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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33,7-9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7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8 가령 내가 악인에게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할 때,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9 그러나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13,8-10
형제 여러분,
8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9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다.”>
오늘 말씀 전례는 ‘잘못된 형제의 교정’과 교정에 대한 본정신이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사실 갈등을 풀고 관계를 회복하는 일은 공동체 생활 안에서나 개인 관계 안에서나 국가적인 정치 안에서나 언제나 큰 과제로 다가옵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언자를 파수꾼으로 세워 잘못된 길을 가는 이를 일깨우라고 말합니다.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에제 33,7-8)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율법의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마 13,10)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 타일러라.
단 둘이 만나 타이르고,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증인을 데려가 타이르고,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려라.”
(마태 18,15-17 참조)
이는 우리 자신과 교회가 잘못된 세상과 공동체, 잘못된 이웃이나 형제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이는 타인과 세계와 우리 자신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깊은 유대와 긴밀한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형제의 잘못이나 세상의 잘못에 우리 자신의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도 복음의 기쁨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와 사랑 앞에서 몸을 숨기는 것은 자살 행위다." (272항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형제를 교정하는 방법과 절차를 다섯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혼자 단독으로 하는 교정이요,
둘째는 두 세 사람이 함께 하는 교정이요,
셋째는 교회를 통한 교정하는 것이요,
넷째는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을 통한 교정이요,
다섯째는 형제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 바치는 기도를 통한 교정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교정의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단지 잘못한 형제에 대한 형식적인 교정 방법이나 절차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스며들어 있는 ‘사랑’과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교정’은 처벌이나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형제적 사랑’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가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타인을 ‘남’이라 여기지 않고 서로를 형제요, 자신의 일부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지체라 여기는 마음에서 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그의 <규칙서>(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잘못한 형제를 고쳐주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살인 행위와 같다.
왜냐하면 잘못한 형제는 마치 독 있는 뱀에 물린 상태와 같은데, 그 독을 빼내어주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잘못한 형제의 ‘교정’이 자신의 불편을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극한 형제적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오직 사랑과 신뢰, 그리고 하느님께 의탁해서 할 일입니다.
사랑이 아니면 차라리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어떤 형제가 잘못했을 때는, 먼저 그의 잘못을 앞세우기에 앞서 그가 바로 내 ‘형제’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비록 그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는 죄인이기 이전에 바로 내 ‘형제’요, 나 또한 그의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처지에 이르더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무관심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이때가 잘못한 형제를 위해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 사랑으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실 것’(마태 18,19)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죄를 찾아내어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회개시켜 그들과 함께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
(마태 18,18)
교회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권한, 곧 ‘풀기와 매기’의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매는 권한은 최종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매는 조건이 풀어지면 교회는 항상 풀어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죄인이 돌아오기를 항상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 기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곧 스스로가 해결사가 되려고 하지 않고, 아버지께 신뢰로 의탁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부 성 베네딕도께서도 “(잘못한 형제들에게) 사랑을 더 베풀 것이며, 또 모든 이는 그를 위해 기도할 것”(규칙서 27,4)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
(마태 18,19)
그러니 이 세상에서 함께 마음을 모으는 일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이루는 것은 모인 사람의 수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사랑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을 모으는 바로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다.”
(마태 18,20)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마태 18,15)
주님!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형제의 잘못을 앞세우기에 앞서 그가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할 줄 알게 하소서!
그의 잘못이 드러나거든 그에게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함을 알고, 힘을 모아 사랑하게 하소서!
그를 돕는 길은 죄를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데 있음을 알게 하소서.
우리의 사랑만으로는 안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사랑을 대신하는 우리 사랑>
어리석은 얘기인지 모르지만, 용서해 주는 사랑과 교정해주는 사랑 가운데 어떤 것이 더 큰 사랑일까?
용서해 주는 사랑과 교정해주는 사랑 가운데 어떤 것이 하기 더 어려울까?
교정해주는 것이 용서해 주는 것보다 더 어렵고, 그렇기에 교정해주는 것이 더 큰 사랑일 것입니다.
용서해 주는 것은 용서받는 사람이 반기고 고마워하는 것이지만, 충고해주는 것은 충고를 받는 사람이 싫어하는 것이고, 충고를 사랑이 아니라 미움으로 받아들이기에 하기 더 어렵지요.
실로 충고를 교정을 위한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믑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척 성숙한 사람이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기 잘못을 고침으로써 자신도 행복해지고 충고해준 사람도 사랑의 보람을 느끼게 하겠지요.
문제는 충고를 거부하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것입니다.
거부하는데도 충고를 계속해야 하겠습니까?
사실 충고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예상될 경우만 충고한다면 앞서 봤듯이 거의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에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충고를 받아들이건 말건 우리는 나의 사랑으로 충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내 안에 없으면 아예 충고할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하고, 그럴 때 우리 안에 그를 위해서건 나를 위해서건 사랑부터 채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충고하려면 사랑이 내 안에 차오르도록 먼저 나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잘못한 그에 대한 연민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분노가 연민보다 크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충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를 마음 아파하지 않고 오히려 그 형제의 영혼에 자리를 잡게 된 죄를 마음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충고할 때 공동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나의 사랑만으로 안 되고 나의 충고만으로 안 될 때 그것으로 포기하지 말고 공동체 힘을 빌려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랑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말해서 사랑의 의지로 간신히 충고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조금 있던 사랑마저 날아가 버리고 분노하거나 비난으로 바뀌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가 마음을 모아 청하면”이라고 하십니다.
내 사랑만으로 안 될 때 그것으로 포기하거나 뒤에서 비난하지 말고, 내 작은 사랑만으론 불가한 것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같이 기도하자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이런 청을 받아들여 같이 기도하고 같이 포용해 들여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충고할 때 하느님 대신 충고해야 합니다.
오늘 에제키엘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사실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대신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 사랑을 결코 작게 여기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고, 그러니 충고 역시 함부로 하거나 즉흥적으로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대신하는 만큼 나의 사랑을 하느님 사랑으로 키워 충고해야겠지요?!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듣기 좋은 소리보다 사랑이 먼저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보다 깊고 넓고 높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사랑으로 바른 충고를 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청합니다.
사랑은 기다림입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고 변화와 성장을 기다립니다.
배려해 주고 존중하며 아량을 가지고 기다려 줍니다.
사랑은 진실한 만큼 상대를 인정하고 도와줄 방법을 압니다.
상대를 결코 이용하지 않습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의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로마 13,8)이라며 ‘사랑’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서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그 사랑의 구체적 행동으로 충고에 대해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안되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알려라!’ 하십니다.
처음에는 드러내 놓지 말고 조용히 만나서 형제애로써 대해주고, 그다음은 사생활을 존중하는 가운데 이웃의 도움과 함께 최선을 다하고, 더 나아가 교회공동체가 다 함께 노력하는 정성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점진적으로 끝까지 기다리며 기회를 주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연약함을 지녔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서로 부딪히면 깨져버리는 ‘토기 그릇’과 같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그러니 충고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습니다.
칭찬은 달고 달지만, 충고는 한없이 쓰니 섣불리 쓴 약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큰 사랑을 갖지 않은 이상 섣불리 충고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사랑이 없는 한 칭찬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칭찬은 그로 하여금 칭찬의 노예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칭찬은 달지만, 독이 되기 쉽고, 충고는 쓰지만, 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찬과 충고를 하기에 앞서 주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충만케 해야 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충고를 한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자!”라고 하였고, 성녀 안젤라 메리치는 “좋은 충고를 받아들여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행하십시오.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 12,15)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고를 할 수 있는 큰 사랑과 온유함을 간직해야 하며, 동시에 충고를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함을 지녀야 합니다.
바른 충고를 해 줄 수 있고, 또 충고를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소중합니다.
성경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묵시 3,19),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 하신다.”(히브 12,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소리로, 하느님의 뜻으로 다가올 충고해줄 사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소리가 되어줄 수 있다면 큰 은총입니다.
한 주간 바른 충고를 통해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도록 기도하고, 듣기 좋은 소리보다 바른말에 귀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충고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충고가 필요한 사람일수록 더욱 경시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효과 있고 살아있는 충고는 사랑입니다.
더디더라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심을 가지고 대하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형벌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자녀, 친구,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도 정곡을 찌르는 논리 정연한 설득과 충고가 아니라 진심 어린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타일러라’는 말씀은 남의 잘못을 지적하라는 말이 아니라 내 이웃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혜롭게 배려하여 변화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남에게 충고는 잘하면서 남의 충고는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연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한계를 잘 극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결점을 스스로 잡아내지 못하고 없애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도움이 필요합니다.
깊은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마주 오는 사람이랍니다.
그리고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반가운 것 역시 사람이랍니다.
사람이 제일 좋기도 하면서 가장 힘든 존재이기도 합니다.
좋을 때는 더없이 편하지만, 한 번 틀어지면 그것만큼 불편한 것도 없습니다.
가장 친했던 사람이 가장 어렵고 힘든 사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 기대와 바람, 그리고 허물조차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이 커졌으면 좋겠습니다만, 진심을 주고받기까지는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열기 전에 먼저 주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잘못을 지적받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
(마태 18,19)
한마음 한 뜻을 이룰 수 있는 형제가 있다면 기뻐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형제가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모두가 주님과 함께 잘사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 왜 당신이 직접 우리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시고 교회에 그 권한을 위임하셨을까?>
오늘 복음은 매우 교회론적입니다.
왜 교회에 예수님께서 묶고 푸는 권한을 주셨는지 설명합니다.
누구의 죄든 먼저 혼자 가서 타이르고 안 되면 둘이나 셋이, 그것도 안 되면 교회에 알리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께서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하신 말씀처럼, 교회에도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죄를 용서 받지 못하면 당신께 오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치 아드님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에 반기를 든 사람이 마르틴 루터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죄 용서의 권한을 주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 권위를 부정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각자가 다 사제이기 때문에 직접 예수님께 죄를 용서 받으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교회에 죄 용서 권한을 주시고 파견하셨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이 예수님께 죄를 용서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유용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만든 예수님을 상정해 놓고 그냥 용서 받을 것이라고 믿고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실제로는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며 예수님께 용서 받았다고 믿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2003년 12월 19일, 당시 나이 24세였던 이 씨는 자신의 6살짜리 아들과 5살짜리 딸을 동작대교 위에서 한강으로 던져 죽게 하였습니다.
기자가 “왜 같이 안 죽었어요?”라고 물었을 때 그는 “기독교인이라서 자살은 못 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기자가 “기독교인인데 사람 죽이는 건 괜찮아요?”라고 묻자 그는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가톨릭 신자라면 그런 죄를 지을 수 있었을까요?
만약 자신이 한 행위를 직접 예수님이 아니라 사제에게 고백해야만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었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제보다 더 쉽게 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먼저 교회에서 죄를 용서 받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 안에 흐르는 용서의 힘의 효과입니다.
인간에게 죄 용서의 힘을 주셨다면 나에게도 그 힘이 미치고 있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용서는 먼저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할 수 있게 됩니다.
토니 던지는 미국 프로 미식축구 리그 역사상 최악의 팀들을 최고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결승에서 번번이 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005년 성탄절에 끔찍한 비극이 닥쳤습니다.
던지의 큰아들, 제이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힘이 팀 전체를 감쌌습니다.
모두가 감독을 위로하기 위해 전적으로 감독을 믿고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다음 해에 콜츠는 역사에 남을 명 경기로 역전승하며 우승을 차지합니다.
피는 성령과 같습니다.
교회 안에도 용서의 힘인 그 피가 돌고 있습니다.
피는 모든 세포 안으로 스며듭니다.
그 피가 곧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누군가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뜻은 그 본성으로 모인다는 뜻입니다.
개는 인간이 죽었을 때 모이지 않습니다.
본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을 입었고 그 본성이 우리 심장에 피로서 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가더라도 그도 한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줄 힘이 있음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것으로는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걸으면 나도 할 수 있다고 믿게 합니다.
그 용서의 권한이 인간에게 주어졌음을 믿는 믿음은 각 개인이 누군가를 용서하게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게 고정원 씨처럼 용서가 불가능하게 보이는 사람까지도 용서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각 개인의 용서를 위한 힘은 용서의 권한이 주어진 교회의 일원이라는 믿음으로 강화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닌 교회에 와서 용서 받고 용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웃을 향한 가장 큰 사랑의 표현, 형제적 교정>
돌아보니 수도공동체에 몸담은 지 40여 년이 다 되어 갑니다.
수련기 때 계획으로는 지금쯤 공동체 생활의 달인이자 친교의 전문가가 되고도 남을 순간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아직도 공동체 생활이 부담스럽고 어렵습니다.
아직도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기보다 공동체가 내게 뭔가 해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요즘도 이런저런 수도회 회의에 참석하면 빠지지 않는 단골 주제가 있습니다.
공동체 성장과 쇄신입니다.
공동체 성장과 쇄신, 말은 쉬운데 정말이지 요원한 과제처럼 느껴집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이상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도 저희는 또 다시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공동체 성장과 쇄신을 위한 방안을 모색합니다.
공동체 성장과 쇄신을 위해 다른 무엇에 앞서 따뜻한 형제애가 필요합니다.
특히 공동체 책임자들의 부성애, 그리고 흘러넘치는 일상적 친절과 배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책임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우선적인 역할은 공동체 안에 사랑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늘 예의주시하고 고무하는 역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형제들을 춤추게 하고 살맛 나게 하는 칭찬과 격려도 필요합니다.
끝없는 용서, 한없는 인내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더 가치 있고, 꼭 필요하고, 차원이 다른 사랑의 실천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형제적 교정’입니다.
그러나 형제적 교정은 말은 쉬운데, 결코 만만하거나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고도의 조심성과 극도의 예민함, 숙련된 기술과 강도 높은 기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한 형제가 길이 아닌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한 형제의 눈이 뭔가에 잔뜩 씌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한 형제가 본래의 정체성과 사명을 상실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그래서 증거의 삶은 사라지고 반대 표양이나 손가락질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을 때, 그를 가장 사랑하는 형제라면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는 형제라면 침묵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용기를 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아프겠지만, 정확하고 예리한 형제적 교정 작업을 실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척 어려운 작업이기에 적당히 해서는 낭패를 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한 치밀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우선 그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겠지요.
그리고 문제의 핵심과 정확한 현실을 파악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교정 작업을 위한 로드맵을 세워야겠습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오늘 우리에게 아주 실효성 있는 교정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마태오 복음 18장 15~17절)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공동체, 형제애>
사람들 가운데에는 ‘용서’에 관한 말씀을 들을 때 자기 자신도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용서하는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똑같은 죄인들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공동체와 형제애를 강조하는 말씀을 하실 때에는 우리가 모두 똑같은 죄인들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위치에 있는 의인과 용서받는 위치에 있는 죄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용서를 청해야 하고, 서로 용서해야 하고, 서로 타일러야 합니다.
“너, 회개하여라.”가 아니라, “우리, 함께 회개하자.”입니다.
따라서 “그를 타일러라.” 라는 말씀도 입장을 바꿔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네가 죄를 지었을 때, 형제가 와서 너를 타이르면 그의 말을 들어라.
그래야 네가 참으로 그의 형제가 될 수 있다.”
만일에 남을 타이르는 일은 잘하면서 남이 와서 타이르는 것은 듣기 싫어한다면?
그것은 위선자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나를 타이를 때, “너나 잘해라.” 같은 반응만 보인다면?
죄를 짓는 형제를 타일러서 회개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누가 와서 나를 타이르는 말을 할 때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잘못한 일이 없다.” 라고 생각해서 그런 경우도 있고, 마음속으로는 잘못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남의 충고를 듣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로 생각해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어떻든 누가 와서 타이르거나 충고하기 전에 먼저 자기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과 회개가 없는 사람을 타이르는 일은 아무 소득 없이 끝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타이르는 말을 하기 전에,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할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또,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가서 타이를 때, 그것을 ‘다수의 압력’이라고 생각해서 회개하기는커녕 반발심만 품고 형제애에서 더욱 멀어져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 상황에서 ‘다수의 압력’과 ‘공동체의 형제애’가 잘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평소에 형제애가(사랑이) 잘 유지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평소에 꾸준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배신자라는 말씀을 처음 하셨는데, 그때까지 사도들은 배신자가 있는지도 몰랐고, 배신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요한 13,22).
심지어 사도들은 유다가 완전히 공동체를 떠난 뒤에도 그가 배신자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요한 13,28-29).
다른 사도들과 유다 사이에는 대화가 전혀 없었을까?
동료 하나가 믿음이 흔들리고, 고민하고, 그럴 때에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을까?
유다 혼자만 외톨이였을까?
따돌림을 당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사도들도 각자 따로 흩어져 있었나?
하여간에 사도단 안에서 배반자가 생겼는데도 사도들이 그것을 마지막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사도단을 공동체라고 말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적어도 그때에는 그랬습니다.
‘참된 공동체’는 구성원 모두가 서로 관심 갖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는 ‘한 몸’입니다.
구성원 중에 누군가가 고민하고 있는데도, 아파하고 있는데도, 슬퍼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그것에 관심이 없다면, 그 공동체는 공동체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죄를 짓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관심 갖고 있다면, 누군가가 죄를 짓기 전에 그것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막는 것을 실패하더라도 금방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공동체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일이 생긴다면, 떨어져 나간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라는 말씀은 “그를 파문하여라.”, 즉 “그를 공동체에서 추방하여라.”인데, 죄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네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너는 공동체에서 추방될 것이다.” 라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경고도 됩니다.
그러나 추방된 후에라도 ‘회개하면’ 다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이고.
18절의 ‘매고 푸는 권한’에 관한 말씀은 사도들에게 ‘집행권’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뜻’을 땅에서 실행하는 ‘집행권’입니다.
어떤 사람의 구원을 결정하는 ‘결정권’은 주님만의 권한입니다.
사도들과 교회에는 모든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노력할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삶 - 기도하라, 사랑하라, 지혜로워라, 운동하라>
참 사람되기 힘든 시절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광야 인생 여정 잘 살면 성인이요 못 살면 괴물도 폐인도 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삶만이 참 사람이 되어 살게 합니다.
더불어의 인생 여정, 끝까지 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 일간지나 인터넷 뉴스를 보면 어수선한 부정적 뉴스로 가득합니다.
한마디로 영적전투 치열한 전쟁터 같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분들이 참 많습니다.
정말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어느 일간지 토요기획 한면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근육이 자산이다.
생존을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은 과욕과 과거, 채워야 할 것은 근육과 균형이다.
운동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바람이 분다.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중년들이 운동하기에 최적화된 계절이 왔다.”
요지의 기사였습니다.
영성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삶의 근육, 삶의 균형을 돌봐야 하고 이를 위한 삶의 전략이 필수입니다.
어떻게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삶중에 참 사람이 되어 살 수 있을까요?
구체적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참 좋은 삶의 전략, 삶의 균형에 삶의 근육을 튼튼히 하는 방법이겠습니다.
첫째, 기도하라.
몸과 마음은 하나입니다.
정신이, 마음이, 영혼이 튼튼하면 몸의 건강도 따라옵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삶을 위해 우선적 필수 요건이 기도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요, 세상이 어수선하고 불확실하고 불안할수록 기도는 절실합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괴물이나, 폐인이 되지 않기 위해, 성공적 삶을 위해 한결같은, 끊임없는 기도의 훈련과 습관은 정말 중요합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요 회개와 더불어 겸손의 덕입니다.
삶의 전략, 삶의 근육, 삶의 균형을 위해 기도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참 자기를 알 수 있습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기도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도 결국은 기도에 대한 강조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하늘과 땅은 하나로 연결되었으며, 바로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하게 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도를 통해 땅에서 풀면 저절로 하늘에서 풀려 영육의 건강입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늘 주님의 현존 안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함께 기도입니다.
주님 안에서 함께 끊임없이, 한결같이 기도하는 그 자리가 꽃자리이고 하늘 나라 공동체의 실현입니다.
둘째, 사랑하라.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에 길이 없습니다.
기도가 바로 사랑입니다.
참으로 함께 기도할 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도 의식적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거창한 사랑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상적인 사랑입니다.
참으로 깨어 있는 일상의 삶일 때 눈 밝은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집착없는 깨끗한 사랑, 한결같은 아가페 사랑이 가능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간곡한 충고 역시 사랑입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말도 있듯이 사랑도 평생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을 배우고 배워도 영원히 초보자임을 인정하면서 겸손히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에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래서 앞서의 기도를 다시 강조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항구한 노력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지혜로워라.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와 겸손입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는 것도, 바로 잡아 주는 교정도 사랑이자 지혜입니다.
참으로 형제들의 잘못이나 죄에 대한 교정도 지혜롭고 겸손해야 합니다.
사랑의 지혜, 사랑의 겸손입니다.
참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이런 교정의 지혜도 나옵니다.
상호교정이 없는 공동체는 약한 공동체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울 때, 형제의 잘못을 겸손히 잘 지적할 수 있고 자기의 잘못도 기꺼이 인정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형제들에 대한 잘못의 교정 절차가 참으로 침착하고 차분합니다.
절대 사감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정확히 잘못된 사실, 팩트를 지적하고 시정을 권합니다.
정말 깨어 있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라면 즉시 잘못을 인정할 것입니다.
“고맙다”, “감사하다” 보다는 “미안하다”, “잘못했다.” 진솔한 사과가 백배 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도 형제적 교정을 명령합니다.
이 사랑의 의무가 형제적 교정입니다.
형제적 교정에 소홀했을 때 그 책임을 묻겠다는 주님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참으로 진정한 형제 사랑은 교정의 충고에서 빛납니다.
교정과 치유, 화해를 위한 충고이지 책임 추궁이 아님을 숙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동체가 사랑과 지혜를 다해 단계적으로 충고의 절차를 밟고 최종적으로 아니다 싶을 때 공동체로부터 배제시키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원판 불변의 법칙”, “사람은 고쳐 쓸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걸레는 빨아도 역시 걸레”라는 자조적인 거친 말도 있지만, 끝까지 희망을 갖고 한계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살 수 있도록 참으로 넉넉하고 자비로워야 할 것입니다.
잘못한 자나 공동체나 참된 회개가 참으로 절실합니다.
무엇보다 공동체는 하느님의 넉넉하고 자비로운 모습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넷째, 운동하라.
오늘 말씀에는 없지만 특히 권하고 싶은 충고입니다.
기도처럼, 공부처럼, 일처럼, 사랑처럼, 교정처럼 운동도 일정시간 한결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영육의 건강에 심신의 훈련과 단련에 운동은 정말 필요합니다.
그러니 일정한 시간 혹은 되는 대로 심신 이완이나 강화를 위한 운동을 추천합니다.
영적 삶의 전략에, 참으로 살기 위해 건강을 증진시키는 운동 역시 중요 수행입니다.
저 역시 매일 한 시간 이상 침묵중에, 또는 기도중에, 또 노래하며 걷는 운동을 합니다.
참 사람되는 공부보다 어려운 평생 공부도 없을 것이나 결코 포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괴물이나 폐인이 아닌 참 사람이 되기 위해 평생 훈련이 하느님 중심의 기도와 사랑, 지혜와 겸손, 교정의 훈련이요 심신의 운동의 훈련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참사람이 되는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삶에 최선의 노력과 열정을 다할 힘을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제1독서(에제 33,7-9)는 파수꾼으로서 예언자의 사명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이스라엘을 감시하는 파수꾼이라고 하십니다.
파수꾼은 위급한 상황을 빨리 정확하게 알려야 하지만, 파수꾼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책임은 이스라엘이 감당해야 합니다.
예언자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맞춰서 말하는 점쟁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여주시고, 전하라는 말을 전하는 대변이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전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본대로 선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예언자가 자기 사명을 소홀히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예언자의 죽음으로 묻겠다고 하십니다.
예언자는 자기가 선포하는 말을 듣는 청중의 반항이나 협박 때문에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개인적인 취미에 젖어 말씀을 전하는 일에 소홀해도 안 되며, 하느님의 말씀을 제때 무조건 전해야 합니다.
예언자의 선포를 듣고서도 하느님께 돌아서지 않는다면 “자기 죄 때문에 죽는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말씀을 거부한 책임을 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시편 95장)은 그 옛날 이집트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말고, 하느님을 떠보거나 시험하지도 말고,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합니다.
복음(마태 18,15-20)은 죄지은 형제를 타이르고 용서하고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의 질서를 교란하는 이들과 관계를 단절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양을 찾듯이(18,12-14) 형제애를 발휘해서 타이르고, 용서하고,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죄를 지었어도 충고의 말을 받아들이면 “형제”라고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무거운 죄를 지은 것이 공개된다면 그 사람을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잃었던 양을 찾으면 다시 양의 무리에 들게 했듯이, 형제가 무거운 죄를 지었을지라도 용서받을 수 있고, 공동체와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걸림돌이 되는” 사람을 불행하다고 선언하신(18,6-9) 다음, 무거움을 강조하기 위해서 “죄를 짓는다”는 말을 쓰십니다.
걸림돌이 되는 것이 개인적인 문제라면, 죄를 짓는 것은 공동체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게 되는 일이 생길 때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찾아가 충고하고 화해하는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처음에는 다른 이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사랑하는 마음으로 단둘이 만나서 타이르라고 하십니다(레위 19,17).
그런데 단둘의 만남에서 좋은 결과가 없을 때는 율법에 따라서(신명 19,15; 2코린 13,1)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하십니다(요한 8,17-18).
저지른 죄의 내용에 대한 증인이 아니라 악행을 저지른 것에 대한 경고(용서냐 단죄냐)와 더불어 대화의 증인으로 데리고 가라는 것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려고 율법 아래에 있지도 않으면서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말씀하십니다(1코린 9,19-22).
둘이나 셋이 찾아가서 타일러도 듣지 않을 때는 공동체에 알리라고 하십니다.
기도하는 공동체가 마지막 중재자 역할을 할 것인데, 공동체의 말조차 듣지 않는다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공개적으로 죄인으로 취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공동체와 단절이 아니라 공동체가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그에게 확인시켜주라(2코린 2,7-10)고 하십니다.
이방인이나 세리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나게 되면 회개하고 공동체로 돌아올 수 있었듯이 단절이나 심판은 하느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13,24-30).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에게 주셨던 매고 푸는 권한(16,19)을 강조하면서 최종적인 심판의 권한은 당신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의 질서를 교란시킨 형제들과 대화하기 전에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것을 권고하십니다.
충고하러 가는 두 사람의 기도 지향이 일치하고, 상의하는 가운데 긍정적 의견을 끌어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파수꾼이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우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땅에서 매는 일이 교회의 일이지, 어느 한 개인의 일이 아님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다는 것은 최소한의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에서 봉사하는 사랑의 파수꾼이라면 제자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뜻입니다.
제2독서(로마 13,8-10)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임을 강조합니다.
“모든 이에게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13,7)라고 말한 뒤, 바오로는 별안간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합니다.
소극적으로 살지 말라는 것뿐만 아니라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라.”(12,21)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말한 뒤에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갈라 5,22)에 있어서는 오히려 빚을 진 것처럼 사랑으로 갚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만 빚쟁이가 되고, 또 그 이웃을 자기가 베푼 사랑의 빚쟁이로 만들어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이 단죄받는 일이 없게(8,1)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게명들)의 완성이고,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채울 수 있다(8,4)는 것입니다.
교회도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완덕의 여정에 있는 신앙인들이 완전할 수 없으므로 공동체에 아픔을 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파수꾼인 우리는 하느님의 입으로서 이웃에게 형제적 충고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잘못된 교리와 잘못된 신앙생활을 조장하는 이들에게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맡은(預言) 파수꾼으로서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해야 하고, 형제들의 충고를 들을 때에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고, 단순하게 인간의 훈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처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때로는 충고하는 이들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충고하기 전에 둘이나 셋이 모여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대로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파수꾼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 한 뒤에 최종적인 심판은 하느님께서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죽이는 이들을 용서하기가 정말로 어려웠기 때문에 아버지께 미루셨습니다(루카 23,34).
용서한다는 것은 미워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입니다.
우리도 용서하기가 어렵다면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미루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죽해야 저럴까?”라는 말로 먼저 자기 마음을 다스리면서, 그리고 완고한 마음이 사라지도록 기다리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가 화해를 청하지 않을지라도, 용서는 나에게 아픔을 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파수꾼이어야 할 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소홀히 하는 가운데 매고 푸는 권한을 남용한 적도 있었고, 반대로 공동체를 교란시킨 이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잘못 해석한 나머지 교회의 말을 듣지 않은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감시의 파수꾼이 아니라 사랑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을 크게 다치게 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데에는 물론 용서하는 데에도 용기가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해서 전체를, 아니 자기 자신은 물론 이웃과 하느님까지 잃어버릴 수야 없지 않습니까?
- 수원가톨릭대학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며칠 전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주도에서 5살 먹은 아이가 수영장에서 놀다가 사고가 났습니다.
급히 출동한 119 구조대의 심폐소생술로 아이는 다행히 깨어났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서 소방대에 익명으로 치킨세트 50개를 보냈습니다.
소방대에서는 선물을 보내준 분을 찾아보았고, 아이의 부모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소방대에서는 고마운 마음은 받겠지만 치킨은 근처의 보육원으로 보네고 싶다고 전하였습니다.
아이의 부모도 기꺼이 동의를 했습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선순환(善循環)’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고, 고마워하면 고마운 일이 생기고, 기뻐하면 기쁜 일이 생기곤 합니다.
꽃 한 다발의 선순환도 있습니다.
남편이 퇴근길에 모처럼 아내를 위해서 꽃 한 다발을 사다 주었습니다.
아내는 고마운 마음에 꽃을 담을 화병을 찾았는데 너무 낡았습니다.
꽃집에 가서 화병을 하나 샀습니다.
식탁을 보니 식탁보가 찢어져 있었습니다.
식탁보도 새로 샀습니다.
식탁에 앉아 창문을 보니 커튼이 너무 낡았습니다.
큰 맘 먹고 커튼도 새로 마련했습니다.
거실을 보니 지저분했습니다.
아내는 청소기를 돌려서 거실을 깨끗하게 청소했습니다.
남편이 퇴근해서 보니 집이 완전히 달라 보였습니다.
꽃 한 다발이 ‘선순환’의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제게도 선순환의 경험이 있습니다.
팬데믹이 심할 때입니다.
신문을 홍보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브루클린 사목회장이 전화를 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몸이 아파서 한국에 갔는데 3달만 미사를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주일 미사를 도와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도와주기 시작한 본당 미사가 어느덧 3년이 넘었습니다.
성당에서는 제가 머물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저는 가끔씩 숙소에 머물면서 지내곤 합니다.
교우들은 어머니가 하느님 품으로 갔을 때 함께 연도를 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어머니가 하느님 품으로 가신 지 3년이 되는 날입니다.
오늘도 브루클린 교우들과 함께 연도하기로 했습니다.
브루클린 공동체는 저의 서품 30주년 미사도 함께 해 주었고, 맛있는 반찬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매주 하는 친교도 선순환이 되고 있습니다.
한 가정이 기쁜 마음으로 친교의 비용을 기부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친교는 2년이 넘었어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결혼기념일, 생일, 기일, 손자의 백일, 장례가 있으면 친교의 비용을 기부하였습니다.
기쁜 일에도 기부가 있었고, 슬픈 일에도 기부가 있었습니다.
저도 오늘 어머니의 기일을 지내면서 기쁜 마음으로 친교 비용을 기부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악순환(惡循環)’도 있습니다.
짜증내면 짜증낼 일이 생깁니다.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깁니다.
불평하면 불평할 일이 생깁니다.
불가에서는 ‘인드라망’이라고 합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그물처럼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 우리는 악순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 있습니다.
‘폭염, 가뭄, 산불’의 삼종 세트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캐나다에서 발생한 산불이 검은 연기를 내뿜었고 뉴욕의 하늘까지 어둡게 하였습니다.
하와이 마우이 섬에서 발생한 산불은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고, 많은 인명 피해를 초래하였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온실가스를 계속 생산하면 자연은 기상이변으로 되갚아 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버려야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가는 손님일 뿐입니다.
이 지구는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야 할 삶의 터전입니다.
악순환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노래가 있습니다.
‘작은 연못’입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에 작은 연못이 있었습니다.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가 서로 싸웠습니다.
한 마리가 죽으면서 썩어갔고, 물도 따라 썩어 갔습니다.
결국 연못 속에서는 아무 것도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악순환이 계속되면 결국 모두가 망하게 됩니다.
신앙인에게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회개’입니다.
신앙인에게 선순환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나눔입니다.
악순환의 고리가 있다면 과감하게 끊어버리면 좋겠습니다.
선순환의 고리는 계속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한 관광객이 이탈리아 여행을 갔습니다.
길을 걷다가 건물을 짓는 공사판으로 들어서게 되었지요.
그는 한 노동자에게 다가가 “무엇을 하는 중입니까?”라고 묻자, “벽돌을 쌓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관광객은 계속 걸어가다가 먼저 만난 노동자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이번에도 똑같이 “무엇을 하는 중입니까?”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이 노동자는 “벽을 세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관광객은 두 노동자와 똑같은 일을 하는 세 번째 사람을 만나서 역시 같은 질문인 “무엇을 하는 중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동자는 아주 특별한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성당을 짓는 중입니다.”
똑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일의 무게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반복적인 일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즉, 자신의 시선에 따라 기쁨과 희망의 일상이 될 수도 있고, 무의미한 일상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다는, 그래서 일상의 삶을 특별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일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사는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만남도 의미있는 만남이 되어야 하지, 그저 그런 만남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만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일상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을 사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삶을 사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면서 나의 이웃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곳에 주님도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 공동체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 안의 일치는 주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며 살아가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공동체 안의 일치보다는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 너무나 큰 노력을 쏟아붓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함께 계신 주님을 떠올리면서,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본인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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