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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1일(산상 변모 주일)
누가복음 9:28~43
별세(別世)를 위한 기도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설교 주제: 예수님은 기도로 별세를 준비하셨다.
*설교 목적: 우리는 주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
오늘은 교회력 상, 주현절 후 여섯 번째 주일인 산상 변모 주일입니다. 주현절(主顯節)은 예수님의 생애를 기념하는 절기인데, 이 절기의 끝에는 산상 변모 주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부터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사순절(四旬節)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일생을 상징하는 교회력은 그리스도의 생애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고난과 죽음을 향해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8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과연 변화산(變化山) 사건이 있기 팔 일 전에 예수님께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때 제자들이 대답하였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고 부르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하나이다(19절).”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차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에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20절).”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침내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예고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는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때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산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그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문득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과연 모세와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모세는 애굽의 압제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여 백성들에게 율법을 전달했던 위대한 지도자가 아닙니까?
또 엘리야는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가장 영적인 암흑기라고 할 수 있는 아합왕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가 아닙니까? 구약시대를 상징하는 두 기둥은 율법과 선지자였습니다. 이 두 기둥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께서 깊이 기도하실 때에, 그의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깊이 졸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느라 얼마나 피곤했을까요?
깊이 졸고 있던 제자들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들은 영광스럽게 변화된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두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직관력이 남다르게 뛰어났던 베드로는 예수님과 대화하고 있던 두 사람이 모세와 엘리야인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33절).”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주님을 위해 초막 셋을 지어 바치겠다는 베드로의 말이 얼마나 대단하게 들리는지 모릅니다.
오늘날로 바꾸어서 말하면,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멋진 예배당 세 개를 지어 바치겠다는 정도의 대단한 표현이 아닙니까? 어떻게 베드로에게 이러한 충성스러운 마음이 있었을까요?
그런데 누가는 이 말을 어떻게 평가했나요? 누가는 33절 하 반절에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라는 해설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왜 성경은 주님을 위해 초막을 지어 바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의 고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셨을까요? 과연 초막을 지어 바치겠다고 말했던 베드로의 숨은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헌신하고 싶었기 때문일까요?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초막을 지어드리겠다고 말하기 직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33절)”
어쩌면 베드로의 속내가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차피 세상에 내려가면 병든 자를 고쳐야 하고, 귀신도 내쫓아야 하고, 사람들의 요구에 시달려 얼마나 피곤하게 살아야 합니까?
더구나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라고 말씀하시며 정처 없이 떠도는 생활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셨고, 유대인들이 그토록 존경하던 모세와 엘리야가 자신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 얼마나 흥분되는 일일까요? 산 밑에 내려가서 고생하지 말고, 그저 산 위에 머물면서 지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보셨나요?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을 맞는 아이들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무엇일까요? “얘들아, 일어나 학교 가라!”입니다. 직장 생활하시는 분이 가장 듣기 싫은 말도 비슷하겠지요?
월요일에 출근할 생각 하면, 주일 밤부터 마음이 무겁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원이 “매일 주일만 같아라.” 아닙니까? 산 밑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저 산 위에서 평화, 평화만을 노래하고 싶은 게 우리의 속내입니다.
저는 베드로도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분명히 겉으로는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것인데, 속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그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주의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주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끔 교회에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수레바퀴 원리를 알고 계십니까? 수레바퀴는 동그랗습니다. 동그란 수레바퀴가 잘 굴러가기 위해서는 수레바퀴를 지탱하고 있는 중심축들이 균등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축은 길고, 다른 축은 터무니없이 짧으면 동그란 수레바퀴의 모양이 뒤틀리고 맙니다. 그래서 수레바퀴가 잘 굴러갈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수레바퀴를 지탱하는 중심축들은 여러 가지입니다. 먼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신앙의 중심축에 자리를 잡으셔야 합니다.
그다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말씀의 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도의 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다음은 ‘전도의 축’, 그다음은 ‘교제의 축’, 그다음은 ‘순종의 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말씀, 기도, 전도, 교제, 순종의 축이 균일하게 자리를 잡아야 신앙생활의 수레바퀴가 잘 굴러가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말씀의 축은 잘 자리 잡고 있는데, 기도의 축이 약합니다. 또 어떤 분은 말씀과 기도의 축은 잘 자리 잡고 있는데, 성도 간의 교제 축이 약합니다. 혹 어떤 분은 순종의 축이 약하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균형 잡히지 않은 수레바퀴를 장착한 수레는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없고, 오래 끌고 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100을 기준으로 각축들의 길이가 최소한 65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누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합니까? 주님이시지요? 우리는 주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종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주인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려 한다면, 어떻게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겠어요?
베드로처럼, 겉으로는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싶어 하는 경우가 우리에게는 없을까요?
제가 한 가지 더 덧붙여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제자들의 무능력’입니다. 제자들은 무능력했습니다.
이튿날,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 산 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귀신들린 자기의 아들을 고쳐달라고 사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 하더이다(40절).”
이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41절)”라며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이 사람의 아들에게 들어갔던 귀신을 내쫓아주셨어요.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 9장에서, 제자들은 조용히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예수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제자들의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눅 9:29).”
기도 외에 다른 그 무엇으로도 이런 능력이 나타날 수 없다는 겁니다. 오직 기도만이 귀신을 내어 쫓고, 병든 자를 고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겁니다.
왜 기도가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과 권위를 사용하지 못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능력과 권위는 기도를 통해서 나타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지기 위해서는 그들이 말씀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이같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며, 병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이미 주셨어도, 제자들이 기도할 때에만 이 약속이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 자녀의 능력과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나의 삶에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권위를 실제 삶 가운데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무엇이나 명령하면 이루어지는 요술 방망이와 같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기도해야 해야 하는 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나의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깊이 졸던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입술로 예수님이 자신의 주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님께 구하였습니다.
그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정욕으로 쓰려고 주님께 잘못 구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응답 될 리 없습니다. 또 응답 되어서도 안 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기도를 들으셔서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고 산 위에 눌러앉아 있도록 허락하셨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영광을 누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결코,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깊은 영적인 잠에 빠진 성도에게도 이런 불행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된 약속, 즉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한,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육체의 욕구를 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해서 산에 오르셨습니까? 28절에 보면,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습니다. 또 2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기도하실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또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나누신 대화의 주제가 무엇이었습니까?
31절을 보면,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 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별세’라는 단어를 영어 성경에서는 'departure' 즉, “떠남”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즉 구약성경에 약속된 예언의 성취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이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심으로 장차 이루어질 자신의 별세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별세를 기도로 준비하셨을 때, 그것은 꼭 슬픈 일만은 아닙니다. 별세가 “떠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출발”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이 세상을 떠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는 일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떠남은 천국을 향한 새로운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 13: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것을 알게 된 제자들이 근심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후에,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를 위한 구속 사역을 이루신 후에, 우리가 장차 거하게 될 천국의 거처를 예비하시기 위하여 천국으로 출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셔야 했지만, 우리를 위해 천국의 거처를 예비하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출발을 선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능력 많으신 예수님께서도 기도로 자신의 앞날을 준비하셨다면, 하염없이 부족한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더 많은 기도로 우리의 앞날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희망찬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장차 우리가 겪게 될 죽음과 죽음 이후의 복된 삶을 어떻게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 학교에서 성경 공부를 하고 돌아온 한 소녀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교회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이 세상의 삶은 천국의 삶을 준비하는 거래요. 맞아요?” 엄마는 딸이 귀여워서 “맞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이 작은 꼬마가 이렇게 다시 물었습니다. “엄마는 작년에 오스트레일리아에 갔다 오시고, 올해는 영국에 가시는데, 다른 나라에 가실 때마다 여행한 준비를 열심히 하시면서 왜 천국 갈 준비는 안 하세요?” 딸의 물음에 당황한 엄마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주님을 이 세상 무엇보다 사랑했고, 주님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던 무디 목사는 언제나 종말을 준비하는 자세로 하루하루를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순간 찾아온 죽음 앞에서 다음과 같은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땅은 물러가고 하늘이 열린다. 내 주께서 나를 위해 오신다.”
여러분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런 고백을 드릴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출처: 이동원, 「비유로 말씀하시더라」 (나침반, 2011); 「생명의 삶」 (두란노, 2017년 3월호), 109쪽에서 재인용.
연세 드신 성도님들 중에 자신의 임종을 위해 기도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복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하여 기도로 자신의 별세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죽음은 이 세상을 떠나는 서글픈 일이지만, 동시에 영광스러운 천국을 향해 출발하는 기쁜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기도로 여러분의 앞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기도로 믿음의 배우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기도로 자녀와 믿음의 후대들을 축복하며, 기도로 장차 우리가 겪게 될 별세를 준비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 기도의 열기로 가득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기도의 열기로 가득하여,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약속하여 주신 능력과 권위가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