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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로의 제자들과 만남 21:1~6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가이사랴 빌립의 집에 머묾 21:7~14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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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바울 일행이 두로에 도착하자,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합니다. 가이사랴에 있는 빌립 집사 집에 머물 때, 아가보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해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을 예언합니다. 바울의 각오가 굳건해 일행은 권고를 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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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로의 제자들과 만남 21:1~6
바울 일행은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서두릅니다. 밀레도에서 배를 타고 고스, 로도, 바다라를 거쳐 두로에 도착합니다. 큰 항구 도시 두로는 사람들이 짐을 풀고 여러 목적지로 흩어지는 곳입니다. 그들은 두로에 7일간 머물며 제자들을 만납니다. 두로의 제자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권합니다. 바울이 당할 고난을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제자들이 바울을 전송하며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는데, 이는 바울을 향한 큰 애정을 보여 줍니다. 유대인들의 박해도 있었지만, 바울은 가는 곳마다 제자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다.
● 더 깊은 묵상
두로의 제자들이 바울에게 보인 애정은 어떠했나요?
주님 일을 위해 나와 함께 기도하며 서로 격려하는 동역자는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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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랴 빌립의 집에 머묾 21:7~14
바울 일행은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이 로마 황제를 위해 건립한 항구 도시입니다. 그들은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 집으로 갑니다.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이후 거의 20년간 가이사랴에서 지낸 듯합니다(8:40). 아가보 선지자가 와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을 예언합니다. 제자들의 만류에도 바울은 주님 이름을 위해 죽음까지 각오했다고 대답합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의 모습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표명하셨습니다(눅 9:51; 13:33; 18:31). 바울도 이를 여러 차례 드러냅니다(19:21; 20:16). 바울은 예수님을 좇아 사명의 길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제자들의 권면에 바울은 어떻게 대답했나요?
나는 무엇을 따라 내 인생의 우선순위를 결정짓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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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말씀을 따라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한 친구를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재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친구는 ‘이 정도 대학을 나와서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취직·결혼·출산은 가능할까?’ 등의 수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인생의 설계도를 제대로 그릴 수 없어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희망을 볼 수 없고 답이 나오지 않는 상태, 많은 이가 이런 현실을 겪고 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 미래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을까요? 우리는 전 인생을 다 안다는 듯 미리 우울해하고 절망하고 있는데, 바울은 어땠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부터, 바울의 여정은 끊임없는 위험의 연속이었습니다. 매 맞고 죽을 뻔하며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다가 그는 결국 로마로 압송되었고 순교했습니다. 바울이 고난만을 생각했다면 두렵고 우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영광스러운 사명과 주님의 약속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 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을 따라 발을 움직이며 복음 전파에 계속해서 힘썼습니다.
너무 많이 또는 깊이 생각하다가 두려워서 아무 일도 못 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 약속의 말씀을 설계도 삼아 힘차게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수고하고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 김경진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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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사도행전 21장 13~14절
아가보의 예언을 들은 제자들이 울면서 만류하는데도, 바울은 죽음을 각오했다며 자신의 계획을 철회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의 고집과 독선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는 신앙적 확신 때문입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이기심은 모든 일을 '자기 뜻'에 맞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인생길은 '하나님 뜻'을 향해 나아갑니다. 고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 뜻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목소리를 믿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기에 날마다 하나님 음성을 듣고 따라야만 한다. - 스티븐 퍼틱
오늘의 기도
하나님, 입술로는 ‘하나님 뜻대로’를 외치면서 여전히 ‘마음과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제 연약함을 회개합니다. 주저앉고 싶은 순간마다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하나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하나님 시선을 따르는 일에 두려움이나 지체함 없이 나아가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97 주 사랑 안에 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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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우리와 소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면서, 그분의 뜻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
누구를 만나든, 어디를 가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잊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면서, 담대히 그분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우리 앞에 놓일지라도 그분이 갖고 계신 계획이 있을 것임을 잊지 말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분께서 맡겨 주신 일들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잘 마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나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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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각오한 순종의 길” 박종호 목사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하여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를 거처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타고 두로에 상륙합니다.
제자들을 찾아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여러 날을 그 곳에서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 때 그들이 처자들과 함께 성문 밖까지 나와 전송하자 바닷가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작별합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믿음의 형제를 찾고 함께 말씀을 나누고 기도를 합니다.
우리도 공동체와 함께 교제하며 사랑을 나누며 함께 기도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서 머뭅니다.
그곳에서 여러 날 머물러 있는 동안 아가보라 하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두로에 있는 제자들과 가이사랴에 있는 아가보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설득합니다.
사도바울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그들을 위로하면서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그들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하고 자리에 일어섭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사도바울의 굳건한 의지와 결단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주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믿음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박해와 어려움이 있어도 주의 뜻이면 가게 하시고
주의 뜻이면 멈출 수 있는 그런 믿음과 순종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자녀와 가정과 일터를 축복하시며
환우들에게 위로와 치유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해외에 있는 한인들에게도 한인교회들에게도 큰 은혜를 더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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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3차 선교 여행 가운데서 오순절 이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
급하게 돌아오는 여정 가운데 있었다.
가장 오랫동안 사역을 했던 에베소를 방문하지 않고 밀레노로 장로들을 불러서
마지막으로 여러가지 권면을 하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는 사실로 교회를 잘 지킬 것을 당부하고 밀레노를 떠나서 갔다.
오늘은 여러곳을 거쳐서 이동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밀레노를 떠나서 배를 타고 로스로(1)
다음날 로스에서 바다라로(2)
바다라에서 다시 배를 타고 두로에 이른다.(3)
여러날이 지난 후 두로에서 다시 돌레마이로(7)
돌레마이에서 가이사랴로(8)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15)
밀레노에서 두로로 가는 가운데 한 가지 일과
두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동일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두로에서 7일을 머무는 동안에 제자들이 바울을 찾아왔다.(4)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말한다.(4)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4) 한다.
두번째 가이사랴에 빌립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에(8)
과거에 큰 흉년이 들것이라 예언했던(11:28) 아가보가 유대로부터 왔다.(10)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발을 잡아매고 말한다.(11)
성령이 말씀하시기를(11)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 손에 넘겨주리라(11)한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한다.(12)
두로에서 제자들이나, 가이사랴에서 아가보나 그곳 사람들의 공통적인 권면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4, 13)라는 것이다.
동일한 성령님이 바울에게 하신 말씀과 제자들과 아가보에게 하신 말씀이 다른가?
그렇지 않다.
바울이 밀레노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서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사역하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했다고 말하면서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20:22)
오직 성령이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20:23)라고 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환란과 결박을 알고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고
제자들과 아가보 예언자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인간적인 마음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애정어린 권면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센스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들의 충고와 권면을 더 신뢰하게 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길에서 벗어 날 수 밖에 없구나.
사도 바울의 대답에 깊은 감동이 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13)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을 뿐만이 아니라.(13)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한다.
바로 골고다 언덕 길을 오르시던 예수님의 걸음과 비슷한 심정의 걸음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예루살렘을 향하실 때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이방인에게 넘겨주어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힐 것을 알면서도 바로 그 길을 가셨던 것 처럼
사도 바울도 이런 순교자의 마음으로 순교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구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이 말씀을 실행하는 바울이다.
동일한 성령님의 음성이였지만
제자들과 아가보 예언자와 그곳에 있은 사람들은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을 막으시려는 성령의 경고로 해석하지만
바울은 동일한 예언을 두번이나 반복해서 들으면서
마음의 각오를 다시 한번 더 다지는 성령의 음성으로 듣는 구나.
말씀을 듣는것,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분별하고 해석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영적인 센스가 필요하다.
주여 말씀을 해석 하고 분별하는 센스를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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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확실한 말씀 하실 때가 있습니다.(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하여)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때에, 모든 사람들이 처음부터 다 동의하고 따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정 반대의 반응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두로의 제자들이나 가이사랴에서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 바울과 함께 했던 자들과 그곳 사람들이 바울을 만류했던 이유는 바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결박과 환난을 당하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성령의 계획을 오히려 방해하는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임을 당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베드로의 행동과 유사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을 말렸던 자들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말렸던 베드로처럼 신앙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과 내가 사랑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막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고 고백하며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내려놓은 일입니다.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힘듭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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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함께하는 제자
바울은 선교여정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데요. 이 길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에게도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였습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Ac 21:4) 두로에 들렸을 때에 그곳에는 이미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돌레마이에서나 가이사랴에서도 믿는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설립한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여정에 함께하였습니다.
가이사랴에서는 여전히 초대교회의 일곱 사역자 중에 한 명인 빌립이 계속 충실하게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은 모두가 하나입니다. 지역, 사명, 생각 등이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면에 있어서는 모두가 하나입니다. 바울이 가는 믿음의 길에 함께하고 위로하는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Ac 21:16) 가이사랴에서 몇 사람이 힘든 길을 가는 바울 일행에 합류하였습니다. 구브로 출신 나손은 이후에 다시 나타나지 않지만 그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을 보면 그는 또한 바울과 함께 함으로 바울 일행에게 위로가 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변에 믿음의 길을 위하여 힘을 다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믿음의 길을 힘있게 간다는 것이 많이 힘들어서 주변에 천사의 손길, 하나님의 손길이 많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서로 천사의 손길, 하나님의 손길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길이 매우 힘든 길이 되리라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Ac 21:4) 두로에 살던 제자(기독교인)들은 바울을 염려함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은 성령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의미 보다는(그렇게 되면 바울에게 말씀하신 것과 상충되기 때문에) 그들이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는 환상같은 것을 보고 바울을 말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이사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가보는 구체적인 상징을 보여주며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겪을 고난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Ac 21:12) 상황이 이쯤되니 이 글을 쓰고 있는 누가를 포함한 사람들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말렸습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기에 바울을 염려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정으로 모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인 공동체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가야 합니다.
2.일사각오의 제자
오늘 본문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서 들리게 된 도시에서 다른 신앙인들이 계속 바울을 말리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이 만류를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Ac 21:13)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일신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러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그것을 그만두는 것도 일신의 안위가 아니라 그것이 예수님을 위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전히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도록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강한 인도를 알기에 그렇다면 현재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하고 고난 받는 것'입니다. 어쩌면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그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모습은 마치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과 매우 흡사합니다. 예수님은 죽음당함을 아셨고 그 길이 매우 힘든 길이라는 것을 아셨지만 그 길을 가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때로는 고난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 받으신 예수님께 다 맡기고 이제 자신은 모든 기쁨과 행복을 누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21)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대속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고난의 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일사각오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사각오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사각오의 정신이 없고 실제로 죽음같이 느낄 정도의 수고가 없다면 제자의 길이라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함께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었기에 행복하였습니다. 그들을 만나기를 즐거워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을 함께 해야 합니다. 홀로 가기에는 너무 힘든 길입니다. 홀로 가는 것이 더 쉬워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 때 보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모든 신앙인은 신앙의 길을 열심히 가는 주변의 그 누군가를 위한 천사의 손길이 되고 하나님의 손길이 되어야 합니다. 꼭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일사각오의 마음가짐과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진정 죽어야 하늘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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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14.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 바울 일행이 여러 사람의 예언을 듣고 가이사랴 성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 것을 바울에게 권하였지만 거절되자, 주님의 뜻대로 될 것을 빌었다는 말입니다. 바울 일행이 들은 ’그 말‘은 예루살렘 행을 말리는 성령에 감동된 두로의 제자들의 말과 그리고 바울의 체포됨의 상징인 아가보의 결박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신변을 염려해서 해 준 것임에 틀림이 없기에, 당연히 바울의 일행은 그곳에 가지 말 것을 권면했을 것입니다.
‘일단 살아야 합니다. 살아야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릴 것 아니겠습니까? 당신같이 유능한 사람이 먼저 가면 우리 기독교가 손해입니다. 아무래도 재고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마 안타까워 이구동성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의를 봐서라도, 그들의 애정 어린 충고를 위해서라도,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볼 만도 합니다. 못 이기는 척하고 슬그머니 빼더라도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실제로 맞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초지일관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더 마음을 굳게 하며 오히려 그들에게 왜 자기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나무랍니다.
바울은 고집을 부린 것이 아닙니다. 아집과 집념도 아닙니다. 더구나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충고한 것을 부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릅니다. 어떤 것이 우선인 것을! 이미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 단서들이 사도행전 본문에만 여러 개 나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 행 9:16 : 예수님이 바울의 눈을 고쳐 줄 아나니아에게 하신 예고,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 행 19:21: 마술책을 불태운 사건 이후의 바울의 예정,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 행 20:22-23: 밀레도 장로들에게 언급한 바울의 각오
모든 일에 우선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의 갈 길에 위기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으로 봅니다. 그가 성령 안에서 이미 선택하였고, 그 길을 가기로 굳게 작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감화 감동, 첫 결단, 첫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 행 23:11: 사도행전 끝부분에서 예수님이 나타나 바울의 첫 마음을 인정해주신 말씀입니다. ‘14.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 바울의 첫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를 아껴 일행이 빌어준 말이 바로 주의 뜻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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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로에서 만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만류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행21:4) 그런데 분명 바울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에 간다고 했는데, 이 번역은 마치 성령이 이제는 말리라고 말씀하시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한 분 성령께서 바울에게는 가라 하시고, 두로의 제자들에게는 만류하라 하셨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4절의 "감동"은 원문에는 없는 임의로 추가한 단어이고, 전후문맥을 살피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제자들이 성령에 의해 바울이 고난 당할 것을 미리 알게 된 후,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 하더라
" 그런데 가이사랴에서 만난 제자들도 똑같이 만류했습니다 이것이 적용의 딜레마입니다
성령께서 두로와 가이사랴의 제자들에게 바울이 고난 받을 것을 미리 말씀하신 이유가 뭘까요?
말리라는 것이 아니라, 부르짖어 함께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성령의 말씀을 인간적인 마음을 앞세워 적용해서 바울을 만류하는 행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했습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
만약 성령께서 우리가 진리로 인해 어떤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시면,
얕은꾀를 써서 얍삽하게 그 고난을 피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적용을 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미리 다 알고 계셨고, 피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도록 기도하셨고, 그 고난을 피하지 않고 다 당하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1~44)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시는 것은
이리저리 잘 피해서 고난을 하나도 당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더욱 깨어 기도함으로 준비하라는 것이고,
그런 일이 닥쳐도 당황하지 말고 담대하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시31:24)
미쁘신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니 사자 같이 담대한 심령되기 원합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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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것을 각오한 바울)
13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러나 바울은 울어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상하게 하느냐는 두들겨 깨뜨린다의 뜻을 갖는데, 이는 주위 사람들의 애정에 가득찬 눈물의 만류가 마치 바울의 마음을 부수어버릴 정도로 간곡했음을 나타냅니다. 이 표현 속에는 성령의 일을 거역하게 하는 것에 대한 책망보다는 그들의 충정어린 애정을 마음 깊이 이해하고 있는 모습이 엿보입니다.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의 애정어린 만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결의를 더욱 강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했던 바로 그 도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죽임을 당하는 것도 피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처럼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예루살렘에 가려고 했던 이유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이름으로 구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이방 교회의 성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해 주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 교회의 성금을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교회의 단합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롬 15:25-32).
또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이방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연합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유대계 신자들과 이방 신자들 사이에 소원(疏遠)한 관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원만한 연합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연합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나를 막론하고 모두 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는 말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갈 3:28), 이 진리를 바르게 깨달은 바울은 바로 이 연합을 위해 죽음까지도 무릅쓰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가는 것이 주님의 이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라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믿음대로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이 그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주님 나도 나의 유익을 따라서 움직이지 않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움직이는 자들이 되게 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주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
14절을 보십시오.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는 직역하면 저가 설득되지 아니하므로(when he would not be persuaded, KJV)가 됩니다. 아마 그들은 바울의 신변의 안전을 이유로,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수행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많다는 식의 그럴듯한 명분으로 바울을 설득하여 그의 예루살렘 행을 포기시키려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때가 아니라 지금, 다른 곳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설득을 뿌리쳤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을 향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의 가는 길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그들은 주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고 바울을 만류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설득하려던 사람들은 그의 의지를 꺾는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그에게 닥쳐올 불행을 넘어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바울을 설득하려던 사람들이 바울에 대한 잘못된 충정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신앙의 자세로 되돌아와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기도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를 상기시켜 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이야기는 지도자 바울과 그를 아끼는 사랑하는 제자들이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야하는데 누가와 디모데를 포함한 많은 제자들은 그것을 막고 싶습니다. 울면서 만류하는 사람,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고난 받을 것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아가보와 같이 소문난 예언자의 행위 예언이 있은 후로는 모든 제자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만류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어떻게 하든지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바울이 끝내 예루살렘 행을 고사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하고 만류하기를 그쳤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는 너무나 우리 일상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 사안은 다르지만 말입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다 바울을 아끼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여기 성령의 감동하심이라는 미묘한 문제가 개입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혼란스럽습니다. 분명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성령의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다는 사실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런데 두로에 있는 제자들과 아가보의 예언까지 두 번이나 만류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행복한 전도자(4, 7-8절)
우리는 우선 본문을 살펴보면서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그들과 교제하는 행복한 전도자 바울의 모습을 만납니다. 그 만나는 사람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애틋한 정을 나누며 교제하는 모습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의 답변(13절)
여러분! 바울의 답변을 들어보십시오. 13절입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그랬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상하게 한다는 말은 마음이 찢어질 것 같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부서질 것 같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의 사랑이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께 매인바 된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권위를 가지고 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째서 내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 하느냐! 나는 이미 예루살렘에서 결박뿐만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들의 지도자 바울은 분명하게 예루살렘에 가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고 바울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류하는 사람들의 성숙함(14절)
그런데요? 바울의 동역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우리가 이루고 있는 이 지상교회, 이 불완전한 유형교회에서는 이 일이 분열로 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는 내 고향으로 돌아갈란다. 가면 죽을 것이 뻔한데 거기를 무엇하러 따라가”
그러나 때로 지도자는 권위를 가지고 꼭 그 일을 추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정면으로 거부를 계속하는 것은 자신도 죽고 공동체에게도 해를 가하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가 얼마나 세상 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가를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잔뜩 세상 적인 논리로 무장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 역시도 세상 적인 논리로 본다면 지금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슨 전도나 교회의 일도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바울의 동역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그쳤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멋진 태도인지 모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은 주기도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상기시켜 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실 때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를 상기시켜 준다고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바울의 동역자들은 더 이상 지도자의 생각에 이의를 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 일임을 알고 하나님께 이 일을 위임하고 순종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일행은 나손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도 바울의 뜻을 거스려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핍박과 고난, 심하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본문의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충분히 살폈습니다. 저는 이런 반응을 “내려놓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순종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지만 저는 내려놓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 땅의 수많은 분쟁의 원인은 주로 탐욕 때문일 때가 가장 많습니다. 탐욕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주범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처럼 탐욕이 아닌 사랑과 존경 때문에 생기는 이견이 존재할 때 내려놓음은 공동체를 화평하게 하는 중요한 성도의 덕목입니다.
본문 가득히 흐르고 있는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가 이룬 교회의 모습이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사도 바울은 긴 시간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세우고 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행복한 전도자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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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신 하나님, 만남의 축복을 허락하시고
또 그 귀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드러내기를 기뻐하시는
인생의 섭리를 깨달아
한순간도 허투루 살지 않고
정성을 다하며 귀하게 모든 영혼을 대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좇아
넘어지지 않고 담대하게 걸어가는
복된 발걸음 되길 오늘도 소망합니다.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구원의 기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그 가정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인해 고통받고
신음하는 아버지의 백성들에게 회복과 치유의 손길로 덮어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민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주님의 뜻에 겸손과 순종으로 걸어가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