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모 일간지에서 선생님과 학생간의 불협화음에 대해 시리즈로 다루고 있다. 차체에 그 대책까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다룬 내용들은 주로 공격성에 관한 내용들이다.
공격성에 관한 문제는 학교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정서와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자칫 공격적인 문화로 자리매김을 할 가능성이 있어 그에 관해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고, 심리학자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대책은 무엇인지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행동심리학자 Buss는 공격성을 의도보다는 행위를 강조하여 ‘타인간의 상호작용에서 유해한 자극을 나타내는 행동’이라고 정의한 반면 벨코위츠는 의도성을 강조하여 ‘타인에게 의도적으로 상해를 입히는 것’이라고 했다.
그 유형으로는 Frodi는 신체적 공격성, 언어적 공격성 그리고 공격을 유발시킨 대상을 표적으로 하는 직접적인 공격성, 공격성을 유발시킨 사람이외의 다른 대상을 향하거나 일정한 대상이 없는 간접적 공격성으로 분류하였고, Coie는 공격성을 표출하는 원인에 따라 주도적 공격성과 반응적 공격성으로 분류했다. 주도적 공격성은 구체적인 보상을 획득하기 위한 공격성이며 그에 반해 반응적 공격성은 위협이나 도발과 같은 공격성 원인을 제공한 대상을 공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공격성이다.
공격성의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심리학자들 간에 의견이 갈린다. 근본원인을 본능에 두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환경에 의한 경험에 두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근본 원인을 본능에 두며 환경이 큰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말씀한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7장을 통해서 악한 생각 등이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인간의 공격성의 근본원인은 본능임을 알 수 있다. 창조 당시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사랑과 온유와 겸손 등의 성품을 지녔으나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하여 그 같은 성품들을 공급받지 못함으로 혹은 변질되어 급함과 미움과 공격성 등의 성품을 본능으로 지니게 된 것이다. 거기에다가 부모 등의 양육자와 어떠한 관계경험을 했는지에 따라 본능적으로 주어진 공격성이 파괴적으로 되기도 하고, 건강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강한 공격성을 지닌 자녀들은 어떤 양육을 받은 것일까?
첫째는 안아주는 환경이 있다. 안아주는 환경은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위니캇이 처음 사용한 용어로 부모가 자녀를 안아줌으로써 공격적 충동과 불안이 해소되어 안정감을 갖게 되고 또한 자신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안아준다는 것은 피부접촉, 눈 맞추기 웃어주기 등의 신체적인 안아주기가 있고 자녀의 욕구를 잘 알아서 해결해줄 뿐 아니라 공격성까지도 견뎌주고, 수용해주며, 일관성 있게 편안하게 대해주는 정서적 안아주기가 있다.
둘째는, 독립적인 환경이 있다. 아이들이 걸음마를 할 시기쯤 되면 의존적인 면도 있지만 스스로 시도해보고자 하는 독립심과 모험심도 생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걸음마이다. 아이들은 걸음마라는 모험을 하면서도 불안하여 자꾸 뒤를 돌아보며 엄마를 쳐다본다. 이때 엄마가 박수나 웃음 등으로 잘 한다는 신호를 보내면 아이는 신이 나서 더욱 모험을 감행하며 조금씩 독립심을 갖게 된다.
이후에도 부모가 자녀와 매사 의견을 주고받으며 스스로 선택, 결정해나가게 함으로써 더욱 독립심을 갖게 되어 스스로 어려움 등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자신감 있는 삶,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부모와 상의하고 협의하는 일에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나, 해서는 안 되는 일 등의 한계나 규칙이 포함된다.
하지만 부모가 자신의 부모로부터 안아주는 환경을 제공받지 못함으로 인하여 자신의 욕구만을 충족시키는데 급급하여 안아주는 환경을 제공하지 못할 경우 자녀는 본능적으로 주어진 공격성이 해소되지 않고 억압이 되어 버린다. 그럼으로써 타인과 환경에 대해 불안을 가지게 되고, 경계를 하게 됨으로 사소한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등 공격적 행동을 하게 된다.
또한 안아주기 환경만 있을 뿐 부모가 불안해하여 독립적인 환경을 제공하지 못하면 어려서는 부모나 친구들에게 그리고 결혼 후에는 배우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환경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사람이 되어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삶이나 규칙 등을 스스로 선택해본 경험이 없어 자기 통제력이 부족하여 방탕한 삶이나, 학교 등의 사회적 규범을 깨뜨리는 등 자기 멋대로의 삶을 살아가기 쉽다.
셋째는 좋은 모델링이 있다. 부모 중 한 사람이 분노 및 폭력 등의 공격적 행동을 하는 경우 자녀들의 대부분이 모방 등을 통해서 그와 똑같이 행동을 한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최근 가족치료 세미나를 다녀왔다. 기독교인 가정이었음에도 4대째 폭력이 대물림되어, 3대째의 아내가 자신의 아들까지도 그렇게 된 것을 보면 가슴이 찢어진다며 통곡하는 것을 보고서 모든 참석자들이 눈시울을 적셨다.
그 대책은 무엇일까. 그것은 재경험이다. 어려서 경험하지 못한 부모의 안아주는 환경과 독립적인 환경 그리고 좋은 모델링을 다시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위니캇은 아동이나 청소년들의 공격성을 통해 귀중한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이 공격적 행동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은 안아주는 환경을 제공해달라고 하는 조난신호라는 것이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공격성을 ‘희망의 표시’라고 했다.
그러나 안아주는 환경을 재경험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안아주는 자가 그 공격을 충분히 받아주고 담을 수 있는 관대한 마음, 여유로운 마음이 필요하다. 시쳇말로 스스로가 안아주는 환경을 경험하지 못한 재양육자는 냄비와 같은 마음의 그릇을 가지게 되어 공격을 받게 되면 마음이 쉽게 끊어 올라 그 공격을 안아주지 못하고 맞공격을 하거나 보복을 함으로써 변화를 시켜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상담자나 재양육자는 자신의 상처치유가 선행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한번 형성된 성품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에 안아주기를 오래도록 해줄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하다. 말이 쉽지, 아무리 관대한 마음의 그릇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자면 때론 속도 상해야 하고 눈물도 흘려야하지 않겠는가. 또한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따뜻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사랑의 모델링이 되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그뿐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게 하거나 협의하여 결정하는 독립적인 환경을 재경험하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럴 때 더욱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될 수도 있고 가족규칙이 될 수도 있다. 또한 학교 교칙이 될 수도 있다.
서울 금천구의 M고등학교는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학생 200명이 참석한 공청회를 통해 체벌에 대한 원칙을 정했다.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을 교사가 손발이나 도구를 이용해 때리는 직접 체벌은 금지하고 '교실 뒤에 서 있기', '빈 교실에서 반성하기(성찰교실)' 같은 간접 체벌과 대체벌을 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 결과 선생님과 학생 간에 존경과 신뢰를 주고받는 학교로 얼마 전 기사화되었다.
학교와 교회는 설령 가정에서 안아주기와 독립적인 환경 그리고 좋은 모델링을 제공해주지 못함으로 인해 학생이나 성도가 공격성을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재경험을 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내는 ‘희망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들나귀와 같은 우리들을 그렇게 하신 것처럼 말이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