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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28
1월2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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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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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664LPYV6C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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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바람처럼, 구름처럼, 홀연히 떠나가는 세례자 요한의 뒷모습!>
한 형제가 어떤 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처음 만났기에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다들 나름대로 각 분야에서 한 직책 담당하고 있는 분들이라, 소개들이 꽤나 거창했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큰 목소리로, 자랑스럽게 자신들의 스펙과 경력, 직함을 소개했습니다. 마침내 우리 형제 차례가 되었는데,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답니다.
“에~ 거시기, 저는 말이죠, 아무 것도 아입다이~”
예수님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이 등장해, 종래 예언자나 지도자들과는 다른 촌철살인의 설교와 함께, 구름 군중을 불러 모으며 유명세를 떨치자,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 바짝 긴장을 하였나봅니다. 세례자 요한을 두고 유다 지도층 인사들 사이에서 설왕설래가 있었겠지요.
“보아하니, 오시기로 된 메시아가 분명해!”
“입고 다니는 옷을 봐. 초라하고 남루한 행색을 봐서 그럴 리가 없어.”
“그런데 신선하고 거침없는 언변에, 강력한 카리스마에, 메시아가 맞을 지 몰라.”
고민 끝에 그들은 사제와 레위인들을 세례자 요한에게 보내 그의 정체를 파악하라는 미션을 줍니다.
“당신은 누구요?” 질문에 세례자 요한의 대답은 조금의 망설임도 업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세례자 요한은 길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딱 잘라 본론만 말하는데, 그야말로 솔직담백함의 극치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복음 1장 19절)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복음 1장 23절)
뿐만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솔직함에 겸손까지 더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복음 1장 26~27절)
구약시대를 마무리짓는 마지막 대 예언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서 세례자 요한의 태도는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만일 제가 세례자 요한이었다면,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 앞에 조금은 망설였습니다. 스스로를 좀 더 있어보이게 하려고 포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메시아까지는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잘 알고 있으며, 일정 부분 그분의 인류 구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분과 나는 아주 가까운 친척 관계이며, 그분의 가족들도 잘 알고 지낸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정체, 신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하늘을 찌르는 인기 앞에 조금도 우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유효 기간이 언제까지 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마침내 떠날 순간이 왔음을 인지하자, 단 한 순간도 지체없이, 그 어떤 미련도 없이, 잘 마련된 무대를 주인공이신 예수님께 넘겨드린 다음, 신속히 구세사의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의 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뭐 그리 아쉬움이 많은지,
미적미적, “아직 떠날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어요. 좀 더 있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바람처럼, 구름처럼, 홀연히 떠나가는 세례자 요한의 뒷모습이 참으로 멋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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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우리는 길이 아니라 이정표,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 주인·왕이 아니라 종, 심부름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시건방지기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수탉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다른 수탉들과는 달리 유난히 크고 붉은 닭벼슬과 화려한 색상의 털은 지니고 있었기에 건방을 떨었나 봅니다. 다른 수탉들은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데, 스스로를 닭 세계의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수탉은 더 큰 착각을 한 가지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동틀 무렵에‘꼬끼오!’하고 외쳐야 태양이 뜨고 새벽이 온다고 여겼습니다. 수탉 자신으로 인해 이 세상이 시작되고,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 역시 그런 수탉의 착각에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내가 없으면 이 공동체가 절대 돌아갈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모두 들러리로 여깁니다. 나로 인해서 이 공동체가 평화롭고, 나로 인해 이 공동체가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외칩니다. “나야 나! 나 말고 누가 있어?” 그러나 실상은 어떠합니까? 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입니까?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어떻게 눈을 뜹니까? 창조주 하느님의 오묘하고 신비스런 섭리와 질서의 손길에 의해 이 세상은 시작됩니다.
태양은 새벽녘에 아주 미세한 여명을 보내시어 깊이 잠들어있는 수탉을 흔들어 깨우십니다. 옅은 빛으로 인해 닭장 안에 잔뜩 깃들이고 있던 짙은 어둠이 조금씩 어두움이 가시는 것을 감지한 수탉은 달라진 분위기에 기지개를 펴며 ‘꼬끼오!’하고 외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절대 나로 인해 공동체가 돌아가고, 나로 인해 공동체가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착각 중에서도 너무나 큰 착각입니다. 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 인간 개개인 각자는 얼마나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 누구든 이 세상에 홀로 설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크신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공동체란 이름 아래 엮어주셨습니다. 각기 한없이 부족하고 보잘 것 없지만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면서 살아가라고 한 울타리 안에 엮어주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준 자기 스스로에 대한 명확한 신원의식, 자아정체성은 얼마나 큰 교훈으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그가 탁월하고 강력한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등장하자 사람들은 큰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이 사람이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가 아닐까?’
이런 이유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몇몇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복음 1장 19절)
그러자 요한은 서슴지 않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세례자 요한은 탁월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때, 그야말로 잘 나가던 때, 그를 바라보던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대단했습니다. 촌철살인 같은 메시지, 극도로 청빈했던 삶, 강직한 인품, 쌍날칼보다 날카롭던 그의 설교... 그의 삶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던지 그를 따르는 사람이 점점 많아져서 한때 ‘세례자 요한 당(黨)’까지 형성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명료한 신원의식과 명확한 이해가 있었습니다. 자신은 그저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보내진 자, 자신은 길이 아니라 이정표,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 주인·왕이 아니라 종, 심부름꾼이라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때가 이르자, 즉 구세사의 주인공 예수님께서 등장하시자 스스로를 소멸시켜나가기 시작합니다. 공개석상에서 자신을 완전히 낮추며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합니다.오랜 세월 공들여 양성시켰던 제자들도 미련 없이 예수님께로 떠나보냅니다. 뿐만 아니라 좀 더 완벽히 소멸되기 위해 헤로데 왕가의 타락을 공개적으로 거듭 질타합니다. 그 결과 순교라는 완벽한 소멸을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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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녀임을 포기할 때 얻을 수 있는 참 자녀의 자격>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s88T_OST6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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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이들은 “당신은 누구요?”라고 하며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밝힙니다. 몇몇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명확히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대답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 누구나 “너는 누구냐?”란 질문을 받을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하늘나라 상속권을 받으려 할 때 야곱에게 이사악이 누구냐고 물어본 것과 같습니다. 그때 하느님과 관련된 정체성이 나와야지 이 세상 부모와 관련된 대답이 나오면, 그것 자체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어떤 도움도 받지 않은 사람임이 증명됩니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나와 사귀는 사람이 나에게 영향을 받으면 그의 정체성에 내가 조금 개입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입니다. 결혼해서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내’라고 대답하는 것은 이미 둘이 한 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혹은 ‘누구의 자녀’, ‘누구의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이 그리스도의 그것과 섞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정체성이 바뀐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때,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나 엘리사벳이 있었다면 마음이 어땠을까요?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자신들의 이름이 조금이라도 거명되었으면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부모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위대한 면입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과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끌어주신 분, 그래서 너무 작아져 자녀에게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는 분들이 바로 요한의 부모들입니다. 그들은 요한을 하느님 것이 되게 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위대한 부모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자녀들에게서 자신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위대한 부모의 모습입니다. 그러기 위해 더 큰 부모가 주는 정체성으로 자녀를 인도해야 합니다. 내가 준 정체성 안에 자녀를 가두려 하면 자녀도 죽고 자신도 죽습니다.
전설적인 흥행을 기록했고 성탄절이면 여지없이 TV에 방영되었던 ‘맥컬리 컬킨’의 영화는 무엇일까요? 누구나 다 ‘나 홀로 집에’임을 알 것입니다. 성탄절마다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그의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부모였습니다. 특별히 아버지였습니다.
맥컬린 컬킨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과 7남매가 단칸방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교회를 관리했고 어머니는 전화 교환원으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 돈으로 7남매를 부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귀여운 외모의 맥컬리 컬킨을 아역배우로 쓰기로 합니다. 아버지도 예전에 배우로 활동한 적이 있었고 그쪽에 인맥이 있었기에 기회만 되면 아들을 무작정 출연시켰습니다. 그러던 중 전국적으로 흥행한 ‘아저씨는 못 말려’라는 영화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나 홀로 집에’가 제작됩니다. 예상외로 엄청난 흥행을 하고 ‘나 홀로 집에 2’는 그것보다 40배 이상의 출연료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아버지는 교회 관리인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아들의 매니저가 됩니다. 아버지는 이제 할리우드에서 흥행 보증수표인 아들 덕분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50인에 들어갑니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아버지의 욕심은 날로 커져만 갑니다. 다른 자녀들을 맥컬리와 함께 써달라는 조건을 내걸기도 했고, 맘에 안 드는 대사는 고치지 않으면 아들을 출연시키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망치기만 해봐. 맞을 줄 알아!”라고 협박을 하곤 했습니다. 맥컬리는 아버지와 함께 단둘이 호텔 방에 묵는 것이 감옥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혹사합니다. 7년 동안 무려 17편에 달하는 엄청난 영화를 찍습니다. 정신이상자 연기, 욕설이나 담배를 피우는 연기 등 닥치는 대로 시킵니다. 이렇게 되자 맥컬리의 연기 의욕은 빠르게 저하되었고, 대부분이 흥행에 참패하게 됩니다. 그러자 더는 맥컬리를 찾는 감독이 없어졌습니다. 아버지에게 맥컬리는 더는 유용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부모는 이혼소송에 따른 양육권 분쟁을 하는데, 맥컬리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해서 양육권을 차지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내가 벌어들일 돈을 생각해서 싸우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이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애 가장 좋았던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나서야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았고, 아버지도 아들을 공식적으로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다시 시작하는 학교생활, 대인관계는 쉽지 않았습니다. 17살에 결혼하고 거의 바로 이혼하고, 방황하고, 술과 마약 등에 찌들어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큰 흥행은 못 하지만 조금씩 부모의 압박에서가 아닌 자유의지로 연기를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출처: ‘크리스마스 영화보다 더 감동적인 맥컬리 컬킨의 인생’, 달빛 부부의 영화와 미드, 유튜브]
물론 좀 심한 부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조금은 자녀들이 나의 테두리에 있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그러면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을 매우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에 명확히 대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이 부모의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테두리 안에 있으면 아무리 커도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테두리 안에 있으면 어디까지 클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부모를 위해서라도 부모가 준 정체성을 넘어서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저는 요즘 “저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라고 자주 되뇌고 다닙니다. 저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저의 머리로 사시기 때문에 저는 그분의 몸만 되어주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제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부모님도 저의 이 정체성 안에서 보게 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 때문에 변화된 정체성은 지상의 부모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만듭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하고 자신 또한 자녀를 통해 영광을 받고 싶다면 자녀에게 인간으로서 주는 정체성이 아닌 하느님을 부모로 둔 정체성을 가지도록 이끌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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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19-28 : 이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로마를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도 그리스도로 생각하여 많은 군중이 그들을 따랐던 것이다. 예수님 수난기에 나오는 ‘바랍바’도 그리스도로 불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의례 추종하는 자들이 있었고 대부분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명멸했던 것이다.
세례자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즈카르야의 아들로 제사장직을 이을 수 있는 혈통이었음에도 그 직분과는 거리가 먼 광야에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말과 행동을 보고 혹시나 그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물론 세례자 요한에게도 그의 제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나타나셨을 때에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고 역사의 뒤로 사라지는 그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인간적으로 자신의 위엄과 힘을 군중들의 힘을 빌어 나타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메시아로 생각하면서 따를 수 있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면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묻는 말에 그는 솔직하게 ‘아니다.’라고 했다.(20절) “엘리야요?” 하였을 때 또 아니라고 대답하였다.(21절) 이 엘리야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와서 반대자들을 처리해 주고, 물건이건 사람이건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을 가려주고, 흩어져있던 유다인들을 한데 모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인데,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21절) 하고 물었을 때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이 예언자는 신명 18,15에서 모세가 한 말에 있는 예언자이다. “너희의 주 하느님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한 예언자인데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요?”(22절) 하였을 때, 세례자 요한은 이사 40,3에 나오는 대로, 왕이 오실 때 그 길을 준비하라고 외치는 소리라고 하였다(23절). 그러면서 자기를 그렇게 보지 말고 오직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이며, 이미 와 계신 분을 바라보라고 하였다.(26-27절)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작고 크고 간에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과대포장을 하여 드러내려고 하지나 않는지! 우리는 “백마병” 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 자신을 드러내는 오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이 미사 중에 우리는 세례자 요한과 같이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솔직함과 겸손을 갖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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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국장)]
예루살렘의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찾아와 “당신은 누구요?”라고 질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서에 나와 있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밝힙니다. 더욱이 자신은 그리스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면서 겸손한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처럼 때로는 물질로 자신을 평가하기도 하고, 자신의 권력과 명예가 곧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자신을 알게 되듯이, 우리는 우리의 삶과 예수님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아 갈수록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면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겸손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이 구세주께서 오시는 길을 닦는 사명을 완수하게 하듯, 우리의 겸손함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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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곳 미국에서 저를 나타내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회 보장 번호(社會保障番號, Social Security number)입니다. 저는 이를 근거로 세금을 납부하였고, 작년에 재난지원금으로 1,200불을 받았습니다. 이 번호는 한국의 주민 등록증과 같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장기 체류하거나, 취업을 하는 사람은 사회 보장 번호를 받아야 합니다. 미국 생활에서 꼭 필요하고, 중요한 번호입니다. 두 번째는 운전 면허증입니다. 운전 면허증은 신분증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비행기에 탑승할 때도 운전 면허증이 있으면 됩니다. 제가 있는 뉴욕에서는 한국의 면허증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운전을 하려는 사람은 필기와 실기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성사 허가증(The Faculties of the Diocese of Brooklyn)입니다. 한국에서는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 전국 공용으로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을 받지만 외국에서는 지역 교구장님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한국에서 교구장님이 공문을 보냈고, 부르클린 교구장님이 제게 5년 동안 성사를 집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작년에 나타난 코로나19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코로나19는 무엇이기에 세계의 경제를 멈추게 하였고, 미사를 중단하게 하였고, 우리에게서 일상의 소중함을 빼앗았을까요? 답답한 마스크를 써야 했고, 이웃과도 거리두기를 하게 했습니다. 확진된 많은 사람이 병원엘 가야했고, 소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코로나19는 도대체 무엇이고, 왜 우리에게 나타났을까요? 코로나19는 사스, 메르스, 신종플루와 같은 바이러스라고 합니다. 폐에까지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심각한 상황을 초래합니다. 전염력이 높으면 사망률이 적은데 코로나19는 전염력도 높고 사망률도 높은 편이라고 합니다. 다른 바이러스는 증상이 나타나면 비로소 바이러스가 전파되는데 코로나19는 무증상인 상태에서도 높은 감염력을 보인다고 합니다. 기존의 바이러스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기에 방역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바이러스를 우습게보고 초기 대응을 소홀히 한 면도 있습니다. 미국은 한국과 같은 시기에 바이러스 확진자가 나왔지만 초기에 대응을 소홀히 하였기에 바이러스가 광범위하게 퍼졌고, 희생자도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세례자 요한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코로나19처럼 새로운 충격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에게 새로운 질서를 이야기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권력을 이야기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변화를 꿈꾸는 사람에게 혁명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새로운 질서를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을 보았습니다. 신세계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있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알았습니다. 우리 신앙인이 가야할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식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 악의 세력을 따르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안개가 자욱한 길을 운전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우리들의 삶에도 식별하기 어려운 안개가 끼게 됩니다. 좋은 것과 가치 있는 것이 함께 할 때는 식별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좋아 하지는 않지만 가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치 있는 것을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좋아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좋아하지만 가치가 없는 것을 식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비록 가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좋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것은 식별하기가 쉽습니다. 당연히 선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식별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기도 습관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오늘 복음에서 본 것처럼 ‘주님의 길을 곧게 내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 없는 활동은 공허하고, 활동 없는 기도는 관념에 빠지기 쉽다고 합니다. 2021년도에는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따라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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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누구인가>
요한 1,19-28 (세례자 요한의 증언)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
물어야 하는 물음
나는 누구인가
지금여기에
내가 있어야 하는 까닭을
깨닫기 위해서
물어야 하는 물음
나는 누구인가
나를 노리는
나 아닌 것에서 해방되어
진정 내가 되기 위하여
물어야 하는 물음
나는 누구인가
쉽게 답할 수 없는 물음
굳이 답하지 않아도 되는 물음
참으로 물음이 답이 되는 물음
물음을 던지는 이가
참나가 되게 하는 물음
물음을 던지는 이가
소명을 깨닫게 하는 물음
물음을 던지는 이가
삶의 길을 알게 하는 물음
그러니 다만
쉼 없이 묻고 물어야 하는
단 하나의 물음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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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합니다. 백성들은 환호하며 올리브 나무 가지를 들고 열렬히 환영합니다. 그러자 놀란 어린 나귀는 어찌할 바를 모르지요. 더구나 지나야 할 길마다 사람들은 옷을 벗어 깔아놓기까지 합니다. 겉옷을 직접 밟은 어린 당나귀는 백성들의 열광에 착각에 빠지고 맙니다.
‘야, 내가 이렇게 대단한 줄은 몰랐네, 내가 이렇게 높은 존재였었나?’
나귀는 자기가 대단한 줄 알고 우쭐대며 앞발을 들고 ‘히히잉’ 소리로 환대에 응답합니다. 안타깝지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가 자기를 향한 것으로 착각한 어린 당나귀의 뻐기며 으스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사명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오로지 하느님과 또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데에만 자기를 쏟아 부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낮춤으로써 주님을 높인 인물, 세례자 요한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은 채 모든 것을 절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그 모습 속에 인간으로서는 보여줄 수 없는 신적인 권위가 느껴졌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묻게 합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1,19)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1,20)
세례자 요한은 조금도 숨기지 않고 분명하게 대답했다고 복음이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요한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요한1,21)
"그러면 그 예언자요?"(요한1,21)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요한1,22)
계속 다그쳐 묻는 사람들을 향해 요한은 그제야 대답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1,23-27)
자신의 모든 것을 낮추어 오로지 오실 예수님만을 높이고자 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낮출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반대로 살아갑니다. 나를 높이기 위하여 이웃을 깎아 내리지요. 나의 잘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을 험담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남에 대해서 쉽게 말하고 남을 좋지 않게 평가하여 자기를 돋보이려는 행동들은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높아지면 하느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또 높아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중심을 잃기가 쉽고 평화가 깨지며 하느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작은 것에도 수시로 흔들리지요.
사람에게 기대를 두고 살면 쉽게 상처를 받고,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해하며,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게 됩니다.
마음의 중심을 바르게 잡고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참 기쁨과 고요 속에 편안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내 중심에 하느님이 자리잡으셔야 합니다.
이는 사제나 수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들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면 힘들어집니다. 입고 먹고 마시고 꾸미는 세상일에 흔들리는 것과 똑같은 결과가 빚어지지요.
우리는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고 은근히 남보다 높아지기를 바랍니다. 어느 때는 하느님보다도 나를 더 앞세우기도 하지요.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만을 높이기 위하여 일생을 낮추며 절제하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본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남을 높일 때 나도 높아지는 지혜도 함께 배워야 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직 주님만을 섬기고 높여드리며 그 안에서 참 기쁨과 평화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길이 남는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습니다.
나를 낮추고 하느님과 이웃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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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주영길 토마스 신부님]
<거짓의 사람들>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유다인들이 세례자 요한한테 사람들을 보내면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이 질문 속에는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는 시대적 바람이 들어 있다. 그의 예언자적 삶과 거침없는 선포, 큰 무리의 추종자 등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서슴지 않고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고백한다. 그들의 기대를 한순간에 꺾어버리고 만 것이다.
과연 우리는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포장된 모습, 또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나’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지는 않는가?
예수님이 그토록 책망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그랬다. 그들은 율법주의라는 틀 속에서 남에게 경건한 이로 비춰지며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살아간다.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모진 질책은 ‘거짓’을 깨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남을 속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마저 속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거짓의 사람들’이다.
얼마 전 방송을 통해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절규’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사이비종교의 실상을 보도한 것이다.
일흔이 넘은 고령의 목사가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신도들을 집단 농장에서 부려먹으며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목사는 자신이 하느님의 계시를 직접 받으며 머지않아 세상의 종말이 다가온다고 설교했다.
목사 개인을 하느님과 같은 위치에 놓고 성경을 함부로 해석하는 이는 전형적인 ‘거짓의 사람들’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세례자 요한의 솔직한 대답은 끊임없이 ‘거짓’으로 포장하려는 우리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 그런데 가면을 벗기기는커녕 오히려 씌우려 하니 삶의 진지한 성찰과 변화가 있을 리 없다.
무엇보다 사제를 예수님처럼 대하는 신자들 앞에서 점점 익숙해 가는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다. 나도 어느덧 ‘거짓의 사람들’ 무리에 속해 살아가지는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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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구요비 욥 신부님]
오늘 기념하는 두 성인은 초대교회의 초석을 놓은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곧 동방교회의 대성인들이다.
2천 년 교회의 역사 안에서 커다란 두 물줄기가 있다고 하면 동방정교회와 서방교회이며, 로마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 형제들을 포함하여 서방 라틴 교회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래서 신학자 이브 콩가르는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묵시 22,1)이 동방과 서방에서 흘러나온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동방정교회가 미미하여 그 전례의 장엄함과 신비스러움을 접할 수 없어 아쉬움이 많다.
서방교회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모되는 성변화의 순간을 주님의 성찬제정 말씀인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의 잔이다”로 믿는 데 비해, 동방정교회는 성찬기도문 전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리고 성령의 오심(Epiclesis)을 강조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와서 서방교회는 이 성령의 오심을 미사성제 안에 받아들여 성찬제정 말씀 이전에 성령청원(축성기원)을 드리고 있다.
우리에게 친근한 이콘 성화를 바라보노라면 바로 동방교회의 신앙세계, 은둔과 신비와 관상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이런 교회의 심원한 사상은 러시아의 문호들, 특별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신비스러움은 어쩌면 우리가 믿는 신앙의 세계,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나누어주시고자 하는 당신의 내적 생명의 온갖 풍요로움(에페 1,3-14)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세례자 요한은 오늘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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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신혼부부가 부부싸움을 엄청나게 했다고 합니다. 이 싸움의 원인은 아침밥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혼자 자취를 하며 살아왔던 남편은 결혼과 동시에 아내가 해 주는 따뜻한 밥을 먹으며 출근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하니까 아침은 알아서 해결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직장 생활을 하지 않고 가사만 담당하는 아내가 당연히 아침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내는 어떻게 당연한 것이 있냐면서 그 무엇도 강요하면 수평적인 부부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아침밥 문제가 결국 이혼 이야기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아침밥’만의 문제일까요? ‘당연히 ~해야만 한다’라는 식의 당위적 요구와 기대 때문입니다. 남편은 아침밥을 아내가 해줘야 한다는 당위적 기대를, 아내는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는 수평적 부부관계에 대해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서로 다른 기대가 충돌을 일으킨 것입니다. 사실 ‘당연히 ~해야만 한다’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지도 또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모습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당연히 나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안 좋은 결말을 가져올 뿐입니다. 주님과 나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당연히 ~해야만 한다’라는 당위적 요구와 기대를 없애야지만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겸손’입니다. 이 겸손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배웁니다. 그는 대사제의 아들로 좋은 가문 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물음에 ‘그리스도’라고 대답했다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후에 비참하면서도 어이없는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자기만을 드러내다 보면 하느님을 보려는 마음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했기에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었고, 끝까지 하느님을 증거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겸손을 우리 안에 간직해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1요한 2,2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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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뻔한 것도 내세우는 용기와 자신감>
오사카에 가면 광고문구 하나로 매출을 7.5배 더 올린 자전거 가게가 있습니다. 광고문구는 이렇다고 합니다.
“펑크 수리 5분 이내에 가능합니다.”
5분 이내에 펑크 수리를 할 수 있는 특별한 자전거 가게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전거 수리점을 하시는 분은 이 문구가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펑크 수리는 5분 이내에 가능하기 때문입니다.(저도 5분이면 충분합니다)
아무리 뻔한 것이라도 내세울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용기와 자신감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용기와 자신감을 내세우기가 왜 이렇게 힘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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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제를 아는 사람>
덕이 있는 지도자가 그리운 세상입니다. 인기는 없지만 묵묵하게 자기 위치를 지키며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인기 높은 고위직이 아니라도 고집부리고 ‘말귀 안 통해 어렵다’고 투덜대는 지도자는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말귀가 안 통하면 통하는 방법을 찾으면 되는 것이지 그 탓을 남에게 돌리고 상대를 무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면, 의사소통은 더욱 어렵게 될 것입니다.
가장이 자식의 부족한 탓만 나무라고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줄 생각을 소홀히 한다면 그는 이미 가장으로서의 덕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나 세상이나 자기 위치에서 자신의 할 일을 하고 분별력 있는 처신을 하는 지도자가 그립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당시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대사제들과 레위사람들이 그의 신분을 알고자 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였던 같습니다. 그만큼 대중에게 끼친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사람들이 “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었을 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하고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요한은 이미 사람들이 자기를 그리스도로 잘못 인식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 초점을 둡니다.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인기가 높아지면 자기를 뽐내고 싶은 마음이 더해질 텐데 요한은 오히려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모습으로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를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자기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자기 주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분별력 있는 지도자입니다. 세상에 맛들인 사람은 자신의 인기를 과장하고 자기가 최고라고 합니다. 자기가 아니면 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떠벌립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람은 분수를 압니다. 성 마더 데레사는 당신이 “하느님의 손에 쥐인 작은 몽당연필”이라고 했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언제나 진실한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보다는 남을 배려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뽑내지 마십시오. 겸손은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자랑하려거든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하시고 하느님 앞에 자기 분수를 알고, 주제를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 바실리오는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랑과 희망을 하느님께 두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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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리스도와의 우정, 너와 나의 우정-
‘건강하게 나이 든다는 것’ 책 소개에 나오는 내용 일부입니다. 꼭 경청해야할 내용입니다.
“운동 역시 20-30%까지 사망률을 낮출수 있다. 그런데 가족 및 친구와 튼튼한 지원망을 형성하면 사망위험도가 45%까지 낮아진다고 한다. 혼자서 샐러드를 먹고 이어폰을 꽂은 채 러닝머신을 한시간씩 뛰는 것보다 친구들과 즐겁게 수다를 떨면서 적당히 기름진 한 끼를 먹는 게 장수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무슨 일인가를 더하기보다 덜해야 한다는 뜻이다. 운동기구, 유기농 음식을 줄이고 물건을 덜 사고, 걱정을 줄이는 것 말이다. 이러한 것들을 덜어낸 공간에는 가족이나 친구들, 웃음과 여유를 채워 넣어라.”
답은 그리스도와의 우정 그리고 너와 나의 우정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부러울 것, 걱정할 것, 불안할 것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우정과 함께 가는 너와 나의 우정입니다. 바로 이 우정의 지원망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또 조화와 균형의 건강한 영육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무병無病하다는 것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균형과 조화중에 잘 관리되고 있음을 뜻합니다.
오늘은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두분 다 4세기 오늘날의 터키 중부 카파도키아 출신으로 같은 해 전자는 49세, 후자는 60세 선종하셨습니다. 두분 다 성 아타나시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더불어 동방의 4대 교부에 속하며 우정이 아주 돈독하였다는 것과 수도생활에 남다른 애정을 지녔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주교직에 있으면서도 늘 수도승답게 사신 분들입니다.
새삼 확인되는 바 이 두 성인들 우정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우정이 두분간 우정의 기초가 됨을 봅니다. 바로 너와 나의 우정의 참된 원리를 보여줍니다. 수도자든 부부간이든 참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우정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우선순위가 공동체의 중심이자 우리 삶의 중심인 그리스도와 우정의 관계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두 수도승 주교를 비롯한 모든 성인들이며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그리스도 예수님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요? 제로(0)일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만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 사도 바오로 모두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빼면 제로일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제 경우 역시 예외 없이 제로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무관無關한 나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무지로부터의 해방은 물론 참 나의 실현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우정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그리스도인 모두의 운명이자 사랑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과 깊어가는 우정과 더불어 참 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입니다.
“당신은 누구요?”
세례자 요한은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어지는 평생 화두같은 물음입니다. 누가 묻는 다면 과연 여러분은 무어라 대답하겠는지요. 세례자 요한을 통해 계시되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입니다.
“나는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너희 가운데에는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바로 우리 삶의 중심에 영원히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그리스도를 섬기듯 형제들을 섬길 때 그리스도와 더불어 형제들과 깊어지는 우정입니다. 신발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치 않다는 요한 세례자의 그리스도께 대한 겸양謙讓과 경애敬愛의 우정이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바로 이런 그리스도와의 깊은 우정이 이단에 빠지지 않는 결정적 비결입니다. 사도 요한은 제1독서에서 처음부터 들어온 진리대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깊이 뿌리내릴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이래야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음은 물론 그리스도의 적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적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며,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매일, 바로 오늘 주님 재림의 날처럼 ‘그분 안에 머무르면서’, 그분과의 우정과 더불어 형제들과의 우정을 깊이하면서 하루하루 깨어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과는 물론 형제들과의 우정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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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과 지속적으로 관계 맺고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
유다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어 묻습니다. 아버지 즈카르야가 사제였고 어머니 엘리사벳도 아론의 후손인 까닭에 세례자 요한은 계보적으로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기는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
요한이 서슴지 않고 고백합니다. 그는 찰나의 순간이라도 타인의 정체성으로 자신을 치장할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그의 소명이니까요.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요한은 백성을 준비시키려고 자기가 베푸는 물의 세례와, 주님께서 베푸실 "성령의 세례"(요한 1,33 참조)를 구분합니다. 백성 가운데로 오셨으나 아직은 백성이 알아보지 못한 분, 그분이 바로 그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임을 알려 줍니다.
"모르는 분"
예수님은 백성의 눈에 아직 베일에 싸여 계십니다. 그분이 나타나셔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 해도,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풍요를 구원이라 여기고 기대하는 이들 눈에는 영영 감춰져 계실 것입니다. 슬프게도 인류에게 예수님은 여전히 "모르는 분"으로 남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는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신도들이 늘어가면서 그들이 어떻게 그분과의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지 조언합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1요한 2,24)
요한 서간은 예수님과의 실제적 접촉이 매우 짧거나 거의 없었던 이들이 신도가 되어 세대를 거듭하는 시기(기원후 80-90년경)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지요. 아마도 예수님과의 직접적 추억보다, 사도나 그들의 제자들을 통해 전해진 말씀에 의지해 그리스도를 믿기로 전향한 이들이 대부분이었을 겁니다.
기존 유다교의 반박과 이단의 교설도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각자가 기억하는 부르심의 순간과 방식은 다 다르니, 박해 시대의 풍랑 속에서 때때로 불확실과 의심의 순간도 맞닥뜨렸을 테구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누군가를 믿고 사랑하는 일은 현상적 영역 밖의 일이라 그렇습니다. 그러니 주님과 사랑에 빠진 첫 순간을 기억하고, 그 뜨거웠던 첫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겠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1요한 2,27)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의 물로 정화되고, 성령의 도유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된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의 불은,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러 있는 한 결코 꺼지는 일이 없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곤곤하고 버거운 세상살이 파도 안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방법입니다. 매일 다가오시는 말씀에 머무르고, 자비 가득한 그분 마음에 머무르며, 우리를 부르신 그분 뜻에 머무르고, 우리와 일치하고 싶어하시는 그분 사랑에 머무르는 것이지요. 이 머무름이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나날이 더욱 친밀하고 두텁게 만들어 줍니다.
기름부음을 통해 우리 안에 거처하시는 성령께서 성부 하느님을 부르시고, 성자 예수님을 끌어당기십니다. 성삼위 하느님의 속성이 일치이기 때문이지요. 성령께 마음을 열고 말씀에 머물러 아버지의 심장 안에 자신을 감추는 이는 성삼위 하느님의 일치적 사랑에 함께하게 됩니다. 머무름이 죄스럽고 부족한 우리에게 일으키는 기적입니다.
이 머무름을 통해 주님은 "모르는 분"에서 차츰 "아는 분"이 되어가실 겁니다. 새해에는 주님께 머무르고 말씀에 머물러 그분과 더 깊이 사랑을 나누는 여정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가 좀 더 고결하고 선량한 그리스도인의 면모를 갖추어 갈수록 세상도 좀 더 나아지고 밝아질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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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우리 구원과 구속의 오심을 즐겁게 경축합시다.
이 축제의 날을 경축합시다. 거대하고도 위대한 날에서 나오는 거대하고도 위대한 날이신 분이 이 짧고도 일시적인 우리의 이 날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정의가 되시고 우리의 성화와 구속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누구든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진리가 땅에서 움터 나왔습니다.” 우리를 위해 태어나신 그리스도를 믿는 이는 사람인 당신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진리가 땅에서 움터 나왔습니다.” 그것은 “말씀께서 육신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았습니다.” 그것은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땅에서 움터 나왔습니다.” 육신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았습니다.”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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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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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자기증언입니다. 광야에 살면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던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온 사제들과 레위 인들에게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
이 질문은 단순히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메시아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입니다. 곧 “그리스도와 당신의 관계는 무엇이요?” 라는 질문입니다. 요한은 그분과 관련하여, 자신의 신원을 부정과 긍정을 통해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
“나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구세주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증거 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혹 우리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증언하고 증거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우리가 그리스도를 스승이나 주인으로 따르기보다 자신을 스승이나 주인으로 내세우고 있지는 않는지,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고 자신을 존경하도록 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스승이 아니라 제자이고, 앞서가는 자가 아니라 뒤따라가는 자입니다. 주인이 아니라 속해 있는 자이고, 판단해야 하는 자가 아니라 응답해야 하는 자입니다. 또한 우리는 구원자가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고,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리고 요한처럼, 우리도 ‘외치는 이’가 아니고,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곧 ‘내 안에서 외치는 분’를 드러내는 소리입니다. 사실, 소리를 내는 것은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입니다. 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습니다. 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곧 화살표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피리를 부는 이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를 담아내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는 진정 비워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한은 참으로 비워진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채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비워진 데서 오는 기쁨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타인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 말입니다. 그러기에 비워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추하게 보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이들을 자기 발밑에 두려는 것처럼 추한 모습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의 발밑에 다른 이를 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다른 이의 발밑으로 내려가려고 하나, 그 발밑에 내려갈 자격마저 없는 몸이라 고백합니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종의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운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도 요한이 받은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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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
주님!
화살표 같은 존재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붓이 되어 당신의 말씀을 삶으로 쓰게 하소서.
피리가 되어 당신의 노래를 온몸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주인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 당신의 귀염둥이 아들, 당신의 사랑이오니,
당신께만 속해 있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만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생명의 춤이 되고, 당신 축복의 강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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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1,20)
'세례자 요한의 증언!'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이 자신의 신원을 묻는 이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의 신원>
우리의 신원은 또 하나의 그리스도이며, 또한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과 말과 삶이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리스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원은 세례자 요한처럼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말과 행동으로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낮고 비천한 자리 위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큰 신앙고백입니다.
초대 교회 때 이 신앙 고백을 흔드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아리우스라는 이단이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예수님이 구원자이신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이었고, 이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핵심인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교리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는 이런 아리우스 이단들과 맞서 싸우면서 정통 교리를 지켜낸 분들입니다.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입니다."(1요한2,22)
거짓말쟁이가 되지 맙시다!
그리스도의 적이 되지 맙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새해에는 구유 위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며, 우리의 그리스도라는 믿음과 그에 따른 고백이 더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노래 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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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438rpbEKmAY&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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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 23)
새 일기장에
새 날을
기록했다.
다시 태어나는
은총의
시간이다.
부딪히고
맞닥뜨리며
깨닫게 되는
삶의
나날들이다.
그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진짜 우리들
소리이다.
어김없이
만나게되는
광야의
시간이다.
삶 속의
광야이다.
같은 것
하나 없는
힘겨운
우리들 광야의
삶이다.
광야에도
사람이 있다.
광야에도
사랑이 있다.
광야에도
햇살이 비친다.
광야는 늘
간절하다.
광야에서
삶의 목적지가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된다.
추운 광야가
우리를
성장시킨다.
괴로운 시간도
필요한 은총의
시간이 된다.
광야에서
우리를 살릴
유일한 말씀을
듣게 된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광야도 길을
드러낸다.
이쪽 광야가
끝나면 저쪽
광야가 우리를
기다린다.
광야에서
하느님을
뜨겁게
만난다.
추운 광야에서
깨닫게 되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은총으로
지나가는
순간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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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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