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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동역자들 21:15~18
15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조언 21:19~26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2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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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나 하나님이 이방인 가운데 행하신 일들을 보고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후, 유대인 신자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 바울에게 서원자들의 결례에 동참하도록 권합니다. 바울은 그대로 행하며 결례 기간이 만기되었음을 신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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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동역자들 21:15~18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약 100km입니다. 바울 일행은 가이사랴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이때 가이사랴의 제자 몇 사람이 함께 가고, 나손도 함께 갑니다. 구브로(키프로스) 출신인 나손은 1차 전도 여행 때 바울의 전도로 회심했을 것으로 봅니다. 나손의 집이 예루살렘에 있었기에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에서 그의 집에 머물고자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형제들에게 환영을 받고, 교회 지도자요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나 인사를 나눕니다. 하나님은 여러 동역자의 도움과 환영으로 바울을 위로하시면서 그를 사명의 길로 이끄십니다.
● 더 깊은 묵상
구브로 사람 나손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과 동행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가 사역자들을 위해 기꺼이 섬길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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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조언 21:19~26
바울은 선교 보고에서 모든 사역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그러면서도 유대인들로 인해 그에게 주의를 당부합니다. 유대인 신자가 매우 많은데, 그들은 주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모세 율법과 유대 관습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이방 지역의 유대인들을 선동해 유대 관습을 어기게 한다고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유대 관습을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면 안 된다고 했을 뿐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바울이 유대 관습을 존중한다는 표를 보일 방안을 제시하고, 바울은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자 그 제안을 실행합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오해 소지를 없애는 것이 좋습니다. 본질은 타협하면 안 되지만, 비본질에는 유연함을 발휘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품은 오해는 무엇이었나요?
비본질적인 일로 충돌하지 않기 위해 내가 유연함을 발휘할 일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하나님, 제 신념과 고집을 앞세우면 관계를 어그러뜨리고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분별의 지혜를 주셔서 진리는 사수하되, 죄가 아닌 것에는 유연히 대처하게 하소서. 겸손하며 서로 존중함으로 덕을 쌓고 화평을 이루는 데 힘쓰는 저와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20 나의 죄를 정케 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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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들이 지혜롭게 잘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고, 지혜를 부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 모든 찬양과 영광을 온전히 주님께만 올려 드리고,늘 겸손함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내가 먼저 나눔과 섬김을 실천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하자
- 어디를 가나, 어느 곳에서 누구를 만나든, 그분께 지혜를 구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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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여러분
또 한 번 바울의 결단에 감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그는 헌금을 주는 입장에서 약간은 무례한 야고보의 제안을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을 가지고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 야고보의 제안에 동의하며 행동에 옮겼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저는 바울이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다메섹에서 그를 만나 주셨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야고보의 결단과 지혜를 폄하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을 비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사도로서 권위를 세우기 위한 야고보의 노력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며 그 속에 있는 자유와 절제를 경험하는 삶이 되길 소원합니다.
복음 때문에 무엇이든지 자유하나 복음 때문에 자신을 절제하는 삶을 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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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 삶....-
❏ 한절 묵상
⊙ 21:24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3차전도 여행까지 마친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이방 사역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낱낱이 보고하자 야고보를 비롯한 장로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는 일에 매우 열성이 있는 사람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할례를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가르쳤다고 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1절).
이에 대해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잘못된 소문들을 잠재우기 위해 바울로 하여금 유대인의 전통적인 규례인 정결 예식을 행하여 모세의 율법과 유대인의 전통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 오해를 풀어가기를 조언을 했습니다.
바울은 결코 악한 것이 아닌 정결 예식을 행함으로 유대인 성도들과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다음날 네 사람을 데리고 정결 예식을 행하게 됩니다(26절).
바울의 관심은 교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자기 자신의 것을 기꺼이 헌신하면서까지 유대적 관습에 따라 정결 예식을 행했습니다. 한 영혼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본질적인 것을 위하여 비본질적인 것들을 과감히 내려놓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들이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교회 공동체 안에 수많은 갈등이 일어나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전통, 관습, 관례라는 것들을 가지고, 복음의 본질을 놓쳐버리는 교회 공동체의 안타까움을 봅니다. 나의 일상의 삶에서도 내 목회에 그리고 지금의 시간에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것들에게 너무나 많은 시간들과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허무하게 시간들을 낭비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시간의 관리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거룩함이 나의 일상의 삶에서 들어날 수 있도록 내 자신을 잘 가꾸어 가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진리에 대해서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굴복해서는 안 되지만, 타인의 영혼을 구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결단해 봅니다.
오늘도 내 판단과 원칙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평안과 안정을 위해 내려놓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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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노에서 에베소 장로님들과 작별을하고 밀레노에서 두로로
두로에서 예루살렘까지 바울이 도착을 했다.
이것으로 실질적인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이 모두 끝나게 되는 것이다.
두로에서 제자들이 찾아와서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고
가이사랴에서는 선지자 아가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했지만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을 뿐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라고 굳은 각오를 밝히고 예루살렘으로 갔다.
드디어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을 한다.(17)
그 이튼날 바울의 일행이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의 집을 방문한다.(18)
장로들도 다 함께 있었다.(18)
바울이 선교 보고를 한다.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한다.(19)
선교 보고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드러내 나타내는 것이로구나.
바울처럼 성공적으로 이방인 전도를 한 분이 내가 이렇게 열심히 섬기고
내가 이렇게 사역해서 이런 교회 저런 교회를 세웠노라라고 말할 수가 있을 법 한데
바울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단지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했다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만을 드러내었다.
바울은 큰 일을 하고도 겸손하게 하나님이 하셨다고 간증하고 보고를 했다.
하나님이 행하셨을을 간증하고 찬양하자.
간증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 또한 놀랍다.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20)
보고를 하는 자도 하나님의 행하심을 나타내었고
듣는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나는 날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보다도
목사님을 찬양하고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은 없었는가?
혹시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으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비극이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 바울의 선 교보고를 들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반응으로, 모두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영광을 돌리지만 다만 그 일로 인해 불거진 문제점을 제시한 말입니다.
여기서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는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모세의 율법과 각종 규례들을 소중히 지키는 자들로 소위 유대적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바울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율법을 폐기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율법의 매임으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율법에 매이지 않는 바울의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수만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단한 숫자입니다. 그 시대 유대교를 떠나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로, 지금도 이스라엘에선 그렇지만 사회에서 매장을 당할 수도 있고 가문에서 추방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장한 그들이 여전히 율법을 신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율법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지만 계속 불완전한 구약의 율법을 고수하고 있으니, 마치 그림자로 실체를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신앙이 척도인 양 그것에 위배되는 자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에 정통하고 율법에 자유한 바울을 징계하려고 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정통 기독교를 유사 기독교가 판단한 것입니다. 기독교 아닌 기독교가 진짜 기독교를 기준 미달이라고 비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기독교 안에도 그런 현상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분명한 기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한국기독교가 마치 신앙의 전통처럼 활용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성경을 너무 오해한 예입니다. 더 심한 것은 수험생을 위한 100일 기도입니다. 이것은 정말 성경에 조금도 그 근거가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무속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지요. 그런 비슷한 상황에서 바울의 행동은 남다릅니다.
유대적 그리스도인들을 의식해서 율법을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다투지 않습니다. 자기 기독교가 정통하다고 신학논쟁을 벌이지도 않습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주님을 영접한 것이 너무너무 고마웠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도 유대인이라 그렇습니다. 그렇게 핍박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가는 곳마다 회당에 먼저 들린 것은 동족을 우선으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의 사명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이지만 그 전에 자신도 유대인이므로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는 타고난 유대인으로, 조국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주여 삼창! 누구보다도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통성기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산 기도도 해야 하고 수험생을 위한 100일 기도도 참여해도 좋습니다. 40일 금식기도도 체력이 되면 도전해 보고, 일천번제도 좋고 더 나아가 삼천 번제도 여력이 되면 해도 좋을 성 싶습니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기독교 안에 조금 수상한 유교, 샤머니즘 같은 요소들이 있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기독교를 버릴 수는 없지요.
마치 바울이 율법을 버리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비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폐기 처분할 수 없는 것은 오히려 율법아래 있는 영혼을 위해 바울이 스스로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술, 담배 하지 말라는 명확한 근거도 없어도 그것을 금했고 거의 200년 동안 지키고 있는 청교도 한국기독교가, 우리 기독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안팎으로 비판의 소리가 심한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도 개독교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국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셔서 태어난 곳이 이곳 한국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높이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곳에서 우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민족의 복음화를 이루어내면 좋겠습니다. 요즈음 청소년들과 젊은이 들이 즐겨 입는 티셔츠가 있습니다. ‘KOREA ARMY’ 등판에 있는 그 문구를 보면 심장이 뜁니다. 이 시대 바울이 우리에게 전한 말입니다. 믿는 이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과 한국기독교를 사랑합니다. 이를 위해 그 어떤 것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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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바울이 그의 세 번째 선교여정의 마지막 지역인 예루살렘에서의 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1. 일부 예루살렘 교인의 오해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을 기쁨으로 환대하였습니다.“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행 21:17)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이방지역에서 하신 선교의 일을 말하였습니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행 21:19)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도 유대지역에서의 일을 바울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행 21:20) 복음이 그렇게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힘있게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도 있었습니다.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행 21:21) 예루살렘의 유대인 기독교인들 중에 바울을 향해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부의 교인들이 바울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오해는 사실 그들의 몫입니다. 바울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입장에서는 그들의 오해에 대한 책임이 없습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매우 서운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였고 수많은 곤욕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어렵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물질적 어려움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일부 교인이 자신에 대해 아주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오해하고 있는데 교회의 리더들이 그들이 오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에게 그것을 해소해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자신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강력히 설명해주어야 할 것 같은데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들이 오히려 자신에게 그들의 오해를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을 때 바울 입장에서는 매우 서운하였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묵묵히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들이 요청하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였습니다. 바울 자신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할지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2.바울의 자세
예루살렘교회의 리더들은 바울에게 일종의 보여주는 행동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행 21:24) 바울이 이방지역을 돌아오고 자신의 정결의식을 행할 때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들의 비용(상당한 비용)을 대주면서 그들과 함께 하면 사람들이 바울의 진심을 알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여전히 일정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존중하였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으니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줌으로 유대인 신자들이 바울을 오해하는 것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도 그렇게 왔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들이 보여주는 일종의 쇼를 요청하였을 때 역시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강하게 자신의 마음의 정직을 밀어붙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은 떳떳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울은 그들의 요청을 그대로 수용하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리더는 바울에게 이러한 것을 요청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행 21:25) 예루살렘의 교회 리더들은 바울에게 그러한 것을 요청하며 그것이 이방인 신자들에게는 적용되는 것이 아니며 단지 문화적인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진리에 대해서는 일사각오의 단호한 정신으로 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문화에 대해서는 온유한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바울을 오해는 사람들에게나 바울에게 또한 이러한 것을 요청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들에게나 서운한 마음이 들 수 있었으나 바울은 자신의 행동이 진리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관습을 지키려는 것을 존중하는 것으로서 그들을 위해 묵묵히 낮아져서 그들의 요청을 수용하였습니다.
저는 바울의 이러한 모습이 참으로 대단하다 생각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믿음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강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자신이 낮아짐으로 그들의 연약함으로 실족하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충분히 주장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멋있어 보일 수도 있는데 그는 멈추어야 할 때를 알았고 복음을 위하여 멈추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사각오의 모습으로 힘있게 가는 것이 아름답지만 때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멈추고 낮아지는 것이 더 아름다울 때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바울은 강하고 담대한 전투적 모습이 아니라 항복하는 것과도 같은 나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들이 아직 복음에 대해 연약하기에 그 연약한 이들을 위해 기꺼이 낮아지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오직 복음을 위하여 강해야 할 때와 약해야 할 때를 알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한 없이 약한 모습이지만 그 속에 참으로 강인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강한 믿음을 나의 멋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조금 약해지고 조금은 덜 멋있는 모습으로 낮아짐이 필요합니다. 오직 복음을 위하여. 우리의 믿음에 일사각오의 멋스러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보가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이르자 형제들이 나실인 서원자 넷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 비용도 부담하라고 권했습니다 사실 나실인 서원자의 구별기간이 차면, 번제물로 숫양 한 마리와 속죄제물로 어린 암양 한 마리와 화목제물로 숫양 한 마리와 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과 전제물을 드리고 머리를 깎음으로 서원이 완성되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네 사람의 거액의 서원제사 비용을 바울에게 부담하라고 했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가난한 서원자의 비용을 대신 내는 것을 큰 경건으로 인정했고,
바울이 모세를 따르지 말라고 한다는 유언비어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행21:24)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좋게 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결례를 행하라 하셨다면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시선이 두려워 한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우리가 행할 바가 아닙니다
어차피 저들은 비방을 위해 비방하는 것이고,
그 어떤 합리적인 설득도 불가능한 사탄에 잡혀 어떤 지혜도 지식도 분별력도 없는 자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 대해 잘못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 말아야 합니다
잘못 알려지면 어떻고, 비방을 들으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로 잘못 알려졌습니다 "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요8:48~49)
바울은 전염병이요 이단의 우두머리로 잘못 알려졌습니다
"전염병 같은 자라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행24:5)
그러나 우리의 인정은 오직 주의 칭찬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10:18)
그러므로 오직 주께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그
그래서 착하고 충성되다 인정받기 원합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25:21)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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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묵상은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 했던 유언적인 말씀입니다.
오늘 묵상은 분명하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했는지 안다는 17-21절,
성령에 매여라는 주제를 다루는 22-25절,
그리고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함을 선언하는 26-27절입니다.
너희도 아는 바니(투명성의 원리)
오늘 우리가 살펴볼 부분은 “너희도 아는 바니”에 걸려 있는 바울의 사역원리 부분입니다.
우선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모아놓고 말하기를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라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동역 했으며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었는지, 어떤 자세로 사역을 감당했었는지 바로 당신들이 증인이라는 말입니다. 뭘 안다는 것입니까? 내가 어떤 자세로 사역을 했는지 다 보아서 안다는 말입니다. 겸손과 눈물,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 유익한 것은 거리낌 없이 전한 것들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공히 복음을 전한 사실입니다.
특히 거리낌 없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자신이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 사람의 비위를 거스를까 무서워 억제하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교묘한 말로 피해가거나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교훈과 책망을 비롯하여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대히 증거 했다는 말입니다. 특히 앞에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관되게 전했다는 말입니다.
용기 있게 말씀을 증거 했다는 말입니다. 위축되는 일이 없이 말씀을 증거 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목회 일선에서는 망설여지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틀림없이 원리는 이런데 그대로 전하면 상처가 될까 망설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원리가 요동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늘 같은 말을 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가르친 것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내 남은 평생 거리낌 없이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께 부름 받을 수만 있다면 가장 큰 행복일 것입니다.
심령의 매임을 받아(22-25절)
사람은 뭔가에 매여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로잡힘이 없으면 그 인생은 얼마 가지 않아서 짙은 허무에 빠지게 됩니다. 의미 없는 인생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얽어맵니다. 뭐라도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살겠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무엇에 매여 사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선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그랬습니다. 비장함이 풍겨나고 있고 꼭 가야 한다는 매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심령에 매임을 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의해서 이 본문은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심령이 순전히 인간적인 집착이라면 사도 바울을 지금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게 아니고 심령에 매임이 성령의 강권하심이라면 이것은 고집이 아니라 순종이 됩니다.
어쨌든 이 본문에는 꼭 가야 한다는 비장함이 풍겨나고 있습니다. 왜요?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23절에 의하면 성령께서 이미 각 성에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에 매인다는 것은 이것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심령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은 이미 성령께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한 행보가 아니었습니다.
무슨 영화가, 무슨 커다란 부와 명예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 아닙니다. . 성령께서 주신 매임이었습니다.
돈과 명예 때문에 매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매인 것입니다. 그 매임은 기쁨의 매임입니다.
자발적인 매임입니다. 따라서 이 매임은 구속하고 속박하는 매임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 하게 하는 매임입니다.
성령께 매임을 입은 사람이 예루살렘을 거부하고 환난과 핍박을 피해갈 길을 모색했더라면 그것은 아마 더 큰 매임을 얻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왜요? 아마 이 고난의 길을 어떻게든 피해서 갔다면 평생 그로 인한 죄책감에 매어 살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발적이고 기쁨으로 매였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구절은 바로 24절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그랬습니다. 자신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에 매인 사람이라는 분명한 자기이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매임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에 대한 매임이었습니다. 이 매임은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매임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생명까지도 귀하게 여기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매임은 성령에 매임이요, 인간적인 욕망에 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는 간절한 열망의 매임이었습니다. 그 매임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생명까지도 걸 정도로 간절한 매임이 있었습니다. 이 매임은 사도 바울의 평생을 붙잡고 있었던 매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매임이 사도 바울을 행복하게 했습니다. 열정적이게 했습니다. 성령께서 물어오시는 진지한 질문입니다. 무엇에 매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돈과 명예와 권력이 나를 붙들어 매고 있는 실체가 아니기를 기도합니다.
마지막 사도 바울의 사역에 대한 말씀은 26-27절에서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내가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우선 사도 바울은 성령의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하면서
내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깨끗하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 3:17-21절을 살펴보아야 온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그랬습니다.
여기서 피 값을 찾게 되는 경우가 언제입니까?
말씀을 증거 하지 않아서 죄 가운데 죽게 된 경우 그 피 값을 말씀을 전하지 않은 그에게 찾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뜻을 가감 없이 전하는 것에 그 주안점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선지자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을 모아 놓고 나는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왜요? 20절과 27절에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꺼림이 없이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했다는 말씀입니다.
3년 동안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증거 했기 때문에 자신은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31절에서도 나타납니다.
내가 삼 년이나 밤낮을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지요. 정직했다는 말입니다. 말씀 앞에 충실했다는 말씀입니다.
내 남은 생애 성령에 매임을 받아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고 싶습니다. 미숙해서 독설을 퍼붓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깊은 세계를 올바르게 분별하고 그대로 전하고 싶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말씀 앞에 깨어 돈에 매이지 않고, 세상에 매이지 않고 성령에 매여, 말씀에 매여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8월12 인천역 차이나타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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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드디어 예루살렘에 옵니다. 예언자들의 예언대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로마사람에게 잡힙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로마로 가는 끈이 됩니다. 총독과 왕에게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신비롭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야고보를 만난 바울)
17,18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은 드디어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형제들이 기꺼이 영접하였습니다. 가이사랴에서 함께 한 성도들을 포함한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그들을 기꺼이 환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는 아닙니다. 18, 22절에 의하면 실제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아직까지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온 것을 알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은 교회 전체가 아니라 동료들과 친구들로 이루어진 사적인 모임에서 영접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거기서서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났습니다. 우리와 함께 라는 표현을 써서 우리와 바울이 구분되어 표현합니다. 바울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먼저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하고 할 수 있는 야고보를 방문하였습니다. 여기에 베드로나 요한, 그 밖의 다른 사도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이는 그들이 전도나 다른 일을 위해서 출타 중이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수장(首長)으로서 교회 공동체를 지혜롭게 잘 지도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일반 유대인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일반 유대인들은 그에게 의인 야고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고 합니다. 야고보는 수석 장로이며 다른 장로들은 바울을 환영하는 자리에 초청된 야고보의 손님들이라고 봅니다. 아니면 야고보를 제외한 사람들은 단지 입회인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바울의 선교보고)
19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바울은 이들에게 하나님이 자신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인 가운데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였습니다. 사역은 종 일꾼을 뜻하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사명(20:24), 또는 직분(롬 11:13) 등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람들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음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그의 역할 가운데는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헌금 전달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이방 가운데서 사역한 일들을 세세히 증언하고 있는데, 그는 그 모든 일들의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을 오해를 하는 유대인이 있다)
20,2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야고보와 일행은 바울의 보고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야고보 및 장로들이 바울의 증언을 매우 호의적으로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으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야고보는 유대인 가운데 예수를 믿는 수만 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율법에 열심히 있는 자라고 합니다. 누가는 야고보의 무리들이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기쁨에 넘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눈길들이 많음을 말합니다(22절).
수만 명이라는 야고보의 이야기는 교인들의 수가 많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관심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소위 유대적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모세의 율법을 비롯한 각종 규례들을 소중히 여겨 지킨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바울이 깨달은 바, 복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율법을 폐기하지는 않지만 율법의 매임으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매이지 않는 바울의 행위를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이방에 있는 유대인에게 율법을 어기고 할례를 하지 못하게 하고 관습을 지키지 않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을 비방하는 소문을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이러한 소문의 진원지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을 것이고 그 중에서도 유대교적 전통에 철저한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모세를 배반한다는 것은 모세가 전해준 율법을 무시한다는 말이고 이는 곧 하나님에 대한 배반을 뜻한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을 배반했다는 것은 악의에 찬 허위 사실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 자체를 부정한 바 없으며 오히려 그는 율법을 신령한 것으로 보았고, 율법의 긍정적인 역할도 인정하였습니다. 다만 바울은 사람들이 율법 자체에 얽매여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행위들을 배격하였습니다. 율법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자들은 비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바울이 할례를 금하였다는 것도 전혀 터무니없는 허위 사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할례 그 자체에 대해서 어떤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았으나 하는 것도, 안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했습니다. 디도는 할례를 받지 못하게 하였지만 디모데에는 할례를 받도록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진실이 이렇다 하더라도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들은 바대로 오해를 하고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이 오해를 해소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의 안식일법이나 먹는 율법을 다 지키지 않고 할례를 하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이 은혜의 복음을 가지고 있을 때 율법도 더 잘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형성된 그들의 자존심을 무시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깊이 알고 이해했습니다.
(오해를 풀기 위해서 결례를 권면함)
22-24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묻습니다. 야고보 및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바울의 신변에 대한 문제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실은 이제 곧 다른 교인들에게 알려질 것이며 바울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자들이 거센 공격조로 나올 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이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을 얻기 위해서는 이들에게는 율법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야고보는 바울이 이를 위해서 서원한 네 사람과 결례를 행하고 돈을 드려서 머리를 깎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서원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무엇을 하기 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단순한 소원을 넘어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서약이기 때문에 매우 엄숙한 것입니다.
서원은 주로 나실인의 서원과 관계되는데, 부모에 의한 서원이나, 본인의 자유의사에 의한 서원이 있으며 서원의 기간은 영구적인 것이 있고, 일정한 기간 동안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서원자는 서원한 것에 대해 반드시 신속하게 행해야 하며, 남용하거나 경솔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서원한 기간 동안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규범으로는 독주를 마시지 말고 머리를 깎지 말며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네 명의 서원은 본인의 자유 의사에 의해 일정한 기간 동안만 하는 서원이라 여겨집니다. 결례를 행하라는 것은 서원한 자들처럼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서원 기간 동안 지켜야 할 규범을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는 것은, 결례 기간이 끝나는 날에 머리를 깎고 희생 예물을 드리는 때에 드는 경비를 부담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드려지는 희생 제물로는, 번제물로 일년 된 수양 하나, 속죄 제물로 일년 된 어린 암양 하나, 화목제로 수양 하나, 그 외에 무교병 과자 등이었으므로 그 비용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비용을 바울에게 부담하라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난한 서원자를 위하여 비용을 대신 부담하는 것은 매우 경건한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아그립바 I세가 가난한 나실인을 위해 이런 비용을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울에게 이런 일을 하라는 것은 그의 재력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환심을 사라는 말이 아니라 그가 율법을 부정하지 않고 지키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어 그들의 오해와 노여움을 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도 율법을 행하는 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을 얻기 위해서는 잠시 유대인과 같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을 상기시킴)
25절을 보십시오.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야고보는 신도가 된 이방 사람들에게는,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삼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결정해서 써 보냈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일찍이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 신자들의 신앙 생활을 위한 지침으로 결의되었던 것인데, 여기서 다시 한번 반복하여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바울의 동료들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나 누가가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반복하여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 회의에서의 결정이 이방인 선교에 중심적 역할을 했던 바울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 내려진 것이라고 볼 때 이번에는 율법 준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루살렘 신자들을 위하여 바울이 양보해 줄 것을 간접적으로 요청하기 위한 것입니다.
(결례를 행한 바울)
26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바울은 그 다음날 네 사람을 데리고 가서, 함께 정결예식을 한 다음에,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정결 기한이 차는 날짜와 각 사람을 위해서 예물을 바칠 날짜를 신고하였습니다. 바울은 야고보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바울 일행이 서원의 절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친 후 머리를 깎아 제단 불에 던져 태운 다음, 제사장에게 서원 기간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보고하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그의 선교 전략 즉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자에게는, 자신은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아니하지만,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자같이 된다는 원칙을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9장 20절에서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바울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스스로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목표는 어찌하든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생각과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일찍이 예루살렘에 올 때 고난이 있을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말을 존중하여 머리를 깎고 결례를 행하였습니다. 우리가 복음 외에는 어떤 것도 양보하고 하나가 될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복음은 절대 양보할 수 없지만 양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만의 틀, 스타일, 생각은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것만 고집하다가 양들에게 상처 주고 교회의 화평을 깨고 구원 역사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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