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 전 휴거가 거짓인 이유 1 (살전 4:13-17)
환난 전 휴거는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환난전 휴거는 확실히 거짓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휴거가 환난 전이라 말하지 않고, 환난 이후라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성경의 기록과 반대되는 환난 전 휴거설을 믿고 따릅니다.
환난 전 휴거의 증거 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혹, 환난 전 휴거 증거로 제시하는 성경주절들은 잘 못 이해한데서 비롯 된 것입니다.
<빛과 흑암의 역사> 카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ourdailybread>님께서는 환난 전 휴거의 증거로 살전 4:13-17절 말씀을 근거로 제시하고, 장황하게 설명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잘 이해한다면, 환난 전이 아니라 환난 이후에 적용 될 말씀임을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반론: 필자는 환란후휴거의 실체를 인정하는 매우 드문 전천년 환란전휴거 신앙자 중에 한 명이다. 본인은 "두 휴거"(the two rapture: 한국말 제목은 휴거 이후에 있을 일들, 말씀보존학회 간)의 내용을 근간으로 또 피터 럭크만 박사의 주석을 숙지한 사람으로서 환란전휴거와 환란후휴거 둘 다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다만, 교회시대의 거듭난 성도는 예외없이 환란전휴거가 된다는 것을 골자로 믿고 있다.
환란전휴거를 부인하고 환란후휴거만을 주장한다던지 환란전휴거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나 그리스도인 대다수는 환란을 통과하여 환란후휴거를 받아야 된다고 가르친다던지 하는 모든 이설들은 근본적으로 저들이 가진 휴거론의 하자가 있을 뿐 아니라 구원론 자체에 심각한 오류가 있기 때문에 나온 이설이다. 교회시대 구원론의 골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만 받는 구원이며 그 받은 구원에는 하늘나라에 이르기까지 평생 보장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놓쳐 버리게 되면 믿은 자의 구원 상실 가능성을 말하게 되는데 그 구원상실론이 환란전휴거 신앙을 못 받아들이게 하는 걸림돌 구실을 실질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의문 제기에 대해 상반된 사례가 있다면 마르튀스님을 포함하여 어느 누구라도 제시하기 바란다. 혹은 자기 본인은 절대 안 그런 사람인데 내가 오해했다고 항의해도 좋다. 내가 알기로는 필자가 온-오프라인 그 어디서 만난 환란통과론자, 혹은 부분휴거론자들일지라도 전부 "구원상실론파"에 소속된 사람들이었고 또 그들 중 다수가 오순절파 은사주의자들이었다. 이것은 희한한 교집합인데 구원상실론을 믿는 순복음파 교인이 환란통과론을 열성적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참 많고 그 다음으로 한국 교인들이 선호하는 사상은 환란전 휴거이되 부분휴거와 부분 환란통과를 가르치는 쪽이다. 그들이 가장 불선호하는 종말론은 교회의 온전한 환란전휴거이다. 상당히 소수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만이 이 교리를 가르친다.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3-17)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성도들(죽은 성도들)이 부활 할 때가 언제인가를 정확하게 안다면 환난 전 휴거 주장 못합니다.
성도들이 부활 할 때는 환난 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성도들을 다시 살리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다시 살리시는 그 때가 마지막 날이라고 성경은 기록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 말씀이 그 증거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
반론:
이것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니, 즉 그분께서 내게 주신 모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요 6:39).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읽지 못하는 마르튀스 같은 분은 십자가 이전과 십자가 이후의 구원론의 차이점이라던가 교리의 상이점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단지 어떤 원하는 단어가 발견되면 그 단어를 자신의 교리에 끼워 넣어서 합리화시키고 넘어가 버린다. 요한복음 6장은 아직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의 구원론이다. 요 6:40을 잘 보기 바란다.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생을 얻게 하는"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육안으로 보고 그를 믿어서 영생 얻는 사람들이 누가 있는가? 꿈에서 예수를 보고 믿는다는 사람들은 잘 검증해 봐야 한다. 개꿈이거나 예수 분장을 하고 나타난 빛의 천사를 가장한 마귀를 보았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지금은 보고 믿는 시대가 아니라 보지 않고 믿어야 제대로 믿는 그러한 시대인 것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도마야, 네가 나를 보았으므로 믿는구나. 보지 않고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고 하시니라(요 20:29).
십자가 사건과 부활 이후로 경륜은 이미 보지 않고 믿는 자들에 초점이 옮겨졌다. 사도들은 전부 예수님을 보고 믿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나를 포함해 이 시대에 사는 어떤 그리스도인도 예수님을 보고 만져보고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이다.
초림 당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믿었는데 만일 그 사람이 주님 공생애가 끝나기 전에 죽었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 사람은 피뿌림 이후의 신약 성도가 아니기 때문에 구약 성도들과 함께 부활할 것이요 그가 부활하는 날이 마지막 날이다. 구약 성도가 부활하는 날은 "마지막 날"로 언급되는데 그 날이 언제인지 알려면 아래 구절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각자 자기의 서열대로 되리니 그리스도가 첫열매들이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라(고전 15:23).
이것은 아래 단윈에서 논할 것이다.
성도들의 부활이 여러 번 있는 것 아닙니다.
단 한번 남았습니다.
부활의 순서는 <그리스도>, <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그리고 <끝>입니다.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3-24)
반론:
그러나 각자 자기의 서열대로 되리니 그리스도가 첫열매들이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라(고전 15:23).
그리스도가 첫열매들이요, 라는 것은 주님 부활 당시에 많은 구약 성도들이 함께 부활했기 때문에 복수가 된 것이다. 변개된 성경을 고수하는 자들은 마르튀스 포함해서 이 사실을 전면 부정한다. 주님 혼자 부활하셨다고 가르치면서 마 27:52-53을 거짓말로 만드는 것이다.
하여튼 첫열매들은 초림 당시의 부활을 말한다는 건 분명하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분께 속한 사람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당연히 신약 교회라고 해야 정답인데 그게 끝이 아니라 구약 성도의 나머지들과 환란 성도들까지 함께 부활해야 온전한 것이다. 교회시대 성도는 교회시대 끝에 부활할 것이고 환란성도와 구약성도는 대환란 막바지에 함께 부활할 것이다. 환란 성도와 구약 성도의 부활이 별개의 사건이라 생각할 단서는 없다. 겔 37장은 구약 성도들의 부활을 보여주고 환란 성도의 부활은 올리브산 설교에 나오며 계 14장에도 나온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라는 표현을 지상 재림과 연결지으면서 지상 재림이 있어야 모든 성도가 부활한다고 하는 것이 무천년 역사적 전천년 목사들의 전형적 레파토리이다. 허나 고전 15:23에서는 공중에 나타나신다거나 지상에 내려오신다거나 어느 한쪽으로 규정짓는 표현을 쓰지 않고 있다. 교회시대 성도들을 데리러 공중에 나타나시고 환란 끝무렵에 환란성도들을 데려 가시려 공중에 나타나실텐데 그 케이스들을 구별하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교회시대 끝에서 환란시대 끝까지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자기 때에 휴거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된다.
<끝>에서는 성도들 부활 하지 않습니다.
악인들이 심판 받기 위해 부활합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 20:13)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부활>이라 표현 하지 않고, <사망>이라 표현 합니다.
성도들이 부활하는 시점은, 대환난의 기간이 모두 지나고 주님 재림하신 이후입니다.
그 때까지 성도들 부활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첫째 부활>이라 기록한 것입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 20:6)
반론: 마르튀스가 고전 15:23을 환란통과론의 근거로 삼은 이유는 "그리스도의 오심"은 단 한 번이라는 자신의 교조적 신념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지상 재림을 의미해야 된다고 스스로 단정한 후에 내린 결론이기 때문에 어차피 자기 생각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에게 속한 자는 꼭 교회시대의 거듭난 크리스찬들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환란 성도들도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며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뒤늦게 구속받은 구약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것이다. 천년왕국 시작 이전에 그 세 부류(구약, 신약, 환란 성도)는 다 부활해야 한다. 본문은 그들의 부활들에 대해 세분화해서 이 그룹은 언제, 저 그룹은 언제 규명하는 내용이 아니다.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이전에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다 부활한다는 일반적인 사실을 말씀했을 뿐이다.
<<그래서>>
<살전 4:13-17절> 말씀 가지고 성도들 환난 전에 휴거 된다는 주장은 엉터리입니다.
부활 없이는 성도들 휴거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도들 부활은 마지막 날 이루어집니다.
그 날은 환난 전의 어느 날이 아니라, 환난의 날들이 모두 끝나는 날입니다.
앞으로 부활은 두 번 남았지만, 성도들의 부활은 한 번 뿐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반론: 성도는 오직 한 부류가 아니며 최소한 세 부류로 나뉜다. 구약, 신약, 환란성도. 유사성의 카테고리로 묶자면 구약과 환란 성도는 유사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는 존재들이고 신약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별종들이다. 신약 성도들이 만약 구약이나 환란 성도들과 함께 부활한다면 그들과 동격이 된다는 소리인데 그러면 구약과 환란 성도들도 새예루살렘에 들어가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새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신부인 신약 교회만 들어가는 도성이지 아브라함, 야곱, 이삭 이런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새예루살렘이 아닌 새 하늘과 새 땅에 살아야 한다.
때문에, 성도들의 부활은 단 한번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향상된 계시 체계를 무시하고 해석자 자신이 어떤 신약 성경도 아직 기록되기 이전의 유대인의 예언관으로 되돌아 가는 행태이다. 신약 성경이 기록되기 전까지 모든 정통파 유대인들은 부활은 한 번 뿐이며 그것이 마지막 날이라고 믿고 살았다. 지금은 신약 성경 27권이 주어졌고 특히 요한계시록에 미래의 역사가 밝혀져 있기 때문에 마르튀스 같은 심히 미혹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분별해서 미래를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http://cafe.daum.net/Biblebeliever
첫댓글 님이 쓴 박스 안의 글만 읽으면 정말 재미 있습니다^^
웃음만 나옵니다...
몰라도 이렇게 모를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계속 부탁 드립니다^^
글 내용 읽지도 않고 욕설 비방만 일삼는 에녹 같은 사람보다는 그래도 마르튀스님이 좀 낫습니다. 이해도는 떨어지는 듯 하지만 읽기라도 하니까. 반론글도 올려주시고 말입니다. 저의 주장에 대해 재반론이 있다면 언제든 발언권 행사하십시오. 반론 채널은 열려 있습니다.
신학은 논쟁을 거쳐야 발전합니다. 저도 마르튀스님을 무조건 비난하는 건 아니고 틀린 게 워낙 많아서 일일이 다루려다 보면 짜증이 솟구치는 점, 양해 바랍니다.
이런 사람이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자라니....!
말보회가 망조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