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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틸리케 감독 부임 이후 평가전 2연전이 막을 내렸다. 1승 1패를 거뒀고, 180분 경기라고 생각한다면 3골 득점에 3골 실점이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성적표라고 할 수도 있고, 또 조금은 불만족스러운 성적표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코스타리카 전은 1-3 완패였지 않은가. 하지만 그 과정은 매우 희망적이었으며 대한민국 대표팀은 불과 3개월 전과 비교하면 아예 다른 팀이 되었다. 감독 부임 후 처음으로 갖는 평가전들이었으며 감독은 선수들이 경기를 뛰는 모습을 직접 지켜볼 수 있었던 첫 기회이기도 했다. 패배는 축구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있다면 다음을 더욱 기대할 수 있다. 더욱이 이런 평가전이라면, 약팀을 이기는 것보다 코스타리카 같은 수준급 팀을 상대로 지는 것이 더 나을 수가 있다.(개인적으로 이번 코스타리카 팀에게 감사하고 싶을 정도이다.) 부족한 점이 있을 순 있지만 우린 이제 그것을 보완하면 될 일이다.
희망적인 변화는 분명히 있었다. 우리가 파라과이와 코스타리카를 몰아붙이는 장면은 다른 강팀들 못지않게 강력했다. 게다가 그 과정을 보면 우리가 아시아권에서 만나야할 약팀을 몰아붙이기에도 충분할 수준의 약속된 전술과 움직임이 있었다. 앞으로 유럽, 남미, 아프리카의 강호들과는 호각지세의 승부를, 아시아권의 상대적 약팀을 상대로는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대승을 거두는 경기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슈틸리케 감독의 부임과 함께 시작된 2018 러시아 월드컵을 향한 여정도 힘차게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꽤 밝은 것 같다. 평가전 두 경기에 대한 리뷰 1편 시작하자.
0. 감독은 팀을 바꾼다.
이번 평가전에서 팬들이 느꼈을 감정은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 샤워한 후, 뜨끈하게 튀겨진 치킨에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들이켰을 때 느꼈을 시원함이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최소한 나는 그랬다. 감독 한 명이 바뀌었을 뿐인데 팀 전체가 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뀐 것은 감독 한 명이지만 감독 한 명이 바꿀 수 있는 게 한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슈틸리케 감독이 팀을 바꾼 것을 차례차례 정리해보자.
1. 전술의 변화 - 공격진에서의 속도를 높이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팀의 전술 변화이다. 전술을 단순히 포메이션의 수준에서 보자면 이전 감독들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하지만 같은 형태의 선수 배치를 유지하면서도 각각에게 부여된 역할과 움직임이 달라지자 팀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선수들의 움직임에 자유도가 높아졌다. 코스타리카 전에서 가장 위협적인 움직임 몇 차례가 수비형 미드필더에 위치한(사실상 그렇게 여겨질 뿐인) 기성용의 공격 가담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늘 공격 전개 등 공을 만지는 역할은 기성용에게 맡긴 채 수비적인 역할에만 치중했던 한국영이 볼 전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훌륭한 공격적 재능도 뽐냈다. 그 외에도 남태희의 드리블을 통한 탈 압박과 원터치 패스로 공의 흐름을 이어가는 움직임, 이청용이 드리블과 넓은 시야 그리고 타이밍을 적절히 맞춘 패스로 수행한 플레이메이커 역할 역시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즉 많은 선수들이 이전에 부여되었던 역할과는 다른 움직임을 많이 보였다. 남태희와 이청용이 과거에 전형적인 측면 공격수로 위치하면서 측면 공략에 치중했던 것과 달리 중앙과 측면을 넘나들면서 움직임을 가져가자 많은 공간들이 생겨났다. 기성용 역시 그 공간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고, 손흥민, 이동국, 조영철 등 공격수들이 적극적으로 공간을 찾아들어가면서 빠른 템포의 공격을 이끌 수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의 가장 기본은 ‘공간’에 대한 이해이다. 선수들도 아마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 훌륭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축구도 많이 보고 배웠을 것이고 그런 축구들도 많이 해봤을테니까. 하지만 11명이 움직이는 축구에서 혼자만의 움직임으로 팀 전체의 움직임을 이끄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독단적인 움직임은 팀의 균형과 단합을 떨어뜨릴 수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감독의 존재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선수들의 위치와 움직임을 잘 정리한 듯 보인다. 우선 가장 중요한 움직임 변화는 “공을 주는 사람, 공을 받는 사람 이외의 제 3자가 이후 움직임을 예측하여 ‘생겨날’ 공간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코스타리카 전 득점 장면으로 간단하게 설명이 가능하다. 골 장면에서 공은 장현수-남태희-손흥민-이동국 순으로 연결이 이뤄졌다. 장현수가 중앙 쪽의 남태희에게 공을 투입하는 순간 이미 측면에 위치한 손흥민은 중앙으로의 쇄도를 시작한 상태이다. (아래사진 참고)
공이 향하는 남태희에게 수비가 압박을 가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수비수들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이 공을 받는 남태희에게 쏠릴 수밖에 없고, 순간적으로 속도를 높이는 손흥민과 같은 공격수들을 견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능동적인 공격수들이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수비수들에게 우위를 점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이 될 때이다. 이런 움직임을 가져가기 위해선 1차적으로는 유연한 위치 변경으로 공을 받으러 움직이는 것이 필요하고, 2차적으로는 위치를 변경하여 공을 받으러 움직이는 선수의 움직임에 맞춰 바로 공을 받을 수 있는 위치로 제 3의 선수가 움직여야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상대가 반응할 수 없는 속도까지 공격의 ‘템포’를 올릴 수 있어서 수비진을 순간적으로 허물 수 있다. 불과 며칠 간의 소집이었지만 슈틸리케 감독은 이러한 움직임을 잘 조직해냈다. 개개인이 번뜩이는 실력을 보이긴 하지만 팀 차원에서 답답한 공격을 보였던 이전을 생각해보면 상당한 발전이다. 우리보다 전력이 떨어지는 아시아권 팀을 상대로 답답한 공격을 이어갔던 것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타개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최근 축구의 화두는 ‘압박’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에 따라서 ‘탈압박’이 또다른 화두가 될 수밖에 없다. 언급한 빠른 템포의 움직임은 ‘탈압박’하기에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브라질에서 우리가 공격적으로 실패를 겪어야 했던 이유는 일단은 선수들이 공을 받아 놓은 이후에 공을 연결할 곳을 찾았기 때문이다. 수비진에서처럼 안정적인 연결이 중요한 위치에서는 문제가 될 것이 없으나 빠른 전개로 상대를 허물어야 할 높은 위치에서도 수비라인에서와 같은 느린 템포의 연결은 파괴적이지 못하고 질질 공격을 끄는 경향만을 나타냈다. 수적 우세에서도 효과적인 공격을 하지 못했던 벨기에 전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라인을 2선 혹은 3선으로 굳힌 상대를 허물기 위해선, 지금 우리 대표팀이 보여준 공격처럼 능동적으로 공간을 만들고 또 그 공간에 뛰어들면서(공간에 뛰어들고 나면 또 다른 공간이 또 생긴다.) 상대를 빠른 속도로 흔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선수들 자체의 달리기 속도에는 크게 차이가 없었으나, 팀의 템포가 올라가면서 전체의 스피드는 빨라졌다. 이를 위해선 이러한 전술적 움직임을 할 수 있는 선수가 발이 빠른 선수보다 훨씬 중요하다.
(김상호 감독이 이끌던 U-19 선수들도 마찬가지 감상이다. 개인적으로는 드리블, 속도, 슛 전부 훌륭했음에도 답답한 공격을 이어갔던 것은 이러한 팀의 유기적 움직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2. 팀의 밸런스를 잘 잡았다. - 대한민국은 공격의 팀이다.
개인적으로 홍명보 감독의 축구가 그렇게까지 나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감독의 성향이 그랬다고 생각한다. 익숙한 선수들을 뽑으면서 의리 축구 논란에 휘말려야 했고, 선수 기용에 있어서도 익숙한 선수들을 우선 기용해서 의리 축구 논란은 더욱 깊어졌다. 또한 전술적으로도 수비를 강하게 굳히는 것을 그 핵심으로 삼았다. 골을 노리는 것은 주로 세트피스 상황이나 크로스에 이은 공격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선수 선발부터 전술까지 굉장히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모습이었다. 아마도 수비수 출신인 홍 감독의 성향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나쁘다고 평가하고 싶진 않지만 우리가 가진 장점을 잘 못 살려냈다는 평가를 내리고 싶다.
대한민국은 공격적인 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수비진에서는 역대로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오늘 코스타리카 전에서도 3골이나 실점했으며 2번째 골은 우리 선수가 걷어낸 공에 우리 선수가 맞으면서 역습 상황을 맞았고, 중앙 수비수는 다급하게 태클을 시도해서 완전히 젖혀졌고 이후에 크로스를 허용하고 실점했다. 파라과이 전에서도 골키퍼의 선방 덕에 많은 실점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점 장면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었기 때문임이 분명하니, 굳이 잘못된 점을 여기서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수비적으로 완벽한 팀은 아니라는 것이다.(수비에 일가견이 있는 슈틸리케 감독이 그 완성도를 높여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실점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고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이기기 위해 ‘공격’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슈틸리케의 팀 밸런스는 매우 적절하게 잡혀있다고 보인다. 수비라인을 전체적으로 올린 상태로 상대를 강하게 압박한다. 축구라는 스포츠는 네트가 있는 스포츠들이나 야구와는 달리 공을 빼앗는 순간부터 공격이 바로 전개된다. 높은 위치에서의 압박은 뒷공간을 얻어맞을 가능성도 높지만 공을 빼앗았을 경우 상대의 골문을 향해 빠르게 전진하는 것도 가능하다. 안정감을 위해 다소 점유율을 빼앗기더라도 수비라인을 내리고 2선으로 단단히 구축했던 브라질 월드컵과는 달리, 슈틸리케는 공격진부터 조직적인 압박을 가하는 전술을 구사한다. 전체적으로 팀의 중심을 앞쪽으로 끌어올리고 팀 자체도 보다 전방을 향하여 무게를 두고 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이전까지 낮은 위치에서 수비를 우선시하고 공격 시에는 공의 1차적 전개에만 관여하던 기성용이 전진하여 압박을 가하는 모습이 파라과이 전에서 몇 차례 보였다. 이전에 비해 훨씬 전방 지향적인 팀이 되어있다.
앞서 언급하였듯 선수들의 위치 변화가 잦아진 만큼, 수비적 역할을 부여받은 선수들이 공격에 나서는 경우도 잦아지고 있다. 좌우 풀백의 공격가담과 기존의 ‘수비형’ 미드필더들의 공격가담도 잦아지고 있다. 이 때문에 수비 시에 허점을 노출할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 공격수들의 수비 가담으로 상쇄시키는 모습은 단순히 전술적인 측면이 아니라, 팀의 단합에 있어서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수비가 원래부터 불안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위험은 알지만 앞으로 다같이 압박하고 공격하는 전술은 팀 스피릿에도 긍정적일 것으로 보인다. 다함께 공격하고 다함께 수비하는 팀이 바로 ‘원 팀’이 아닐까.
3.선수들의 위치와 역할 변화가 유연하다.
선수들의 역할 변화가 그 어느 때보다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코스타리카 전을 보자면 기성용이 전진배치 되기도 했으며, 윙어라고 생각했던 이청용이나 남태희는 중앙에서 움직이면서 공을 뿌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국영 역시 그 어느 때보다 많이 공격전개에 나섰다. 장현수는 중앙 미드필더로 기용되어 평소보다 앞 선에서 팀의 빌드업에 나섰다. 양쪽 측면 풀백들은 공격 시에는 지체하지 않고 공격으로 나섰고 남태희와 이청용이 중앙으로 좁히면서 생긴 공간을 내달렸다. 지난 파라과이 전을 보아도 공격진에서는 끊임없이 선수들이 움직이면서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전반전에 누가 고정적인 측면 공격수인지 알 수 없을만큼 포지션 변화가 잦았다. 이번 평가전은 이전에 비해 포지션 변화가 심하고 위치가 고정적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고 평가를 내리고 싶다. 선수들이 항상 하던 플레이만 하는 것과는 다른 플레이들을 지켜볼 수 있어서 즐거웠고, 또 경기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례로 이청용을 설명하자면,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2007년 U-20 대회 당시 이청용은 중앙에서도 활약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측면에서 중앙으로 번뜩이는 패스를 연결할 때도 많았다. 기본적으로 패스에 재능이 있는 선수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이청용의 이미지는 빠른 돌파와 재기있는 움직임으로 상대를 제쳐내는 드리블러로서의 모습에 가깝다. 하지만 코스타리카 전에서 이청용은 중앙과 후방으로 움직이면서 빌드업 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했고 매우 훌륭한 플레이를 펼쳤다. 남태희 역시 드리블러로서가 아니라 연결 고리 역할을 멋지게 수행했고, 기성용은 수비 뒷공간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면서 위협적인 공격 재능도 뽐냈다.
늘 선수들이 하던 플레이만 해서는 팀 차원에서 득이 되지 않는다. 측면에 위치한 이청용은 드리블을 칠 것이라는 것을 아시아권의 선수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기성용은 보통은 수비진 앞에 서서 공을 전개하는 역할을 하곤 하니까, 수비 배후 공간이 생겨도 침투는 안할 것이고 자연스레 중거리 슛 정도만 조심하면 기성용이 수비 시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코스타리카와의 경기를 보고 나면 그러한 선입견은 철저히 깨질 것이다. 그리고 상대 입장에서는 수비하기에 더 까다로워질 것이 분명하다. 개인적으로는 장현수 혹은 한국영이 여지껏 보여주었던 수비능력에 더해서, 오늘 보여준 준수한 볼 간수 능력과 공격으로의 패스 연결 덕분에 기성용이 볼 전개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공격에 더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성용이 굳이 위치를 변경하지 않더라도 기성용의 조금 더 공격적인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전반전 40분경 김민우가 골대를 맞춘 장면에서 크로스를 올린 것이 바로 기성용이었다. 이전 경기들을 생각해보자. 그렇게 상대방 페널티 박스까지 접근하고 공격에 적극적인 기성용의 모습은 쉽사리 기억나지 않는다.
(두루뭉술한 이야기라 쓸까말까 고민이었는데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축구도 정신적 측면이 매우 중요한 스포츠이다. 투지나 위기 상황에서의 침착함 이런 것들 뿐만 아니라 팀에서의 자신의 위상을 스스로 어떻게 정해놓는가도 굉장히 중요하다. ‘주장’이 되고 나니 더 헌신적이 되는 선수들이 괜히 그런 것이 아니다. 스스로 주장으로서 해야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다보니 팀에 모범이 되기 위해 한발 더 뛰고 더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브라질 월드컵 당시 우리 대표팀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역할이 분명하게 나눠져 있었다. 이청용-손흥민 양쪽 측면 공격수는 공을 받아 공격을 하고, 중앙의 박주영이나 김신욱은 상대 선수들과의 높이 싸움. 기성용은 수비진 앞에서 수비를 보호하면서 공을 받아 공격 방향을 정했다. 한국영은 기성용의 보좌를 맡아 수비에 힘썼다. 오늘 부여된 새로운 역할을 이렇게도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것을 보니, 당시엔 다소 고착화된 움직임과 역할로 인해서 선수들은 자기 역할을 ‘축소’시킨 채 경기에 임하고 있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위치 변화는 필연적으로 다른 선수와의 역할 변화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정해진 역할만 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선수들의 역할도 때때로 같이 수행하면서, 공격에서의 움직임도 함께, 수비에서의 움직임도 함께 하는 것은 팀 분위기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전술적으로 봐도 상대에게는 혼란을 줄 수 있고, 선수 개인적으로는 개인의 실력 향상에도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슈틸리케가 외국인 감독이라 한국 선수들에 대한 편견이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갖는 전술적 유연성 때문인지 선수들에게 새로운 역할과 움직임을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 선수들도 재능이 있는 선수들이기에 새로운 역할에도 곧잘 적응하여 괜찮은 경기력을 선보였다. 아직 감독의 완벽한 전술이 녹아들지는 않았을 상황임에도 이런 식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앞으로의 팀 전체적으로 매우 긍정적일 것이다.
4. 전술 변화와 주전 경쟁, 그리고 의외로 두터운 선수층
감독이 새로운 전술을 시도하고, 선수들을 새로운 위치에 배치하거나 새롭게 역할을 부여하면서 대표팀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 것으로 보인다. 파라과이 전과 코스타리카 전에서의 출전 선수에선 차이가 컸으나 경기력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개인적 기량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나, 감독이 원하는 빠른 템포의 공격 전개와 강한 압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면 개인 기술이나 스피드의 차이는 충분히 상쇄할 수 있다. 아마도 슈틸리케 감독은 두 경기를 통해 자신의 팀에서 주전으로 활약할 선수들을 어느정도는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슈틸리케는 대한민국 대표팀에 새로운 축구를 이식하는 중이며, 이전까지 후보였던 선수도(현재로선 기성용, 이청용, 손흥민 정도를 제외하곤 확실한 주전이 없어보인다.) 전술에 빠르게 녹아들면서 주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새롭게 시작하는 시기에 ‘황태자’들이 등장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가 아니겠는가. 박지성이 맨유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은 그가 화려한 드리블과 호쾌한 슛을 날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감독이 원하는 전술적 역할을 그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전술의 변화는 주전 경쟁을 가속화 시킬 것으로 보인다.
김영권, 이용 등 월드컵 때 주전으로 활약한 선수들 역시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었으며, 김민우, 남태희, 조영철 등 새롭게 등장 혹은 대표팀에 다시 등장한 선수들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사실이다. 남태희는 자신이 왜 ‘중동 메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지 충분히 증명해냈다.(사실 드리블 모습은 벨기에의 아자르와 비슷한 것 같다.) 파라과이전에서는 오랜만에 돌아온 곽태휘가 능숙하게 수비진을 지휘했다. 월드컵에서의 부진으로 비난을 받았던 이청용 역시 2경기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며, 대한민국의 이른바 ‘냄비 팬’들에게 무언의 항변을 했다. 사간 도스에서 뛰는 김민우 역시 번뜩이는 플레이와 함께 멀티플레이어로서의 가치도 증명해냈다. 36세의 이동국도 여전한 실력을 보여주었으며, 한교원 역시 두 경기 모두에서 짧은 시간을 뛰었지만 순간순간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자신이 ‘조커’로서의 가치를 가졌음을 어필했다. 굳이 이렇게 많은 선수들을 언급한 이유는 바로 대한민국 대표팀의 미래가 밝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레버쿠젠의 손흥민, 스완지시티의 기성용은 대한민국의 슈퍼스타이며, 그들이 갖는 위상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기성용은 앞으로 5년은 더 전성기를 구가할 것으로 보이며, 손흥민은 이제 커리어를 시작한 수준인데도 이미 대한민국 팀의 에이스로 우뚝 섰다. 하지만 축구에서 원맨팀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들이 어느 리그에서 뛰고 있든 어느 팀에서 뛰고 있든 제 몫을 해낼 수 있는 선수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절대적 연습량이 부족하다는 중동 리그, 최근 약화된 경향이 역력해 보이는 J리그, 상대적으로 유럽리그에 비해 주목도가 떨어지는 K리그까지 선수들의 출신은 다양했으나 대한민국 팀이 보여준 경기력은 안정적이었다. 리그에 대한 편견만 버리면 재능있는 선수들이 많다. 의외로 대한민국 팀의 선수층이 두텁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번 평가전 2경기에서 남태희의 플레이는 유럽 빅리그에 진출한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훌륭했다. 김진수, 구자철 등 부상이 있거나 폼이 떨어져 있는 선수들 역시 충분한 가능성을 갖췄기에 대한민국 대표팀에서의 주전경쟁을 지켜보는 것 역시 상당히 즐거울 것으로 보인다.
언급한 대로 슈틸리케 호가 막 출범한 마당에 많은 선수들이 대표팀에서의 주전경쟁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다. 언급했듯 의외로 두터운 선수 풀을 갖추고 있어서, 많은 이들이 대표팀에 도전할 수 있고 이것이 선수들 간 경쟁 심리를 자극하여 상승효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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