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첨 소개할 때 그저 생각없이 신문기사의 표제를 따, '고서에 숨은 악마의 음모'라고 제목을 달았는데, 굳이 악마의 음모라고까지는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게 지금 생각입니다. 루시퍼가 전면에 음모를 깔고 나타난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고는 뒤얽혀가는 인간들의 추태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 내용은 차라리 '고서를 매개로 루시퍼를 찾아가는 어느 장서가'의 이야기랄까.
아래 신문소개기사에도 혹평이 있고, 또 세츠나님의 열혈폄하도 있고해서 별다른 기대없이 그저 책과 어떻게 다른지 보려고만 했습니다. 제 소감은 한마디로 그럭저럭 괜찮다, 입니다.
시나리오는 원작과 다소 차이가 납니다. 단순화시킨 부분도 많고 생략된 부분도 적잖습니다. 원작을 영화화했다기보다 오히려 모티브를 따왔다는 정도가 적절할지도 모를 정도로 다릅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입니다. 배우들이 영화속에 착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영화 바깥으로 튀어나오지 않고 자연스레 녹아들어간 연기가 돋보였다는 거죠.
예전에 어느 양복광고에 십년을 입어도 일년을 입은 듯, 막 구입해도 일년을 입은 듯하다는 카피를 본 기억이 떠오릅니다. 배우들이 모습이 그처럼 적당히 침윤되어 보기 좋았습니다. 여기에 녹아있는 연기는, 잘못보면 서투른 연기와도 같고 좋게보면 절제된 연기처럼 보입니다. 이를 위해서 캐스팅에서부터, 의상, 소품, 카메라 앵글 등등 모든 영화적 배경이 조화롭게 뒷받침을 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로만 폴란스키라는 대가는 결코 그 이름값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사실성. 차분한 연기와 더불어 유럽의 어둡고 무겁고 고풍스런 톤을 잘 살려내는 스텝들의 노력이 사실성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제가 보고 겪은 유럽보다 더 유럽다운 본연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뒤마 클럽>이 그러하듯이, 배경은 책을 뒤쫓아 뉴욕에서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파리로 옮겨갑니다. 그 배경을 따라가며 보여지는 유럽의 모습은 늙고 퇴색하고 쇠퇴한 그것이어서, 유구한 전통이 적절히 현대와 조화되지 못한 오늘의 현상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주인공 코르소역의 죠니뎁의 열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콧수염이 좀 어색하긴 했지만, 시종일관 진지하고 자연스레 책 사냥꾼의 역을 소화해냈습니다. 그는 이제 미남배우로서가 아니라 좋은 연기자로 기억해야 할 듯 합니다. 볼칸교수역의 프랭크 란젤라의 비밀스럽고 우중충한 연기도 훌륭했습니다. 또 수호천사로 나오는 여우, 엠마누엘 시그너는 유럽인의 영어식 발음을 어색하면서도 그럴 듯하게 보여줍니다(사실 어색한 느낌이 좀 강한데 이건 연기문제인 듯). 이 점에선 다른 모든 배역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식 영어발음, 스페인식 영어발음, 간간히 들리는 불어나 서반아어..모두 생경하면서도 유쾌한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유라는 무엇보다 고서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원작에서 묘사되는 책들을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더군요. 그리고 각 소장자들을 찾아나설 때마다 그들의 장서를 보여주는데, 인상적이고 깊이 뇌리에 남는 아름다운(?) 장면들이었습니다.
아래에 보시듯 뉴욕의 영화비평가들, 그리고 우리나라의 일간지 기자들, 대체로 혹평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뒤마 클럽>을 직접 읽고 영화를 봤다면 조금은 다른 평을 내지 않았을까 합니다. 또 이들이 그 소재, 즉 고서, 희귀서, 중세, 루시퍼, 장서, 유럽 등에 좀더 관심과 식견있는 사람들이었다면 또한 영화를 보고난 소회도 달라졌으리라 믿습니다.
아무튼 유라에게는 <뒤마 클럽>을 전제한다면 한 쌍의 좋은 영화로 남습니다. 영화자체로는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볼때 그렇게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영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영화만 떼놓는다면 그저 평범한 범작 정도랄까. 물론 제가 범작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부분은 그 속에 담겨있는 여러가지 세부적인 요소때문이죠.
제가 너무 너그러웠나요. 영화보는 안목이 낮은건가. 까다롭게 하자면 한없이 까다로워지는 게 이런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상대적인 걸 고려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기준에다 만족스럽다는 형용사를 갖다대려한다면 사실 맘에 쏙 드는 영화는 거의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단편영화 <벌이 날다>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정도.. 그치만 상대적으로 눈을 조금 부드럽게 하면 영화 <장미의 이름>도 좋게 보이고, 그보단 분명 떨어지지만 영화 <나인스 게이트>도 괜찮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만약 비됴 던져버리고 싶은 기분이 든다면 자신의 성정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나 합니다. 너무 눈에 힘주고 보면 마음을 다스리는 데도 좋지 않은 듯 합니다. <뒤마 클럽>과 <나인스 게이트>에 나타나는 텍스트와 영화의 그 정도의 차이는, 에코책을 읽다 다른 책을 읽을 때에 느끼는 차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저는 레베르테의 책을 비롯하여 그 다른 책들을 던져버리진 않습니다.^^;
* 이제 서가에 <뒤마 클럽> 독후감 쓰는 일이 남았군여.
이건 또 언제 쓰쥐. 밀린 숙제가 그러하듯, 귀찮아서리...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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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르테의 <뒤마 클럽>을 지금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영화화한 게 바로, '나인스 게이트'라네요.
얼른 비됴로 찾아봐야겠네염..^^;
아래는, 뒤적여서 찾아낸 당시 언론의 소개기사입니다.
그보다 먼저 하이텔에 실린 영화정보를 엇갈리는 평과 함께 살펴보죠.
줄거리 소개부분을 보니 <뒤마 클럽>과 좀 차이가 있네요.
글구 평들을 보니 감독의 명성과는 달리 그다지 명화는 아닌 듯 합니다.
그냥 재미로 또는, 그저 책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삼아 볼 필요는 있겠네여..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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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스 게이트 (The Ninth Gate)
제작년도 1999년
제작국가 스페인/프랑스
관람등급 15
상영시간 132분
감독: Roman Polanski
출연: Johnny Depp, Lena Olin, Frank Langella, James Russo, Jack Taylor, Jose Lopez Rodero, Allen Garfield
Barbara Jefford, and Emmanuelle Seigner
<Add> Tony Amoni, Willy Holt, Jacques Dacqmine, Joe Sheridan, Rebecca Pauly, Catherine Benguigui, Maria Ducceshi, Jacques Collard, Dominique Pozzetto, Emanuel Booz, Lino Ribeiro de Sousa, Asil Rais, Bernard Richier, Marinette Richier, Goldie
영화 해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94년작 <진실> 이후 오랜만에 연출한 작품으로, 스페인의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 알투로 페레즈-레베르떼(Arturo Perez-Reverte)가 쓴 소설 <클럽 듀마(El Club Dumas / The Club Dumas)>를 스크린으로 옮긴 초자연 스릴러물이다. 쟈니 뎁이 전설의 악마 서적을 추적하는 희귀 서적 추적가로 출연하며, 프랭크 란젤라, 레나 올린, 엠마뉴엘 시그너 등이 공연한다.
고서적 수집가인 딘 콜소(쟈니 뎁)는 어느 날 기이한 분위기의 악마서 수집가인 보리스(프랭크 란젤라)에게 '어둠의 왕국의 아홉번째 문'의 오리지날 판을 구해오는 일로 고용된다. 이는 지옥의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한 17세기의 책이다. 딘은 뉴욕과 파리를 거치는 여정을 통하여 책 찾기에 나서는데 많은 함정과 유혹, 의문의 죽음 등이 도사리고 있다. 이상한 힘과 함께 천사 소녀(엠마뉴엘 시그너)의 수호를 받으며 하나하나 실마리를 풀어나가던 딘은 마침내 이 일의 뒤에 숨겨진 엄청난 음모를 깨닫게 된다.
미국 평론가들의 반응을 보면, 대부분 반감을 나타낸 가운데, 폴란스키를 좋아하는 일부 평론가이 호평을 하는 쪽으로 나타났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의 캐리 릭키는 폴란스키 영화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평했고, 뉴욕 포스트의 조나산 포어맨도 "로만 폴란스키의 작품들을 숭배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 영화는 고통스러운 경험이다."라고 혹평을 보냈다. 또 워싱턴 포스트의 스티븐 헌터 역시 이 영화를 "바보들의 교회로부터 뛰어나온 오컬트 영화."라고 칭하였다. 반면, 뉴스데이의 잰 스튜어트는 "난로옆에 앉아서 고딕풍의 두꺼운 스릴러물을 읽는 것 같은 편안한 독서에 비견할 만한 작품"이라고 평했고, 토론토 스타의 피터 하웰은 "폴란스키는 너무나 뛰어난 감독이어서, 조그마한 작품들이라도 매력적이다. 이 영화 역시 예외는 아니다."고 폴란스키의 연출력을 추켜세웠다. 또, 뉴욕 데일리 뉴스의 제이미 버나드는 이 영화를 "익살스러우면서도 우아한 탐정 이야기."라고 불렀다. (장재일 분석)
영화 내용
유창한 말솜씨와 문화에 대한 전문적 지식, 어떤 일에 있어서도 흔들리지 않는 냉철함까지 겸한 전문적인 고서 감정인 딘 코소(조니 뎁 분)는 어느 날부터인가 직업에 대한 이상은 버린 채 뉴욕의 뒷골목에서 부유한 수집가를 위한 희귀본을 찾아내는 일에만 전념한다. 그러던 어느 날 코소는 저명한 애서가이자 악마연구자인 보리스 볼칸으로부터 막대한 액수의 보상금을 건 제안을 받게 되는데, 그 제안은 바로 전세계에 단 세권뿐인 <어둠의 왕국과 아홉 개의 문>이란 책의 감정에 대한 것이었다. 이 책은 악마 루시퍼가 직접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중세 이후 악마를 부르는 기도서로 사용되고 있었다. 초자연적인 현상의 기대보단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어마어마한 돈 때문에 제안을 받아들인 코소는, 볼칸의 책을 프랑스와 포루투칼에 남아있는 다른 두 권과 비교하여 진짜 루시퍼가 쓴 책을 가려내기 위한 머나먼 여정을 준비한다. 그러나 주위에서 이유없는 폭력과 살인사건 등 기도서를 둘러싼 미스테리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자, 코소는 기도서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사본을 보유하던 사람들이 모두들 잔혹하게 살해당하게 되고, 그들이 보유한 기도서는 모두 불에 타 재가 되어버린다. 단 루시퍼가 그린 그림이 그려있는 페이지만 뜯겨 없어진 채. 그럼에도 코소는 자신도 모르는 어떤 강력한 힘의 도움을 받아 책의 비밀을 하나씩 풀어나가게 되는데, 어느 순간 코소는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임무의 진짜 목적을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성악가 조수미가 주제가를 불러 화제가 됐던 ‘나인스 게이트(The Ninth Gate)’는 ‘비터문’의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연출 각본 제작을 맡은 스릴러 영화. 폴란스키 감독의 다른 영화들이 그렇듯 공을 들인 세트와 오케스트라를 이용한 음악은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캐릭터들은 비밀스럽다.
고서 감정가 딘 코소(조니 뎁)는 악마관련 도서 수집가 볼칸 교수(프랭크 란젤라)로부터 악마 루시퍼가 직접 썼다는 책 ‘어둠의 왕국과 아홉 번째 문’의 판본이 진짜인지 감정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딘은 이 책을 프랑스, 포르투갈에 남아있는 다른 두 권의 판본과 비교해 어느 것이 진짜인지를 가려내려 하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의 추격을 받기 시작한다. 딘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역시 정체가 모호한 수호 천사의 도움을 받아 책의 비밀을 하나씩 풀어간다.
딘과 주변 사람들이 책에 나와있는 그림과 동일한 방식으로 죽거나 다치고, 책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은 복잡한 퍼즐을 풀 듯 관객에게 추리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에이리언4’ ‘쎄븐’ 등을 촬영한 다리우스 콘쥐의 유려한 영상은 이번에도 여전하다.
그러나 너무 느린 호흡이 스릴러의 긴장을 희석시키는 것이 흠. 책의 비밀을 해독해 영생하려던 인간들의 하찮은 욕망은 좌절되는 대신, 악마의 계획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은 좀 느닷없다. ‘비터문’의 여주인공 엠마누엘 자이그너가 정체가 모호한 수호천사 역을 맡아 신비감을 보탰다. 11일 개봉. 15세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