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나? 앉아라 어서~ 쪼매마 기다리라. 금방 주께~"
아줌마는 얼른 소쿠리를 덮은 보자기를 걷어내고 수북히 담긴 잡채더미를 한 손으로 푹 집어 넓적한 사발에 담기 시작한다.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워 금새 입안에 침이 고인다.
소복하게 담긴 잡채가 상위에 놓이고 시래기국 한 사발이 뒤를 따르면, 미리 젓가락 들고 대기하던 나는 먹기를 시작한다.
"천천히 묵어라~ 그라다 얹히겠다~"
입안 가득 잡채를 물고 아줌마를 보고 씩 웃어주면...
"아이고...먹성도 좋은 기라~ 군바리 아이라 칼까봐...ㅎㅎ"
잡채아지매를 보면 늘 기숙이 엄마가 생각났다.
아주 어릴적 내 첫 여자 친구인 기숙이의 어머니이자, 돌아가시기 전까지 우리 어머니의 절친한 친구셨던 기숙이 어머니.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여 어지간한 거리는 늘 걸어다니시는 지라, 작은 발뒤꿈치엔 늘 거친 굳은살이 박혀있었다.
남편의 박봉을 절약과 근검으로 열심히 모으고, 모은 돈을 계로 불려 집도 두 채로 늘리고 취직 못한 큰아들 슈퍼도 하나 얻어주고... 삶을 즐기며 누릴만한 처지가 되었을 때 그만 덜컥 위암에 걸려, 석 달 동안 모진 고통 시달린 뒤에 돌아가셨다.
위암이란 사실을 알기 얼마 전, 기숙이 엄마가 우리 집을 들리셨다.
소화가 잘 안되고 위장이 오래 아프다해서 먹기 편한 칼국수를 어머니가 점심으로 준비하셨는데도 한 젓갈 뜨시고는 젓갈을 내려 놓으셨다.
"몇 술 더 뜨지 와...?"
어머니 채근에도 기숙이 어머니는 그냥 희미한 웃음만 짓고 계셨다.
눈치가 별로 없는 나는...내 배 채우기 바쁜 스무 살 전후라...
파 총총 썰어 넣은 간장 한 숟가락 푹 떠 넣고, 젓가락으로 먹다가 급기야는 양푼이 채로 들고 후루룩 마시고 있는데...
"그 참...익이는 복시럽게도 묵네...침이 다 꼴깍 넘어가네.ㅎㅎ"
내 먹는 것을 가만히 보고 계시던 기숙이 어머니가 다시 젓가락을 손에 드셨다.
역시나 몇 술 더 뜨시다가 마셨지만, 그래도 익이 덕에 좀 먹었다며 고마워하시던 기숙이 어머니의 모습은 내가 마지막 본 모습이 되고 말았다.
내가 배치 받은 부대는 부산 연산동, 부산여대 아래에 있는 부대였었다.
수송부대의 경리와 정훈교육을 담당하는 사병이었던 나는 가끔 민간 은행을 들리는 일이 있었는데...하루는 은행 다녀오는 길에 배가 출출해서 골목시장으로 들어섰다. 먹거리를 찾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데, 상이 두 개쯤 놓인 작은 분식 집 앞에 큰 소쿠리 가득 담긴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잡채가 눈에 들어왔다. 입에 고인 침을 후루룩 들이마시며 눈을 들어 분식집 주인과 눈을 맞추었는데...이럴 수가?
기숙이 어머니와 꼭 닮은 분이셨다.
"잡채 먹으시게?"
"네...오 백 원어치도 팔아요?"
"ㅎㅎ 천 원인데...오 백원치만 주지 뭐~ 얼른 앉으소~"
웃는 얼굴로 잡채를 성큼 집어 담는 아줌마를 보다가 넌지시 물어 보았다.
"아지매...혹시 기숙이 엄마라고 아세요?"
"모르는데...와요? 누가 내 닮았어요?"
혹시 자매지간이나 친척이라도 되는가 싶어 물어보았지만 아닌 모양이었다.
오 백원치를 훨씬 넘는 잡채와 국 한 그릇 받고 보니 까맣게 잊고 있던 기숙이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맛있게 먹어 드리자.
"아이고~ 얹히겠다. 좀 천천히 물도 마시면서 묵어야지~"
신나게 먹고 있으려니 잡채아지매가 걱정스러운지 바싹 붙어 앉아 물 컵을 들이미셨다.
"군인 총각 묵는 거 보니 내 배가 다 고푸네~ ㅎㅎ"
그 후로 나는 그 집의 단골이 되었다.
요금은 500원으로 고정되었고, 그릇위로 올라오는 잡채의 높이는 나날이 높아갔으니 단골 중에는 늘 손해만 끼치는 악성 단골이 되었다.
인심 좋은 잡채아지매는 날 친정조카 대하듯, 나는 아지매를 기숙이 어머니 대하듯 그렇게 허물없는 단골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단골 왔나~"
반갑고 살갑게 맞아주던 잡채아지매가, 오늘 아침 한인마트 장을 보며 사온 잡채를 점심으로 먹다보니 불현듯 떠올랐다.
기숙이 어머니도...
내 어머니도...
첫댓글 마음자리님의
맛깔나는 글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
잠시 소강 상태이던 비가 또 쏟아지네요.
챔기름 자르르한
잡채 먹고 싶어서
끙끙~~
ㅎ
잡채, 늘 먹어도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입니다.
저도 글 쓰며 배 고파집니다. 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미국 산 지 14년 되었네요.
읽고 느낌 주셔서 감사합니다.
엊그제
오산시 내삼미동의 체인점 식당 '천지연'에
아파트 옆동의 형님과 아파트 옆 동네 할머니와
셋이서 돼지갈비 먹으러 갔는데
보조 반찬으로 나온 잡채가 어찌나 맛있던지
할머니는 잡채 두 접시를 추가로(보조 반찬은 무료)
잡숫고는 돼지갈비는 잡숫질 못하더라구요.
배가 부르다고......
아... 그 천지연 식단 소개하신 글 본 기억이 납니다. 잡채도 그렇게 맛있게 해주는군요. 한국 갈 일 있으면 기억해두었다가 꼭 한번 들러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자리 '천지연'은 체인점이라
각 도시마다 다 있습니다.
제가 사는 오산시에도
두 군데나 있습니다.
수원시엔 세 군데나 있다고 합니다.
반가운
악성단골이십니다..ㅎ
돈으로 갈음할 수 없는
정이 물씬거립니다..
참 많이 반겨주셨습니다.
집 떠나 군생활 하던 외로움이 아줌마만 만나고 오면, 아줌마가 해주시는 잡채만 먹고오면, 많이 해소되곤 했었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요즘은 이역만리 타국이라도 인터넷 세상이라 큰 거리감은 못 느끼고 삽니다. ㅎ
텍사스 달라스 귀퉁이에 살고 있습니다.
저도 한인마트 가서 사논 잡채가
있습니다...
비빔밥 나물하고
그런날은 저도 남 부러울거 없답니다...ㅎㅎ
군인 시절 젊음은 뭐도 다 소화하시지요.
옛날에 여학교 선생님께서
옛날에 먹던것들은 정말 더 맛있었다,
그런 말씀을 많이 하실때는 뭐 저런말씀을....?
헸는데,,,,세월이 지나고 보니
시장이 반찬 이라는둥~~
그런 말들이 진리, 명언 이더라구요~~~ㅎㅎㅎ
많은 부요 가운데 살면서도
뭔가 결핍된 기분. 그맛이 그맛인듯 해서요,,,,
공감하며 읽고 감사 합니다!~~~
수샨님은 저와 식성이 비슷하신가 봅니다. 한인마트가면 제가 꼭 사오는 것이 잡채하고 비빔밥 나물입니다. 가끔은 도토리묵도 사옵니다.
옛날에 그른 말 없다는 말이 다 맞는 말이구나... 바쁘게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알게되는 나이가 되어있네요. ㅎ
아~~엄마 생각 ~~세월이 흐릅니다
늘 곁에 계시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람이 아름다운게 그런 풍경이지요
우리 그렇게 살아 갑시다 돈 많으면 뭐 합니까
그런 저런 풍경 연출 없이 살다 가는데 ㅎㅎ
어묵 꼬치 하나에 드세요 제가 살게요 하는 서민들 삶
전 너무 사랑합니데이~
살아온 날들 돌아보면 꽃보다 아름다운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제가 타고난 복이 많았던가도 싶습니다.
아~ 잡채아줌마와 기숙이엄마
혹시 아십니까? ㅎ
악성단골이라도 반가운 인연을 맺으셧습니다.
귀한 인연이었습니다. ㅎ
글을 정말 깔끔하고 재미나게 쓰시네요. 전에 올리신 글도 찾아 읽어 보고 있습니다.~
한 오년 전에 조금 올리다 만 글들이 있습니다. 읽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군인이던 시절, 남들은 고단하고 괴로운 일들만 떠올리기 쉬운 기간인데,
마음자리님에겐 글소재의 보고가 되는군요. 이래서, 더러는 역발상이 필요한 우리의 인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