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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 1,21-23
형제 여러분,
21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22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23 다만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고, 나 바오로는 그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6,1-5
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2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5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아닌 은총의 새 시대를 열어 가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곧 앞 장면에서는 단식 논쟁을 통해 새로운 시대인 당신의 때를 알리시고, 오늘 복음의 안식일 노동을 통해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곧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라고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밀밭’을 가로질러 가시고, 제자들은 '밀 이삭'을 뜯어 비벼먹습니다.
이는 그들을 교회의 사도적 활동에 참여시킴을 암시해줍니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 밀밭의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루카 6,2)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는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5,17)
사실 그들이 트집 잡은 것은 밭의 이삭을 뜯어먹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비는 일을 했다고 해서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의 정신을 일깨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 빵을 먹었던 일’을 말씀하십니다.
곧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제사 빵을 주었던 것처럼 이제 당신께서는 배고픈 제자들에게 아직 빵이 되지 않은 밀을 먹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곧 율법을 은총으로 바꾸십니다.
사실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
(탈출 23,12)
이처럼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 주어진 날입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쉬는 것이며, 인간에게 주어진 은총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오히려 '해야만 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혹 '해야만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하고 있지는 않는지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마태복음의 병렬 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태 12,7)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일’이 바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르코복음의 병렬 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마르 2,27)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루카 6,5)
주님!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간혹 신자 분들이 ‘미사참례를 어디부터 해야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글쎄요? 병자를 위한 봉성체를 하게 되면 전례문은 짧지만, 참회와 복음 말씀 듣기, 그리고 주님의 기도 후 영성체 예식을 합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영성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주님을 모시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미사참례를 하러 왔는데 시간을 잘못 알고 온 거예요.
벌써 신부님 강론도 끝나고…주님은 모시고 싶고…어쩌면 좋을까?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어서 준비하고 왔건만...
무슨 답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가슴 안에 답이 있습니다.
법은 함부로 어겨서는 안 됩니다.
법은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반포한 이성의 명령”(성 토마스 아퀴나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하거나 억압할 경우라면 어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법의 의미를 지킬 수 있고 사람도 살기 때문입니다.
법의 자구에 매여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법의 해석 방법을,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 하시며 확실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부여받은 “하느님의 아들인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안식일의 휴식 규정과 해석에 관한 결정권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마태 12,5-7).
자비를 거스르는 법은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파괴해야 하는가?
그 누구도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법의 자구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못살게 구는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갈라 2,16)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 13,8)
그 어떤 법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법규에 얽매여 사랑하기를 멈춰서도 안 됩니다.
미사참례를 하시면 정성껏 준비하여 성체를 믿음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뻐꾸기를 키우는 새가 어떻게 쉴 수 있겠는가?>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는 것을 보고는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라고 묻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물음은 곧 ‘구원’에 관한 물음입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6일간의 일을 마치시고 7일째 쉬신 시간입니다.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이렛날 쉽니다.
우리도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나에게 영혼을 구원하라고 일을 시키신 분 안에서 쉬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 모든 영혼을 창조하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당신의 일을 하는 제자들을 보호하십니다.
그분의 집 안에 있으며 그분에게 자기 뜻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그분께 순종하는 새로운 아담들입니다.
영화 ‘비바리움’(2019)은 인간이 왜 고생은 하는데 안식이 있을 수 없는지를 고찰하는 내용입니다.
이야기는 함께 첫 집을 구입하려는 젊은 부부인 젬마와 톰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영화 초반부에 뻐꾸기 새끼와 그가 밀쳐내 떨어져 죽은 다른 새들의 새끼들이 나옵니다.
한 아이가 왜 뻐꾸기는 자기 집을 만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젬마는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대답해줍니다.
그리고 떨어진 두 마리의 새끼를 묻어줍니다.
어미는 자신보다 덩치가 큰 뻐꾸기 새끼에게 음식을 물어주며 지쳐갑니다.
이것은 인간이 어떤 법칙에 사로잡히면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인간의 비참함을 보여줍니다.
젬마와 톰은 부동산 중개소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조금 이상한 세일즈맨 마틴을 만납니다.
그는 욘더라는 새로운 개발 주택지를 보도록 초대합니다.
도착하자마자 마틴은 사라집니다.
그들은 욘더를 떠나려고 할 때 어느 방향으로 운전해도 탈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항상 같은 집인 9번으로 돌아옵니다.
결국 그들은 연료가 떨어져서 그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합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안에 아기가 들어 있는 상자와 “아이를 키우고 석방되라”라고 적힌 메모를 발견합니다.
그들은 이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 곳에 갇혀 자기 아이가 아닌 아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에 부닥칩니다.
아이는 부자연스러울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합니다.
98일째가 되면 아이는 아이보다 어른처럼 행동하고 소름 끼치고 당황스러운 방식으로 톰과 젬마의 소리와 행동을 모방합니다.
톰은 땅이 가짜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탈출구를 찾기 위해 앞마당을 파기 시작합니다.
젬마는 차에 들어가 지난날의 향수에 빠져듭니다.
결국 소년은 이상한 부동산 중개업자 마틴의 복제품으로 성장합니다.
톰은 땅을 파다 지쳐 죽고 맙니다.
아이는 톰을 비닐에 싸서 톰이 파 놓은 땅에 던져버립니다.
분노한 젬마는 소년을 죽이려 하지만 도리어 압도당하고 결국 부상으로 사망합니다.
소년은 역시 젬마도 구덩이에 던져 묻습니다.
이후 그는 여행 가방을 싸고 부동산 사무실로 돌아와 늙어 죽은 마틴의 이름표를 달고 미래의 톰과 젬마처럼 될 순진한 커플들을 맞이합니다.
‘비바리움’은 인간이 동물을 사육하며 감시하고 실험하는 곳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살아간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무언가를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희생합니다.
여기에서 뻐꾸기 새끼, 혹은 마틴이라는 톰과 젬마가 키운 아기는 자기 안의 자아입니다.
탈출기에서는 파라오가 될 것입니다.
그 시스템 안에서는 안식이 없습니다.
그것들에게 이용당하고 죽게 됩니다.
누구나 어떤 시스템이나 법에 지배받습니다.
내가 있는 욘더라는 곳은 내가 지배받는 자아의 시스템입니다.
결국 나는 새로운 법의 시스템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 시스템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됩니다.
그 방법이란 무엇일까요?
뻐꾸기 새끼에게 지배받는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길은 뻐꾸기 시스템을 이길 수 있는 누군가에게 길러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 길러진다면 자기 새들을 죽이는 뻐꾸기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집에 머물려면 인간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제자들은 예수님의 법을 따르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뻐꾸기의 시스템을 벗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분 뜻에 따라서 그분 집에 머물지 않으면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여전히 그들은 자아의 시스템 안에서 안식을 찾으려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벌써 하느님의 집에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뜻을 주님께 강요하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이라야 안식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나의 뜻 자체가 나의 안식을 빼앗습니다.
마치 파라오처럼 나를 종살이시킵니다.
오직 주님의 뜻만이 그 뱀의 압제에서 나를 쉬게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안식을 누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떤 뜻을 따르느냐가 어느 집에 머무느냐를 결정합니다.
어느 집이건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뱀의 집에 살면서 안식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따르는 법, 곧 욕구가 내가 사는 집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 어떤 형식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예수님>
한 사람의 그릇된 행동이나 사회적 일탈 행위 앞에 법 집행은 엄정해야 마땅합니다.
때로 구금되어 수사를 받기도 합니다.
재판을 받아 톡톡한 대가를 치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상 참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지속적인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부인이 참다 참다 폭발한 경우라든지, 극심한 가난이나 오랜 병수발로 인해 야기된 사건 등등.
언젠가 굶주리는 자녀들을 보다 못한 젊은 엄마가 대형 마트에서 식자재를 몰래 가져 나오다가 들킨 일이 있었는데, 소문을 전해 들은 지역 주민들의 선처 호소가 이어졌고, 그 가정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법행위를 습관적으로 저질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공동선을 위해 제정된 가장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에 대한 철저한 준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처한 극도로 고통스러운 상황 앞에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사실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안식일 법이 제정된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법, 사람의 영적 육적 건강을 위한 법,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만든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법 규정이 점점 불어나고, 가지를 치고, 세분화되면서, 나중에는 사람을 위한 안식일 법이 사람을 힘들게 하는 법, 사람을 꼼짝달싹 못하게 옭아매는 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안식일 규정의, 정신에 따르면, 안식일 당일날, 주중 계속된 과중한 업무에서 손에 떼고, 몸과 마음을 편히 쉬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더없이 좋은 것입니다.
원한다면 강변길을 따라 마음 편히 산책을 하거나, 좋아하는 운동도 원 없이 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시장도 보고 요리도 해서 나눠 먹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그 잘난 안식일 규정에는 그 모든 것들이 다 금지되어 있습니다.
몇 걸음 이상 걸으면 절대 안 됩니다.
운동을 물론 절대 금지입니다.
요리를 한다거나 텃밭을 가꾸는 것도 안됩니다.
그저 하루 온종일 대리석으로 된 석상처럼 가만히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게 무슨 법이며, 무슨 웃기는 짬뽕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형식적인 안식일 규정을 보란 듯이 산산조각 내십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반대 받는 표적이 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그 어떤 형식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갖은 법이나 규정에 앞서 한 인간 존재를 더 중요시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당신 앞에 서 있는 한 인간 존재가 이런저런 규정에 매여 힘겹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충만히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일치의 중심 - 참 권위의 예수님을 닮읍시다>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시편 31,20ㄱ)
요즘처럼 나라 걱정 많이 하는 분들을 만나기는 생전 처음입니다.
면담 고백성사 때도 자연스레 나오는 나라 걱정 이야기들입니다.
어제도 대전에서 40대, 청주에서 30대 초등학교 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뉴스입니다.
역시 오늘 밤도 기상하여 집무실에 들어와 어제처럼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만세육창 후 강론을 씁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면담 고백성사 후 보속으로 말씀처방전을 써드린 후 보속 하나 더하여 애국가 1절을 부르도록 합니다.
들을 때 마다 감동이요 부르는 이도 마음 차분해지는 분위기입니다.
아, 정말 “일치의 중심”이 되어 나라와 국민을 섬기고 사랑하여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참 권위를 지닌, 기도하는 겸손하고 지혜롭고 정의롭고 용기있는 나라 지도자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나라 세우기는 시간 오래 걸려도 나라 망해 무너지기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일치의 중심-참 권위의 예수님을 닮읍시다-”로 어제 이미 정해 놨습니다.
교회공동체 역시 일치의 중심은 예수님이라 하지만 가시적 중심의 장상인 지도자의 리더십은 공동체의 성장과 발전에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교회 공동체뿐 아니라, 나라 공동체, 가정 공동체등 모든 공동체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일치의 중심이 되는 분의 역할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말그대로 참권위의 핵심인 섬김의 리더십이, 사랑과 지혜를 겸비한 리더십이 중요합니다.
교회공동체로 말하면 궁극의 일치의 중심은 예수님을 날로 닮아가는 지도자요 공동체의 성원들이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입니다.
어제는 뒤늦게야 깨달음처럼 참 반갑고 기쁘고 고마운 성모님 축일임을 화들짝 놀라 깨닫고 각오를 새로이 했습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할 때는 마음에 와닿지 않았는데, “어머님 생신”이라 말을 바꾸니 즉시 마음에 와닿으며 정말 성모님은 영원히 내 어머님이란 생각에 참 반갑고 기뻤습니다.
효성스런 자녀로서 날마다 어머니 생신처럼 지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어머님 은혜라는 동요도 듣고 불러봤고 고인이 된 돌아가신 육친의 어머니도 생각났고, 예전 어머니를 그리며 일부 대목도 떠올랐습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 지만
나는 나는 높-은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애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넓-은 게 또 하나- 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바다 그보다도 넓은 것-같애”
늦게서야 성모 마리아 어머니 생신임을 깨달아 참으로 오랜만이 어머님 은혜 동요를 불렀고 성모 마리아 어머님을 연상하며 산책중 자주 불러 드려야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더불어 나이 들어갈수록 그립게 떠오른 육친의 어머님 생각에 예전 글 일부도 나눕니다.
“어머님은 전형적인 조선 여자 같은 분이셨다
애교나 아양은 거의 없었지만
강인한 의지에 아주 지혜로운 분이셨다
심한 밭일에 몸 많이 피곤하여
밤에 끙끙 앓으셔도
아프다는 내색 하나 않으셨다
아버지 원망하는 말 하나 들은 적 없고
큰 소리 내셔서 다투거나
화내신 적 한 번도 본 적 없다
그 흔한 종교나 신앙없이도
한결같이 사셨던 내 어머니
삶자체가 기도였고 신앙이셨다
이리저리 감정에 연약하게 흔들렸던 분이셨다면
그 험한 세월에
다섯 남매 어떻게 키웠을 것인가
‘외롭다’ 거나 ‘그립다’거니
감정 표현 없이도
따사로운 남편 사랑 없이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가정을 지켜오신 내 어머니”
참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라면 누구나 예외없이 예수님은 물론이고 가톨릭 교회의 일치의 중심의 되시는 참 권위의 성모 마리아 어머님을 인정할 것입니다.
“큰일 났구나! 이를 어쩌나 나라가 무너지겠다!”
윤간우 녹색병원 직업환경의학 과장의 “2023 교사 직무 관련 마음 건강” 실태 조사 결과를 인터뷰한 내용을 출력하여 정독한 결과, 저절로 쏟아진 탄식이었습니다.
“살려주세요!”
실태조사에 응한 교사들의 주관식 답변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마디였다 합니다.
일반 성인 대비 4배 많은 38.3%가 심한 우울을 겪고 있으며, 16%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합니다.
교사들의 업무 부담 요인 중 수업은 3.2%에 불과했고, 학부모 상담 민원(37.5%) 및 생활지도(28.4%)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과장의 언급도 참 심각했습니다.
“교직생활을 하며 예상과 다른 일로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스스로가 무너지고 갈수록 스트레스가 커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도를 통해 해결하기는 너무 늦습니다.
우선 위험에 처한 교사들을 빨리 도와야 합니다.
일반인은 가벼운 우울 증상이 20% 정도고, 심한 경우가 8-9%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는 가벼운 우울이 60%이고, 심한 우울은 40% 가까이 나왔으니까요.
서비스직 노동자의 경우에도 대개 15-20% 정도입니다.”
저에겐 실로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70년대 8년동안 아이들 교육에 전 삶을 걸었던 “20대 후반-30대 초반까지” 초등학교 교사시절에는 꿈에도 상상치 못할 오늘의 지옥같은 교육 현실입니다.
미래의 주인공들인 어린이 교육을 책임진, 누구보다 정신 건강하고 학교에서의 아이들 공동체의 참 권위를 지니고 일치의 중심이 되어야 할 교사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니, 이들을 그대로 보고 배울 어린이들이 어른이 될 미래의 모습은 어떻겠는지요!
악순환입니다.
이런 교사들로부터 훌륭한 제자들이 나오기 힘듭니다.
정말 교사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처우 개선이 절박하며, 교사들 역시 분발하여 내외적으로 강인해져야 할 것입니다.
정말 치열한 영적전쟁의 싸움터에서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 나라의 총체적 위기요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는 나라의 실상을 보는 듯 했습니다.
현재를 보면 미래를 예상할 수 있습니다.
나무처럼, 평생 잘 길러내는 인재여야 하는데 참 난감한 현실입니다.
“이를 어쩌나, 큰일 났네!”
그래서 한밤중 일어나 나라 걱정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분발하여 일어나야 합니다.
각자 제 삶의 자리에서 일치의 중심이 되어 참 권위를 지닌 삶이 되도록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구체적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나라 사랑입니다.
삶은 평생 영적전쟁이요 평생 학교입니다.
믿는 이들은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평생 전사요, 죽어야 졸업은 영원한 학생의 주님의 평생 학인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나와 싸워야 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우리의 일치의 중심이, 참 권위의 빛나는 모델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삶을 선택-훈련-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일치의 중심인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섬기는 것이고 기도하고 공부하는 것이요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지혜입니다.
이렇게 섬김의 사랑으로 예수님을 닮아갈 때 각자는 공동체 일치의 가시적 중심이 될 수 있고 저절로 참 권위도 은총의 선물처럼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각자 주인 의식을 지니고 지도자처럼 일치의 중심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외부의 공격을 막아주는 울타리가 되고 제자들의 곤궁한 처지를 이해하여 이들을 두둔해 주는, 공동체 일치의 빛나는 모델임을 보여주는 다음 참 권위의 주님이신 예수님 말씀입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얼마나 멋진 일치의 중심이자 참 권위를 지닌 다윗이요 예수님인지요!
이분들의 자유로운 처신을 통해 얼마나 하느님 마음에, 사랑에 정통해 있는지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신뢰와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는 자부심이 이런 자존감 높은 삶에 자유로운 처신을 가능하게 했고,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는 참 권위의 사람, 공동체 일치의 중심으로 만들어 줬음을 봅니다.
일치의 중심이자 참 권위의 사람, 바오로 사도의 권고 가르침도 참 적절합니다.
이대로 분투의 노력을 다해 훈련하여 습관화하면 우리도 각자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일꾼이자 참 권위를 지닌 일치의 중심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고, 나 바오로는 그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복음의 일꾼!
얼마나 멋진 칭호입니까?
정말 복음의 일꾼으로 살 때 저절로 참 권위를 지닌 일치의 중심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사람들인 우리에게 참 고맙고 자랑스러운 사실은 우리 삶의 좌표가 되고 일치의 중심의 모델인 참 권위의 성인들을 무수히 모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각자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일꾼으로, 또 참 권위를 지닌 일치의 중심으로 살게 하십니다.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시편 54,6)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이제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사이에 안식일 논쟁이 가시화됩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루카 6,1)
선교 여행으로 지치고 허기진 제자들이 예수님 뒤를 따라 밀밭 사이에 난 길을 걷다가 손에 잡히는 대로 밀이삭을 흝어 입으로 가져갔나 봅니다.
어찌 보면 별 의도 없는 자연스런 행동인데, 바리사이들 눈에는 추수 정도의 노동으로까지 보인 듯하네요.
그렇다면 그들에겐 분명 안식일을 거룩히 지내기 위해 손에서 일을 놓아야 하는 규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임에 틀림없겠지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
(루카 6,2)
두 존재 사이에 관계 맺음이 시작되면 처음엔 서로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을까?' 고민이 시작될 겁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후손들이 본격적으로 야훼 하느님을 "신"으로 모시면서도 그랬겠지요.
이집트의 파라오나 가나안의 바알처럼 자기들만의 "신"을 가져본 적이 없는 그들에게, 그래서 하느님께서 친히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거고요.
아직 하느님과의 관계, 하느님 백성으로서 피조물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에 맞게 내리신 규정들이 탈출기 중반부터 신명기까지 모세오경에 잘 나타나 있지요.
안식일에 무얼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도 실은 하느님을 더 잘 섬기고 모든 피조물과 더 조화로이 공존하라는 하느님의 의도가 담긴 조항입니다.
그 마음을 헤아린다면 그날 해서는 안 될 일보다 그날 해야 하고 허용하며 품어야 하는 일들에 대해 더 고민했겠지요.
아무튼 두 존재 사이에 시간이 지나고 관계가 깊어지면 서로에게 처음 제시한 규정은 차츰 희미해지게 마련입니다.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이미 존재에 새겨졌다는 관점에서 말입니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당연하고 익숙하리만치 몸과 마음에 배어들게 된 거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좀 더 정신과 마음으로 접근했더라면 그 긴 시간 동안 더 깊고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수많은 율법 규정이 불필요할 경지에 이르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신뢰 만땅, 사랑 만땅의 관계가 되면 서로 눈빛만 봐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니까요.
그리 되었다면, 척 하면 척! 두꺼운 율법 규정집을 치워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서만은 뼛속 깊이 남았을 겁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루카 6,5)
율법 조문이 주인이 되어버린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안식일 제도에 성자이신 예수님의 권위가 미치신다는 의미이고, 또 안식일이 회복과 해방의 날인 것처럼, 당신을 바쳐 온 인류에 참된 해방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알아듣건 알아듣지 못하건 말이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개의 시선을 관상합니다.
제자들이 하는 행동 너머로 그들 존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따사로운 사랑의 시선,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인 사람에 대한 존중 없이 행동만으로 올가미를 씌워 단죄하려는 차가운 증오의 시선...
이 시선이 곧 그 사람의 마음이고 영혼입니다.
"여러분은 한때... 그러나 이제..."
(콜로 1,21)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 신자들의 과거와 현재, 즉 비포(Before)와 에프터(After)를 이야기합니다.
율법의 지배 아래, 사랑으로 애끓는 하느님의 마음보다 심판자의 칼날을 염두에 두고 살 때는 엄벌에 처하는 "심장 없는 신" 하나를 우상으로 삼아 섬기며 사는 꼴이기에 실제로는 진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원수로 지내게" 됩니다.
하지만 당신 아들을 내주시어 세상과 화해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이제 사람의 아들의 공로로 우리는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진짜 하느님, 심장을 지니신 사랑과 자비의 아버지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 되면 더 이상 세세한 율법 조항에 얽매여, 해도 되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따지느라 심장을 빼놓고 살지 않아도 됩니다.
그때에는 어찌 해야 될지 사랑이 답을 알려 줄 것입니다.
사랑이 길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사랑이 원하는 걸 하면 됩니다.
마음 저 깊은 곳에 머무르시는 주님께서 우리 존재 안에서 울려 주시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따뜻한 예수님의 시선에 우리 눈길을 포개어 사랑이 알려준 답을 찾아가면 됩니다.
율법의 자리에 사랑이 들어서면 비포(Before)와 에프터(After)는 사뭇 달라질 겁니다.
벗님도 그렇게 되실 겁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지난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신부님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꿈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32년 전 이맘 때 저는 첫 본당에서 새 사제가 되어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제 의식의 저편에서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다른 꿈들도 있지만 가끔 이렇게 미사를 봉헌하는 꿈을 꾸곤 합니다.
새 사제의 첫 미사 강론은 대부분 ‘아버지 신부님’이 해 주십니다.
아버지 신부님은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 준 신부님을 말합니다.
아버지 신부님의 강론은 사제생활의 이정표가 되기 마련입니다.
신부님들은 크게 4가지의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첫 번째는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제는 샘이 깊은 물과 같다고 하십니다.
뿌리 깊은 나무와 같다고 하십니다.
유혹과 갈등이 찾아와도 이내 이겨낼 수 있다고 하십니다.
두 번째는 말씀입니다.
사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늘 말씀을 가까이 하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는 건강입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기 마련이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몸을 위해서는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네 번째는 친교입니다.
사제는 동료사제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살아야 하듯이 사제는 교우들과 친교를 이루면서 지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슴이 사나운 사자에게 잡히는 것은 무리에서 떨어져 있을 때입니다.
우리의 뇌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일을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반응입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고, 지체할 수 없는 반응입니다.
우리의 심장, 허파, 신장, 혈관은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습니다.
뇌가 즉각적이고 직관적으로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자율신경계라고 합니다.
위험에 처하면 우리의 몸은 생각하지 않고 즉시 피하기 마련입니다.
오랜 시간 뇌는 이런 기능을 통해서 사람이 생존할 수 있도록 진화하였습니다.
이것을 본능과 직관이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뇌는 공동체를 이루면서, 문화와 문명을 키워가면서 또 다른 일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민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에만 머물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방 정리를 하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며칠씩 생각만 하기도 합니다.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전화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생각에 머물기만 하면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는 발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고, ‘기쁜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마귀를 쫓아내는 것,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생각에만 머무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정리해 주십니다.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은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정하였습니다.
안식일에 해서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불가에서는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계명과 율법이라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안식일의 규정도 버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직원회의를 할 때입니다.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이유를 찾는 직원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직원이 있습니다.
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직원이 더 고마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찌 보면 ‘해결사’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안 되는 방법을 찾는 바리사이가 되기보다는 되는 방법을 찾는 주님의 제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베네딕토 성인은 서방 수도 생활의 초석이 담긴 ‘규칙서’를 쓰셨습니다.
그는 수도원을 세웠고, 그 안의 수도자들에게 절대적으로 금지한 한 가지가 규칙서에 담겨 있습니다.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을 죽이는 것? 교회에서 도둑질하는 것? 여성과 함께하는 것? 기타 십계명에 어긋나는 것들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절대적으로 금지한 한 가지 규칙은 바로 ‘불평’입니다.
규칙서에는 그 내용이 이렇게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어떠한 이유로든지, 어떤 말이나 혹은 표시로라도 불평의 악을 드러내지 말 것이며, 만일 이런 자가 있거든 더욱 엄한 벌을 내릴 것이다.’
(규칙서 제34장)
불평만큼 자신을 망가뜨리는 일이 있을까요?
불평 속에 있으면 제대로 행동하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이 역시 죄 안에 빠지게 만듭니다.
또 불평이 커질수록 이를 멈추게 할 방법도 없어집니다.
스스로 멈출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이 안에 하느님의 일이 정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평하면서 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으니, 그 일 자체가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저 역시 불평을 자주 했음을 반성합니다.
내 안에 주님의 자리가 아닌 악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불평보다 인내와 호의를 키울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불평 섞인 의견은 나 혼자만 알고 있다면 어떨까요?
바리사이 몇 사람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제자들을 보고는 예수님께 불평 섞인 말을 합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겨우 밀 이삭 몇 개 뜯어 먹었다고 시비를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 불평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편에 서지 않고, 또 특별한 권위로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불평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철저하게 예수님 반대 편에 서면서 하느님의 자리를 만들지 못하게 됩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이야기하지만, 행동으로 하느님과 함께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참으로 많은 불평 속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고 있습니다.
불평의 악을 통해 마귀의 자리만을 더 크고 화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평을 줄이고 대신 인내와 호의의 마음을 키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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