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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 3,1-11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6 이것들 때문에 하느님의 진노가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립니다.
7 여러분도 전에 이러한 것들에 빠져 지낼 때에는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8 그러나 이제는 분노, 격분, 악의, 중상, 또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운 말 따위는 모두 버리십시오.
9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10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11 여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다인도, 할례 받은 이도 할례 받지 않은 이도, 야만인도, 스키티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6,20-26
그때에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오늘 복음은 ‘참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길은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모순처럼 보입니다.
곧 우리 앞에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라는 두 길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행복'은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강령입니다.
'행복'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곧 행복으로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신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이기에, ‘행복’은 곧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의 ‘여덟 가지 복’을 네 가지로 함축시켜 말하면서, 동시에 네 가지의 불행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선언은 제자들에게 직접 2인칭(너희)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곧 제자들이 부유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고, 배부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굶주리는 사람들이며, 웃는 삶들과는 반대로 우는 사람들이고, 좋은 대우를 받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온갖 잔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그 중에서 마지막 것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루카 6,26)
사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누군가가 칭찬하고 좋게 말해주면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반면에 꾸중하고 질책하며 나쁘게 말해주면 우울해하고 불행해 합니다.
그토록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비위 맞추며 눈치보고 타인의 말 한마디에 우지좌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는 것, 혹은 인간적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 곧 하느님의 뜻 안에서 관계 맺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단지 좋은 인간관계나 단순히 아름다운 세상이나 복지사회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혹은 그저 오손도손 미워하지 않고 재미나고 즐겁게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미움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 속에서도 사랑하는 일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과 슬픔 안에서 사랑하고, 바로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되 당신이 하신 것처럼,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하는 일이요, ‘먼저 하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일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고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어둠의 유혹과 은총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는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러한 말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루카 6,22)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루카 6,20)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다 내려놓고, 당신만을 차지할 것입니다.
굶주릴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도 마음을 두지도 않을 것입니다.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받고 기쁠 것입니다.
진정 저는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오로지 당신의 것이오니,
배척받고 모욕 받으면서도 기뻐할 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이 세상에서 행복한, 저 세상에서 완전한>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오늘 루카 복음의 행복 선언은 마음의 가난이 아니라 그저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면에서, 그리고 불행 선언과 병행된다는 면에서 마태오복음의 행복 선언과 다릅니다.
그럼으로써 가난과 부를 마음이나 정신에 국한하지 않고, 마태오복음에 비해 물질적 가난과 부를 강조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돈이 많고 적음인지, 돈이 많고 적음이라면 얼마가 그 기준인지.
그런데 주님께서는 한 번도 그런 기준을 제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아니, 제시하시긴 하셨습니다.
그러나 돈은 아니고 하느님 나라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나 이런 것들이 많음을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은 부자이고, 이런 것들이 많아서 하느님 나라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은 그 반대지요.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기에 저세상에서 부자 되기를 바라고, 저세상에서 부자 되고 싶기에 이 세상에서 가난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가난한 사람들은 오늘 콜로새서가 권유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 콜로새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추구한다는 것,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에 대해 좀 생각해봄이 좋을 것입니다.
추구한다는 것은 집착하는 것과 비교하여 좋은 의미입니다.
이상과 현실의 문제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좋습니다.
반면에 집착한다는 것은 미움과 불행의 뿌리이니 나쁩니다.
그런데 이상에 집착하는 것이 왜 나쁩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나 우리 공동체가 이상적이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이며, 그래서 이상에 비추어 현실을 거부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추구는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인정하는 것을 넘어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요, 지금도 좋지만 그렇게 되면 더 좋겠다는 매우 긍정적인 태도입니다.
우리가 저 위에 있는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늘 주장하듯 땅에서 하늘을 살자는 것이요, 땅에서부터 하늘을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이 아니고, 이 세상을 미워하고 저세상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시작하여 저세상에서 완성하자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행복이 궁극적 목적이기에 이 세상 행복에 안주하지도 않지만, 이 세상 행복을 포기하지도 않으며, 저세상에서의 완성을 꿈꾸며 한걸음 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발은 늘 현실에 있어서 한발은 현실을 딛고 한발은 앞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천상을 추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행복>
남보다 머리가 좀 뒤떨어진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머리가 좋지 않다고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고 무시당해서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였더니 어느 날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소원 한 가지를 청하면 꼭 들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젊은이는 얼른 똑똑한 머리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니 머리보다는 돈이 좋을 듯했습니다.
돈이 많으면 머리 좋은 사람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청을 바꾸었습니다.
또 청을 바꾸고 생각하니 돈보다는 아리따운 여자와 함께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께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니 다시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시 간절히 청했습니다.
"세 가지를 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참다못해 말씀하셨습니다.
"자꾸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고 한마디로 말하여라."
그래서 큰 소리로 외쳤답니다.
"머리 돈 여자!"
하느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주셨고 그는 지금 많은 어려움 속에 산답니다.
‘머리 돈 여자 !’ 정신없는 여자와 살려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행복은 똑똑한 머리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많은 돈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리따운 여인에게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 마음의 목마름을 해소하고 오직 사랑만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며 사랑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줍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길입니다.
행복하기 위해 유명인이나 부자 되거나 권력을 쥘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면, 시간이 지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기쁨과 마음의 평화가 여러분을 지탱하는 내면의 힘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고(콜로 3,2)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은’ 사람다운 생활을 하는 데 있습니다(콜로 3,9-10).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미움을 사고 쫓겨나고 모욕당하고 누명을 쓴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하시고, 오히려 부유한 사람들, 배부르고 웃고 칭찬받는 사람들을 불행하다고 하시니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부 때문에 위험합니다.
그들은 자기 삶의 확고한 기반을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삶의 만족은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멀리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불행을 선언하시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을 차려 회개하도록 하는 경고입니다.
앞으로 올 세계를 희망하지 않고 현세만을 생각하는 만족이 불행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모든 것을 오로지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께 맡기고 의지하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행복이란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 넘어지면서도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가지고 ‘행복하다.’, ‘불행하다’를 단정지을 일이 아닙니다.
거죽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천상 것을 추구하는 행복을 놓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시편의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시편 1,1-3)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행복하십시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행복의 법칙은 유일하고 예외가 없음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의 비결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행복하여지려면 가난해야 하고 배고파야 하며 박해받아 울게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완전 자기 학대 수준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이 법칙이 예외 없는 유일한 행복의 길임이 확실하다면 누구든 그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 법칙을 믿을까요?
누가 행복해지기 위해 가난해지며 행복해지기 위해 단식하며 행복해지기 위해 멸시와 박해를 찾습니까?
우리는 먼저 이 행복의 법칙이 유일하고 예외 없는 법칙인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왜 더 가지고 배부르고 인정받기를 원하면 행복하지 못한지부터 이해해봅시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세속-육신-교만, 곧 삼구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세속인데 이를 청빈으로, 육욕을 단식으로, 교만을 겸손함으로 이겨야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단계를 받아들이는 일이 제일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왜 자살과 마약중독과 같은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나라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고 미국 사망 원인 1위는 마약중독이라고 합니다.
사실 자살이나 마약중독이나 원인은 다 같은 데서 출발합니다.
생존 욕구가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더 가지고 더 먹고 더 강해지면 행복하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추구하지만, 욕망에 비해 채워지는 것은 미흡합니다.
이 고통이 너무 커서 자살이나 마약으로 그 고통에서 빠져나오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행복을 위한 호르몬 조절 시스템이 존재합니다.
아기를 낳는다면 그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엔도르핀이 솟구칩니다.
이러한 자연 진통제가 없다면 우리는 고통을 감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마약과 같은 것으로 고통을 줄여주면 어떻게 될까요?
몸은 더는 엔도르핀을 내보내지 않게 됩니다.
지나치게 환각에 빠진다면 현실감각을 잃고 그 쾌락에만 집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망가집니다.
문제는 마약과 같은 쾌락을 주입하지 않을 때 벌어집니다.
이미 망가진 시스템 때문에 평소에 호르몬 때문에 잘 견뎌냈던 것들이 참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더 가지려 하고 더 먹고 더 강해지려 합니다.
이것도 안 되면 자살로 도피하거나 약물 과다복용으로 마지막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이러한 생존 욕구에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요?
창조자를 만나지 못해서입니다.
부모에게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이 부모의 부재보다는 돈이 없어서, 먹지 못해서, 강하지 못해서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과 보호를 받지 못한 아이들은 커서 그런 것들에 더 집착하게 되고 그래서 더 큰 욕망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에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세속과 육신과 마귀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일부러라도 그러한 욕망과 싸우면 우리 행복 조절 시스템은 우리가 느끼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행복 호르몬을 더 많이 분비하게 됩니다.
운동으로 몸을 괴롭혀주면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만들려고 마치 마약과 같은 쾌락 호르몬을 분비합니다.
그러면 잠깐 고통을 주는 것으로 오랜 만족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어쨌건 우리가 느끼는 행복과 고통은 호르몬의 작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행복해지려면 마약과 같은 것으로 고통을 줄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고통을 주어 행복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게 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이것이 지나치면 얀세니즘처럼 쾌락을 위한 고통 추구만을 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더 가난하고 더 배고프고 더 멸시와 박해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진정 행복 호르몬을 증가시키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몸에 고통을 주어 생겨나는 행복 호르몬의 양은 우리가 그 고통을 감내하기 위한 최소한만 분비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호르몬 중독에 빠져서 운동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운동만 하게 될 것이고 단식하는 사람은 계속 굶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간당간당하는 수준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시 이전의 빠른 보상을 찾게 되고 그러면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싸우기 위해서는 그것을 통한 행복 추구보다 더 큰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 동기가 바로 자존감입니다.
그랜트 카돈은 마약 중독자 무일푼에서 순자산 8천억에 이르는 성공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자신들을 부유하게 해주었던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집안이 가난해지자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돈은 생각처럼 벌려지지 않았고 그 고통을 마약으로 치유하려 하였습니다.
차츰 마약의 양이 많아지고 응급실에 실려 가는 일도 생겼습니다.
그리고 마약 치유 센터에서 치료받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적인 공허감은 채워지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매번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를 치유해 준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가 중독치료를 마치고 나오는 날 그의 담당자는 그에게 인격모독과 같은 발언을 합니다.
바로 “당신은 어차피 또 들어올 겁니다. 당신은 절대 마약을 끊지 못해요!”라고 단언한 것입니다.
그러자 오기가 생겼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는 오기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성공에 집착하게 됩니다.
반드시 성공해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공에 집착하다 보니 마약은 손도 안 대게 되고 건전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집착의 법칙』이라는 책을 써서 자신을 건전한 사람이 되게 만들어준 것은 성공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성공에 대한 집착의 근저에는 자신이 루저가 아니라는 자존감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도 삼구의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새로운 집착, 곧 내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으면 더 가지려 하고 더 먹으려 하고 더 강해지려 하는 마음은 매우 어색해서 더는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저절로 예수님처럼 가난해지게 되고 덜 먹게 되고 멸시와 박해를 즐겨 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반작용으로 오는 행복의 쾌감으로 언제나 기쁘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행복의 법칙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예외를 두지 않으십니다.
무엇을 따르려면 그것이 하나의 법칙이고 예외가 있을 수 없음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이제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 수 없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을 고쳐줄 수 있는 행복의 엔지니어, 혹은 행복의 의사나 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처럼 되려는 집착을 가져봅시다.
어차피 하나에는 집착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탐욕이든 사랑이든.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론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은 명강론가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의 말씀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생명력이 있었으면 사람들은 그에게 ‘황금의 입을 가진 사람’이란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그가 강론을 펼칠 때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죽이고 그의 입만 바라봤답니다.
그리고 마치 금실처럼 술술 그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듯,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감명을 받고 눈물을 흘리곤 했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벌써 삼십 년 가까이 강론대에 서고 있지만 설 때마다 늘 고민되고 부담스러우며 언제나 두렵고 떨립니다.
무엇보다도 자신감이 없습니다.
대체 왜 그럴까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준비가 덜 돼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더 큰 문제는 아직도 하느님께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 그렇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펼치려는 강론과 내 삶 사이의 큰 괴리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의 강론이 그토록 감동적이고 생명력이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강한 확신과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선포하는 말씀을 온몸으로 살아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늘 기도하면서 묵상하면서 강론을 열심히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렇게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며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명강론을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사제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강론대에 섭니다.
때로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참 어려운 것이 강론입니다.
길면 길다고 뭐라 하십니다.
짧으면 준비 안 했는가 보다고 수군댑니다.
살짝 양념이라도 치려면 또 삼천포로 빠진다고 걱정들 하십니다.
강론을 듣는 대상은 너무나도 천차만별입니다.
누구에게 수준을 맞춰야 할지 언제나 걱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론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성당을 찾아오면서 가장 바라는 것 중에 하나가, 피곤에 지친 일상에 위로와 힘을 건네주는 맑은 샘물 같은 신부님들의 한 말씀입니다.
그 한 말씀에 큰 위로를 받고 다시금 열심히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합니다.
간결하면서도 감동적인, 흥미진진하면서도 의미로 충만한 신부님들의 한 말씀에 신자들의 한 주간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하니 강론 더 잘 준비해야겠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께서는 얼마나 강론 준비에 철저했는지 모릅니다.
강론에 앞서 깊은 묵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라면 지금, 이 시대, 이 사람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고민하고 성찰했습니다.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람들 앞에 섰고, 자신의 삶을 통해 걸러낸 순금 같은 강론을 사람들에게 건넸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분의 강론 말씀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강론하는 동안 회개의 눈물을 흘렸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강론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났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은 기도 중에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 하느님의 음성을 세상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 대상이 절대 권력을 지닌 황제라 할지라도 두려움 없이 말씀을 전했고, 언제나 꿋꿋하고 떳떳했습니다.
그야말로 쌍날칼 같았습니다.
그 옛날 선포하신 말씀이 오늘 우리 시대, 우리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말씀 같아 신기했습니다.
“저들의 법이 그릇되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것에 불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최고의 권위는 땅의 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입니다.
만일 이 두 법이 서로 충돌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을 본받아 우리들의 입에서 진리와 사랑의 메시지, 희망과 격려, 기쁨의 말들이 흘러나오길 바랍니다.
우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사랑과 위로의 말로 인해 우리 이웃들의 삶이 한층 밝아지고, 행복해지고,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참 행복, 구원>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 말씀과 ‘불행 선언’ 말씀은 ‘행복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구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에서 “행복하여라.”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이고, “불행하여라.”는 “멸망할 것이다.”입니다.
‘행복론’이 아니라 ‘구원론’입니다.
뜻은 생각하지 않고 번역문의 표현만 보고서 행복을 얻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생각이 짧은 것입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들’은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만 섬기는 사람들을 뜻하고, 반대로 ‘부유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만 섬기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이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루카 16,19-24)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이미 위로를 받은(실컷 즐기고 있는) 사람이고, 지금 배부른 사람이고, 지금 웃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도 잊어버리고,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그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심판을 조금이라도 의식했다면, 또 자신의 영혼 구원을 조금이라도 신경 썼다면, 라자로를 외면한 채 그렇게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저승에서 고통과 고초를 겪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라자로에게 빵 한 조각도 제대로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한 방울의 물이라도 달라고 애원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뿌린 대로 거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마태 25,41-4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마태 25,45)
라자로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에게 무관심하고, 예수님을 외면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나라에(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그 부자처럼 살지 말라는 가르침인데, 그렇다고 해서 라자로처럼 비참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아닙니다.
라자로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라자로들’을 외면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나에게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사회에서 라자로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정답은 사랑 실천입니다.
종교와 신앙의 기본정신은 사랑입니다.
정치인들은 국가 전체의 복지 제도와 정책을 마련하고 실행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인데, 그런 일을 올바르게, 또 충실하게 할 일꾼을 제대로 뽑는 일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고 책임입니다.
루카복음 12장에 있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루카 12,16-19)
심판을 의식하지 않고, 구원에 관심도 없다는 점에서, 즉 어리석다는 점에서 두 부자가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어리석은 모습들을 실제 현실에서도 자주 봅니다.
종말, 심판, 내세, 구원,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 등을 비웃으면서 그저 하루하루 즐기면서 사는 것만을 최고로 생각하는 세속 사람들은 전부 다 그렇다고(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누가 참 행복한 사람인가? - 행복하여라, 하느님께 희망을 둔 사람!>
‘하느님, 저를 지켜주소서, 당신께 피신합니다.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의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
(시편 16,1-2)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
(시편 86,4)
여러분은 행복합니까?
과연 참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제 경우도 지금까지 삶을 다시 처음부터 살라하면 도저히 못 살 것 같습니다.
힘들고 어려웠을 때가 거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미화하여 때로 그리워하지만 잘 들여다 보면 쉬웠던 날은 거의 없었습니다.
아마 다시 살라해도 이런 삶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은총 덕분에 이렇게 살아 왔음을 깨닫게 되니 감사할 뿐입니다.
성인들은 참으로 행복했었을까요?
객관적 인간적 눈으로보면 결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불행했습니다.
성인들이라하여 결코 행복한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평생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삶이 대부분입니다.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았던 성인들이요 결코 휴식도 없었고 죽어서야 비로소 휴식할 수 있었던 성인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기에, 예수님만을 사랑하여 그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았기에 감사와 기쁨이 있었고 참으로 행복한 성인들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안티오키아 출신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가 그러합니다.
참으로 고난으로 점철된 삶이요 평생 참으로 치열하게 살다가 순교적 죽음을 맞이한 위대한 성인입니다.
대 바실리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아타나시오와 더불어 동방교회의 4대 교회학자로 인정된 성인입니다.
서방의 아우구스티누스 정도의 비중을 지니는 교회학자입니다.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뛰어난 설교가로 황금의 입을 지녔다하여 “크리소스토모”입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제37대 총대주교였던 성인은 설교가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성인은 에페수스에서 교회 회의를 열어 성직을 사고팔며 돈벌이이하던 주교 6명을 면직시키고, 세속적인 욕심에 가득 차 안락하고 화려한 삶을 누리던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쫓아냈으며, 부잣집만 골라 다니며 호사를 누리던 수도자들을 소속 수도원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병원과 학교를 늘리고, 교구청의 장식품과 가구들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데 썼습니다.
평신도들은 복음에 따라 살아갈 것을 권유했고 성서 읽기에 몰두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삶이 한결같이 정의로웠고 올곧았기에 주위에는 온통 적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는 열렬한 환영과 전폭적 신뢰와 사랑을 받았던 주교학자였습니다.
성인의 열화熱火같은 설교 일부를 나눕니다.
“가난한 이는 강합니다.
아무도 그에게 손해나 손상을 입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온갖 어려움을 겪습니다.
종들, 황금, 재산, 일, 끝없는 욕심, 사회적 야심, 끝없는 필요등 모든 것이 그를 억누르고 사로잡습니다.
여러분을 종으로 삼고 있는 맘몬을 언제까지 재갈을 물리지 않은 채 방치할 작정입니까?
만일 사람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자유를 얻으려고 온갖 수를 다 쓰겠지만, 돈의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여러분은 이 무서운 종노릇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조차 하지를 않습니다.
돈이라는 폭군에 잡힌 삶은 사람의 종 노릇보다도 더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공경하고 싶습니까?
그분이 헐벗은 것을 볼 때 못 본체하지 마십시오.
바깥거리에서 추위와 헐벗음으로 고통당하시는 그분을 돌보지 않는 동안에는 이곳 성당에서 비단옷으로 그분께 경의를 표하지 마십시오.”
정말 예언자적인 설교가 심금을 울립니다.
대부분의 설교가 이처럼 직설적입니다.
다음 찬미가도 성인의 이런 면모를 잘 드러냅니다.
"마음이 사랑으로 활활 타올라, 그 열정 뜨겁게도 솟아오르고,
황금의 입이 뿜는 열정의 말씀, 듣는 이 가슴마다 깊이 찌르네."
마침내 권력자들의 미움을 사서 유배중 흑해 동쪽 해안에 있는 최종 유배지로 가는 도중 향년 60세로 “순교자 바실리쿠스(+311) 경당”에서 사망합니다.
전설같은 일화를 소개합니다.
"성인이 이 경당에 도착하기전 그날 밤 바실리쿠스는 요한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마음을 편히 가지시게. 요한 형제, 아침이면 우리가 함께 있을 것이오.”
그날 밤 바실리쿠스가 순교자 경당의 사제에게도 나타나 “요한 형제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게. 그가 오고 있네.” 말했다 합니다.
이어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순교자 성당에 도착했고 임종을 맞이합니다.
요한은 흰 수의를 입혀줄 것을 요청했고 자기가 입었던 옷은 둘러서 있는 사람들에게 선사합니다.
다음 사제로부터 성체를 받아 모신 후 그의 삶을 특징짓는 마지막 “하느님은 모든 일에 찬미받으소서” 임종기도를 바칩니다."
참으로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되었던 성인의 참 치열한 생애를 살았던 참 가난한 순교적 선종의 죽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때문에 행복했던 성인이요, 모든 성인들이 그러합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오늘 지금 여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어제 어느 자매와의 면담성사 후 마지막 떠날 때 드린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제는 지났고 내일은 오지 않았고 모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을 선택하여 사십시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에서 행복을 못살면 내일도 못삽니다.
행복을 살아야 할 가장 좋은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주님의 행복선언이 참행복의 비밀을 알려줍니다.
역설적으로 가난한 이들, 굶주리는 이들, 우는 이들이 행복하다 하십니다.
루카의 예수님은 가난을 영성화하지 않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바로 하늘이신 하느님께 절대적 신뢰와 사랑을, 희망을 두었기에, 하느님만으로 행복하고 만족하기에 이런 참행복입니다.
다음 불행선언도 의미심장합니다.
그대로 부자들, 배부른 이들, 자족하여 웃는 이들이 앞서의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이들과 사랑으로 연대하여 나누며 함께 살라는 회개의 촉구 말씀처럼 들립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과연 여러분은 어디에 속합니까?
행복한 사람입니까? 혹은 불행한 사람입니까?
행복은 선택입니다.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을 선택하여 회개하며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참행복을 사는 것입니다.
참행복은 환경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달렸습니다.
주님께서 고맙게도 바오로 사도를 통해 참행복의 구체적 지침을 주십니다.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분노, 격분, 악의, 중상, 또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운 말 따위는 모두 버리십시오.
4.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5.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으십시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부단히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참나의 새 인간이 될 때 비로소 참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닮은 참나의 새 인간이 되어 참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지난 8월 23일은 저의 사제서품 32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LA에 신문 홍보를 위해서 가있었습니다.
몇몇 교우 분들이 자리를 마련하여서 ‘맘모스 산’에 갔었습니다.
맘모스 산은 해발 11,000피트가 넘는 높은 산입니다.
마모스 산은 환경보호를 위해서 셔틀버스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셔틀버스에서 ‘우리는 운전사를 원합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보았습니다.
저는 광고 문안을 보면서 파격적인 조건에 놀랐습니다.
조건은 이랬습니다.
“우리는 경험자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비용을 들여서 훈련을 시켜 주겠다. 시급은 21불에서 27불을 주겠다. 정년퇴임 시 연금을 보장하겠다. 스키장 회원권을 무료로 주겠다. 각종 복지제도를 실시하겠다. 년 1,000불의 상여금을 보장하겠다.”
대충 읽었지만 파격적인 조건이었고, 호감이 가는 조건이었습니다.
제가 운전을 할 수 있다면 지원하고 싶은 조건이었습니다.
신문사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서 직원들의 근무 일수를 줄인 저에게는 꿈과 같은 조건이었습니다.
저는 교구 성소국장으로 5년간 있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는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지원했습니다.
교구와 신학교에서는 지원자들 중에서 신학생을 선발하였습니다.
40년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교구는 신학생이 감소하고 있습니다.
신학교를 지원하는 학생들이 감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감소의 원인은 크게 3가지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인구의 감소입니다.
인구의 감소로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신학생 감소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인사적체로 인한 사제들의 의욕 감소입니다.
오랜 기간 보좌신부로 지내야 하는 현실 앞에서 보좌신부님들의 의욕이 감소하였고, 이는 신학생 감소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세 번째는 가정의 문제입니다.
성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모님은 학업을 위해서라면 성당에 가지 않는 것도, 기도를 하지 않는 것도 눈감아 주는 현실입니다.
가족이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고, 가족이 신앙 안에서 대화하지 못하는 것도 현실입니다.
성소의 씨앗은 가정에서 키워져야 하고, 교회에서 돌봐주어야 합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우리는 신학생을 원합니다.’라는 모집요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떤 조건이면 좋을까요?
“성적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제가 되겠다는 열정이면 좋습니다. 사제가 될 수 있는 소양과 지식은 신학교에서 책임지겠습니다. 성지순례를 비롯한 해외연수의 기회를 주겠습니다. 대기업은 아닐지라도 중소기업 수준의 급여를 책임지겠습니다. 부모님의 의료 비용을 교회에서 부담하겠습니다. 보좌신부 근무 기간을 10년 이내로 줄이겠습니다. 휴가를 비롯한 각종 복지제도를 마련하겠습니다. 차량지원을 교구에서 하겠습니다.”
교구와 본당 그리고 가정에서 사제성소를 위한 고민과 대책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국립공원에서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가 꼭 필요했기에 파격적인 조건으로 모집 광고를 했던 것처럼, 교회도 사제성소가 정말로 필요하다면 그에 합당한 방법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제자들을 모았을까요?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과 표징으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함께 지냈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치유의 기적과 새로운 권위를 지닌 말씀은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시면 그 옆에 자리에 있겠다고 서로 다투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도 나를 떠나겠느냐?”라고 하셨을 때입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선생님을 두고 저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힘든 자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나에게 와서 쉬어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마라.
아버지께서는 그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함께 하는 것, 말씀과 표징, 그리고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께 흠뻑 빠져서 제자가 된 바오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다인도, 할례 받은 이도 할례 받지 않은 이도, 야만인도, 스키티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성직자들이, 수도자들이, 교우들이 예수님께 흠뻑 빠져서 산다면 사제성소는 늘어날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아이가 조금이라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가 있습니다.
이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기에 절대 넘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하고는 이를 위해 온 힘을 기울입니다.
아이가 일어나 앞으로 한 발짝 가려고 할 때마다 부모는 바로 아이를 안아 올렸습니다.
혹시 넘어져서 다치거나 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이는 걷는 법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아이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실패를 겪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래서 넘어져도 바로 일어나고, 아무렇게나 낙서하면서 글을 배우고, 바닥을 엉망으로 만들면서 식사 도구를 잘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패는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합니다.
이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몸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실패를 두려워하며 실패를 통한 성장보다 제자리 지키기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편하고 쉬운 것만을 추구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무조건 기쁨과 행복의 삶일까요?
주님께서는 무조건 좋은 것만을 주셨을까요?
우리를 위해 실패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왜 잊어버릴까요?
실패를 주셨다고 해서, 고통과 시련을 주셨다고 해서 주님을 떠나겠다고 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 될 수밖에 없으며 행복이 아닌 불행을 선택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어떤 실패에도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행복과 네 가지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우선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을 향해 “행복하여라.”라고 선언하십니다.
솔직히 그리 행복해 보이질 않을 것입니다.
그에 반해 우리 눈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향해서는 “불행하여라.”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들은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를 향해 좋게 말하는 것을 듣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정반대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을 통해, 또 실패를 통해서 성장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왜 우리의 시선과 다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행복 선언의 주인공들은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불행 선언의 주인공들은 무엇이든 채워져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굳이 없어도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한 사람이며, 그 반대는 불행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까? 주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고통과 시련,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만이 행복 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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