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무늬의 뿌리는 곡옥曲玉이다?
지난번에 우리는 강녕전 월대 소맷돌에 새겨진 삼태극 무늬의 기원(뿌리)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발견한 것은 무척 고무적인 사실이었습니다. 즉 우리 조상들은 중국 한족들이 11세기에 들어와 태극논리를 정립하기 훨씬 전에 이미 태극무늬를 애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보다 무려 7세기 즉 700년 이상이나 앞선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태극무늬를 그렇게 일찍부터 애용했던 증거들은 6 -7 세기 신라시대에 나타납니다(보검 장식과 감은사터 장대석). 그 보다 더 이른 시기의 증거로는 4세기 경의 가야 왕릉에서 출토된 파형동기巴形銅器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태극무늬(파형문巴形紋)들은 근원적으로 곡옥曲玉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중국 철학자들이 춘추전국시절부터 장황하고 그럴듯하게 설명해 놓은 음양론이나 태극도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새로운 주장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태극무늬는 우리 조상들이 북방유목민족이었던 시절, 그들의 주술적 신앙인 샤머니즘의 표상인 곡옥曲玉(곱은 옥)에 그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곡옥 과 태극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한마디로 <용맹勇猛> 과 <벽사僻邪>. 그것 입니다.
그 증거들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감은사터 태극무늬(7세기) : 경북 월성 감은사는 AD682년(신라 신문왕2년)에 창건되었는데 그 장대석에 태극무늬가 석각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얼핏 보기에는 2태극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4태극 같기도 합니다. 제 눈에는 아무래도 4태극으로 보입니다. 아래 그림-1 참조.
둘째, 신라보검 삼태극 무늬(6세기) : 경주 대릉원에서 출토된 보검의 칼자루에 새겨진 것인데, 또렷한 삼태극 무늬가 세 개 나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아무리 늦춰 잡아도 AD514년 이후로는 내려갈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감은사 것보다도 170년 정도 앞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라보검은 중앙아시아 신장성 키질벽화 속의 인물이 차고 있는 보검과 붕어빵처럼 닮은 것이어서 같은 계통의 연결선상에 놓이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래 그림-2 참조.
셋째, 금관가야 파형동기(4세기) : 김해 대성동 13호분에서 출토된 파형동기(아래 그림-3 참조)은 누가 보더라도 4태극무늬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고분은 금관가야의 왕릉 급 무덤으로, 그 시대는 AD4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감은사 것보다 무려 350년이나 앞서는 것이지요. 이 유물은 함께 출토된 동복이 입증하듯이, 북방유목민족의 문화계열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넷째, 위에서 보듯이, 태극무늬는 신라와 가야의 왕릉에서 출토되는 유물이고, 그 근원은 북방유목민족의 Scytho-Siberian (스키타이-시베리아)문화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태극무늬의 기본 모형은 스키타이-시베리아 문화의 지표적 유물인 곡옥의 모양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경주의 신라 왕릉에서 출토된 금관에 주렁주렁 달린 곡옥 말입니다.
아래 그림-4의 곡옥의 모양과 그림-5의 양태극 모양을 비교해 보시면 쉽게 납득이 되실 것입니다.
[곡옥의 유래와 의미]
곡옥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어머니 자궁 속에 웅크리고 있는 태아의 형상이라는 웃지 못 할 학설도 있습니다. 저는 곡옥은 <맹수의 송곳니>에서 유래한다는 정설만을 채택합니다.
수렵에 삶을 의존하던 선사시대 유목민들에게 최대의 공포대상은 맹수였었고, 그 맹수의 포악의 상징이요, 두려움의 초점은 날카롭기 그지없던 송곳이빨이었겠지요.
그런 맹수를 때려잡아 제압할 수 있었던 용사 중의 용사는 용맹함과 힘의 징표로 그 송곳니를 뽑아 허리에 달고 다니든가 목에 걸어 치장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맹수들이 그것을 보고 다시는 덤벼들지 못 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지요.
그 <송곳니>가 발전한 장식물이 곡옥이 된 것이고, 따라서 곡옥은 용맹, 힘, 상무尙武, 권위, 왕권의 상징이 되었고, 요귀나 사악함을 물리칠 수 있는 <벽사>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송나라 때 주돈이가 태극도형을 제창하고, 주자의 성리학도들이 태극이론을 정립한 것은 11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 훨씬 이전에 우리민족의 정서의 밑바닥에는 멀리 태고 적 선사시대의 습속이 앙금처럼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그 증거물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 김해시 대성동 금관가야 왕릉에서 출토된 4태극 문양의 파형동기라는 것이 제 주장이지요. 주돈이의 태극도설보다 무려 700년 이상이나 앞선 것입니다.
(요주의 - 이 글에서 주장하는 결론은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인 사견일 뿐 입니다. 학계에서 인정되거나, 학술적으로 검증된 것이 절대로 아닌 만큼, 가벼운 이야기 거리로서 받아주시고, 참고로 하시면 됩니다. 아하! 그렇게 보는 사람도 있구나!!하고 말입니다. 너무 큰 의미를 두고 보시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림-1 감은사 태극 그림-2 신라보검 3태극

그림-3 파형동기 그림-4 신라 금관총 출토 곡옥

그림-5 양태극 무늬

첫댓글 아하, 그렇구나!
선생님의 好學, 探究정신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덕분에 저 같은 무식꾼의 머리가 조금 씩 채워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