힌 꽃 한 송이가 더 아파서 잠이 오지 않는다 도대체 예수는 어디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는가 영등포에는 왜 기차만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가
겨울 산길을 걸으며 / 정호승
겨울 산길 어린 상수리나무 밑에 누가 급히 똥을 누고 밑씻개로 사용한 종이 한 장이 버려져 있었다 나는 나를 앞질러 가는 사람들을 급히 따라가다가 무심코 발을 멈추고 그 낡은 종이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누구나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성경 말씀이 깨알같이 인쇄된 부분에 빛바랜 똥이 묻어 있었다 누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똥을 닦을 자격이 있었던 것일까 혹시 어린 아들과 추운 산길을 가던 젊은 엄마가 급히 성경책을 찢어 아들의 똥을 닦아준 것이 아니었을까 겨울 산길을 천천히 홀로 걸으며 나를 앞질러 가는 사람들을 모두 먼저 보내고 나는 지금부터라도 어린아이의 마음이 사는 마을로 가서 봄을 맞이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정호승 / 창비시선23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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