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을 알린 예언]
1592년에 일어나 1598년에 끝난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이다. 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은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포로로 일본에 잡혀가고 국토가 초토화되는 등 엄청난 타격을 받았고, 그런 만큼 큰 재앙이었던 임진왜란을 미리 예언한 사례도 여럿 있었는데, 이번 항목에서는 그런 경우들을 거론해 보기로 한다.
먼저 국가공식기록인 1592년 4월 30일자 <선조실록>을 보면, 이런 예언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었던 승려 무학(無學)이 지은 도참기(圖讖記)라는 예언서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나와 있는데, 임진년(1592년)에는 ‘악용운근(岳聳雲根) 담공월영(潭空月影) 유무하처거(有無何處去) 무유하처래(無有何處來)’라고 적혀 있었다. 이 문구는 임진년이 되면서 시중에 널리 나돌았는데 아무도 그 뜻을 정확하게 풀이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카가 지휘하는 일본군 선발 부대가 조선의 부산을 공격하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당시 명성이 높던 장수인 신립(申砬 1546~1592년)을 보내어 방어하도록 하였는데 신립은 1592년 4월 28일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의 탄금대(彈琴臺)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가 거느린 군대와 함께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무학이 도참기에 언급한 ‘악용운근(岳聳雲根) 담공월영(潭空月影) 유무하처거(有無何處去) 무유하처래(無有何處來)’의 뜻이 바로 탄금대 전투의 패배를 예언한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악(岳)’은 곧 유악강신(維岳降申)’이며, 용(聳)’은 ‘입(立)’의 뜻이며, ‘운근(雲根)’은 곧 돌(石)이니, ‘악용운근(岳聳雲根)’은 ‘신립’이란 말이 된다. 또 ‘담공월영(潭空月影)’은 곧 ‘달이 여울에 떨어진 것(月落灘)’이니 ‘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인데, 신립은 탄금대에서 패배하자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그 아래의 구절은 한양의 백성들이 피난을 가고 왜구가 들어온다는 뜻이라고 한다.
또한 임진년 1월부터 “자리 봉사 고리 첨정(自利奉事高利僉正), 경기감사 우장직령(京畿監司雨裝直領), 큰달마기(大月乙麻其).”라는 동요가 도성 안에 퍼졌는데, 나중에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그 노래의 뜻을 이렇게 해석하는 의견이 있었다.
“자리고리’는 우리나라(조선)의 방언으로 ‘냄새나고 더럽다.’는 뜻인데 이것은 임진 난리 뒤에 생긴 납속 군공(納粟軍功)을 의미하며, ‘봉사첨정’은 다 낮고 미천함을 의미하니,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천하고 낮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공을 세워 벼슬을 받는다는 뜻이다.
또한 ‘큰달마기’는 곧 큰달의 끝인데, 선조 임금이 4월 그믐날에 피난을 떠났으니 그 달이 큰 달이며, ‘경기감사 우장직령’은 경기감사가 우장(비옷)과 직령(도포)을 입고 임금을 따라 피난을 간다는 뜻이다.”
또한 저자를 알 수 없는 조선 말의 야담집인 청구야담(靑邱野談)에도 임진왜란에 관련된 예언이 실려 있다.
김윤신(金閏臣)이란 사람이 학자이자 도사인 남사고(南師古 1509~1571년)와 친해서 그의 집에 자주 갔는데, 어느 날은 베옷을 입은 노인 한 명이 있었다.
그 노인은 남사고와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의논을 했는데, 노인은 “푸른 옷과 나무신이면 나라의 일을 알 수 있다. 난리가 일어나 임금이 궁궐을 떠날 때에 서쪽 변방에 이른 후에 도성을 다시 회복할 수 있으며, 두 번째는 한강을 건널 일이 없다.”라고 말했고, 남사고는 그 말들에 동의했다.
김윤신은 노인이 한 말들을 듣고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런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 임금이 도성을 떠나 조선의 서쪽 변방인 의주로 피난을 간 후에 명나라 군대가 들어와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도성은 다시 조선의 영토로 회복되었다.
그제야 김윤신은 노인이 임진왜란을 예언했음을 깨닫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일본군이 다시 쳐들어오자, 선조 임금에게 자신이 남사고의 집에서 본 노인이 한 말을 전해주고 “이제 전하께서 왜군을 피해 한강을 건널 일이 없사옵니다.”라고 풀이해 주었다.
과연 그 말대로 명나라 군대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군을 격파하여 일본군은 진격을 멈추고 남해안으로 철수하였으므로 선조가 두 번째로 한강을 건너 피난을 갈 일은 없었다.
1873년 조선 고종 임금 때 서유영(徐有英 1801~1874년)이 쓴 야담집인 금계필담(金溪筆談)에도 마찬가지로 임진왜란에 관련된 유명한 예언이 담겨 있다.
신묘년(辛卯年)인 1591년 선조 임금이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다가, 여자 한 명이 손에 볏짚을 쥐고서 남대문에서 궁궐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녀가 궁궐로 들어올 때마다 피가 땅으로 잔뜩 흘러 내렸고, 그녀는 하늘이 울리도록 크게 울더니 잠시 후 궁궐에 큰 불이 나서 모조리 잿더미가 되는 것이었다.
나중에 선조 임금은 그 꿈이 재앙을 예견한 흉조라고 생각했는데, 다음 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일본을 뜻하는 한자 왜(倭)는 벼(禾)와 여자(女)가 들어간 글자이니, 곧 일본이 쳐들어와 궁궐을 불태운다고 하늘이 선조 임금한테 미리 가르쳐 준 것이었다.”라고 풀이했다
************************************************
[병자호란을 알린 예언]
병자호란(丙子胡亂)은 병자년인 1636년 12월 2일,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을 가리킨다. 이 전쟁은 1637년 1월 30일에 끝났는데, 비록 기간은 짧았으나 조선이 끝내 패배한데다가 청나라 군대가 조선 백성 수십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가는 바람에 피해는 임진왜란에 못지않을 만큼 컸다.
그런 이유로 병자호란에 관련된 전설이나 민담들도 꽤 많은 편인데, 저자와 연대를 알 수 없는 조선 말엽의 야담집인 청구야담(靑邱野談)을 보면, 병자호란을 미리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한양의 어느 선비가 하루는 하인 한 명을 데리고 강원도 이천군(伊川郡)으로 떠났는데, 그곳은 나무와 숲이 하늘을 찌를 만큼 울창하고 호랑이와 표범과 늑대와 여우 같은 맹수들이 낮에도 다닐 만큼 위험했다.
설상가상으로 산길도 매우 험준해서 선비와 하인은 갈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방황하며 하룻밤 머물 곳을 찾았는데, 그러던 와중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선비의 주변에 있던 큰 바윗돌 하나가 마치 성문처럼 갑자기 열리더니, 그 가운데로 큰 시냇물이 흘러나오고 물 위로 무와 배추 이파리가 둥둥 떠다녔다.
선비는 그 모습을 보고 “저 바위 안에 반드시 사람이 살아서 이렇게 무와 배춧잎이 흘러나오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하인더러 시냇물 안으로 수영을 해서 쭉 올라가 보라고 말했다.
하인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시냇물 속으로 수영을 해서 들어갔더니, 이윽고 배 한 척에 올라타서 돌아왔다. 선비는 하인과 함께 그 배에 올라 시냇물이 나온 바위 안으로 들어가다가 언덕을 발견하고는 배에서 내려 주위를 살펴보다가 한 초가집을 발견하고 거기로 향했다.
초가집에 선비와 하인이 도착하자, 어느 노인 한 명이 지팡이를 짚고서 그들을 마중하러 나왔는데, 노인이 입은 옷과 걸친 모자는 보통 사람들의 복식과 전혀 달랐다.
노인은 선비 일행을 보고 “이곳은 인간 세상과 단절한 지 100여 년이 지났는데, 그대는 어떻게 들어왔는가?”라고 물었다. 그 질문에 선비는 자신이 보고 겪은 대로 말해주었고, 뜻밖에도 노인은 선비 일행을 내쫓지 않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서 저녁 식사를 차려주었다. 노인이 대접한 밥상에는 산나물과 들에서 재배한 채소가 올랐는데, 그 맛이 매우 순하고 담백하여 선비가 평소에 먹던 음식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선비 일행이 저녁 식사를 다 마치자, 노인은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 조상들은 세상의 더러운 일들이 싫어서 이곳에서 수백 년 동안 살아 왔다네. 내가 사는 초가집보다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나의 친척들이 100여 호 정도가 되는 큰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는데, 서로 다투는 일이나 무거운 세금 때문에 고통을 받는 일도 없다네. 그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고 편하게 살 뿐이지.”
말을 마친 노인은 문득 하늘에서 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내가 알고 지내던 평구(平邱)의 사람인 박진헌(朴震憲)이 죽었군!”하며 탄식을 했다. 그러더니 노인은 “장차 전쟁이 벌어질 것인데, 이를 어떻게 하리오?”라고 걱정을 했다.
노인의 말을 듣던 선비는 이를 괴상하게 여겨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작은 책자에 노인이 말하는 대로 앞으로 벌어질 전쟁의 연도와 날짜에 대해 적고는 노인한테 이렇게 질문했다.
“만일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재앙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피난을 가면 좋은 곳이라도 있습니까? 아신다면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선비의 물음에 노인은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대는 강원도의 강릉(江陵)이나 삼척(三陟)으로 피신을 가게. 그러면 재앙을 피할 수 있을 것이네.”라고 가르쳐 주었다.
날이 밝자 선비 일행은 바위문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평구촌(平邱村)이란 마을에 도착하자 혹시나 싶어서 “이곳에 박진헌이란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는데, 마을 사람이 “그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라고 알려주자, 노인이 운명을 정확하게 예측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1636년 12월 2일, 마침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선비는 노인이 들려준 말을 떠올리며 하인과 가족을 데리고 삼척으로 피난을 떠났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백성들이 청나라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붙잡혀 가서 피해가 매우 컸지만, 삼척으로 피신을 한 선비 일행은 모두 무사했다고 전해진다.
*******************************
[친구의 수명을 늘려준 정북창]
************************************
[기인 중의 기인, 정북창(鄭北窓)]
북창 정렴선생은 중종 원년(1506)에 출생했다.
자는 사결이고 호가 북창이며 본관은 온양이며 명종조에 정승을 지낸 순붕의 아들이다.
중종32(153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나서 과거로 진출하기를 그만 두었으며 음률.천문.의약에 정통해서 장악원 주박 관상감 혜민서 교수를 역임했다.
외국어에도 능통하였고 여러 가지 이적을 남겼으며 진인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유불선에 박통한 바 일찍이 삼교에 대해 논하되 "성학은 인륜을 주로 하며 선불은 명심과 견성을 주로 한다. 이것이 삼교의 차이점인데, 선불은 대동소이하다"고 하였다.
어릴적부터 마음을 가다듬어 신과 통할 줄 알았다고 한다.
가까이는 동리 집안의 사소한 일에서 멀리는 해외의 일과 심지어는 개소리, 닭소리, 이방인들의 말까지도 잘알아들었다고 한다.
14세에 중국을 관광하였는데 이상한 기운을 바라보던 중국에 온 유구사람이 북창을 보고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운명을 점쳤더니 아무날에 중국에 들어가면 어떤 이인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더니 그대가 참으로 그 사람인가 봅니다"하고 그 자리에서 배우기를 청하였다.
그 사람에게 유구말로 주역을 강의하였다.
외국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앞을 다투어 찾아왔다.
북창이 외국의 말로 응대하니 사람들은 깜짝 놀라 이상히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북창을 천인이라 불렀다.
그들은 외국말을 다 할 수 있는 비법을 물으니 북창은 "내가 듣고서 해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지 오래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외에도 북창에 관한 재미있는 몇가지 설화가 있다.
짐승소리를 듣는 지음설화, 연명설화, 수도설화 등이 그것이다.
정북창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할 줄 알았고 또 대낮에 그림자가 없었다고 한다.그래서 생이지지한 천재요, 그림자없는 귀신이라고 세평을 들을 만하였다.
실제로 북창이 중국에 갔을 때 봉천천에서 중국의 도사를 만났는데 '우리나라는 삼신산이 있어서 낮에도 도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항상 볼 수 있으니 무엇이 귀하겠는가?'하며 신선이 되는 단계를 설명하니까 중국도사가 슬그머니 피해버렸다.
그가 금강에 올라 휘파람을 불었더니 바위와 골짜기가 진동하고 중들은 피리소리로 여겼다고 한다. 이상은 해동이적에 보인 설화이며 현전하는 구전설화는 다음과 같다.
① 사촌이 죽은 아버지의 묘자리를 정북창에게 부탁하여 구하여준 묘자리가 진흙 밭으로 물구덩이인지라 돌을 넣고 매장하면서 사촌형인 정북창에게 나쁜 터라고 원망하였는데 사실은 그곳이 옥관자가 여럿이 나오는 명당터였다. 돌을 넣은 수가 옥관자를 달 출세하는 후손이 태어날 숫자였던 것이다.
② 산중을 가다가 까마기가 "대육 대육"하고 우는 소리를 듣고 시신을 찾았으나 오히려 살인자로 누명을 쓰고 죽게 될 때 새소리를 알아듣는 지음이 있다는 증거로 재판관인 원님이 이 품속에 감추어둔 제비의 울음소리를 해석해서 살아났다.
지음은 천기를 누설하는 것이라 하여 왕이 정북창을 잡아 죽이려고 하면서 품속에든 산 제비소리를 알아듣는지 묻자 '어미제비가 임금님이 잡으신 새끼제비를 살려달라고 하면서 피불요, 육불용, 골불용 이라 웁니다'라고 말하니까 감탄하면서 정북창을 살려주었다.
③ 친구인 윤두수 이야기로 그가 40세 밖에 못 살 단명할 팔자인 것을 알고 일러 주었는데 신선이 그렇다면 이 비밀을 알려준 정북창을 감수해서 윤두수를 연명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는 바람에 윤두수는 장수하고 정북창은 단명하였다.
④ 정북창은 충청남도 아산군 송악면 솔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계수의 아들인 조카는 사랑하지만 정작 자기 자식 셋은 사랑하지 않아서 아내가 불평을 하였다. 얼마 뒤에 아들 삼형제가 한날한시에 죽어 슬피우는데 자세히 보니 정북창이 혼인하기 전에 죽인 구렁이가 복수하려고 아들로 태어났던 것이다. 그 내용을 이미 알아챈 정북창이 자기 자식을 미워하였던 것이다.
위의 문헌과 구전설화를 통하여 보면 무불통지한 천재요 천문지리와 동물로 귀신의 세계까지 이해를 한 기인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이 설화는 사실성이 있으면서 인구에 회자될 자격이 충분한 설화라 할 것이다.
19세때 국자시에 뽑히고도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양주에 살 곳을 정하고 있었는데 유불도 삼교에 조예가 깊었다. 포천현감을 지내다가 사임하고 경주의 청계사, 과천의 관악산을 다니며 여생을 보냈다.
북창은 의학과 도교수련에도 관심이 깊었다. 수련적인 도교를 다루는데 있어 정렴, 정작형제를 잊을 수 없다.
북창은 도교수련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며 그의 수련법은 고답 막연한 것이 아니고 인체의 건강을 고려하는 입장이 견지되어 있어 의학과 직결됐다.
그의 아우 정작은 호를 고옥이라고 하였는데 시서화에 뛰어난 재주를 들어냈으며 형으로부터 수련법을 배우고 의약에도 밝았으며 동의보감 편찬에도 참여했다. 북창과 고옥 형제는 한국의학에 도교적인 체계를 갖게 한 인물이다.
정렴은 용호비결(북창비결)을 남겼는데 필사본으로 전해진다. 그의 비결은 "폐기 태식 주천화후" 세 가지로 요약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단을 수련하는 방법은 지극히 간단하고 쉬운데 관계서가 너무 많고 말들이 황홀하여 알아듣기 어려워서 고금의 배우는 자들은 손을 댈 방도를 몰라 장생을 얻으려다 도리어 요절하는 자가 많다.
정렴은 그의 용호비결 제1장에서 단을 수련하는 방법을 설명해 나가는 도중에 이런 말을 했다.
"풍사의 질환은 혈맥속에 숨어 캄캄한 어둠속에서 돌아다니므로 그 역시 몸을 죽이는 도끼임을 알지 못한다. 오래되어 경락에 옮겨가고 고황속에 깊이 들어간 연후에 의사를 찾아가 약을 쓴다고 해도 이미 늦는다.
정기와풍사는 빙탄과 같아 서로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정기가 머물러 있으면 풍아는 절로 달아나고, 백맥이 절로 유통하고 삼관이 절로 승강하는데 질병이 어디로 해서 생겨나겠는가? 조금만 정근하면 반드시 수명을 연장시켜 죽는 날을 뒤로 물리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결국 질병이 범접하지 못하게 미리부터 준비를 갖추는 일종의 건강법 내지는 양생법을 말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양생관은 더욱 확대되고 더욱 세련되어서 조선시대의 의학의 기본체계를 확립시키기에 이르렀고나아가서는 의학의 본뜻을 해명하는데에 전개되었다.
북창은 술을 즐기어 말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언젠가 말하기를 '성인은 인륜을 중하게 여기건데 석가와노자는 마음을 닦아 견성하는 것 만 알고 인사의 학문은 빠뜨렸다. 아마 서로 약간 다른 것이 있는가 보다'라고 하였다.
한때는 탄식하기를 '말하여도 믿어주지 않고 행하여도 알아주지 않는다'하고는 마음껏 노래부르면서 스스로 자기를 희롱하며 방랑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그러면서도 보통 사람보다 남다른 점이 있다고 여긴 적이 없었다.
남과 더불어 말할 적에는 단 한마디도 공자의 학에서 벗어난 말이 없으니 아마 그 깨달음은 신과 같고 그 행동은 노자와 같았으며 사람을 가르치는데는 한결같이 공자로 종을 삼을 것이라 했다.
숨어서 살면서 세상과는 발길을 끊고 침묵을 지킨지 10년만에 세상을 마치니 명종4년(1549) 나이 44세였다.
그가 일상 경험한 처방을 모아 편찬한 것이라는 <정북창방>이 있었으나 유실 되었다. 이 책은 양예수가 지은<의림촬요>에 인용되었다.
북창은 스승도 없으며 또한 제자도 없었다. 양주 사정인에 북창의 무덤이 있다. 을사사화때 그의 부친의 소행을 힘써 간해도 듣지 않으매 은신해 있다가 이내 세상을 떠나니 나이 44세 였다. 죽음에 이르러 한편의 시 '자만'을 남기기도 했다.
"일생에 만권의 책을 독파하고, 하루에 千鍾의 술을 마셨노라. 복희씨 이상의 일을 고담하매 속세의 일은 전부터 입에 올리지 않았노라. 안회도 三十에 아성의 말을 들었는데 선생의 수명은 어찌 그리 지리한가"
북창의 시문은 그의 청허한 인품을 따라 이처럼 고원하다. 북창시집에는 모두 삼십제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을사천문록-정렴전>에 "선생은 정유년에 진사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위인이 청수하더니 자라면서 무엇이든지 모르는 것이 없어서 천문, 지리, 음악, 의약, 산술, 중국어를 배우지 않고도 잘 알았다.
일찍이 부친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을 때, 중국인과 대화하는데 능란하므로 그 나라 사람들도 모두 놀랐다. 후에 귀국하여 육품벼슬로 특진하여 의학, 산학, 상학의 삼학교수를 겸임하다가 포천 현감을 지냈다.
그가 산속에 있을 때 산 밑에 사람들의 일을 보지 않고도 알아 '누구의 집에 무슨 일이 있다'하여 나중에 알아보면 과연 어김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북창선생의 신비한 능력에 대한 설명으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북창선생은 어렸을 때, "불교에 육통법이 있다고 하는데 내가 그것을 시험해 보리라"하며 절에 들어가 삼일동안 정관(靜觀)하더니, 가까이는 동리 집안의 사소한 일에서부터 멀리는 백리 밖의 일까지 통달하였으며, 비록천리 밖의 일이라도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집중하면 곧 알아내었다고 한다.
이렇게 활연관통하여 모든 일을 알게 되는데 불과 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도가에서도 드문일로 기록되어 있다. 재주가 최상승인 기재야만이 가능한 일로 그만한 인재는 천년에 한 명 있기 힘들다고 한다.
첫댓글 율곡이이도 십만양병 설을 주장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선조가 한강을 건너 북으로 피난갔다고 하는 대목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선조의 야반 도주에 성난 민중들이 궁궐에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남대문을 거쳐 한양에 도착했을때는 궁궐은 모두 타고 없었는데, 지금의 덕수궁 자리에 월산대군의 저택이 남아 있어 이곳에 군영을 차렸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