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1일 연중 제19주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41-51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42 그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당신을 양식으로 살찌고 풍성하게 하소서.
하느님 말씀과 하늘나라는 우리에게는 신비롭기만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느님과 우리의 차원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밥을 먹고 사는 우리들에게는 이 육신이 기운을 돋게 하려면 식사도 하고 물을 마시고 우리가 매일 먹고 사는 일은 우리 삶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식이 없다면 아주 심각한 병에 걸리거나 생명에 위협을 당장 느끼게 됩니다. 저도 물론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육신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육신만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에 빠지거나 위급한 일이 있을 때 “사람 살려!”하고 큰소리를 칩니다. 미국 사람들은 “help me !"라고 소리치는데 우리는 왜 ‘사람’ 살리라고 할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라는 개념보다는 ‘우리’라는 개념과 호칭을 좋아하고, ‘사람’이라는 통합적인 개념을 더 좋아합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존재>라고 말하는데 우리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화학 성분을 화공약품 가게에서 산다면 철분 몇 그램, 인 몇 그램, 소금 몇 그램, 칼륨 몇 그램, 물 몇 그램.... 이렇게 계산하면 4,000원이 못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 몸이 4,000원도 안 되는 가격일까요? 그렇다면 영혼의 가격은 얼마나 될까요? 아무도 영혼을 사 본 사람이 없으니 가격을 매길 수 없을 것이고 우리의 몸을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값을 매길 수 있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어 존재(存在)하게 하시는 주님만 우리를 평가하시고 관장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육체의 양식을 위해서 세상에 모든 자연 만물을 주셨습니다. 채소와 곡식을 주셨고, 모든 먹거리를 만들어주시고 지금도 길러주시고 물과 소금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사람에게만 영혼을 주셨으니 우리육체의 양식뿐만 아니라 영혼의 양식까지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영혼의 양식이 정말 문제입니다. 영혼의 양식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모두 주시고자 하느님이 인간 예수님이 되시어 우리의 온전한 양식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양식으로 하늘나라와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의 양식은 우리의 삶을 진솔하게 하고 당신의 곁에서 언제나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며 아주 쉽게 하느님과 하늘나라에 대해서 일깨워주시는 아주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우둔한 우리를 당신의 곁으로 끌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당신의 삶으로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것을 믿고 믿은 것을 가르치고, 가르친 것을 실천하시는 모범을 매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직접 병자를 고쳐주시고, 뛰어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나눔과 섬김과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굶주린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길을 미리 보여주셨으며 현성용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의 삶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도 당신 자신을 조금도 생각지 않으시고 다시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달리시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의 양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셔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생명의 밥으로, 그리고 빵으로, 그리고 고기로 우리 영혼을 살찌우고 모든 죄에서 속량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몸까지도 쪼개어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밥상에서 우리가 원할 때마다 성체성사의 신비 안에 숨어 계신 빵으로 우리의 영혼의 살을 듬뿍 찌게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겠습니까? 그 분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하늘을 오르는 사다리가 되기를 자원하시고 당신을 한발 한발 밟고 밟고서 올라가라고 받침목이 되어서 사다리에 매어져 계십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처럼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30─5,2
형제 여러분,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축일8월 11일 성녀 클라라 (Clare)
신분 :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 지역 : 아시시(Assisi)
활동 연도 : 1194-1253년
같은 이름 : 글라라, 끼아라, 클레어, 키아라
성녀 클라라(Clara)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귀족인 파바로네(Favarone)와 오르톨라나(Ortolana)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기도 중에 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받고 아기 이름을 ‘빛’이란 뜻을 지닌 클라라로 지었다. 귀족 집안의 장녀이자 용모가 뛰어났던 성녀 클라라는 일찍부터 좋은 혼처를 찾아 결혼시키려는 부모의 큰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 수도자로서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바치려고 결심한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는 어려웠다. 마침내 성녀 클라라는 1212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밤에 부모 몰래 집을 빠져나와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고 그의 첫 여성 동료가 되었다.
당시 성 프란치스코는 아직 여성을 위한 수도원을 세우지 않았기에 일단 바스티아(Bastia) 근방 베네딕토 수녀원에 머물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강제로라도 집으로 데려가려고 친척과 친구들을 동원해 수녀원을 찾았지만, 성별의 표시로 삭발한 머리를 보여주며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저항하는 성녀 클라라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 후 그녀는 산 안젤로 디 판초(San Angelo di Panzo)로 옮겼는데, 얼마 후 그녀의 여동생인 아녜스(Agnes)마저 언니에게 와서 함께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녜스만이라도 강제로 집으로 데려가려고 12명의 무장한 장정들을 보냈으나, 성녀 클라라의 간절한 기도로 끝내 아무도 데려갈 수 없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어렵게 모인 성녀 클라라와 몇 명의 자매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산 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을 모원으로 정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생활양식과 규칙을 작성해 줌으로써 복음적 가난과 기도의 삶으로써 교회의 복음 선포를 지원할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가 시작되었다. 이 수도회는 영국에서 작은 수녀회(Minoresses)로 불리기도 했지만, 현재는 클라라 수도회로 불린다. 성녀 클라라는 1216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로부터 ‘가난의 특전’을 얻었는데, 이것은 어떠한 소유권이나 재산도 가지지 않고 전적으로 하느님과 애긍에 의존해 살아도 좋다는 허락이다. 그 후 성녀 클라라는 이 특전을 유지하고자 늘 고심했는데, 오히려 교황이나 다른 성직자들이 수녀들의 규칙이 너무 엄격하다고 반대해서 많은 곤경을 겪기도 했다. 이렇게 클라라 수도회의 수녀들은 당시 그 어느 수도회보다도 엄격하고 가난한 생활을 실천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의 뜻이 담긴 클라라 수도회의 회칙은 그녀가 운명하기 이틀 전에야 겨우 승인을 받을 정도로 그 엄격성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성녀 클라라를 비롯한 동료들은 높은 수준의 관상가들이었으며, ‘복음적 완덕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특히 성녀 클라라는 40여 년 동안 공동체를 지도하면서 다정한 자매요 어진 어머니로서 늘 자매들의 뜻을 경청하며 겸손하게 봉사했다.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가난을 실천하며 살았던 그녀의 삶에 감동한 많은 이들이 기도와 자문을 얻으려고 그녀를 찾아왔다. 그중에는 성 프란치스코와 작은 형제회 회원들뿐만 아니라 교황과 추기경 그리고 왕과 귀족들도 많이 있었다.
성녀 클라라는 또한 많은 기적으로도 유명하다. 1240년과 41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와 동맹을 맺은 사라센의 대군이 아시시에 쳐들어왔을 때, 성녀 클라라는 부축이 없이는 일어설 수도 없을 정도로 심한 병중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방비 상태에 놓인 아시시 시민과 수도 가족을 구하기 위해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 의지하며 성광을 들고 봉쇄구역까지 밀어닥친 적군들을 향해 나섰다. 성녀 클라라가 기도를 마치자 성광에서 강한 빛이 나가며 눈이 부신 사라센군들이 겁을 먹고 도망함으로써 수녀원과 도시를 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또한 작은 빵 하나로 50여 명의 수녀가 먹기 충분할 만큼 불어나게 했고, 기도와 강복으로 무수한 중환자를 치유했다. 1252년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에 중병으로 누워있던 성녀 클라라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병실을 떠나지 않고도 2km나 떨어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자정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기적은 1958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가 성녀 클라라를 텔레비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다.
클라라 수도회는 그 엄격성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이탈리아 전역과 프랑스, 독일로 퍼져나갔다. 성녀 클라라는 42년의 수도 생활 중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야 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봉쇄구역 안에서 오로지 기도에 의지하며 이 모든 일을 이루어냈다. 1253년 8월 11일, 성녀 클라라는 마지막으로 “저를 지어내시어 이 삶으로 부르셨으니 주님, 찬미 받으옵소서”라는 찬가를 부르면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선종 2년 만인 1255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Alexander IV)에 의해 곧바로 성인품에 올랐다. 1255년 성녀 클라라를 시성한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클라라는 숨어 살았지만 그 생애는 모든 이에게 알려졌고, 침묵하였으나 그 명성은 세상 끝까지 자자했다. 봉쇄 담장 안에 자신을 숨겼으나 곳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됐다”라고 말했다. 성녀의 삶이 묻어 있는 산다미아노 성당과 유해가 안치된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대성당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순례자를 불러모으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클라라 자매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