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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7~48장은 ‘바벨론을 향한 나쁜 소식’입니다.1) 이사야 40장의 ‘예루살렘을 향한 좋은 소식’과 대칭 병행됩니다.2)
이사야 48장은 “너희는 바벨론으로부터 나오라”는 명령입니다.3)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명예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풀무에서 연단하신 후에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4)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강 같은 평화가 흘러내릴 것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5)
1. 하나님께서 백성을 바벨론에서 해방시키실 것입니다.
이사야 48장 1-8절
이는(Because)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완고한 자들이고(are stubborn) 그의 목은 철의 힘줄이고 그의 이마는 청동처럼 단단함입니다(사 48:4).
4절은 5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행동의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스라엘의 이마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꿰뚫을 수 없습니다.6) 우상숭배자는 우상의 철과 청동처럼 굳고 마음이 완고하게 됩니다.7)
시편 115편 4-8절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8)
그것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 안에 신뢰하는 모두가 그들과 같을 것인데 우상들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신뢰하는 모두가 우상들과 같을 것입니다. 우상들에게 해당되는 일이 우상숭배자들에게도 해당된다는 말씀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우상을 닮는 최후는 생명이 없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그 의식으로는 우상을 닮고 싶어 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예배 대상인 우상을 닮고 맙니다. 우상숭배자들이 그 우상을 닮는 것은 우상숭배의 벌이기도 합니다.9) 생명 없는 형상을 예배하는 자들은 그 형상처럼 생명 없게 됩니다.10) 콧대 높은 마음을 가진 자는 모두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습니다.11)
콧대 높은 것이 교만이고 교만은 곧 자아를 숭배하는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와 마찬가지로 교만함을 미워하십니다.
사람은 자기가 예배하는 우상 배후에 자리 잡은 귀신을 따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우상과 하나가 되고 우상과 연합하게 됩니다. 우상숭배자들은 그들이 헌신하는 우상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12)
우상숭배자들은 자신이 섬긴 형상인 짐승을 통하여 벌을 받습니다. 우상숭배자들은 그들의 우상 배후의 악마에 의해 형벌을 받습니다. 우상과 가까이 어울리는 자들에게는 커다란 피해가 임하게 됩니다. 우상 제작자와 숭배자는 그 우상과 똑같아집니다.13)
이스라엘이 부패한 때에 더 이상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었고, 그들은 우상들의 아들들인 된 것입니다.14)
그들이 그 악마들에 희생 제물을 바치며 하나님께 하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한 새로운 신(god)들입니다(신 32:17).
그들은 우상의 아들들이 됨으로써 부모인 우상을 닮게 되었습니다.15) 그들은 그들의 영광을 수소의 모형으로 교환한 것입니다(시 106:20). 이스라엘은 수소를 닮은 수소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유대 전통은 이스라엘이 황소를 흉내 내어 춤을 추었다고 이해하는데, 그들은 우상을 흉내 내고 모방을 통하여 그 우상을 닮아 간 것입니다.16) 송아지를 만들었던 이스라엘은 고집 센 황소의 완고함을 닮아 갔습니다.
이스라엘은 들었고 그 모두를 지각하여야 하며 알리지 않을 것입니까, 새로운 것들과 보호되는 것들과 모르는 것들을 듣게 만듭니다(사 48:6).
“새로운 것들”은 개역에 “새 일”로 번역됩니다(사 42:9, 43:19, 48:6). 이사야에 “새로운 일(들)”은 여러 번 나옵니다.
이사야 48장 6-11절은 “새로운 일들”에 대한 내용입니다.17)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일을 행하실 것이니 지금 그것이 싹이 틀 것이며 하나님께서 황야 안에 길을, 황무지 안에 강들을 놓으십니다(사 43:19). 지금 길이 없고 물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절망하지 말아야만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이 없는 메마른 땅에 물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메마른 삶도 기름진 삶으로 바꾸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것부터가 이와 같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매우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일들”을 듣게 하십니다(사 48:6). 보호된(hidden) 일들이고 그가 몰랐었던(have not known) 일들입니다.
“새로운 일들”은 새로운 상황이 싹트는 것과 연관됩니다(사 43:19).18) “새로운 일들”은 아직 예고되지 않은 일들입니다.19)
“보호된 일들”은 영어 성경들에 “숨겨진(hidden) 일들”로 번역되었고, 한국어 개역 성경에는 “은비한 일”로 번역되었습니다.
“숨겨진 일들”은 사람이 모르게 하나님에 의해 간수된 일들입니다.2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알지 못한 새로운 일들을 그에게 듣게 하십니다.
지금 그것들이 창조함을 받고 그때부터 아니고 그는 듣지 못하였으니, ‘내가 그것들을 알았었다’고 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사 48:7).
“새로운 일들”은 포로나 바벨론으로부터의 구원에 제한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을 그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시는 일과 관계된 것입니다.21)
“새로운 일들”이 새로운 이유는 이 일들이 지금 창조된 까닭입니다.22) 사람이 “새로운 일들”을 듣는 때에 감격하여 알릴 수밖에 없습니다.23)
또 듣지 아니하였고 알지 아니하였고 그의 귀가 열리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불신실하게 행하고 ‘위반하는 자’라고 배로부터 완전히 불러졌음을 하나님께서 참으로(well) 아셨습니다(사 48:8).
우상숭배자들은 그 숭배하는 우상들 같이 되며 그것들을 닮게 됩니다. 그들은 우상처럼 듣지 못하고 우상처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사 48:8). 귀가 있어도 이해할 수 없으며, 많이 안다고 자부하나 근본을 모릅니다.
“열다”라는 말(파타흐)은 “열리다”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24)
그는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것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였고 “게다가” 그의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정도로 열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새로운 창조에 대하여 듣지 못하였습니다.25)
8절의 “이는”(for)은 “참으로”(well)로 번역하여야 적절하겠습니다.26)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모태에서부터 위반자임을 아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 백성을 바벨론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사야 48장 9-10절에 “나의 이름을 위해 내가 나의 코를 길게 하고 나의 찬양에 내가 제지하나니 너를 잘라내게 만들지 아니하기 위해서라.너를 정련하고 은처럼 아니하며 고생의 용광로 안에 선택하였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48장 9-11절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새로운 일들”을 계획하십니다.27) 하나님께서는 “나의 이름을 위해”(For my name's sake)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은 성경에 자주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위해 그의 코를 길게 만드신다고 하십니다.
“나의 코를 길게 만들다”가 “나의 격노를 미루다(delay)”로 번역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위해 그의 격노를 미루시는(delay)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나의 찬양을 위해”(for my praise)라고 하십니다. 그는 그의 찬양을 위해 제지하시니 잘라내지 아니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찬양을 위해 그의 격노를 제지하신 것입니다.
예배에는 측량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찬양이 있습니다.28)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과 그의 찬양을 위해 그렇게 자비로우십니다.29) 하나님께서 그의 격노를 제지하심을 아는 자들은 그를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정련하셨고, 고생의 용광로에 선택하셨습니다(사 48:10). 하나님의 백성이 고생의 용광로 안에 정련되어야 참된 신앙인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된 것은 그들의 죄악에 대한 형벌이었습니다.30) 그러나 비극과 포로 생활 중에도 하나님의 목적이 존재하였습니다.31)
불순물이 섞인 광석을 녹여서 순수한 금과 은을 얻는 제련의 과정처럼 하나님께서는 순수한 신앙인을 기르시려고 하나님의 백성을 정련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을 고생의 용광로에 넣으셔서 시련을 겪게 만드십니다.3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광로 안에 계속 두지 아니하십니다.3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은처럼”, “은과 같은 방식으로” 정련하신다면 그 전체가 찌꺼기인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남지 아니할 것이었습니다.34) 하나님께서는 모든 불순물이 다 제거될 때까지 하지 아니하십니다.35)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련하신 때에 그들은 은 같지 아니하였습니다.36)
“고생의 용광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였음을 가리킨 것이며 이것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포로였음을 가리킨 것일 수 있습니다.37)
이스라엘은 극한 궁핍 가운데 있던 때에 하나님께 선택되었습니다.38)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유익에 의해 그의 백성을 선택하신 것입니다.39)
이사야 48장 11절에 “나를 위해 나를 위해 내가 행할 것이니(will do) 어떻게 그것이 더럽혀질 것임이냐(for how can my name be profaned) 나의 영광을 다른 자에 내가 주지 아니할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 자신을 위해 행하십니다(사 48:11).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위해 행하시며 그의 찬양을 위해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키십니다.
목사들 중에 자기 욕망을 하나님을 위해 이루어 달라는 자들이 있는데 하나님을 위해 자기 욕망을 이루어 달라는 목사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며 성경을 아전인수(我田引水)로 인용하는 목사들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가증스러운 거짓말의 입이 신속히 막히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행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사람의 욕망이 아닌데, 원어에 없는 목적어를 어떤 성경은 적절히 “이것”(this)으로 번역합니다. 그가 행하실 것은 앞에 말씀하셨던 “이것”이니 구원하시겠다는 내용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그의 백성을 반드시 구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욕망을 행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분에 넘치도록 예배당을 지어 놓고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행하셔서 문제를 해결하시기를 구하면 안 됩니다. 강동구 수ㄹ교회 목사가 믿음을 강조하면 이와 같은 일을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목사의 야망을 위한 것인지 분간이 어렵습니다. 야망을 위한 것인데 하나님을 위한다고 자기 자신을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는 믿음으로 했다지만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며, 벼랑 끝에서 뛰어내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붙잡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이 큰 믿음이라면서 스스로도 속고 교인들도 속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행하실 때에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인데, 내가 문제를 벌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해결하여 달라면 협박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뒤치다꺼리하는 도우미 정도로 아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고 기도를 하나, 그 속내를 들여다볼 때에 ‘하나님을 위해’가 아닌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위해 행하시는 이유가 이어져서 나오고 있는데, 그것이 더럽혀지지 아니하기 위해서입니다.
“더럽히다(defile)”는 히브리어(할랄)는 “모독하다”(profane)인데 한국어 개역 성경은 “욕되게 하다”로 번역하였습니다.
더렵혀지지 아니하는 주어는 3인칭 단수며 자세히는 생략되어 있는데 번역본들은 “나의 이름”(my name)이라는 주어를 첨가하여 번역합니다.
히브리어 사본에는 없는 주어의 첨가는 70인경의 번역에 따랐습니다. 쿰란 사본에 따라서 1인칭인 “나 자신”(myself)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명성을 침해할 일은 무엇이든 일어나지 아니할 것입니다.40)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실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온 땅을 가득 채우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입니다(사 6:3). 하나님께서는 온갖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으로써 이 진리를 입증하실 것입니다(사 42:8, 신 32:27). 마침내 그 백성은 하나님께 충성을 바치겠다고 결심해야만 합니다.41)
이사야 48장 12-19절
이사야 48장 12-22절은 ‘미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한 내용입니다.42)
12-15절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43)
이사야 48장 12절에 “들을 것이라 나의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8장 12절 후반부에 “나는 그니 나는 처음 참으로 나는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니”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와 같은 말입니다(출 3:14).44)
역대기에 왕들의 처음과 마지막 행적이 기록되었습니다(대상 29:29). 예언자의 글과 예언 및 선견자의 묵시 책에 기록되었습니다(대하 9:29). 그 왕들의 기록 위에 기록되었습니다.45)
처음이신 하나님께서는 예전처럼 이스라엘의 땅에게 하찮게 만드셨고 마지막이신 하나님께서는 갈릴리를 영화롭게 만드셨습니다(사 9:1).
이사야 41장 4절에 “누가 하였고 그 세대들을 부르는 자가 행하였느냐 나 야훼가 처음이고 마지막과 함께(with) 내가 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이시고 마지막과 함께하시는 존재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4장 6절에 “나는 처음(first)이고 마지막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알파와 오메가시며 하나님께서는 처음과 마지막이십니다.
앞에 41장 4절에서 “마지막”은 마지막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이사야 44장 6절에서 “마지막”은 하나님의 본성에 관련된 것입니다.46)
하나님께서 “나는 처음이며 참으로 나는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른 대상들과 구별하시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출애굽기 3장 14절의 “나는 곧 나다”는 것에 연결됩니다.47)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처음과 마지막이 되신 바로 그분이십니다.48)
과연 그의 손이 땅을 설립(設立)하였고 그의 오른손이 하늘을 폈으며, 하나님께서 그것들에 부르시는 때에 그것들이 일제히 섭니다(사 48:13). 그 땅을 설립하고 그 하늘을 편 그 능력의 손이 그의 백성을 구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후 자신을 창조주로 소개하십니다.49)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유일한 창조주십니다.50)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다 주관하시는 것입니다.51)
“마지막”이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변함이 없으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무엇이든 성공적으로 끝맺어질 것입니다.52)
“처음”이신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방해되지 않는 자유를 가지시고 “마지막”이신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은 빛을 발하는 황금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주권적으로 반드시 결과가 생겨나도록 만듭니다.53) 하나님의 영향력의 범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54)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귀 기울여야 하는지의 이유입니다.55) 모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나타나고 사라지는 피조물입니다.56)
하나님께서 자신을 땅을 설립하고 하늘을 편 주체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부르시는 때에, 천지가 함께 차려 자세로 섭니다.57)
모두 소집되고 들어야 하니, 누가 그들 안에 이것들을 알린 것인가요? 야훼께서 그를 사랑하시며 그가 그의 즐거움을 바벨론 안에 행할 것이고 그의 팔이 칼데아 사람에 대하여 있을(be against) 것입니다(사 48:14).
본문 48장 14-15절은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리라는 내용입니다.58)
본문 48장 14-15절은 고레스 계획(project)을 확증하신 것입니다.59)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일 수 있습니다.60) 하나님께서는 당면한 임무를 위하여 고레스를 선택하신 것입니다.61) 바벨론을 향하신 하나님의 고레스 프로젝트는 반드시 성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장래 일들을 알리시는 점에서 우상들과 다르십니다.62)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시며 그가 그의 길을 형통시킵니다(사 48:15).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이끄시며 그가 그의 길을 형통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신 자들을 인도하셔서 형통을 보장하십니다.63)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인도하시고 그를 형통하게 만드실 것입니다.64)
우리는 그에 가까이 가며 우리는 이것을 들어야(listen to) 할 것이니, 그가 비밀에 말하지 아니하시고 있기에 시간부터 거기에 그가 계셨으며, 그리고 지금 주 야훼께서 그와 그 영(Spirit)을 보내셨습니다(사 48:16).
이 모든 일이 실제로 생길 때에 하나님께서 바로 거기에 계십니다. 알 수 없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어지는 메시지를 말하는 자입니다.65)
“나”를 칼뱅은 ‘예언자’, 영(Young)은 ‘메시아’로 해석하였습니다.66) 말하는 자는 42:1 이하에서 소개된 뛰어난(par excellence) 그 종이며 뒤의 여러 장들에서 보다 선명하게 묘사될 것입니다.67)
“나”는 앞에 14-15절에 언급되었던 ‘고레스’라는 견해도 있습니다.68) 그러나 고레스의 사역은 단지 그 종의 오실 것에 대한 준비일 뿐이며, 고레스가 이스라엘에게 영적인 승리와 참된 평화를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 종은 큰 구원을 성취하실 하나님의 참된 도구가 되실 분이십니다.69) 그 종은 우리의 영혼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이사야에는 성령의 수여에 대한 언급이 9번 나옵니다.70) 그 중에서 5번이 메시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71)
야훼 이스라엘을 되사는 자 이스라엘의 성별된 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를 가르치며 갈 길에서 인도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사 48:17).
이사야 48장 17-22절은 ‘하나님의 일들’입니다.72)
이사야 48장 17-19절은 ‘강 같은 평화를 놓친 이스라엘’입니다.73)
우리는 룻기에서 가까운 친척이 되삼에 대하여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사람이 가난하여서 땅을 팔았어도 그 판 땅을 되살 수 있는 제도입니다.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그 땅을 되살 수 있고 친척이 되살 수도 있습니다. 둘 다 불가능할 경우, 희년(禧年)이 되면 그 땅을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땅 독점을 방지하고 조상의 땅을 계속 이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인에게 빚을 지고 종으로 팔릴 수도 있었습니다. 이럴 경우 형제나 삼촌이나 사촌이 빚을 갚고 그를 되사는 것입니다.74) 되사는 자는 친척을 돌보고 옹호하며 변호인도 되었습니다.75)
성경은 그 백성을 “되사는 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기록합니다. 이이사야에 “구속자”라고 번역된 말이 “되사는 자”라는 의미입니다.76)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77) 하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삶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지침입니다.78)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들에 청종하였으면 좋으련만(If only), 그의 평화가 강 같고 그의 공의가 바다의 파도 같을 것입니다(사 48:18).
하나님께서는 본질의 면에서나 행동의 면에서나 진정한 하나님이시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들에 청종하여야 하였습니다.79)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러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사야는 그들이 청종하였더라면 일어났을 일을 상기시켜 줍니다.80)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평화를 내팽개쳐 버렸습니다.81)
하나님의 계명에 청종한 자의 평화는 그 강과 같이 됩니다(사 48:18).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누군가는 질문하기를 ‘강이 넘실거리는데 어떻게 평화가 강 같은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평화가 강 같다”는 비유의 이미지를 잘못 이해하였습니다. 강조점은 강이 넘쳐나는 모습이 아니라, “넘쳐난다”는 풍부에 있습니다.
평화는 적대적 행위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전반적 행복의 상태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비롯되고, 공의와 짝을 이룹니다. 많은 주석자들은 “공의”가 ‘구출’이나 ‘구원’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지만 인접 문맥의 어떤 내용도 이와 같은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아니합니다. “공의”는 이 구절에서 “옳은 행동”이라는 일반적인 뜻을 지닙니다.82)
그의 씨가 그 모래 같이 되고 그의 내장의 소산들이 그 낱알들과 같고 그의 이름이 잘라내어지지 않았고 파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사 48:19).
그의 씨가 모래처럼 많아지리라는 약속이 실현되리라는 것입니다.83) 그의 씨가 모래 같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증표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성취입니다(창 15:5, 22:17).84)
창세기 15장 5절에 “너는 하늘에 바라보고 그 별을 셀 수 있으면 세라, 너의 씨가 이와 같이(so)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씨를 모래처럼 많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창 22:17). 우리는 이것을 육체적인 자손이 아니라 영적인 자손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뒤에 영적인 자손들이 많다면 천국에서의 참된 복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자손들을 낳고 키우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날에 죄와 죄의 노예 상태에서 예수님의 피를 통하여 구원받은 바다의 모래같이 무수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85)
자녀가 성장하여서 생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의 창조는 삶의 본질에 대한 하나님의 교훈을 경청한 데서 비롯된 결과입니다.86)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계명들에 청종하는 삶을 삶으로써 복을 받으면, 우리를 통하여 구원 영생 얻게 될 많은 영적인 자손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백성을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이사야 48장 20절에 “너희는 바벨론으로부터 나오라(Go forth from), 너희는 칼데아 사람으로부터 도피하라(flee from)”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48장 20-21절은 46~48장을 마무리 짓는 부분입니다.87)
그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실 것입니다.88)
“나오다”는 출애굽 용어입니다(민 22:5, 24:8, 신 9:7, 사 48:20).89) 바벨론으로부터의 이주를 표현할 때에 이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90)
롯이 소돔으로부터 나온 것 같이 멸망할 성읍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장래 멸망할 성읍에 머무르면, 그 성읍이 멸망할 때에 함께 멸망합니다. 바벨론과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기 위해, 바벨론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나왔듯이 바벨론으로부터도 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바벨론으로부터 나오라”는 명령은 구원의 말씀입니다. 죄인들은 사탄의 노예 생활과 포로 생활로부터 나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요한계시록에서 드러납니다(계 18:4-5).91) 하나님의 백성은 바벨론의 길과 사고방식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92)
그가 그들을 가게 하신 그 황폐들 안에 그들이 목마르지 아니하였으며 그가 물을 반석으로부터 그들을 위해(for) 흐르게(flow) 만드셨고(made) 그가 반석을 쪼개셨고(split the rock) 물이 흘러나왔습니다(사 48:21).
본문은 출애굽 전승을 상기시키면서 황야의 사건을 부각시킵니다. 바벨론으로부터 나와서 황야의 길로 접어드는 단계기 때문입니다.93)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이집트의 땅에서 나와서 황야의 길을 걸을 때에, 하나님께서 반석을 쪼개시고 물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바벨론의 땅에서 나와서 황폐한 곳을 걸을 때도, 하나님께서 반석을 쪼개시고 물이 흘러나오게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목마르자 반석으로부터 물을 흐르게 만드셨듯이 그와 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그의 백성에게 있게 될 것입니다.94) 물을 솟아나게 하셔서 우리의 갈증을 풀어 주실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고 황폐한 곳들을 향하여 출발할 수 있습니다.95) 하나님께서 가게 하시는 곳이면, 어디서라도 목마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수(生水)시며 예수님께로 나아와 물을 마시는 자들은 목마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 안으로 믿는 자는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그가 주실 물에서 마신 자는 결코 영원 안으로 목마르지 아니하겠으나 그가 주시는 물은 그 안에 영생 안으로 솟는 물의 샘이 됩니다(요 4:14).
야훼께서는 말씀하셨기를, ‘악인들에게 평화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내게 강 같은 평화”가 저절로 넘치지는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들에 청종하지 아니하였기에 평화를 잃었듯이 계명을 지킬 때에 평화가 있고, 악인들에게 평화가 없습니다(사 48:22).
신앙을 고백하였으니 악하여도 괜찮다고 착각하여서는 안 됩니다.96)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에게 평화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 48:22). “평화”는 평화를 누리기에 합당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마 10:13).
모든 나라와 개인은 자신의 과거의 악함에 대한 진실을 들어야만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요청에 응답할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97) 이스라엘이 악을 고집한다면 약속의 말씀은 주어지지 아니합니다.98)
우리는 우리를 노예로 삼고 있는 “바벨론”으로부터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빌 4:13).99) 이런 변화는 하나님의 계명들에 청종하는 자들에게만 일어납니다.100)
1) David A. Dorsey, 『구약의 문학적 구조』, 류근상 역 (고양: 크리스챤출판사, 2003), 354.
2) Dorsey, 『구약의 문학적 구조』, 353.
3) Watts, 『이사야 34-66』, WBC 성경주석, 298.
4) 정중호, 『이사야 Ⅱ』,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주석, 166.
5) 정중호, 『이사야 Ⅱ』,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주석, 167.
6) Smith, 『NAC 이사야 2』, NAC 성경주석, 398-399.
7) Beale,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206.
8) Beale,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207.
9) Beale,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208.
10) Beale,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209.
11) Beale,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210.
12) Beale,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211-213.
13) Beale,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214-217.
14) Beale,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228.
15) Beale,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229.
16) Beale,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230.
17) Oswalt, 『NICOT 이사야 Ⅱ』, 316.
18) Smith, 『NAC 이사야 2』, NAC 성경주석, 400.
19) Young, 『이사야서 주석 Ⅲ』, 278.
20) Young, 『이사야서 주석 Ⅲ』, 279.
21) Young, 『이사야서 주석 Ⅲ』, 280.
22) Smith, 『NAC 이사야 2』, NAC 성경주석, 401.
23) 정중호, 『이사야 Ⅱ』,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주석, 172.
24) Motyer, 『이사야 주석』, 838.
25) Smith, 『NAC 이사야 2』, NAC 성경주석, 402.
26) Smith, 『NAC 이사야 2』, NAC 성경주석, 402.
27) 정중호, 『이사야 Ⅱ』,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주석, 172.
28) Oswalt, 『NICOT 이사야 Ⅱ』, 323.
29) Smith, 『NAC 이사야 2』, NAC 성경주석, 404.
30) Matthew Henry,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격려(사 48:9-15)”, 『이사야』.
31) Watts, 『이사야 34-66』, WBC 성경주석, 306.
32) 정중호, 『이사야 Ⅱ』,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주석, 173.
33) Matthew Henry,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격려(사 48:9-15).
34) Motyer, 『이사야 주석』, 839.
35) Matthew Henry,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격려(사 48:9-15).
36) Young, 『이사야서 주석 Ⅲ』, 283.
37) Motyer, 『이사야 주석』, 839.
38) Young, 『이사야서 주석 Ⅲ』, 283.
39) Matthew Henry,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격려(사 48:9-15).
40) Smith, 『NAC 이사야 2』, NAC 성경주석, 405.
41) Oswalt, 『NICOT 이사야 Ⅱ』, 324.
42) Motyer, 『이사야 주석』, 840.
43) 김창대, 『이사야서의 해석과 신학』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9), 400.
44) Oswalt, 『NICOT 이사야 Ⅱ』, 330.
45) 대상 29:29, 대하 9:29, 12:15, 16:11, 20:34, 25:26, 26:22, 28:26, 35:27.
46) Motyer, 『이사야 주석』, 758.
47) Smith, 『NAC 이사야 2』, NAC 성경주석, 409.
48) Young, 『이사야서 주석 Ⅲ』, 284.
49) 정중호, 『이사야 Ⅱ』,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주석, 173.
50) Oswalt, 『NICOT 이사야 Ⅱ』, 330.
51) Smith, 『NAC 이사야 2』, NAC 성경주석, 409.
52) Motyer, 『이사야 주석』, 841.
53) Motyer, 『이사야 주석』, 841.
54) Smith, 『NAC 이사야 2』, NAC 성경주석, 409.
55) Young, 『이사야서 주석 Ⅲ』, 285.
56) Oswalt, 『NICOT 이사야 Ⅱ』, 331.
57) Watts, 『이사야 34-66』, WBC 성경주석, 307.
58) Smith, 『NAC 이사야 2』, NAC 성경주석, 408.
59) Motyer, 『이사야 주석』, 841.
60) 정중호, 『이사야 Ⅱ』,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주석, 174.
61) Oswalt, 『NICOT 이사야 Ⅱ』, 332.
62) Motyer, 『이사야 주석』, 841.
63) Motyer, 『이사야 주석』, 841.
64) Smith, 『NAC 이사야 2』, NAC 성경주석, 411.
65) Smith, 『NAC 이사야 2』, NAC 성경주석, 411-412.
66) Oswalt, 『NICOT 이사야 Ⅱ』, 334.
67) Young, 『이사야서 주석 Ⅲ』, 288.
68) 임용섭, “이사야서에 나타난 성령: 루아흐의 용례 연구를 중심으로”, 『성경과 신학』 제82권 (2017): 17. (1-27).
69) Young, 『이사야서 주석 Ⅲ』, 288.
70) 사 11:2, 30:1, 32:15, 42:1, 44:3, 48:16, 59:21, 61:1, 63:11.
71) Motyer, 『이사야 주석』, 844.
72) Motyer, 『이사야 주석』, 844.
73) 정중호, 『이사야 Ⅱ』,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주석, 168.
74) 이종록, “룻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고엘 제도”, 439.
75) 김지찬, 『요단강에서 바벨론 물가까지』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9), 262.
76) 이종록, “룻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고엘 제도”, 456-458.
77) Oswalt, 『NICOT 이사야 Ⅱ』, 337.
78) Motyer, 『이사야 주석』, 845.
79) Oswalt, 『NICOT 이사야 Ⅱ』, 338.
80) Oswalt, 『NICOT 이사야 Ⅱ』, 338.
81) Motyer, 『이사야 주석』, 830.
82) Oswalt, 『NICOT 이사야 Ⅱ』, 338.
83) Smith, 『NAC 이사야 2』, NAC 성경주석, 414.
84) Motyer, 『이사야 주석』, 846.
85) Young, 『이사야서 주석 Ⅲ』, 292.
86) Oswalt, 『NICOT 이사야 Ⅱ』, 339.
87) Claus Westermann, Isaiah 40-66: a commentary, tran. David M. G. Stalker from the German (London: SCM Press, 1969), 204.
88) Westermann, Isaiah 40-66: a commentary, 196.
89) Walter Brueggemann, Isaiah 40-66 (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8), 107.
90) Jan L. Koole, Isaiah Ⅲ, vol. 2 (Leuven: Peeters, 1998), 244
91) Young, 『이사야서 주석 Ⅲ』, 294.
92) Smith, 『NAC 이사야 2』, NAC 성경주석, 351.
93) 정중호, 『이사야 Ⅱ』,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주석, 177.
94) 정중호, 『이사야 Ⅱ』,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주석, 177.
95) 정중호, 『이사야 Ⅱ』,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주석, 180.
96) Oswalt, 『NICOT 이사야 Ⅱ』, 341.
97) Smith, 『NAC 이사야 2』, NAC 성경주석, 418.
98) Oswalt, 『이사야』, NIV 적용주석, 631.
99) Oswalt, 『이사야』, NIV 적용주석, 637.
100) Oswalt, 『이사야』, NIV 적용주석, 638.
첫댓글 화창한 봄날 주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