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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 2,6-15
형제 여러분,
6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7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8 아무도 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으로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이 세상의 정령들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9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10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권세와 권력들의 머리이십니다.
11 여러분은 또한 그분 안에서 육체를 벗어 버림으로써,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12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13 여러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육의 할례를 받지 않아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15 권세와 권력들의 무장을 해제하여 그들을 공공연한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을 이끌고 개선 행진을 하셨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6,12-19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오늘 복음에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신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루카 6,12-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거룩한 곳,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올리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분께서 ‘먼저’ 부르시고 뽑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르신 이, 뽑으신 이가 누구신가'입니다.
‘누가’ 부르시고 뽑았는지가 그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곧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곧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하며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 자신이 누구에게 부르심 받았고 누구에게 뽑힌 이인지를 항상 기억하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열둘을 뽑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밤새워 기도하여 뽑은 이들은 능력 있고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뽑힌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뽑힐만한 충분한 자격이나 조건들을 갖춘 거룩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뽑힌 것이 아니라, ‘뽑혔기에 거룩해지게 된 이들’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뽑힌 사도들은 이름 없는 무명인들이었고, 뽑힌 후에도 그다지 특별한 내력을 전해주지도 않습니다. 마치 '사도'란 모름지기, 그렇게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러하리라 여기면 될 일일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둥이 건물을 지탱해주고 있다면, 그 기둥을 받치고 있는 것이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초는 잘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대단히 겸손하지 않으면 튼튼한 기초가 될 수가 없고, 또한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 이들로 뽑혔나 봅니다.
마치 기초가 건물을 떠받들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듯이, 그들은 타인을 떠받들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들과 함께 세상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 나가십니다.
오늘 우리도 겸손한 자로, 예수님과 함께 세상 안에서 그분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하고 싶은 바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 하신 바를 행하고,
아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신 바를 선포하는 겸손함을 주소서!
이름 없이도 사랑하고, 드러나지 않아도 당신 뜻을 실행하며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가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루카 6,13)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 뜻의 실행이 제 양식이 되게 하시고,
제 몸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방전과 충전>
어제는 어떤 분의 편지에 답하면서 잘 지내시라는 뜻으로 ‘방전하지 마시고 충전하시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저에게 하는 말이었고 오늘 여러분께도 하고 싶은 말입니다,
지난 주말 몇 가지 일정을 동시에 소화하느라 무척 바빴고 힘이 들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습관적으로 힘들다고 말하며 힘든 일을 도무지 하지 않으려고 하면, 힘이 들어야 힘이 들어 오지 힘들지 않고 힘 들어오지 않는다고 충고하곤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힘들게 일하고 나면 힘이 빠져나가기만 하고, 재충전이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제 제가 그런 말을 제게 하듯 그분에게 한 것일 겁니다.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치유하실 때 힘이 빠져나가셨다는 표현이 있는데, 혈루증을 오래 앓은 여인이 주님 옷자락에 손을 댔을 때 주님에게서 힘이 빠져나가 치유해주신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고, 오늘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주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힘을 쓰지 않고 어떤 일을 이룰 수 없고, 주님께서 그 많은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서도 엄청난 힘이 소모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밀려드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께서 계속 치유하실 수 있었던 것은 저와 달리 방전하신 다음에는 즉시즉시 충전을 잘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마트 폰 충전기를 늘 가지고 다니는 것은 요즘 풍속도이고, 여기저기 충전 서비스가 있고 버스에도 충전기능이 있어서, 즉시즉시 충전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스마트 폰 충전은 즉시즉시 잘하는데 정작 우리 자신은 그러지 못하고 그래서 방전되고 맙니다.
그래서 요즘 흔한 말 중의 하나가 ‘Burn Out’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국제 질병 기구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번아웃 증후군 곧 무기력증을 일컫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힘든 일로 힘이 완전하게 소진되고 재충전이 안 되면 더 이상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되는 증상인데, 충전기로 치면 완전 방전이 되고 나면 더 이상 충전이 안 되는, 다시 말해서 충전기가 완전히 고장 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사랑 충전과 힘의 충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자주 하지만 의무 기도를 많이 하거나 청원 기도만 많이 한다면 사랑 충전이나 힘의 충전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전만 하고 충전은 하지 않는 나는 아닌지, 즉시즉시 충전하는 것을 놓치며 사는 나는 아닌지, 우리의 기도 생활을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부르심은 자격이요, 응답은 능력이다>
저는 가끔 저의 신상에 대해 생각합니다.
신부가 아니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허물이 많은 사람, 뛰어난 능력도 없고, 잘난 것이 없는데…
그럼에도 주님께서 당신의 도구로 쓰고 계신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감사하고 새 힘을 얻기도 합니다.
그분의 자비가 크시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며 기도하시고(루카 6,12) 나서 제자들을 뽑으셨는데 그 중에는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의 독립군과 친일파로 비유할 수 있는 사이입니다.
그리고 후에 배반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도 있습니다.
기도하시고 뽑은 결과입니다.
저 같으면 그들은 쏙 빼놓았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당신의 대리자로 지정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의 품이 아니라면 도저히 그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 뽑으신 것이 아니라, 응답하는 이에게 당신의 뜻을 전할 힘을 주셨습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을 옆에 두고 속 끓일 생각해 보십시오.
밥맛 떨어지고 꿈에 나타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많은 허물과 부족함에도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자격이고, 부족하지만 응답한다면 주님의 능력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자비가 없다면 어떻게 감히 저 같은 죄인이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주님의 크신 자비가 저를 지탱하게 합니다.
주님 안에서 부끄러움을 감당합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모두를 껴안을 수 있는 큰 품과 온유함이 있었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능력의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말하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요한 8,28-29).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스승이기에 앞서 제자의 삶을 충실히 살았기에 스승이시기도 하십니다.
많은 분이 ‘저 같은 사람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저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며 봉사의 기회를 거절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것은 오히려 교만함이 아닌가 합니다.
오히려 ‘부족하지만, 당신께서 쓰신다면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저를 뽑아주시다니 영광입니다.’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매 순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기꺼이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응답은 곧 능력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나의 부족함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하면 예수님께서 몸소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10,1).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필요로 할 때 우리에게도 언제든지 당신의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도구 삼아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나를 반대하는 사람 한 명 정도는 품을 줄 알아야 그릇이 좀 크다고 볼 수 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를 계획하실 때는 아침 일찍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기둥이 될 사도들을 뽑으실 때는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인재 등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을 배신하게 될 유다를 뽑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님이신 분이 밤새워 기도하셔서 그러한 인물을 뽑을 수 있으셨을까요?
우리는 이것 역시 그분의 실수가 아닌 그분의 위대함의 일부로 보아야만 합니다.
역사에 보면 위대한 인물 중에 인재 등용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 혼자 힘으로는 성장하는 게 한계가 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 같이 다 사람들을 잘 뽑고 함께 일할 줄 알았습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라고 다 쳐내는 사람은 큰 그릇이 못 됩니다.
삼국지에서 오나라 임금 손권이 젊은 장교를 장군 자리에 앉히려고 할 때 그 사람을 비난했던 사람을 품을 줄 아는 것을 보고는 안심하고 최고 장군 지위에 앉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가시 같은 사람도 품을 줄 아는 사람이 대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인재 등용의 신이라 불리는 세종대왕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본인의 능력이 출중했을 뿐 아니라, 아예 능력에 맞는 인재 등용을 목적으로 한 집현전까지 설치한 분입니다.
이곳에서는 분야별 전문가가 양성되었습니다.
능력 중의 능력은 인재를 등용하여 자기 사람으로 삼는 능력입니다.
신숙주가 집현전에서 늦게까지 연구하다 잠이 들었을 때 세종대왕이 자기 옷을 덮어줬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또한 모든 인재를 잘 등용하는 인물들은 자신에게 쓴소리하는 적을 등용하려 하였습니다.
조조는 관우를 그렇게 탐냈습니다.
관우에게 여포가 타던 천리마를 선물로 주었을 때 관우는 이제 정처 없이 도망을 다니는 신세인 유비가 어디 있는 줄 알면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적인데도 자신이 잘해 주었음에도 자기를 버리고 가는 관우를 죽이지 않고 보내줍니다.
이 일로 조조는 엄청난 피해를 봅니다.
관우는 조조의 위나라를 많이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약간 소설화된 것도 있겠지만, 조조가 위태로워졌을 때 관우도 조조를 살려주는 내용도 있습니다.
자기를 살려준 은인을 죽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조조는 성격이 포악했을지언정 사람은 잘 볼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위협이 될 적도 품을 줄 알았던 것입니다.
세종대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을 좋아하는 인재만 등용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극도로 반대한 인물이 황희 정승입니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은 화가 나서 황희정승을 유배시켰습니다.
세종이 왕이 되자 황희 정승은 죽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황희 정승의 능력을 보고 그를 등용하고 자기 오른팔처럼 많은 일을 합니다.
너무 일을 시켜서 은퇴도 안 시키고 죽기 직전까지 부립니다.
이것이 세종대왕의 그릇입니다.
감정이 아닌 목표를 위해서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 품을 줄 아는 사람이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리옷 유다를 품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사.시.』를 보자면 두 가지 이유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다가 사도단 밖에 있었어도 구원이 어려웠습니다.
그가 들어오기를 원하니 예수님께서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죽을 운명을 지닌 그를 곁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뜨거운 용암 속에 떨어지면 그 돌도 용암이 되듯이 당신과 제자들 안에서 유다도 구원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마치 우리 몸의 세균이나 바이러스와 같은 역할 때문이기도 합니다.
온실에서 자란 화초는 비바람이 불면 금방 죽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성덕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유다와 같은 인물이 없었다면 그만큼 강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유다를 통해 더 자기 자신들 안의 죄를 발견하고 그만큼 더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습니다.
유다가 한 번 배신할 때 베드로는 세 번 배신합니다.
그렇게 제자들이 더 겸손해지고 강해지게 하신 이유입니다.
제자들은 그런 유다를 품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나중에는 한없이 묵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게 하신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악이 없다면 우리가 분별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싸움 안에서 강해지고 하느님의 자녀임이 증명됩니다.
그래서 악을 없애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에도 분명 가장 꺼려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를 이익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녹일 수 있고 또 그렇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더 강해지는 데 도움이 되기에 주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 하라고 맺어주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큰 그릇을 가진 신앙인들의 공동체입니다.
큰 포부를 가지고 가시와 같은 사람도 곁에 둘 줄 아는 사람이 됩시다.
세상에 필요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빛이 되기 위해서는 어둠까지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작은 빛으로 둘러싸 어둠을 없애고 그도 빛이 되게 합시다.
이것이 우리를 공동체로 엮어주시는 이유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도 부족한 우리를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해나가시는 하느님>
요즘 한국 현실 안에서 많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 ‘스펙’입니다.
스펙이라하면, 사람들 앞에 내세울 만한 것입니다.
졸업장, 취득한 자격증, 이수한 코스, 수여 받은 상장 등등.
그런데 열두 제자의 스펙은 사실 보잘것없었습니다.
스펙이 보잘것없으면 성품이라도 무난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닌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대기 좋아하는 제자, 성격이 불같은 제자, 드러내놓고 아부하는 제자, 당대 사람들로부터 매국노라고 손가락질받던 제자, 혁명으로 세상을 전복시키려던 제자...
공생활 기간 동안 제자들의 삶은 불을 보듯이 뻔했습니다.
때로 불과 불이 만나 큰 문제가 생기기도 했을 것입니다.
때로 정치성향을 달리하는 두 제자가 부딪쳐 불화와 반목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때로 성숙과 극단적 미성숙이 만나 속병이 다 생겼을 것입니다.
두세 명은 참으로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였습니다.
충분히 배웠고, 도시 물도 먹었고, 배경도 그만하면 괜찮았습니다.
나머지 사람 가운데 대여섯 명은 그저 그랬습니다.
특별한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놔두셨으면 한평생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온몸으로 뼈 빠지게 땀 흘려 근근이 먹고 살 정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두세 사람은 ‘사도단’ 가입이 참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원래 노는 물에서 놀아야 되고,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이 사람 저 사람, 여기 출신 저기 출신, 이런 신분, 저런 신분, 한 마디로 ‘비빔밥’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부족한 사도단이었지만 인재양성의 귀재 예수님을 만나면서 놀라운 변화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강도 높은 특별교육을 제대로 이수한 12제자들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12사도 각자 안에 깃들어 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을 눈여겨보십니다.
그들 마음 안에 자리 잡은 작은 사랑의 씨앗을 발견하십니다.
그 작은 가능성, 그 작은 사랑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도록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나를 포함해서 어쩌면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다 부족한지 모릅니다.
때로 너무 한심해서 혀를 차기도 합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면서 ‘뒷담화’도 많이 나눕니다.
그러나 요즘 와서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 현상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부족하니 공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한심하니 형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나약하니 나를 통한 하느님의 도움과 위로의 손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고귀한 사제직으로의 부르심은 무상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가장 뚜렷한 표현이 바로 부르심인 것입니다.
오늘도 부족한 우리를 지속적으로 부르시는 하느님, 이토록 부족한 우리를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해나가시는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교회>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뽑으시기 전에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는 것은 ‘사도들을 뽑으신 일’은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판단만으로 하신 일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신 일이라는 것, 사실상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교회는 ‘인간의 제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제도’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께서 직접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사도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 아니라.
그래서 교회는 하느님의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세속의 집단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니 당연히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뽑으신 이야기 다음에 ‘많은 군중’이 언급된 것은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교회를 ‘보편적인 교회’ 라고 표현합니다.
인종과 민족의 구분 없이, 또 문화나 풍습과 상관없이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시고 사도들이 이어받아서 성장시킨 교회입니다.
이어받았다는 말은 ‘틀’을 이어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거룩함과 보편성을 이어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실 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18)
또 최후의 만찬 때에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요한 14,16)”
그리고 승천하실 때에는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이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공동체이고, 성령께서 항상 지켜 주시는 공동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역사를 보면 죄를 지은 때도 많았고, 부패와 타락으로 위험한 시기를 겪은 적도 많았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서 항상 지켜 주셔도, 인간들이 한눈을 팔고, 다른 마음을 품고, 헛된 탐욕에 사로잡히면, 그것은 주님의 보호를 거부하는 것과 같고, 그러면 주님의 보호가 ‘헛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마태 21,43)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는 지위를 잃었고, 그 지위는 그리스도교가 차지했습니다.
예수님의 경고는 그리스도교에도 해당됩니다.
주님께서 세우셨으니, 주님께서 없애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제 그대는,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내가 접붙여지기 위해서였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 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
(로마 11,19-22)
여기서 ‘본래의 가지들’은 유대인들이고, ‘그대’는 그리스도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도 새겨들어야 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7-48)
이 말씀은 교회 전체에도 해당되고, 각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해당되는 경고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세속의 안 믿는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큰 은총을 얻어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 은총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회개하면서, 구원을 받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하는 것이 그 ‘응답’입니다.
아무도, 신앙생활을 오래 한 신앙인이라도, 구원이 완전히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가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끝’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자기는 틀림없이 구원받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믿음’과 ‘회개’는, 한 번 하고 그쳐도 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해야 하는 일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승리의 삶 -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답이다>
어제 읽은 시가 준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이미 시작된 지옥도 같습니다.
천국을 만들기 위한 분투의 노력이 절박한 시절입니다.
“지진은 늘 먼곳의 비극이니
여기는 그러려니 했다
별들이 사라졌다고들 했을 때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한여름 우박이 쏟아지던 날도
별일이지만 그러려니 했다
때 아닌 꽃들이 피었다고 해도
그저 그러려니 했다
까르르 웃던 아이들이 사라졌다
푸드덕 날던 새들이 사라졌다
꽝꽝 얼던 빙하가 사라졌다
인간은 사라지고 인공지능만 좀비처럼 둥둥
지금 여기
곧,
개봉 박두”
(시인 김유철; 삶예술연구소 소장)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답은 기도뿐입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에 하나 더 한다면 참되고 항구한 회개입니다.
세계가, 지구가, 특히 한국이 총체적 위기요 총체적 난국입니다.
좀처럼 출구(出口)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회개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합니다.
신문을 성서 보듯, 성서를 신문 보듯 하라는 개신교의 칼바르트 세계적 신학자의 권고에 공감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주님의 기도”가 있다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애국가”가 있습니다.
어제 면담 고백성사 후 두 분 자매에게 보속으로 “말씀처방전”에 이어 애국가를 부르도록 했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부르는 이나 듣는 이나 감동입니다.
나라 사랑이 하나로 녹아있는 기도요 성가같은 애국가임을 체험합니다.
아, 한국은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이들은 기도합니다.
아, 이제 그리스도교 신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도해야 되는, 기도는 인류 모두에게 보편적 과제가 된 느낌입니다.
참으로 기도해야 회개와 겸손, 지혜로 인간 본연의 품위를 되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병든 지구, 병든 세상, 병든 나라, 병든 사회, 병든 학교, 병든 가정, 병든 개인 제가 진단하는, 인간 무지로 자초한 작금의 현실입니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에 온전한 건강한 개인은 불가합니다.
총체적 난국과 위기에는 총체적 기도와 회개뿐입니다.
정말 깨어 살아야 할 때입니다.
무엇보다 영혼 건강, 정신 건강, 마음 건강이 절박합니다.
길을 잃으면, 희망을 잃으면, 꿈을 잃으면, 빛을 잃으면, 중심을 잃으면 영혼은 정신은 마음은 저절로 방황이요 병들기 마련입니다.
이래서 제가 강조하는 바 영혼의 건강, 정신의 건강, 마음의 건강을 위한 최고의 처방은 희망과 기쁨, 감사와 평화요, 바로 이를 위해 희망과 기쁨, 감사와 평화의 원천인 하느님과의 생명의 소통, 사랑의 소통인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참으로 절박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기도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열둘을 뽑아 사도라 부르시고 당신 대신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밤은 잠자라 또는 기도하라 있는 시간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밤마다 외딴곳에서 아버지와의 친교로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기도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관상적 쉼과 친교의 기도를 통해 영육을 충전시켰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특히 중대한 일을 목전에 두었을 때는 참으로 치열히 기도했습니다.
정말 나라를 책임진 위정자들이나 공동체를 책임진 이들이 치열한 영적전쟁터에서 “주님의 전사”로 이렇게 주님처럼 겸손히, 치열히 깨어 기도하여 총체적 난국의 출구를 찾아야 할 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 기도 후 제자들과 함께 평지에 서시니 사방에서 구름떼처럼 당신 중심으로 모여드는 병든 백성들입니다.
말씀에 굶주리고 육신의 병으로, 또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고통받는 무지의 중생들입니다.
아, 어쩌면 예나 이제나 똑같이 반복되는 인간 무지의 병든 현실인지요!
인간의 진보는 도대체 가능한지, 여전히 계속되는 반복의 악순환인지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유일한 답은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이젠 그리스도교 신자들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자 예수님이요 온 인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 떠난 육친의 어머니 대신 영원한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연상하며 “어머니 은혜” 동요를 부르곤 합니다.
다시 엊그제부터 “어머니 은혜” 동요를 부름으로 다시 산책중 동요 부르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복음 대목이 예수님이 결정적 답임을 증거합니다.
'그들은 예수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썼으니,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예수님의 치유의 힘은 기도의 힘,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생명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기르시며 또 병든 우리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야말로 일치의 중심입니다.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과 날로 깊은 관계 속에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요 성인(聖人)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제1독서 콜로새서의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참 고맙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와 닿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아무도 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으로 여러분이 사로잡지 못하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이 세상의 정령들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치유의 구원이요 충만한 삶입니다.
우리의 영적승리를 위한 유일한 답은 이런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삶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활짝 열려 있는 “활동의 앞문”으로, 사막의 하느님께는 활짝 열려 있는 “관상의 뒷문”으로 사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반에 반드시 거치셔야 할 매우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셨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함께 동고동락할 이들을 뽑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을 당신 홀로 하시지 않고 사도들과 함께 하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도 선발을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첫번째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세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루카 6,12)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시니까 기도는 어디에서나 해도 되지만, 특별한 지향이 있거나 하느님 현존을 장소적으로도 생생히 체험하길 원할 때 의미 있는 장소를 찾습니다.
예수님께는 "산"이 바로 그런 곳이었지요.
"산"은 곧 하느님 현존의 장소니까요.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매순간 우리 곁에 계시니까 언제라도 기도할 수 있지만, 만상이 잠든 고요와 침묵의 순간에 깨어 하느님을 대면하는 "밤"이란 시간 역시 예수님의 절실함을 보여 줍니다.
밤을 꼬박 지새우며 예수님은 하느님 가슴에 기대어 그분의 뜻을 듣고 또 들으십니다.
이윽고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 열둘을 뽑아 "사도"라 부르시지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중에는 일시적 또는 간헐적으로 오가는 군중도 있고, 그보다 더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보고 배우는 제자들도 있습니다.
그 제자들 중에서 오늘 선별되어 "사도"라는 명칭을 부여받은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충만한 완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들을 선정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얼마나 고심하며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려 애쓰셨을지 우리는 "산" 그리고 "밤을 새우며"라는 말씀들에서 알아차립니다.
그만큼 절실하고 중요한 일이었기에 공을 들여 숙고하고 경청하고 살피는 시간이었을 겁니다.
이렇게 뽑힌 이들은 하느님과 함께 하신 선택의 열매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들의 됨됨이나 약함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을 철저히 믿어 주시지요.
심지어 당신을 배반할 이도 그 안에 있고, 또 가장 가까우면서도 위기가 닥치면 나몰라라 부인할 이도 보이지만, 그래도 믿어 주십니다.
아버지와 함께 한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열두 사도에 대한 신뢰에는, 당신께서 친히 하신 선택, 당신이 내리신 결단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시겠다는 결의 또한 들어 있습니다.
이는 "내가 만들었으니 내가 안고 간다. 내가 지고 가고 내가 구해 낸다."(이사 46,4) 하셨던 하느님 목소리의 실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루카 6,17)
하느님 현존 앞에서 이루어진 선택의 시간을 뒤로 하고 모두 함께 평지로 내려옵니다.
이 위치적 이동은 제도의 꼭대기, 상층부 윗자리에서 다스리기보다, 같은 눈높이에서, 아니 그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점유한 자리는 사도의 직분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고수해야 할 필수 조건입니다.
주님의 다스리심은 가장 낮은 곳에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니까요.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루카 6,19)
격려이고 사랑이고 권고인 그분의 말씀은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권위로 군중을 사로잡습니다.
만신창이 생의 밑바닥에서 병든 이들을 끌어올려 되살리는 치유와 구마 기적 역시 군중을 매료시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만지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높은 곳에 따로 머무르시지 않고 친히 평지로 자신을 낮추어 내려오신 하느님을 만질 수 있습니다.
접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 역시 기도 안에서 "감히" 하느님을 부를 수 있고 만질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위치를 이동하시면서까지 낮은 곳으로 오셔서 이를 허용하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비록 이천 년 전 그들처럼 살아계신 예수님을 실제로 만질 수는 없더라도 기도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만질 수 있는 하느님은 물리적 시간과 공간에서가 아니라 부서지고 낮추어진 영혼 안에 들어오셔서 당신을 만지도록 허락하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감히 만질 수 없는 죄인인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갈망에 헐떡이며 팔을 한껏 뻗을 때, 우리의 손길이 그분의 터치와 만나 합해지고 일치에로 잠겨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루카 6,19) 우리를 고치시고 씻으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곧 기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콜로새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콜로 2,10)
세상은 사도를 얻게 되어, 예수님을 눈높이에서 모시게 되어, 하느님을 만질 수 있게 되어 충만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고쳐지고 씻겨지고 거룩해진 우리가 곧 예수님의 충만함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몸에 새기는 할례로 하느님 백성이라 자부하지만 우리는 영혼에 선명히 새겨진 "그리스도의 할례"(콜로 2,11)로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사랑의 불길로, 갈망의 인두로 새겨진 할례 자국은 그분 안에서 그분과 온전히 하나 되어 누리는 충만함에 이를 때까지 우리를 더,더,더 목마르게 하고 열망하게 들쑤실 것입니다.
오늘 뽑힌 사도의 수처럼 열둘은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지파를 상징하는 완전한 숫자이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충만함을 더이상 숫자에 기대지 않습니다.
단 한 명이든 백 명이든 예수님께서 피를 토하듯 고심하며 선택한 우리들은 그 자체로 충만한 열매들입니다.
저 높은 곳에서 온갖 기득권을 고고히 따로 누리며 머물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낮은 곳으로 내려와 비천한 자리를 다투어 점유한다면, 행여 예수님을 놓칠세라 눈길을 떼지 않고 팔을 뻗어 그분을 만지려 애쓴다면, 우리도 저 약하디 약한 사도들처럼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이로서 그분과 충만함에 이를 것입니다.
그분의 충만함이 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충만해진 사랑하는 벗님,
주님이 밤샘기도로 얻은 귀한 사도인 벗님,
이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그분과 함께 하늘 나라를 선포합시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1923년 월트 디즈니는 ‘디즈니브라더스’라는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올해는 디즈니의 꿈이 시작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디즈니랜드는 미국사람들에게는 단순한 놀이공원이 아니라고 합니다.
미국사람들에게는 미국인의 꿈과 희망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미국사람들은 디즈니가 제작한 ‘애니메이션’을 보고 어린 시절 꿈을 키웠습니다.
좌절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보았습니다.
악이 이기는 것 같지만 결국 선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난은 불행의 원인이 아니라 단지 불편한 것이라고 알았습니다.
미국인들은 경제 대공황에서도, 전쟁에 참전하면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디즈니랜드는 단순한 놀이공원이 아니라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꿈과 희망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저는 지인들과 함께 100주년을 맞이하는 디즈니랜드엘 다녀왔습니다.
디즈니가 제작한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이 함께하는 행진을 보았습니다.
미키마우스, 피터팬, 신데렐라, 라이온 킹, 미녀와 야수, 알라딘의 주인공들이 행진을 하였습니다.
밤에는 ‘불꽃놀이’를 보았습니다.
성을 중심으로 음악과 애니메이션이 펼쳐지면서 화려한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Dreams come true.)’라는 말처럼 100년 전에 시작된 디즈니의 꿈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도 ‘꿈’을 꾸었던 분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입니다.
그분의 꿈은 ‘성공, 명예,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꿈은 ‘십자가, 나눔,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회당에서 자신이 꿈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선포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의 꿈은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기쁜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참된 행복’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참된 행복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를 받으셔야 할 분이 기도하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앉으셔야 할 분이 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분의 기도, 섬김, 십자가는 죽음을 넘어 부활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 12명의 제자를 선발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사도’라고 부릅니다.
복음서는 자랑스럽게 사도들의 이름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제자들은 기쁜소식을 전하였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마귀들을 쫓아내었습니다.
예수님의 꿈은 인류역사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예수님 이전(Before Christ)와 예수님 이후(Anno Domini)’로 구분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세례를 받은 모든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꿈’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꿈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스트레스가 모든 병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꼭 그런 것은 아님을 깨닫습니다.
헬스장에서 덤벨을 드는 상황을 떠올려 보십시오.
근력 운동을 할 때 근육은 스트레스를 받고 근육 섬유는 끊어집니다.
이를 나쁜 상황이라고 할까요?
아마 헬스장에서 근육 운동을 하는 사람은 잘 알 것입니다.
근육 섬유가 끊어졌다가 회복할 때 예전보다 더 강해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일주일 후에는 약간 더 무거운 덤벨을 들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신중하게 무게를 늘려가며 1년 동안 열심히 운동하면, 힘이 세지고 몸은 더 튼튼해집니다.
그 이유가 바로 스트레스 때문입니다.
결국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스트레스라면서 무조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 역시 나를 튼튼하게 한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스트레스 자체에 집착하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또 이 고통과 시련으로 이어지는 스트레스를 왜 나에게 생기냐면서 불평불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스트레스 안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힘을 주십니다.
이 기도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도 이 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순히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이 기도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굳이 이 기도를 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신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상황을 떠올려 보면 특별히 중요한 순간에 앞서서 하셨습니다.
세례받으신 뒤 공생활을 앞두고 기도하셨고,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 때에도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도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준비하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열두 제자들을 뽑으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밤을 새우며 기도하신 것입니다.
왜 기도하신 것일까요?
기도해야 한다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으신 것이고, 그 뜻에 함께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우리도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단순히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는 식의 청원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고 또 함께 할 수 있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 머물면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스트레스와 같은 상황에서도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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