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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결박됨 21:27~36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 가니
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감이러라
설교할 기회를 만드는 바울 21:37~40
37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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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충동해 바울을 죽이려 합니다. 백성과 율법을 비방하고 성전을 더럽혔다고 바울을 오해한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을 폭행할 때, 천부장과 군인들이 바울을 결박해 영내로 데리고 갑니다. 바울이 천부장에게 요청해 백성에게 말할 기회를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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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결박됨 21:27~36
성령이 미리 말씀해 주셨듯이(20:23), 바울이 결박과 환난을 당합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바울을 보자 증오심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섞어 가면서 바울을 비난하고 폭행하며, 심지어 죽이려 합니다. 회심 전에 바울은 유대인 입장에서 신자들을 박해했는데, 지금은 신자로서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당합니다. 천부장이 소식을 듣고 군인들을 동원해 바울을 구금하려 합니다. 천부장의 이름은 ‘글라우디오 루시아’라고 나중에 밝혀지는데(23:26), 그는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로마 군인들은 바울을 쇠사슬로 결박해 끌고 가고, 무리는 바울을 없애 버리라고 외치며 따라갑니다. 이러한 광경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던 무리를 생각나게 합니다(눅 23:18).
● 더 깊은 묵상
유대인들이 바울을 증오해 죽이려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위협당할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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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할 기회를 만드는 바울 21:37~40
바울은 천부장과 헬라 말(그리스어)로 대화를 시도합니다. 당시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만이 헬라 말을 했기에 천부장은 바울에게 놀랍니다. 요세푸스 기록에 따르면, 광야에서 무리를 데리고 반란을 이끌던 애굽인 주동자는 주후 54년경에 자칭 선지자라고 주장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교육 평판이 좋은 다소시의 시민임을 밝히면서, 백성 앞에서 말할 기회를 얻습니다. 바울이 층대 위에 섰다는 것은 안토니오 요새에 올라가는 돌계단에 섰다는 뜻이며, 손짓한 것은 대중 연설을 시작할 때의 관용적 몸짓입니다. 바울은 위기 상황에서 말할 기회를 만들어, 당시 유대인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 더 깊은 묵상
폭행과 죽음의 위기 가운데서 바울이 말할 기회를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요?
복음으로 인해 위협당할 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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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뜨겁게 만난 후로 저는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환자를 진찰할 때는 그토록 최선을 다하는 남편이 몇 번 가지도 않는 교회에서 설교 들을 때는 졸기 바쁜 것을 보며 애끓는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찬송도, 기도도 하지 않는 남편에게 저는 “교회 한번 가실래요?”라고 말했습니다. 함께 교회만 갔다 오면 남편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도 “교회 가실까요?”라는 말을 잊어버릴 만하면 했습니다. 멸시와 무시를 받으면서도 시도 때도 없이 끈질기게 권했습니다.
“하나님, 이번 한 번만 더 남편의 마음을 움직여 주셔서 교회에 가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를 하며 제가 얼마나 많은 수치와 조롱을 당했겠습니까. 그러나 남편이 교회에 대해 비난을 퍼부으며 병적인 화를 폭발시킬 때에도 저는 제 속에 죄가 얼마나 득실거리는지를 알았기에 수치와 조롱을 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품을 수 있었기에 이 세상에 참지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한 사람의 영혼 구원을 위해 생명을 내놓고 기도하는데, 참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무시와 수치와 조롱과 매 맞음 당하면서도 인내하며 기도한 것을 하나님이 다 기억하시고, 남편을 하루아침에 데려가시면서 그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살피심 / 김양재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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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 사도행전21장 28~29절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바울을 '율법 파괴자'로 규정하고 그에게 적대감을 표출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에 출입시켜 성전을 모독했다는 거짓 소문까지 퍼뜨립니다. 사탄의 무기는 '거짓'과 선동'입니다. 그래서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들에게 지배받는 사람은 진리의 복음에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비진리가 진리로 둔갑하는 시대입니다. 진리를 거부하는 세상에서 성도는 영적 분별력과 인내를 구하는 기도로 무장해야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주님과 동행함이, 사탄의 방해에 맞서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핵심 전략이|다. - 앤드루 머리
오늘의 기도
하나님, 억울하고 위태로운 상황도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활용하는 지혜와 믿음을 제게도 주소서. 그리스도인에게 오는 당연한 고난에 주저앉지 않고 하나님 뜻을 헤아리기 원합니다. 복음에 사로잡혀 한 치도 물러섬 없도록 용기를 북돋우시는 하나님의 손을 힘껏 붙들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440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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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적용
1. 주님께서는 우리와 늘 동행하여 주시면서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 주시고,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피할 길을 열어 주시고, 도움의 손길을 보내어 주실 것임을 믿고 나가도록 하자
2.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 우리 앞에 놓인다 할지라도, 그 상황보다, 그 어려움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고, 그 상황을 통해 이해하길 바라는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기 위해 노력하자
3. 주님께서는 이런 어려움과 환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더욱 더 성장하고, 성숙해져 가길 바라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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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오히려 우리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순종할 때에 시험과 고난이 찾아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계속 떠오르는 질문은 “왜 하필 지금인가?”였습니다.
바울을 향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오해를 풀고 이런 일이 생기면 얼마나 큰 유익이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은 “왜 하필 지금인가?”에 직답을 하고 있지 않지만 앞으로 일어날 사도 바울의 삶을 보게 되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 성전 무리 앞에서, 공회 앞에서, 벨릭스 총독 앞에서, 베스도 총독 앞에서,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앞에서 바울의 수많은 변론을 하게 되며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의 변론을 통해서 큰 유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 사건을 통해서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어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론 좋지 않은 타이밍이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절묘한 타이밍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왜 하필 지금인가?”라는 반문보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순종하며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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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를 능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바울의 소청을 듣고 로마의 군인들은 그가 이전에 폭동을 일으킨 자가 아님을 확인한 후 그가 이 소동에 대해 군중들 앞에서 변론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됩니다.
당시 알렉산더 왕의 정복 전쟁 이후 헬라어는 유럽과 서아시아 전역에 통용되는 공용어가 되었고 흩어져 살던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포함한 이방의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 전파로 급속도로 교회가 세워질 수 있게 하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만약 곳곳마다 도착해서 언어를 배우고 그 이후 복음 전파가 이뤄지게 되었다면 그 수많은 도시에서 증거 된 복음은 수 세기에 걸쳐 이뤄져야 했을 것입니다.
이미 먼저 예비하시고 크신 권능과 섭리로 함께 하시는 여호와를 인정하는 자들의 삶은
고통 가운데에서도 그 누구도 누리지 못하는 평강을 경험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향해 오히려 손을 흔들어 조용하게 한 후 그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담대하게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시고 크신 손길로 덮으시는 그 은혜의 그늘 아래 맡겨주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생명 다해 전하는 주님의 제자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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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 바울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천부장에게 발언권을 달라는 부탁의 말입니다. 당시 다소는 인구 50만에 가까운 대도시로서, 특히 대학이 많은 학문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헬라문화의 중심지로서, 공용어가 헬라 즉, 그리스어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출신성분과 능통한 헬라어를 구사한 것은 천부장이 갖고 있었던 의심, 즉, 로마의 반역자인 애굽인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그렇게 말한 것은 단지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천부장에게 발언권을 청한 것입니다.
사실 그 상황에서 그것은 바울이 할 말이 아닙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에베소인 드로비모를 한 눈에 알아 본 것으로 보아서, 에베소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을 그렇게 죽이려고 안달복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만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죽은 목숨입니다. ‘성전 문이 닫혔다’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성전으로부터는 어떤 자비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구타하기 시작하니, 그것은 징계의 매가 아니고 죽이려고 마음먹는 매질입니다. 바울은 살기가 느껴졌고 공포가 엄습했을 것입니다. 공포는 발작을 일으키게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마비시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을 고비에서 벗어나자 천부장에게 말할 기회를 달라고 주문을 한 것을 보면 익히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못 말리는 바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라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 몸을 가진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연약한 육신은 많이 맞으면 죽습니다. 그렇게 몸은 죽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은 죽일 수 없습니다. 다만,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달려갈 길과 사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말한 대로 삽니다. 그가 그런 위기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이 말한 것을 스스로 지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많은 말을 하고 삽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들에게 약속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깨달아 사람들에게 전하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설교 말씀을 듣다가도 성령이 주시는 메시지를 받기도 하고, 성경을 보다가도 음성을 듣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대로 사느냐입니다. 자신이 말한 그대로, 바울처럼 자신이 말한 것을 원래대로 지키냐는 것입니다.
상황과 처지에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육신의 위기가 오더라도 자신이 한 말을 지키기를 바랍니다.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일이 있을지라도 자신의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말한 대로 살았습니다. 그를 본 받아 우리도 말 한대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라도 말한 대로 살면 이 세상이 그렇게 어둡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도 그렇게 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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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이 선교보고를 하고 예루살렘에서 겪은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수용하라"는 말씀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1.부당한 동료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선교보고를 하였습니다. 보고를 들은 예루살렘의 리더들은 되어진 일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리더들은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으로서 아직도 과거에 행하던 율법을 그대로 준수하고 있었습니다. 리더들은 율법준수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다수의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무시할 수 없어 한가지 묘책을 생각해 냅니다.
바울이 율법준수를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엄격한 율법준수의 한 표현으로서 서원을 한 사람들의 비용을 바울이 지불하게 한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예루살렘 리더들의 요구가 매우 부당한 것입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선교를 하였고,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온 바울을 이런 식으로 대우하는 것은 참으로 부당한 일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일사각오를 하고 온 사람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이런 부당한 요구에 싸워 맞서는 것이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 리더들의 요구에 순전하게 받아들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입장을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조금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것 같아도 예루살렘 교회의 평화를 위해, 아직은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바울은 스스로 낮아지는 위치를 선택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그렇게 행동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행동인지.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다운 행동입니다. 동역자의(예루살렘 교회의 리더) 부당한 요구를 오직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수용합니다.
우리는 동료의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인 적이 있습니까? 내 입장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절박한 상황도 생각해서 때로는 부당한 요구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리더는 나의 입장이 아니라 교회가 어찌될지를 생각합니다.
2.부당한 세상
바울은 율법예식에 따라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바울을 알아보고 바울을 공격합니다. 그들이 공격한 이유는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오해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과 성전에 온 것이 아니라 철저히 율법 의식에 따라 다른 유대인을 도와 성전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해를 받아 바울은 잡아 끌고 갔고 돌을 던져 죽을 지경에가지 이르렀습니다.
이 때 바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참 세상이 부당하죠?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는 그 이유는 분명히 잘못된 오해입니다. 그 작은 오해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죽음 직전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속 마음은 원통하고 속이 터질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랬을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바울은 알았습니다. 그들의 부당한 트집 잡음이 문제인데 사실 그 문제가 아니어도 어떤 식으로든 바울을 잡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부당한 트집잡음에 그렇게 억울해 하지 않고 그들의 공격을 받아들입니다. 수용합니다.
놀랍게도 구원은 엉뚱한데서 옵니다. 로마군대가 와서 극적으로 바울을 건져냅니다. 부당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 부당함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없습니다. 그러니 때로는 그 부당함도 수용하십시오. 어찌할 수 없는 부당함이라면 그 이면에서 공평케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수용하십시오.
부당한 세상으로 인해 억울한적이 있습니까? 그런 일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너누 절망하거나, 억울해 할 필요 없습니다. 공평케 하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보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료의 부당한 요구도 수용하고, 세상의 부당한 대우도 수용하면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바울을 보았습니다. 부당하다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내가 교회를 위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를 생각하며 가야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부당함도 세상의 일부인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면서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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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결례를 행하고 네 사람의 서원제사 비용을 부담했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바울이 율법과 성전을 비방했고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 더렵혔다고 거짓으로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바울을 마구 폭행했고 죽이려고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그때 로마군 천부장이 군대를 동원하여 폭동을 제압하고 바울을 건져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심한 폭행으로 군사들에게 들려가는 와중에도
천부장에게 요청하여 자기를 죽이려던 백성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왜 자신이 하지도 않을 일로 비방하고 저주하고 죽이려는 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려고 했을까요?
자기 민족을 자기 생명보다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1~3)
또한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이렇게 사명에 충성했기 때문에 죽을 날이 가까이 왔을 때에 의의 면류관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6~8)
우리도 각자 사명을 받았습니다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9:17)
그러므로 맡은 사명에 생명 다해 충성하기 원합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
충성된 사명자가 되어서 주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자 되기 원합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25:13)
그래서 그 날에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쓰기 원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주의 날에 명성과 칭찬 얻기 원합니다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습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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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8절을 보십시오.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바울이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는 칠일이 다 끝나갈 때였습니다. 바울과 네 명의 서원자가 7일 간의 결례를 거의 마감할 무렵입니다. 아시아에서 보았던 유대인들이 무리를 충동질하여 바울에게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는 사람이라고 누명을 씌웠습니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은 에베소에서 올라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왔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몰랐을 터인데 이들은 보자마자 바울을 즉시 알아보았고(바울은 3년간 에베소에서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더구나 이들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알고 있었습니다.
충동하는 말은 이방 종교인들이 일으킨 소동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던 말입니다.(19:23-41),
바울을 해하려는 이 무리들이 포악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오해)
29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사실은 바울이 헬라인과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인과 시내에서 함께 있었을 뿐이지 성전에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바울의 적대자들이 선동하기 위해 외친 소리가 사실의 목격에 근거하지 않고 단순한 추측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은 얼마 전에 바울과 드로비모가 예루살렘 시내에서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전에서 바울을 보자 지레 짐작하기를 드로비모가 그를 따라 성전에 들어갔다고 본 것입니다.
바울에 대한 적대감 더 나아가 바울을 해치려는 음모가 이런 오해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순간적이고 단순한 오해를 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죽임으로써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의 사명을 중지시켜 유대인들의 민족적 우월감과 선민 의식을 보존하려는 계획된 행동입니다. 사도로서 바울의 고난은 터무니없는 거짓 증인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비슷합니다.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감)
30절을 보십시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유대인들은 바울을 데리고 성전 밖으로 나갔습니다. 드디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고 적대자들의 의도는 일단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격앙된 감정으로 폭력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사태는 매우 과격하고도 비이성적인 방향으로 돌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단 한마디의 자기 변호도 허용하지 않고 성전 밖으로 끌어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사정없이 끌고 나갔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 있는 문을 닫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는 것을 완료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간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분노한 군중들이 성전으로 밀려 들어와 그곳에서 바울을 살해하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살해 사건이 있게 되면 이는 곧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준수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들로서는 그런 일을 피하려 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하나는 바울이 제단 뿔을 잡아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제단 뿔은 제단 가운데서도 가장 거룩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그 뿔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살륙이 행해질 수 없다고 믿어져 왔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보호함)
31,3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그들은 바울을 쳐서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을 끌어낸 무리들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러 죽음으로 몰고가고 있는 장면입니다. 최소한의 형식적 재판 절차도 없이 바울을 죽이려 하는 것은 그 무리들이 종교적 자존심의 손상에 대한 반발과 군중 심리적 흥분으로 극도로 포악해져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천부장과 백부장이 오는 것을 보고 치는 것을 그쳤습니다. 바울이 연루되어 성전에서 발생한 소요는 민첩한 정보망을 통해 그 지역의 치안 책임자인 천부장에게 즉각 전달되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오순절 기간이었기 때문에 폭동이나 소요를 대비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움직임을 철저히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의 난동 소식은 매우 신속하게 보고되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로마 군대가 출동했을 때 바울을 죽이려던 행위를 중단하였던 것은 그들의 행위가 불법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당국의 재판에 의하지 않고는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산헤드린에서 사형 판결을 내린 후에도 빌라도에게 다시 끌고 가 재판을 받게 했던 예수의 경우도 그런 이유에서 였습니다.
(바울을 체포함)
33,34절을 보십시오.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천부장이 폭력을 당하고 있던 바울을 묶으라고 명한 것은 일단 그가 죄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12:6), 군중들로부터 바울을 분리시킨 것은 그가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법의 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11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결박하게 한 후 무리들에게 바울의 신상과 그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33절). 그런데 무리들이 매우 소란스러운 가운데 여러 가지 말을 했기 때문에 천부장은 그 사건의 실상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죽인 무리들과 같이 큰 고함소리로 미친듯이 부르짖었습니다. 광적으로 흥분하여 외쳐대는 무리들의 소란으로 천부장은 심문할 수 없었습니다. 천부장은 무리들의 흥분이 가라앉은 후에 심리를 하기 위하여 바울을 일단 영문 안으로 데리고 가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군대의 주둔지인 안토니아 영문으로 바울을 데리고 갔습니다.
(바울을 죽이라는 무리들)
35,36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바울은 층대에 이르렀습니다. 이 층대는 예루살렘 성전 바깥 뜰에서 안토니아 영안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을 가리킵니다. 이 계단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무리들의 난폭함이 극에 달하여 로마군인들이 바울을 손으로 높이 들어올리고 가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무리가 바울을 없이하자 하며 따라가자 군인들은 바울을 들고 갔습니다. 무리들의 포행이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이들은 연행되어 가는 바울을 향하여 그 놈을 죽여라(공동 번역)고 외치며 따라갔습니다. 무리들이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바울을 죽이라고 외쳐댔습니다. 예수의 수난 때에도 그들은 그러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의 조상들 또한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을 죽였었습니다. 실로 이 백성은 역사를 따라가면서 하나님을 거역하여 그를 죽여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할 기회를 요구하는 바울)
37-38절을 보십시오.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바울은 천부장에게 자신이 길리기아 다소신의 시민으로 말을 하고 싶다고 헬라어로 말하였습니다. 로마 병사가 바울을 연행하여 영문(34절)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바울은 천부장에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헬라어로 이야기한 것으로 보이며, 천부장은 바울이 헬라어 할 줄 아는 것을 의외의 일로 생각하여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고 되물었습니다. 당시에 헬라어는 로마 제국권 내에서는 공통 언어였습니다. 이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어느 정도 교양을 갖춘 문화인에 국한되었습니다.
바울이 헬라어로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 천부장은 한편 놀라면서 다른 한편, 그렇다면 바울이 과거에 난을 일으켰던 애굽인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였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A.D. 54년경 한 애굽인 거짓 선지자에 의해 예루살렘에 반란 사건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스스로를 위대한 선지자로 자처한 이 애굽인은 추종자 3만여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와 광야와 감람산 등에 웅거하면서 예루살렘 성벽 파괴 및 로마군의 멸망을 예언하며 때가 되면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자였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천 명은 그 가운데 자객으로 선별된 무리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음모는, 로마 총독 벧릭스의 군대에 의해 일부는 죽임을 당하고 일부는 생포되고 이 애굽인 거짓 선지자는 감쪽같이 도망감으로 해서 좌절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천부장의 질문은 바울이 바로 이 거짓 선지자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전도할 기회를 얻는 바울)
39, 40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여 천부장의 의혹을 해소한 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그는 사실 그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왔던 것입니다(13절). 천부장의 허락을 받자 바울은 층대에 올라가서는 히브리 말로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백성들에게 말할 수 있게 해달라는 바울의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바울은 자신과 복음에 대해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그의 양손을 들어올려 백성들을 조용히 시킨 다음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아람어가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이 상용하는 언어였기 때문에 바울이 아람어로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죽음의 위험 아래 있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받고 있었지만 그는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가 많은 어려움이 있는 가운데도 예루살렘에 온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사는 동족들에게 목자의 심정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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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바울의 정결 예식 기간이 끝나갈 즈음에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에 의해 큰 핍박을 받아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큰 소동이 있음을 듣게 된 천부장은 소동의 원인이 바울로 알아 쇠사슬로 결박한 후에 영내로 끌고 갑니다. 유대인들은 뒤 따라오며, 바울을 죽이라 외칩니다.
_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끈질긴 공격으로 환난을 받았습니다(27절).
바울은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유대인들과의 화해를 위해 자신이 직접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정결 예식을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일주일의 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 있는 바울을 보고 무리를 충동질해서 바울을 붙잡았습니다. 박해하기 위해 아시아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왔는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볼 때, 일부러 바울을 박해하기 위해 예루살렘까지 왔을 가능성을 충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바울이 겪는 것처럼 항상 우리 앞에 환난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문제 또한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핍박과 억울한 일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바르게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결코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믿음으로 굳건하게 이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_ 바울은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억측으로 환난을 받았습니다(28~32절).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성전을 모독 했다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은 단순히 추측성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는 것과 ‘분명히 바울이 그 사람을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을 것이라고 생각 했다’(29절)는 것입니다.
때마침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성내에 있었던 것을 사람들이 보았기 때문에 이 황당한 억측은 묘한 설득력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유대인들의 분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바울은 따로 변명할 새도 없이 흥분한 유대인들에게 휩싸여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바울은 자신을 변호할 기회조차 얻지 못함에도 이러한 모든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의롭고,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예상치 못할 상황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또한 이해하지 못 할 그리고 억울해 할 만한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달리 생각해 보면 이 길이 진정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요,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 있음에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믿음의 눈을 넓게 열어서 더 큰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_ 바울은 극도로 공포감을 갖게 하는 환난을 받았습니다(33~36절).
성전에서 밖으로 끌려 나가 일방적으로 폭력을 당하는 바울의 심정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아무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홀로 사로잡혀가는 바울에게 위기감 그리고 공포감이 얼마나 컸을까?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세상에 도와주는 이 그 누구도 없다는 극한 위기감과 고독감을 맛본 경험들이 있습니다.
정말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여겨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삶의 맨붕이 찾아왔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깐, 또 나중에 뒤를 돌아보니깐 나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순간마다 언제나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 인생의 위기감과 고독감에 젖어 있었을 때, 찾아 오셔서 위로해 주셨고, 비전까지 제시해 주셨습니다. 극한 고난과 억울하고, 애매하게 받는 오해가 있을지라도 예수님의 길을 가는 사람은 분명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고통과 환난은 나의 삶에 희망을 여는 열쇠가 됨을 새삼 알아가게 됩니다..
환난과 역경 속에서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우려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바로 결박이었습니다.
오늘도 모든 상황과 현실 앞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환난을 이겨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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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집에는 못가도 장례식에는 가야한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이 맞는 말입니까? 맞는 말입니다. 아주 성경적인 말이지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전7:2)라는 말씀도 있지요. 그런데 이 말씀에서 그 목적이 조금 틀린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통은 '같이 축하하는 것 보다 같이 슬퍼해주는 것이 더 사람으로서 해야 하는 일이다'고 생각해서 장례식을 더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에서는 그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혜를 얻기 위해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떤 지혜입니까?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가장 확실한 이 진리를 사람들은 가장 잘 잊어버리고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고 사람들은 항상 살아남기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 삶이라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목숨 연명하기 위해 사는 모습이기에 추합니다.
'적자생존'이라는 진화론적 개념에 사로잡혀 사람들이 살아남아야 승자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남으려고 바둥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사람도 모두가 죽었습니다. 단지 조금의 시간 문제일 뿐이지요. 사람들이 살 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을 자리를 찾아야합니다.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죽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은 모두가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남기 위해 사는 사람은 모두가 실패하였습니다.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목표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결코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인생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명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사명을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 사명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어야합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 바, 목숨을 위해 사명을 바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명이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때문에 목숨을 바쳐 사명을 이루고자 할 때 그 사명을 충실하게 이룰 수 있습니다. 그 때만이 인생이 풍성한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 대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정 가운데 일어나는 가장 큰 일들은 사람들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을 만류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사람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큰 위험을 받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본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아야 하는 것을 배운 것이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더욱더 마음을 단단히 하고 위험을 맞이하게 된 것이지요.
예루살렘에 가까워지면서 그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을 그와 동행하였던 사람들도 반대하였습니다(12절). 그러자 바울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절)라고 말을 하면서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각오로 가고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그의 일사각오의 정신은 감동을 낳았습니다(5-6절). 일사각오의 정신은 숭고하며 감동을 낳습니다. 열매를 맺습니다.
죽을 준비를 하고 사십시요. 인간은 모두가 죽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잘 살기 위해서 죽을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죽을 준비가 되 있지 않은 사람은 항상 나약합니다.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숨은 참으로 나약하여 비굴해지기 때문입니다. 자그마한 바늘 앞에서도, 작은 쇠 덩어리인 총알 앞에서도, 음식 앞에서도 목숨은 수 없이 비굴해집니다. 그래서 이리 저리 피하다가 인간으로서 하지 못할 일들을 하게 됩니다. 큰 일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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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 우리는 모순이라는 말을 씁니까?
국어사전은 “말이나 행동이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어저께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하고 우리를 구원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우리를 고난 가운데로 밀어 넣을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과 내가 고난 중에 있는 것이 모순처럼 느껴집니다.
섭리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뤄 가시는 경륜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삶에 모순처럼 보이는 상황이 있습니까?
이유 없이 고난당하고, 이유 없이 구설수에 오르며,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하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한 번도 외면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지금 충실하게 당신의 섭리를 이뤄 가시는 중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좌절하지 않도록 지켜줍니다. 절망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다음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사도 바울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거나, 절망에 빠져서 삶을 포기하는 형태의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는 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인생에는 함몰 웅덩이가 없었습니다.
그는 실의에 차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확신과 열정이 그것을 가증하게 한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모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경륜입니다. 섭리입니다.
이것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삶을 살아가는 오늘 이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군중들처럼 오늘 본문의 군중들에게서 우리가 하지 말아야할 행동,
살지 말아야 할 삶을 보게 됩니다. 군중심리에 이끌려 올바른 판단도 하지 못한 채 마녀사냥에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 시대가 미투 운동으로 온통 벌집처럼 시끄럽습니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되 균형을 잃지 않도록 깨어 있음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군중심리에 휩쓸려 살아가는 인생이 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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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말씀하여 주시고, 말씀의 의미들을 되새겨 볼 수 있게 하여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주님, 성난 군중들로 인해 바울은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성령님의 도우심 속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했던 성도들의 말이 떠올랐을까요?
괜히 올라왔다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걸 그랬다면 후회했을까요?
아마도 바울은 자신에 처한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였을 것이고,
어떤 결론에 처했을지라도 온전히 순종하며 나아갔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천부장과 군인들이 때마침 도착하는 상황들을 보면서 주님께서 자신과 동행하고 계심을,
그리고 보호자가 되어 주시고, 자신의 급박한 필요를 채워 주시는 주님을 또한번 경험했을 것 같습니다.
주님, 우리의섬김을 통하여 이런 경험들을 많이 하고 돌아올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경험하고,
주님께서 저희들의 길을 인도하고 계심을,
그리고 때를 따라 도움의 손길을 보내 주시고,
저희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주님을 풍성히 경험하고,
안전하게 잘 복귀할 수 있도록 모든 여정 가운데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친히 저희들과 동행하여 주시면서 길을 열어 주시고,
저희들과 친히 동행하여 주시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일정을 온전히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주님께서 친히 모든 상황들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송을 주님 앞에 올려 드리며,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