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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메섹 도상의 회심 사건 회고 22:1~8
1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2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4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받게 하려고 가더니
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아나니아와의 만남 회고 22:9~16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1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12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4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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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히며 과거에 그리스도인을 결박하기 위해 다메섹에 가던 중, 큰 빛 가운데서 예수님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앞을 볼 수 없게 된 상태로 다메섹에 들어간 바울은 아나니아를 만나 다시 보게 되었고, 하나님이 자신을 증인으로 택하셨음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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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메섹 도상의 회심 사건 회고 22:1~8
회심 간증은 믿음을 북돋우는 데 유익합니다. 바울은 유대인 군중 앞에서 간증 성격을 띤 설교를 합니다(9장과 26장 참조). 바울은 “부형들아”(1절)라고 부르면서 청중에 대한 친근함과 존경심을 표현합니다. 그는 자신의 출생과 성장과 교육 배경을 먼저 밝히는데(3절), 이는 유대인들의 정서적 공감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를 밝힙니다(4~8절). 바울의 회심은 그의 자발적 의지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과 주도로 일어난 일입니다. 자신이 열정적으로 박해하던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일을 간증함으로써, 바울은 청중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함을 피력합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은 왜 청중에게 자신의 출생과 성장과 교육 배경을 먼저 말했을까요?
나는 누구에게 회심 사건이나 간증을 나누며 믿음을 북돋아 줄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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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와의 만남 회고 22:9~16
빛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은 바울에게 다메섹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강렬한 광채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하게 된 바울은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를 만난 후에야 시력을 회복했습니다. 이때 육의 시각뿐 아니라 영의 시각도 열렸을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율법을 따라 사는 경건한 사람이며 모든 유대인에게 칭찬받는 인물입니다. 바울은 존경받는 인물인 아나니아가 자신을 도왔음을 언급하며 유대인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인 마음을 갖길 기대합니다. 바울은 아나니아를 통해 자신을 향한 하나님 뜻을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보고 들은 ‘그 의인’(14절, 부활의 주님)의 증인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증인의 사명이 있습니다.
● 더 깊은 묵상
아나니아는 어떤 사람이며, 바울을 어떻게 도왔나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나는 증인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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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그것이 사명입니다
영적 세계에서 믿음의 길을 먼저 걷는 사람은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어떤 경험이든 거기서 깨달은 바가 있고 은혜가 있다면, 혼자만 경험한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경험과 은혜를 나누어 다른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깨달은 그것,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것이 사명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았다면, 그 용서의 은혜를 사람들과 나누어서 서로 다시는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혼자만 누리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나누면 더 큰 열매로 풍성해집니다.
한때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뒤 복음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여전히 율법주의에 빠진 동족이 자꾸 눈에 밟힙니다. 그래서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더라도 형제와 친척들이 예수님께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은혜받은 사람의 고백이요, 구원받은 사람의 심정입니다. 내가 죄악의 길에서 돌아왔으니, 이제는 죄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도를 가르쳐서 그들을 돌아오게 하겠다는 마음은 변화와 회복의 길로 이어집니다. 어떤 경험과 상처도 사명으로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고통이 고통으로 끝난다면 그 고통은 불행일 뿐이며, 상처로 남은 인생을 아파하기만 한다면 그는 고통의 희생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경험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진리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면 그 고통은 복된 사명입니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 이규현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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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사도행전 22장 14~15절
바울은 아나니아의 입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전하신 '복음 증언의 사명'을 말합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던 바울을 하나님은 복음의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바울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변화를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격과 조건이 되는 사람만을 그분의 일꾼으로 부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이라면, 과거의 삶이 어떠했든 하나님 뜻에 합당한 그분의 일꾼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곧 선교적 삶이 시작되는 역사적 순간이기도 하다. - 이동원
오늘의 기도
하나님, 완악한 저를 돌이키셔서 구원으로 인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제 인생을 주관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선명히 알게 하셔서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소서. 향기로운 삶의 간증이 많은 영혼을 변화시키고 성장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288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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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나를 찾아와 만나 주시고, 내가 해야 할 모든 일들을 일러 주신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택하여 주시고, 그분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 주님께서 나를 찾아와 주시고, 나를 직접 만나 주신 그 때를 잊지 말고, 주님께서 그동안 내게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혜에 늘 감사를 올려 드리도록 하자
- 내게 소망을 주신 분도 그분이시며, 내게 사명을 주시고,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함께 하여 주시고, 지금까지 그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주님께 감사를 올려 드리며, 늘 그분께 드려진 삶을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
-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다음 발걸음을 담대하기 내딛도록 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에 합당한 삶의 모습을 지켜 나가고, 겸손함을 잃지 않으면서 나눔과 섬김을 실천해 나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자
- 지금까지 주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당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당신을 보게 하시고,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신 그 모든 경험들을 잊지 말고,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도록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도록 하자
- 그분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는 증인이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글 쓰는 연습을 하고,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한 노력들을 계속해 나가도록 하자
- 나를 택하시고, 나에게 섬겨야 할 부족 사람들에게로 인도해 가시는 그분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나아가고, 그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올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을 위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더 깊이 고민하고, 실천해 나가는 시간이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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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만난 빛은 세상의 밝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진리 앞에 순식간에 무너지는 거짓처럼, 마른 장작이 불길 앞에 사라지는 것과 같은 죄를 태우는 맹렬한 생명의 능력이요, 모든 것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권능이었습니다.
그는 아나니아를 통한 하나님의 다시 만지심으로 회복될 수 있었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한 죄사함의 세례를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새로이 보는 눈으로 이제 그분의 뜻과 의로움을 보며 그가 그토록 따르던 율법을 압도하는 진정한 진리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회개는 돌이켜 과거의 모습에서 완전히 떠나 새로운 길로, 생명의 삶으로 나아가는 결단과 삶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고백 가운데 날마다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안에 변화되고 겸손과 순종으로 전진하는 주님의 강한 군사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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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 싸움에서 이기고 있습니까?
선교지에서 바울이 가르칠 때, 율법이 완성되었음으로 이방인들은 할례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을 유대주의자들이 듣고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울을 그들의 홈구장인 예루살렘에서 보았을 때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잡아서 죽이기 위해 성전 밖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때 성이 소란스럽다는 소리를 들은 로마군의 지휘관인 천부장이 직접 병사를 몰고 와서 바울을 죽음에서 구하고 바울을 조사하기 위해 끌고 갔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라고 외치면서 따라갔습니다. 로마군의 주둔지로 들어가기 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천부장에게 유대인들에게 말할 기회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바울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고 오늘 본문은 바울이 로마 주둔지로 들어가기 전 유대인들을 향해 자신의 간증이자 설교를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가지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바울이 지금 설교하고 있을 때인가?
유대인들은 바울을 모함하였습니다. 바울이 하지도 않은 일을 하였다고 모함하였습니다.그
렇다면 바울은 그것부터 풀어야 할텐데 그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이 오히려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이유가 되는 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랑할수없는것을 사랑하라,용서할수없는것을 용서하라, 변명하지말~~주님의삶과바울삶,우리의삶이 되도록)
유대인들은 지금 그들의 열심으로 바울을 죽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의 열심으로 유대인들을 살리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 열심 싸움이 보입니까? 바로 직전에 로마군인이 오지 않았다면 바울은 분명히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들에게 생명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열심은 대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이 바울의 열심을 꺾지는 못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을 살리는 복음의 메세지를 전하였습니다. 자신의 신앙체험및 간증을 말하며 자신을 오픈하였습니다. 곧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진실로 유대인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유대인들을 살리고자 하였습니다.바울의 열심이 유대인들의 열심을 이긴 것입니다.
우리들의 열심이 바로 이런 열심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이요, 열심이 될 것입니다. 바울처럼 죽음도 이기는 열심(바울은 죽음의 위험을 무릎쓰고 있습니다), 원수도 살리고자 하는 열심(바울은 지금 자신을 죽이려고 하였던 사람들이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살기가 등등한 그들의 열심을 이기는 열심이어야 합니다. .
전투는 강한 사람보다 열심인 사람이 이길 때가 많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선을 향한 우리의 열심이 악을 향한 그들의 열심에 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복음을 향한 우리의 열심히 악한 이들의 악을 행하려는 열심을 이겨서 이 세상에 복음을 전염시킬 수 있는 주의 백성 되기를 기도합니다.
8월14일 퇴근후 부천상동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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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바울은 그를 죽이고자 외쳤던 무리들의 마음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를 알기 전의 모습이 무리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한핏줄을 나눈 형제들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바울의 행적을 보면) 바울은 언제나 유대인 회당에 먼저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수많은 핍박을 받고, 지금 예루살렘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의 열정(로마서 11장)이 결코 식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열심히 얼마나 큰 죄인지를 다메섹 도상에서 깨닫게 된 바울처럼 우리도 우리의 열심으로 아무것도 이룰수도 주장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열심으로 이끌고 갑니다. 바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려는 열심입니다. 우리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자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자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원합니다.
8월14일 오후8시에 청라호수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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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 아나니아의 입을 통하여 주께서 바울의 부르심을 확인해 주는 말입니다. ‘자기 뜻을 알게 하셨다’라는 말은 지금까지 바울이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오해를 수정했다는 의미입니다. ‘의인을 보게 하셨다’는 예수그리스도를 만났다는 뜻으로, 바울이 주님을 만난 것은 그의 사도적 근거가 되는 것으로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더구나 그분의 음성을 들음으로 인해 그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는 생생한 사명자가 된 것입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그 길을 갑니다. 결코,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바울의 순교 나이를 대략 60대 중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대 청년의 나이는 대략 20~30대로 봅니다. 따라서 적어도 바울은 30년 이상 하나님의 일을 한 것입니다. 그는 신약성경 절반 이상을 기록했고, 그의 혁혁한 사역은 사도행전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자신을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신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배경을 도구로 삼아 일했다면 결단코 그런 역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늘에 이미 바울의 할 일이 정해져 있었고 그는 그 계획에 발을 맞추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일이라면 자기 뜻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매우 단순한 논리이지만 자기 뜻대로 하면 제 일이 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일이라면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하는 것이 극히 당연하니, 이를 위해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 힘 빼고, 제 의지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가고 있는지, 혹시 수정할 것은 없는지, 하나님의 예정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예민하게 체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자기 길로 가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가다가도 자칫 옆길로 얼마든지 셀 수 있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예정해 놓으신 길이 있기 때문이지요.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30년 이상을 일합니다. 그러나 누구는 의미 없는 30년일 수 있고, 또 누구는 귀하고 뜻깊은 30년 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땅의 30년이고 또 어떤 사람은 하늘의 30년을 사는 것이지요. 단 일 년을 일하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일하기를 원합니다. 설령 60년 일을 하더라도 그분의 뜻과 예정하심에 따라 일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는 규정 트랙을 벗어나 달리는 육상 선수와 같습니다. 가장 값진 인생을 산 바울입니다. 인생 황금기 30년을 가장 빛나게 산 바울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심한 폭행을 당해 군사들에 들려가는 와중에도 자신을 죽이려던 군중을 향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첫 마디는 "부형들아"(행22:1)였습니다 헬라어로는 "ἄνδρες ἀδελφοὶ καὶ πατέρες"(안드레스 아델포이 카이 파테레스)로 "남성 형제들과 아버지들이여"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어떤 사랑과 존경으로 말씀을 전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얼마나 율법에 열심이었는지, 그래서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었는지 자신을 고발했습니다 이어서 열심이 지나쳐 외국에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오려고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다메섹에 가다가 예수님의 큰 빛을 보고 눈이 먼 것과 그 음성을 들은 것과 아나니아의 기도로 다시 눈을 뜬 것을 증언했습니다
이것이 복음 전하는 자의 기본자세입니다
바로 자신을 낮추고 자신도 똑같은 죄인임을 알리는 겸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의 은혜와 영광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17)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전도를 하려는 것인지 자기를 자랑하려는 것인지 불분명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항상 자신의 자격 없음을 먼저 말하고, 그렇게 자격 없는 자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셨는지 증언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9~10)
참으로 하나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를 낮추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
왕이라도 낮추시고 엎드러뜨리십니다
"왕관을 벗길지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겔21:26~27)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겸손히 하여 그 날에 높임 받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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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준비된 자가 되어야 할 이유
바울이 히브리 말로 말함으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언어가 통하므로 듣는 자들이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 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가진 언어적인 능력을 활용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다른 관점으로 보면 복음을 위하여 준비되어진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종종 우리는 신앙적인 객관성을 잊어 버리고 은혜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은 영적인 은혜와 그 은혜를 올바르 게 전파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준비되어 질때 더 크게 사용되어 진다는 것을 알아 야 합니다.
특히 선교를 행할 자들은 더욱이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가질 때 더욱 더 큰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묵상하기
나는 복음을 위한 준비에 애쓰고 있는가?
2.복음 전달의 전문성을 가진 바울
만약 우리에게 10분의 시간을 주면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한다면 그 시간동안 정말 정확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바울 사도는 지금 천부장에게 끌려 가는 자리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동안 자신의 영적경험을 토대로 하여 하나님 께서 살아계심을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저함이 없이 자신에게 역사 하심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의 살아계심을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에 게 담대하게 전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를 많이 강조하면서도 실제 전도할 수 있는 능력은 갖추지 못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와 같이 어떠한 경우 에도 예수그리스도를 바르게 전할 수 있는 전도의 능력을 갖추는 그리스도인이 되 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복음 전달의 전문성을 갖기 위해 힘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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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을 보십시오.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오해로 인하여 유대인에게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로마 천부장을 보내사 바울을 결박하여 보호하셨습니다. 바울은 구제헌금을 전달하러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는 구제헌금을 전달할뿐 아니라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이방인과 유대인의 화해를 이루고자하는 소망이 더욱 강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유대인의 전도를 원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마음을 갖고 유대인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은 부형 여러분, 자신이 이제 여러분에게 드리는 해명을 잘 들어 달라고 합니다. 부형들은 형제들과 선배 여러분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연설할 때도 부형들이라고 부르며 매우 정중하게 말하였습니다.(7:2). 부형이라는 호칭은 조상들의 하나님, 저 의인의 호칭과 함께 유대인을 깊이 이해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자신과 유대인 무리들과의 동질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자신도 이스라엘의 전통을 중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천부장의 허락을 받고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어로 자신이 변화된 것을 변명합니다. 현대 영어의 변명(apoiogy)이 해명이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바울은 무리들과의 민족적 동질성을 확인시킬 수 있는 아람어로 해명하였습니다. 무리들은 바울이 배교자이자 민족을 버린 자로 여겨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모국어로 말하자 그들은 너무도 뜻밖이라는 생각에 감정이 누그러졌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자 하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사실 당시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 대다수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잘 몰랐습니다. 심지어 1세기의 가장 뛰어난 유대인 학자인 필로조차도 모세 오경에 대해 방대한 주석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어로 씌어진 오경을 해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히브리어를 유창하게 하자 메시지를 귀기울여 들었습니다.
(율법이 엄한 가말리엘 문하생)
3절을 보십시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바울은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 출신임을 말합니다. 다소 성에서 성장했고 예루살렘에 와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가말리엘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5:34). 로버트슨에 의하면 가말리엘은 유대인들로부터 우리의 랍비라는 최고의 칭호로 불리어지는 일곱 랍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가말리엘에게서 율법을 배워서 그 누구에 못지않게 율법에 정통한 식견을 지녔습니다. 바울은 가말리엘에게 엄한 율법적인 교훈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소개함에 있어서 태생(길리기아다소, 21:39), 성장(이 성에서) 그리고 교육(가말리엘 문하)에 관해 언급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고 율법에 정통하며, 하나님께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열심을 가진 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유대교에 매우 열심이 있었음을 예를들어 설명합니다.
(율법에 열심이었던 바울)
4-5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바울은 율법에 열심이 있어서 예수님 믿는 자를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도를 핍박하는 자로 여러 곳에서 소개합니다.(26:10고전 15:9갈 1:13, 23빌 3:6딤전 1:13). 유대인 무리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라고 스스로 여기는 것보다 바울은 훨씬 더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처넣었습니다.
바울은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도 교회에 대해 핍박한 사례들이 더 많았습니다. 바울이 후에 자신을 가리켜 훼방자, 핍박자, 포행자(딤전 1:13), 또는 죄인 중의 우두머리(딤전 1:1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습니다.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바울의 과거에 대한 증인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증인이므로 바울의 말은 최고의 신빙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성도를 핍박하였으며(9:2), 산헤드린의 대표인 대제사장이 서명한 위임장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 2절에서는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는 대제사장 뿐만 아니라 모든 장로들까지도 공문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9장 2에서 공문을 받은 것이 대제사장 개인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전체 산헤드린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산헤드린의 의장 즉 대표로서 서명을 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해명할 당시의 대제사장은 아나니아였지만, 바울이 다메섹으로 갈 당시에는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에 있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도 잡아 끌어다가 예루살렘에서 형벌을 받게 하려고 공문을 받아서 가던 자였습니다. 다메섹은 동쪽으로 안티레바논 산맥과 남서쪽으로 헤르몬 산, 남쪽으로 아스왓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고대 수리아의 수도를 말합니다. 이 도시는 바르발 강을 끌어들여 관개 용수로 사용한 과수원과 정원으로 유명합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각지로 흩어진 예루살렘의 성도들 가운데 다메섹으로 피난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큰 빛을 만난 바울)
6절을 보십시오.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바울이 다메섹 가까이 갔을 때에 부활의 주님이 오정 즈음에 은혜로 그를 큰 빛으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사도행전 9장 3과 거의 비슷한 묘사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때의 시각이 오정쯤 되었다는 것과 홀연히 바울을 둘러 비추인 하늘의 빛이 매우 강렬했다는 사실은 여기에만 나타나는 상세한 묘사입니다. 이 빛은 정오의 태양 광선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강렬했기 때문에 바울은 사흘 동안 눈이 먼 상태로 지내야 했습니다(9:9). 그런데 이 빛은 바울에게만 집중적으로 비추었습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은 별 이상이 없었으나 바울만 눈이 멀었습니다.(11절). 큰 빛이 바울의 어둠을 비추었습니다. 큰 빛은 참 지식의 빛으로 바울의 무지를 비추어주었습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 있으면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큰 빛을 만나면 우리의 무지가 사라지고 분별력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큰 빛을 통하여 자신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보였습니다. 큰 빛은 생명의 빛입니다. 사망권세에 시달리는 사도바울에게 생명의 큰 빛이 비치었습니다. 그는 큰 빛으로 진리를 알고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사울을 찾아온 나사렛 예수)
7-8절을 보십시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바울은 땅에 엎드려져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땅에 엎드러져는 사도행전 9장 4절과 거의 동일한 표현입니다. 공동 번역에서는 땅에 거꾸러져로 옮겨졌습니다. 바울에게 비추인 하늘의 빛이 단순히 밝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비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어 그를 무력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아십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사울의 헬라식 이름입니다.
바울이 누구냐고 묻자 소리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도 역시 사도행전 9장 5와 동일한 표현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예수라는 이름 앞에 나사렛이라는 지명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당시에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는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바로 그 나사렛 출신의 예수임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사울이 핍박했던 그리스도인들과 부활하신 주님이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이 당하는 모든 일들 가운데 늘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일찍이 주님께서 성도들과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지키셨습니다.(마 28:20).
(바울만이 알아들은 소리)
9절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함께 있는 사람은 빛은 보았지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빛을 보았다는 것은 이것이 바울만의 환상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임을 보여줍니다. 조현증 환자가 겪는 환청이나 환시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7에서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만 듣고 보지는 못하였다고 하는데 비해 본문에서는 빛은 보았으나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진술 사이에는 표현상의 차이가 있지만 바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는 경험에 참여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주위 사람들은 빛을 보기는 하였으되 그것을 영광스러운 예수의 계시로 보지 못했으며, 또한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바울만이 그 순간에 있었던 사건의 경험자이자 완전한 참여자였습니다. 바울은 그 순간 하늘에서 들려오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고 앞으로도 하려고 했던 일들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인식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물음을 묻게 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10절). 그리스도인을 체포하려고하는 바울이 예수님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계획하고 부르신 예수님)
10-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바울은 예수님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 여쭈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6에는 다메섹으로 들어가라는 명령만이 기록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바울의 질문을 기록함으로써 그의 회심 과정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이 질문에는 바울이 자신의 행한 일들과 자신의 신념이 잘못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질문은 마치 오순절의 권능을 받은 베드로가 설교를 하자 마음에 가책을 받은 유대인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뉘우친 사실과 유사합니다(2:37). 바울은 자신의 잘못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장차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는 진정한 회개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다메섹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행할 일을 누가 말해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회심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의 삶을 살피고 있었으며 이제 그 결정적인 때가 되자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었고 그 일을 그에게 이를 자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눈이 멀었습니다. 눈이 멀은 바울은 사람들의 손에 끌려서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바울에게 집중적으로 내려쪼인 강렬한 빛은 그의 눈을 멀게하였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쬐인 팔레스틴의 강한 햇빛 때문에 눈이 먼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강한 햇빛을 쳐다보았다 해도 몇 초 또는 몇 분 안에 곧 정상 시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 멀게 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그마치 사흘 동안이나 장님 신세가 되어야 했으며 그것도 아나니아의 안수 때문에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9:8). 이러한 바울의 회심 체험은 아무런 근거 없는 단순한 환상이나 심리적 착각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서 실제로 그가 눈이 멀게 된 사실이 여러 증인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표현 미완료 과거형으로 되어 있어 바울의 눈먼 상태가 지속되었음을 시사합니다. 바울의 눈을 멀게 하신 예수님은 해보다 더 밝은 큰 빛되시는 분이십니다.
(아나니아를 통해서 다시 보게 됨)
12,13절을 보십시오.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예수님은 아나니아를 바울에게 보내셨습니다. 아나니아는 경건한 사람으로 모든 유대인에게 칭찬을 받는 자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 10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주님의 제자로 소개되고 환상 중에 바울을 찾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경건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유대교의 정통신앙을 잘 지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아나니아가 진정으로 경건한 자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유대인이 그를 칭찬했다는 말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아도 흠없고 온전한 신앙을 지닌 아나니아와 자신의 회심의 과정을 강조하여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이 경건한 유대인조차 인정하였던 것이니 결코 유대인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나니아가 와서 사울아 보라고 말하였을 때 바울은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다시 눈을 떠 보게 된 과정이 사도행전 9장에 비해 매우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본문의 상황은 시간과 분위기가 매우 촉박하였으므로 중요한 부분만 자세히 설명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보라는 명령은 더 분명하게는 다시 시력을 회복하라 입니다. 즉시라는 말은 아나니아의 명령과 바울의 시력 회복 사이의 동시성을 강조해 줍니다. 바울은 시력을 회복하여 아나니아를 쳐다보았습니다. 바울이 다시 눈을 뜬 것은 그의 거듭남을 의미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됨을 뜻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때 죄사함을 받고 성령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보게 하시고 음성을 듣게 하신 하나님)
14을 보십시오.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아나니아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바울을 택하여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과 소명을 청중들에게 설명할 때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하여 가능하면 그들을 흥분시키지 않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 용어 선정을 매우 세심하고 신중하게 하고 있습니다. 처음 그는 의도적으로 아람어를 사용하였고, 자신이 온전한 유대인이자 율법을 잘 아는 자임을 말했으며, 아나니아를 설명할 때는 경건한 사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었습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표현 역시 유대적 색채를 강하게 지닌 말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며 지금 바울 앞에 선 유대인들이 열심을 다해 섬기노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택하여 그 의인 예수님 예수님을 보고 그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택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미리 손으로 잡다란 뜻으로 바울의 소명이 전적인 하나님의 붙드심에 의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택하여 그에게 세 가지를 행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바울에게 당신 뜻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안다는 것은 새로운 신앙을 갖게 될 바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였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오해를 수정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받들어야 했습니다. 그는 율법의 의를 추구하는 데에서 믿음의 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둘째는 의인 즉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하셨습니다. 저 의인은 메시야에 대한 별칭으로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여겨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사실은 의인이고 메시야이셨음을 말해줍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기독교인으로서의 확실한 신앙을 갖게 되었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셋째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7, 8절). 이 세 가지는 사도 바울에게 뿐만 아니라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필히 기억되어야 할 사항입니다.
(바울을 모든 사람의 증인 삼으심)
15절을 보십시오.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바울은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이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세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바울은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큰 빛되신 분이십니다. 성도와 함께 박해받은 분이십니다
.죄인을 자신의 증인으로 삼으시는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죄인을 사도로 부르시는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우리를 예수의 증인 삼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하여 당신의 뜻을 알게 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고 그의 음성을 듣게 한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삼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 곧 이방인에 대한 그의 선교사명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증거해야했던 내용은 자신이 보고 들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변화된 자신의 삶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떠한 사상이나 개인의 신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본 예수님을 충실히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보고 들음으로 변화된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충실히 이행했습니다(4:20). 큰 빛이 임하면 우리의 어둠과 무지가 물러갑니다.
(죄사함을 받은 바울)
16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아나니아는 이제 주저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결단을 촉구하는 것으로, 아직도 확신을 갖지 못하여 망설이는 바울을 책망하는 뜻이라기보다는 어서 속히 은혜에 참여하라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2장 38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주의 이름과 세례와 죄 씻음을 연결하여 말합니다. 당시에 세례 의식이 죄 씻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시행되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세례가 행해질 때 비로소 죄 씻음의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께 대한 믿음의 표현이며, 죄사함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무명의 아나니아를 통하여 바울을 도왔습니다. 바울이 겸손하게 하시고 교회에 들어와 하나님의 역사를 계승하게 도우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우리를 대속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담대하게 나아가며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전심으로 그 앞에 엎드리는 주님의 제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 가운데 허락된 처소마다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고
날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새 계명을 더욱 굳게 붙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을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발걸음을 축복하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아버지께서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와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아버지의 양들을 돌보시고 회복과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아버지의 뜻 안에서
회복과 기쁨이 넘치게 하여주옵소서.
경배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