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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ubf 2021년 부활절 메시지 죽음은 잠이다
요한복음 11장 1-요한복음 11장 16
요절 / 요한복음 11장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찬양합니다. 우리 크리스천에게는 부활절이 성탄절보다 더 큰 축제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사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후에는 이 세상에 달라진 것이 별반 없었습니다. 다만 유대 땅에 몇몇의 제자들과 무리들이 하나님 나라를 보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의 변화도 불완전하였습니다. 그들은 겁쟁이였고 시기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부활 후에는 그들이 죽음을 모르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세계의 역사가 변화되었습니다. 복음이 우리나라까지 전파되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탄생일은 기념합니다. 조금 있으면 석탄일입니다. 그러나 석가 부활절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이곳에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나사로의 죽음이 나옵니다. 사망권세에 시달리는 제자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죽음은 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자는 자를 깨우러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이신 예수님에게는 죽음은 잠에 불과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죽음인데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죽음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번 부활절에 우리가 부활 신앙으로 우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쫄지 말고 담대하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1)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나사로가 베다니에 살고 있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감람산 동쪽에 있는 마을입니다. 나사로 가정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사로와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그 집에 기둥 같은 가장이었습니다. 가장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 병은 불치의 병이었고 죽을 병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실 때 예수님을 초청하여 식사를 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정을 사랑하여 그 집에 머물며 식사교제를 하시고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의 가정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가정은 예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이 맺힌 아름다운 가정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이들을 사랑하셨는데도 그 가정에 병이 났습니다. 병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걸릴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도 병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집이 만사형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때로는 질병도 주시고 사건 사고도 나게 하십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사랑하는 자에게 매 하나 더 준다는 말과 같습니다. 성경에는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의 떡과 환난의 물을 주십니다. 고난이 없으면 사생아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고통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랑하는 이들이 고통받는 것으로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사랑하는 이들에게 질병과 죽음의 고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난을 주시며 우리가 울 때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십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왜 고난을 주실까요?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하여 만민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고난을 통하여 믿음을 배우고 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담대하게 살 수 있고 죽은 후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눈물을 머금고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병이 났을 때 예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고 멀리 갈릴리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삼사일이나 걸리는 그 곳에 사람을 보내 예수님께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나사로의 병을 고칠 것을 믿었습니다.
(2)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나사로의 병은 죽을 병입니다. 나사로는 결국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는 죽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죽을 병이란 없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어둡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는 죽음이 없고 잠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어둠이 조금도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무슨 문제든지 밝게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무슨 문제를 만나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병이 나고 큰 사건이 터져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최악의 경우는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는 죽음도 더 좋은 부활을 향하여 가는 지름길이니 더 좋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그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은 마지막 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주님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십니다. “나, 오직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이야!” “내가 믿는 하나님은 썩어서 냄새나는 자도 살리시는 최고의 하나님이야!”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소식을 듣고 빨리 베다니로 달려가셔야 했습니다. 아니면 여기서 말씀으로라도 고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가시지 않고 말씀으로 치료하셨습니다. “나사로는 나았다!” 하시면 나사로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갈릴리에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가면 나사로가 죽은 지 이틀이 됩니다. 예수님이 이틀을 유하시고 가면 죽은 지 나흘이 됩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시체가 썩어서 냄새 납니다. 인간적으로 완전히 소망 없는 상태가 됩니다. 예수님이 소망이 없는 그 때에 가서 나사로를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썩어서 냄새나는 자를 살릴 수 있는 분으로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3일까지는 자연적으로 우연히 살아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썩어서 냄새나는 자를 살리는 것은 우연이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썩어서 냄새나는 자를 살릴 수 있습니까? 석가입니까? 석가는 한 어머니가 아들을 잃고 슬퍼하자 그 어머니에게 아무도 죽지 않은 집에서 물을 한 바가지 퍼다가 아들에게 먹이면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물을 찾으러 다니다가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죽음은 나만의 슬픔이 아니라 인간 모두의 슬픔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를 통하여 위로를 얻은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썩어서 냄새나는 자를 살리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습니다. 시체는 부패합니다. 재가 되고 흙이 됩니다. 예수님은 썩어서 냄새나는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통해서 이런 흙이나 재가 된 우리도 다시 살리시는 분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다시 오실 때 우리를 살리시는 부활의 주님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마지막 날 우리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이틀을 더 유한 후에 유대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로 가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3) 부활의 예수님을 믿으면 두려움에 빠지지 않는다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유대로 가자는 말에 아멘! 하고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느냐고 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예수님이 유대에 계실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고 돌로 쳐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그 악몽이 살아나서 유대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은 낮이 열두 시간이라고 하셨습니다. 낮에는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밤에 다니면 어두워서 빛이 그 사람 안에 없으므로 넘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비유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넘어지는 것은 두려워서 불신에 빠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빛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안에 빛이 있으므로 죽음의 어둠이 물러갑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빠지지 않고 불신에 빠지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주님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죽어갔습니다. 물론 죽음의 고통은 있어지만 두려워하지는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죽을 때도 부활의 주님을 보고 천사같이 환하게 죽었습니다. 그를 보고 사도 바울이 변화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도바울을 루스드라에서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내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일어나서 다시 루스드라 성에 들어가 제자들을 굳게 세우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세운 제자가 바로 디모데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성경에만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타이타닉 영화에 보면 배가 침몰되는 과정이 나옵니다. 그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이라는 찬송가를 끝까지 연주하며 평안히 죽어갑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멋있는 명장면입니다. 그들은 부활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찬양을 연주하며 다른 사람을 위로하며 죽었습니다.
영화에만 있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실제 요한 웨슬리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배가 파선될 위기에 맞이하자 그는 두려워떨었습니다. 그러나 평온한 모라비안 교도들 보고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알고 회개하였습니다. 그 후에는 그는 변화되어 감리교를 만들었습니다.
(4) 죽은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사로를 깨우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 잠자는 우리를 깨우러 오실 것입니다. 최요한! 크게 부르시며 요한이를 깨우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였습니다. 그들은 잠들었는데 구태여 깨우러 갈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유대로 가는 것이 두려워서 어찌하든지 유대로 가지 않고자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나사로가 실제 잠들어 쉬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잠으로 보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음은 잠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스데반이 죽었을 때 잠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죽음은 잠과 비슷합니다. 죽음이나 잠은 의식이 없습니다. 우리는 잠 잘 때나 죽었을 때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잠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죽음은 영원히 일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잠은 푹 쉬고 나서 일어납니다. 우리 성도들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잠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다시 깨우실 것입니다. 살아있는 자는 변화되어 하늘로 들려 올라갈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다시는 죽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납니다. 썩지 않고 강하고 영광스럽게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우리는 잠을 소망하듯이 죽음을 소망합니다. 죽음을 잠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결코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누가 잠을 두려워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더 자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단 잠을 자듯이 평안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다만 고통스럽게 죽는 것이 힘들을 뿐입니다. 우리는 고통 없이 평안하게 살다가 죽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부활은 잠자고 깨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 잠자고 깨면 이 모습 이대로 이 자리에서 깹니다. 그러나 부활하면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땅에서 살아납니다. 우리는 눈물도 상함도 고통도 없는 그곳에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를 살리는 것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나사로는 죽을 몸으로 살아납니다. 나사로는 다시 죽습니다. 장례식을 두 번 치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지 않는 새로운 몸으로 살아납니다. 썩지 않고 강하고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납니다.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고 하늘을 날 수 있는 몸으로 살아납니다. 처음 부활을 맛본 사람들은 둘째 사망을 맛보지 않습니다. 또한 나사로는 살아나서도 이 하늘과 이 땅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하늘과 새땅에서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죽음은 새로운 몸으로 가는 문입니다.
로마시대에 콜로세움에서 많은 사람이 사자의 밥이 되어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찬송을 부르며 환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 부활의 영광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용사들이었습니다. 사자가 그들을 먹으려고 달려들자 아기가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의 눈을 가리며 “조금만 참아라.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을 바라본 로마시민들이 큰 감동을 받고 로마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로마는 313년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두려워하겠습니까?
(5) 너희에게 부활신앙을 줄 수 있어 기쁘다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진짜 잠으로 생각하자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고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있는 곳에 당신이 없었던 것을 제자들을 위하여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거기 계셨으면 나사로를 치료해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없었기 때문에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게 할 수 있습니다. 부활신앙을 심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로 키울 수 있습니다. 부활신앙을 심을 수 있는 것이 기쁨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유대로 가자고 하시자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하였습니다. 도마는 의리는 있었으나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불신으로 죽음에 사로잡힌 자에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주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부활신앙을 심을 수 있어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과 사람들이 기뻐하시고 슬퍼하시는 때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병이 들면 슬퍼하고 병이 나으면 기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신이 있을 때 슬퍼하고, 믿음이 있을 때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부활신앙으로 예수님을 심히 기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왜 부활신앙을 주시기를 원하실까요?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현재의 어려움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시험에 실패하기도 하고 병이 나기도 하고 돈을 잃기도 합니다. 병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고난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쫄지 않고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신앙 있을 때 죽을 때도 우리는 잠자듯이 평안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하여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활신앙을 심는 것을 크게 기뻐하십니다.
(결론) 죽음은 잠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사망권세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건 사고는 끝이 없이 일어나고 우리는 질병에 시달립니다. 고난 주간 우리에게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손자가 피에 염증수치가 높아 입원하였고 한 목자의 부친이 쓰러져 입원하였습니다. 사탄은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절망과 두려움과 슬픔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때에 할 수 있는 것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점심을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두 사건을 통하여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문제 많은 세상에서 기쁘고 평안하고 쫄지 말고 담대하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천안 ubf 2021년 부활절 메시지 죽음은 잠이다
요한복음 11장 1-요한복음 11장 16
요절 / 요한복음 11장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