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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올리기 전에..
참고로 전 영어가 안 되는고로 이 글이 영문을 번역한 글이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ㅠ.ㅠ;
≪ 존(John) ≫
신의 은총에 연원한 잉글랜드의 국왕이자, 아일랜드의 영주이며,
노르망디와 아키텐의 공작, 앙주의 백작인 존
- 마그나 카르타 첫 단락 中
⑵ 빛과 그림자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분명 헨리의 치세는 복된 영광이 이어졌던 시대였으나 그의 치세 막바지에 이르러 점차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가족들간의 추악한 내전으로 쌓여가던 국력과 왕을 향한 존경심이 비어가기 시작하더니 끝내 서로가 서로를 배신하고 상처를 주어 죽음에 이르게 만들기 이르렀다. 헨리가 평생에 가장 걱정했던 것이 바로 자신의 아들들을 어떻게 달래느냐였으나, 그의 몸 속에서 끓어오르는 권력욕을 억누르지 못하고 이에 정치적으로 미숙한 자식들에 대한 걱정이 겹쳐 끝내 권세를 내놓지 못했던 탓에 결국 결과는 비참했다.
헨리의 치세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시점은 1170년 그 유명한 토머스 베켓(Thomas Becket)의 살인 사건 이후였다. 토머스 베켓은 헨리 2세가 자신의 재위 초반기에 가장 신임하고 가까이 두었던 측근이었다. 헨리는 젊었을 적 꽤나 자유분방하여 말에 탄 채 자신의 비서였던 토머스 베켓의 홀에 들어가 저녁을 함께 하기도 하였으며(당시 헨리의 별명은 짧은 외투를 즐겨입은 스타일 덕분에 커트맨틀curtmantle이었다), 그의 재능을 믿고 1157년 웨일즈를 정벌할 때도 그에게 군공을 세울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 캔터베리의 대주교, 토머스 베켓 ≫
1162년 마침내 캔터베리 대주교에 토머스 베켓이 임명되었을 때, 훗날의 관계를 생각하면 완전히 반대가 된 상황이 나타났다. 헨리 2세는 자신의 신임하는 신하를 위해 이 임명을 강행했지만 그를 떠받들 교회의 인사들은 그가 대주교에 임명된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베켓은 1155년 이래 대법관을 역임한 어디까지나 '세속의 사람' 이었고 낭비벽이 심했으며, 웨일즈 정벌 등 곳곳의 전쟁에 참여한 경력도 있었고, 1157년 전쟁 당시 손금 보는 점쟁이에게 자신의 운수를 점치는 등 그의 신앙까지도 의심되었다.
그러나 베켓은 대주교에 임명되자마자 이 모든 평판을 완전히 뒤엎었다. 그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교회의 강경개혁론자인 그레고리안(Gregorian)임을 사방에 천명했다. 그는 세속의 일을 처리할 때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일에도 능숙하였으며 처음부터 왕과 강한 마찰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직무를 새로 시작하자마자 왕의 동생이 가까운 부유한 친척과 결혼하려는 것을 제지하려고 노력했다. 당연히 왕과의 관계는 크게 악화된 반면 교회로부터는 진정한 대주교라는 추앙을 받았다.
배신감을 느낀 헨리가 할 행동은 안 봐도 뻔했다. 그는 심약한 사람이었고 화를 잘 억눌렀으나 그것이 폭발하면 매우 위험했다. 마침내 헨리가 중죄를 저지른 성직자를 교회법으로 재판받지 못하게 하겠다고 강력히 주장했을 때마저 베켓이 더욱 강력히 반발하자(클래런던 헌장), 양자간의 끈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베켓은 이제 왕실로 소환되어 날조된 기소에 형식적으로 답변하고 완전히 내쳐질 터였다. 왕의 음모를 눈치챈 베켓은 결국 1164년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교황에게 호소하여 그 도움을 받았다.
이런 상태가 5년이 넘게 유지되자 헨리로써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교회와의 어정쩡한 관계는 그 자신은 물론이고 아들 헨리의 승계에도 장차 위험이 될 터였다. 결국 그는 타협을 선택했다. 나름의 양보 끝에 베켓은 잉글랜드의 운집한 군중들이 울리는 환호성을 받으며 귀국했다. 헨리의 심사는 편치 못했고 늘상 그렇듯 혼자 투덜거리며 화증을 부렸다. 이 장면을 지켜본 윌리엄 드 트레이시, 레지널드 피츠우르스, 휴 드 모빌, 리처드 르 브레, 합쳐 총 네 명의 기사는 마침내 칼을 꺼내들고 말에 올라타 베켓의 관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운명의 1179년 12월 29일 밤, 점심식사를 마친 네 명의 기사들이 베켓의 침실로 쳐들어갔을 때 베켓은 여태까지의 사태에 왕에 대한 애정이 떨어져서인지 불안감을 느껴서인지 기사들을 왕이 보낸 사람으로 인식하면서도 일어서서 환영하지 않았다. 기사들이 한꺼번에 베켓을 두고 윽박을 지르다가 관저 밖으로 나가 무기를 빼어들고 베켓을 죽이려 달려들자 위험을 느낀 그는 지지자들과 함께 성당까지 도망쳤으나 그들은 그 곳까지 쫓아와 미처 빗장을 걸어잠그지 못한 성당 안까지 난입했다.
"반역자여, 썩 나와라!"
"여기 있소. 난 반역자가 아니라 주를 섬기는 신부올시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양 쪽 손에 검과 도끼를 든 기사들이 베켓을 체포하려 들자 베켓은 맹렬히 저항했다. 그는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레지널드가 베켓을 체포하려다 실패하자 화증이 난 기사들은 마침내 베켓의 목을 내리쳤다. 그리고 관저로 달려가서는 대주교의 물건들을 약탈하고 '반란의 증거물' 들을 샅샅이 뒤졌다. 이 끔찍하고 잔인한 행위에 속세의 백성들이나 교회의 사람들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 네 명의 기사들에게 살해당하는 토머스 베켓 ≫
"이 불온한 신부(토머스 베켓)로부터 짐을 구해줄 자 하나 없소?!"
- 영화 '겨울의 사자' 에서 묘사된 헨리 2세의 분노에 찬 외침
이 살인 사건은 영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심히 유감스런 사건이었고, 그 당시에도 모든 기독교계에 경종을 울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베켓의 무덤은 잉글랜드의 가장 유명한 성지가 되었고 매년 몇 천이 넘는 순례자들이 이 곳을 방문했다. 헨리 2세는 자신이 명해서 일을 벌인 것은 아니었지만(적어도 드러난 점들로만 보았을 때), 베켓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
베켓 살인 사건이 헨리의 정치적인 명예를 실추시키고 그의 위상을 깎아내리던 바로 이런 상황에서 헨리가 이번엔 부인과 아들들까지 참가한 대규모 반란을 맞았으니 그의 심적인 고통이나 어려운 처지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었다. 1173년 4월 권력의 분점을 도통 허용하지 않는 아버지의 아래에서 상심한 젊은 왕 헨리가 아버지가 존을 편애하여 자신의 동생이기도 한 제프리에게 불이익을 주려드는 것에 분노해 칼을 빼들었을 때만 해도 헨리는 자신의 강력한 파워로 아들을 손쉽게 진압할 수 있었지만 상황은 해결되기는 커녕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헨리에게 불리했던 점은 프랑스 남부에서는 자신 못지 않은 그만의 파워를 자랑하는 엘레오노르가 자신의 장남의 편을 들었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장남 헨리가 이끄는 잉글랜드 외에도, 차남인 리처드의 아키텐과, 그 동생인 제프리의 브르타뉴가 반란에 가담하니 헨리의 영토 대부분이 적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국경에서는 '사자왕' 스코틀랜드의 윌리엄과 엘레오노르의 전 남편인 루이 7세가 그의 목을 졸라왔다. 이제 그가 힘들여 구축했던 제국의 붕괴가 머지 않아보였다.
≪ 신앙심이 깊었던 프랑스의 루이 7세 ≫
그나마 이 추악한 사태를 지켜보는 헨리 2세의 팬들이 유일하게 기뻐할 점이 있었다면, 이로부터 10년도 훨씬 지난 1189년의 헨리와 이 때의 헨리는 달랐다는 점이다. 그 때의 헨리는 늘그막에 모든 기력을 잃고 지쳐있을 때였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헨리는 정력적이었고 자신의 제국이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처음으로 충성을 맹세받았던 노르망디 뿐이었지만, 곧 브르타뉴까지 평정하고 이 일대를 바탕으로 해서 점차적으로 자신의 옛 영토들을 회복해가기 시작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군주는 지방의 통치를 확실하게 하지 못하던 상황이었으므로 루이 7세는 별 위협이 되지 못했지만 역시 문제는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였다. 다행히 그의 부하들이 남장을 하고 있던 엘레오노르를 붙잡는데 성공하면서 프랑스 남부에서 시간을 질질 끌 상황을 막아주었다. 그 뒤 엘레오노르는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아들 리처드가 집권하기 이전까지 15년 간이나 사실상 감금된 상태로 시간을 허비해야했다.
이제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를 평정해야할 차례였는데, 헨리에게는 먼저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두 가지 있어서 이것이 힘든 상황이었다. 첫째로 기본적으로 거두는 세금에 엄청나게 넓은 왕실에서 지정한 '삼림' 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에 대해 이뤄진 삼림재판과 소위 '병역면제세' 를 무기로 법으로 분명히 명시되지 않은 방법을 통해 각종 세금을 합쳐 걷다보니 국고는 풍요로워졌으나 봉신들과 백성들의 마음이 상당히 돌아선 것이었고, 둘째로 내전 기간 동안 어느덧 성인의 경지에까지 오른 베켓 문제로 인한 교회의 질시였다. 이 점에 대해서도 헨리는 발빠르게 움직였다.
첫번째 문제야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도 않았고 이 점에 대해선 반란을 일으킨 아들들도 같은 상황이었지만 두 번째 문제는 헨리 자신도 후회하고 빨리 해결하고픈 사안이었다. 1174년 잉글랜드로 건너가 전쟁이 계속되던 상황을 평정하기 위해 힘쓰던 헨리는 7월 12일, 마침내 녹색 튜닉을 입은 차림으로 캔터베리 성당을 방문했다.
그는 성당에 도착하자 조용히 망토를 벗고 성 토머스(토머스 베켓)의 무덤에 난 구멍 중 하나에 머리와 어깨를 밀어넣은 채 고위 성직자들의 다섯 번의 채찍질과 여든 명의 수도사들이 각기 3회씩, 즉 240회나 내리친 채찍을 맞은 후 바닥에서 밤새도록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며 자신의 속죄를 애타게 찾았다. 비록 그가 회개의 고행을 위해 입는 헤어셔츠를 입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어쨌든 속죄를 위한 값을 다 치룬 셈이었다.
그런 그를 하늘이 도왔던 것일까. 그 다음 날 아닉의 전투(battle of Alnwick)에서, 대부분의 군대가 없을 때를 틈탄 헨리 2세의 군대의 반격에 북부에서 '초토화 작전' 으로 헨리 2세를 골치 아프게 했던 사자왕 윌리엄이 사로잡힘으로써 스코틀랜드 군은 완전히 지리멸렬했다. 아들들은 이 때부터 칼을 버리고 그에게 항복하여 용서를 구걸했고 끝까지 싸우던 차남 리처드도 끝내 항복하면서 18개월만에 치열했던 내전은 종결되었다.
만약 이 때 헨리가 좀 더 강력하게 아들들을 옭아맸거나 아예 의절해버렸다면 헨리가 말년에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헨리는 그렇게 가족들이 산산히 해체되어버리는 사태를 바라지 않았고 결국 이 문제를 두루뭉술하게 끝내버렸다. 아니, 오히려 가장 적극적으로 반란에 참가했던 리처드에게 푸아투 백작의 자리를 내줌으로써 오히려 그 권력을 공고히해주기까지 했다.
어쨌든 이리하여 표면적인 반란이 야기한 문제는 거의 다 해결되었다. 헨리의 국제적인 위상 역시 이전과 변화가 없었다. 영국의 많은 점이 이제 1173년 이전과는 상당히 많이 달라졌지만 헨리의 행보는 여전히 자신만만했고 영국 제도와 프랑스 남부를 계속해서 통치해나갔다. 그는 1176년 시칠리아의 사절들과 만나 딸 조안을 시칠리아로 시집보내었고 1177년 카스티야와 나바르의 국경 분쟁 문제를 대자문회를 통해 해결하였다. 매슈 파리는 이에 대해 '아서 왕의 위대한 날들이 다시 도래한 것 같았다' 고 노래했다.
이 뿐이 아니라 그는 독일의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하인리히 데스 뢰벤, 즉 사자공작 하인리히와의 공조는 익히 알려진 바로 그가 1176년 바르바로사의 협조 요청을 거부한 괘씸죄로 겔른하우젠의 제국의회에서 작센 공작령을 몰수당하고 1182년 마침내 추방당하기에 이르렀을 때 그를 받아들여준 사람은 결국 '인자로운' 장인 헨리 2세였다. 그는 봉토 해지 판결 집행 기간의 3년 동안 영국에 머무르며 장인의 도움을 받아 살아갔으며 이 기간 동안 더욱 잉글랜드의 왕가, 특히 리처드와 끈끈한 인연을 맺었다.
그는 결국 죽을 때까지 제국으로부터 봉토를 받지는 못했으나 여전히 뤼네부르크와 브라운슈바이크에 자신만의 영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1189년 추방당했다가 바르바로사 사후에 다시 귀국하여 1195년 죽을 때까지 자신의 옛 영지들을 되찾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의 노력은 사후 3년만인 1198년 아들 오토 4세(브라운슈바이크의 오토)가 도이치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빛을 보게 되지만 이는 훗날의 일이었다.
≪ 브라운슈바이크의 사자 입상 ≫
- 사자공작의 궁전 당크바르데로데의 요새 구역에 세워진 중세 최초로 노천에 세워진 대형 조각물
헨리 2세의 치세에는 딱히 독일의 정세에 깊숙이 개입한 예가 없으나 그가 구축한 벨펜 가문과의 공조는 많은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격화되던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에 프랑스의 배후에 영국의 은혜를 입었던 벨펜 가문의 황제인 오토 4세가 즉위한 상황이었다는 것은 그만큼 프랑스와 영국 양측이 서로 독일의 문제에 관심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결국 존과 오토 4세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연합군을 구성해 마침내 프랑스와 결정적인 한 판 승부를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부빈의 전투이다.
(부빈 전투는 아마 이번 달 말에나 제 글에서 소개할 수 있을거 같네요.. 뭐 익히 유명한 전투긴 합니다만;;)
다시 이야기를 영국 내부의 사안으로 돌려보자. 헨리 2세가 70년대 초반 일어났던 문제들을 좀 처리하나 싶을 즈음 또 다시 반란이 터진 것은 1179년이었다. 이 문제는 헨리 자신의 실책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영지에서 광포한 통치를 펼치던(...) 아들 리처드 때문이었다. 리처드에 대항하던 반군들은 리처드의 형제인 젊은 왕 헨리와 제프리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결국 이번엔 형제들간에 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헨리 2세가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리처드는 샤랭트 계곡의 텔르부르성을 계략을 통해 점거에 성공함으로써 자신의 군재(軍材)를 몸소 보였고, 결국 리처드의 봉신들이 다시 충성을 맹세하면서 리처드 영지 내의 반란은 싱겁게 끝이 났다.
하지만 이 반란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보다 리처드와 그 형제들이 갈라서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점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헨리는 결국 가장 맞이하고 싶지 않던 사태를 맞게 된 셈이다. 게다가, 이 반란 이후 자신의 파워와 능력에 다시 자신감을 얻은 리처드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는 앙굴렘의 백령 계승 분쟁에 개입하고 프랑스의 새로운 국왕 필리프 2세와 힘을 합한 반란군들과 열심히 전쟁을 벌였다. 곳곳에서 리처드의 지휘하에 벌어졌던 강간과 약탈들은 영국 전체의 명성을 크게 훼손시켰다. 게다가 리처드 자신도 포로들을 데리고 '회포를 푼 뒤' 병사들에게 자유민들의 아내와 딸들을 넘겨주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이 분쟁은 1181년부터 이듬해까지 이어지며 리처드에게 유리하게 마무리되었으나 형제들간의 관계는 별로 진전되지 못했다. 1183년 젊은 왕 헨리가 또 다시 아버지와 동생 리처드에게 칼을 빼들었을 때 헨리 2세는 계속되는 아들들의 일탈 행위에 지친지 오래였다. 젊은 왕 헨리는 리처드와 싸우기 위해 동생 브르타뉴 공작 제프리를 끌어들였고 또 한 번 리처드의 봉신들이 자신들의 주군을 버렸다.
이처럼 아키텐에서의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일 즈음에 젊은 왕 헨리가 급사한 것은 리처드에게 호기였다. 비록 아버지 헨리 2세는 큰 상심에 빠졌으나 그의 형제들은 그가 죽거나 말거나인 듯했다. 그가 죽었지만 여전히 왕위계승 분쟁은 이제 장성한 막내 존까지 가세하면서 계속 정체를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상 떼르Sans Terre' 존은 아일랜드(그것도 실질적 통치는 못하는)만을 영지로 가지고 있어서 여러모로 형들과의 내전에 불리한 상황이었으나 아버지 헨리 2세의 편애는 그에게 큰 힘이 되는 것이었다. 1183년 아들 리처드의 약혼자로써 헨리 2세가 구금하고 있던 앨리스와 존의 결혼이 계획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도 헨리 2세의 존에 대한 애착이 그 이유였다.
헨리 자신이 앨리스를 취했다는 게 거의 정설로 굳어지던 상황에서(엘레오노르가 감금된 이후 헨리는 많은 여인을 곁에 두었는데 특히 애첩 로저먼드 클리퍼드와 오랜 기간 함께 지냈고, 옥스퍼드셔의 와일드스톡 궁전에서 그녀와 거의 은둔하다시피 말년을 보냈다), 이런 소문은 제국의 분열을 부채질했다. 존이 왕좌를 둔 내전에서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자 리처드와 제프리가 급해진 것이다.
쉬엄쉬엄 가족들간의 분쟁이 계속되던 1186년 브르타뉴의 제프리가 파리의 마상시합 도중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분쟁은 좀 더 간단해져, 이제는 리처드의 세력과 이에 반하는 군주 헨리 2세와 그 사랑을 받는 존의 연합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구도로 정립이 되었다. 아키텐에선 젊은 왕 헨리 대신에 존의 군대가 리처드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기력을 잃은 헨리 2세는 만사가 귀찮은 탓에 1173년에 보였던 행적처럼 스스로 움직이려하지 않았던 반면 새로 떠오르던 리처드는 정체되는 내전을 해결할 묘수로 1187년 이전의 적수였던 프랑스의 군주 필리프와 손을 잡는 도박을 결행했다. 필리프는 루이 7세의 세 번째 부인 아델르 드 샹파뉴(Adele de champagne)의 아들로써 앞으로 영국의 군주들에게 최고의 골칫거리이자 무서운 적수가 될 터였다. 그는 이 때까지는 그 발톱을 다 드러내지는 않은 채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지만 이제 리처드에게 신하의 예를 받고 본격적으로 내전에 참가했다.
헨리 2세는 놀라운 통찰력(그와 리처드, 심지어 막내 존도 모두 통찰력이 뛰어난 군주들이었다)을 보이며 이 연합이 자신과 존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은 물론이요 영국 전체에 큰 화를 불러올 것을 짐작하였으나 여전히 몸소 움직일 의향은 없어보였다. 1188년 십자군 문제(다음 글에서 자세히;)로 어느 정도 내전이 '쉬는 기간' 을 맞이하는 동안 헨리 2세는 아키텐을 막내인 존에게 양여하려는 행동을 보였다.
그가 십자군에 참여하겠다고 해놓고도 이런 분쟁거리를 만든 이유는 불분명하다. 단지 노망이었을지도 모르고, 자신에게 죽음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끼며 빨리 사랑하는 막내에게 발판을 마련해주고픈 마음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이런 헨리의 행동은 리처드를 또 한 번 자극하였으며, 필리프는 몸소 나서서 1189년 여름 앙주를 침공해 헨리의 목을 조여왔다. 7월 4일, 불패의 군주였던 헨리가 마침내 발랑에서 패배했고 리처드는 공식적인 헨리의 후계자가 되었다. 막내 존까지 리처드의 편이 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뒤 헨리 2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리처드에게 패한 후 오래 버티지 못했다. 불과 이틀 뒤(7월 6일), 헨리는 사망했다. 호브덴의 로저는 리처드가 헨리의 시체에 다가오자 시체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고 전한다. 마치 자신의 살인자를 알아본 것처럼.. 독살설이 있지만 떡사마의 저서처럼 이는 근거없는 이야기로, 대체적으로는 존의 배신과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지 못해 기존의 병환에 울화병이 겹쳐 죽었다는게 정설인 것 같다. 그 해 9월 3일 리처드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헨리 2세의 모든 권리를 이양받아 왕위를 대관했다.
헨리 2세는 재위 기간 동안 참으로 적이 많았다. 웨일스와 아일랜드의 군소 세력의 군주들은 물론이고 스코틀랜드의 왕도 그에게 마음까지 복종하진 않았으며 내부에서도 토머스 베켓과 그를 따르는 교회의 사람들이 그의 정책에 사사건건 태클을 걸었고 교황들도 그를 재위 초반기에나 좋아했을 뿐 베켓 살인 사건 이후로는 왕과의 관계는 상당히 소원해졌다. 게다가 형식상 그의 주군인 프랑스 왕까지도 그를 견제했다.
하지만 결국 그를 무너뜨린 것은 가족들이었다. 가족들은 그의 모든 꿈을 파탄내고 그를 배신했다. 그는 절망 속에 죽어갔고 그의 유산은 상당한 손해를 남긴 채 불효자인 리처드에게 넘어갔다. 그가 시농에서 죽은 뒤 정확히 15년 후 그의 사랑'했던' 부인도 죽었다. 8명의 자녀를 합심하여(?) 낳았고, 말년에는 서로 권력을 두고 아웅다웅했던 부부였지만 죽어서는 같은 자리에 있게 되었다.
그것이 헨리가 죽은 후 '배신자' 막내 존이 그에게 보내준 유일한 선물이었다.
헨리는 그녀와 다시 자리를 함께 하게 된 것이 위안이 되었을까?
첫댓글 이부분은 미가 번역한 부분과 많이 겹치구만 ㅋㅋ 너굴공 기말고사도 끝났겠고, 고딩되기전까지 글을 쓸려 하는거3?
할 일도 없는지라.. 앨런비님의 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답니다. 역시나 통치보다 약탈에 더 세심했던 '사자심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