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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민수기의 말씀 21,4ㄴ-9
4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5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6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8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3,13-17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그렇습니다.
이 큰일을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셨습니다.
사실 ‘십자가의 형벌’은 손과 발이 못박인 채 철저히 무력해진 참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비참함의 끝이요, 노예 죄수에게나 행해지는 참으로 냉혹하기 짝이 없는 철저하게 버림받음이요, 그야말로 완전한 패배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을 자다’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갈라 3,13)
그래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1코린 1,23 참조).
그러나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오늘은 ‘십자가’에서 세 가지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는 ‘죄인임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할 때라야 십자가는 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십자가를 피하고 도피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용서해야 할 존재’이기에 앞서, ‘용서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나아가서는 죄인이라서가 아니라 ‘죄 없음에도 죄를 뒤집어쓸 줄을 아는 일’입니다.
이해받지 못하고 오해받고 곡해 받고 누명쓰는 일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둘째는 십자가는 ‘죽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입니다.
곧 죽이는 일이 아니라 죽음 당하는 일이요,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일이요, 앞서는 일이 아니라 물러나는 일입니다.
승리하는 일이 아니라 패배당하는 일이요,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변두리로 밀려나는 일입니다.
동시에, 나아가는 틀려서가 아니라 옳으면서도 지는 일이요, 힘 있으면서도 눌리는 일입니다.
셋째는 ‘타인을 위하여 건네주는 곳’입니다.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가 잘 되기를 바라며 하는 것이요, 그가 구원되기를 희망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일이요,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승리요, 구원이 됩니다.
곧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죽이고 진정으로 참 생명으로 살아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무력함이지만, 구원을 이루는 전능함이 됩니다.
낮아짐으로써 진정 높아지며, 패배이지만 사랑의 승리가 됩니다.
지면서도 쳐부수며, 승리의 깃발이 되고, 영광의 월계관이 됩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십자가는 우리 삶의 의미가 되었고, 역사의 역전이며 혁명이요, 하느님 사랑의 표상이며, 완전한 승리의 표상이요, 현양이며 영광이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 사랑이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갈라 6,14)
오늘 십자가를 드높여 이 고귀한 그리스도의 구원과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며,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큰 고통과 긴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의 독서 민수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제가 히브리어를 모르기에 원어의 뜻을 직접 해석할 수 없어 다른 번역들, 공동 번역과 개신교 성서와 영어 번역을 찾아봤는데 이러합니다.
“길을 가는 동안 백성들은 참지 못하고”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with their patience worn out by the journey,”
이 네 번역을 다 감안할 때 백성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무척 지치고 인내가 한계에 도달해 마음 안에 조급함과 불만이 차올라 마침내 불평이 입에서 터져 나올 지경이 된 것 같습니다.
이런 그들을 보며 바로 떠오른 말이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큰 고통과 긴 고통이 떠올랐고, 큰 고통과 긴 고통을 나라고 잘 견딜 수 있을까 이런 성찰을 하게 되었고, 큰 고통과 긴 고통을 견디고 이기는 사랑이 내게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제는 80이 넘으신 노부부의 병문안을 갔습니다.
남편이 치매에 매주 3번 신장 투석을 해오셨는데 이번에 자매님까지 폐암을 앓게 되신 분들이었지요.
그런데도 자매님께서는 남편을 요양 병원에 보내지 않고 손수 돌보시는데, 너무도 정성껏 그리고 깔끔하게 돌보시는 거였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걱정되어 위로의 말씀을 드리려고 "많이 힘드시지요." 하고 위로를 건네니 자매님께서 견딜 만하다고 너무도 훌륭하게 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견딜 만하다!'
힘들어 죽을 지경이라고 하시지 않고 견딜 만하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당신의 항암치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보면 저와 같은 사람에게는 견딜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달리 그 큰 고통을 그분이 견디실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큰 고통보다 더 큰 사랑이 그분에게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저는 큰 고통과 더불어 긴 고통에 관해서도 얘기하려고 합니다
제 생각에 긴 고통을 견뎌낸 분들이 큰 고통을 견뎌낸 분들보다 위대합니다.
저는 태어나서부터 장애를 지닌 분이나 오래 고통을 겪은 분들을 볼 때마다 한 편으로는 마음이 아프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그 긴 고통을 견뎌내심에 머리가 절로 숙여집니다.
이분들 중에는 행복이란 것은 생각지도 않고 사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분들 앞에서 저는 제가 행복한 것이 미안하고 죄스럽습니다.
사실 행복은 사치이고 사랑을 얘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만 기도할 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이분들에게 위로가 되고 더 나아가 힘이 되기를 말입니다.
그리고 그저 견디는 것에서 더 나아가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고통에서 승리하시게 되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고통에서 승리하고 죽음의 고통까지 승리하여 부활에 이르게 하는 사랑, 이런 주님의 사랑을 일컬어 Passio 또는 Passion이라고 하는데, 이 Passio의 사랑이 이분들의 긴 고통의 열매로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큰 고통과 긴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주님 Passio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의 십자가>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민수 21,8-9)
쳐다본 사람과 ‘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지 않은 사람과의 운명은 분명히 다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었으면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4),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고 하셨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니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았듯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가 아니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라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곳곳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고 또 몸에도 지니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일깨우고 십자가를 지겠다는 고백을 못한다면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십자가가 점점 더 화려해지고 상품화되는 현실에서 나를 정화시키고 성숙시키는 은총의 십자가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승리를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에 앞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십자가는 내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그분은 분명히 나를 부활시켜줄 것입니다.”
(성녀 벨라뎃다)
힘겹고 고달픈 십자가의 길이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미리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많은 경우 ‘왜 나만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 고 하소연합니다.
왜 나는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고 투덜댑니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 속에서 십자가는 더 무거워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는 언제나 첫발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가 됩니다.
첫 발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성 요한 비안네)
사람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는 다르지만, 모두가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난이 십자가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큰 부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녀, 남편, 아내, 동료가, 공동체의 일원, 장상이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격, 언어의 습관, 주변의 환경이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다듬고, 겸손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마침내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게 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게 해주십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피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십자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어디서 오는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하는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성 요한 비안네)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교과서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구원의 도구임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에 사랑의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특별히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에는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구리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았듯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십자가!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이것이 빠진 희생은 오염된 피만 배출한다>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구약에서 십자가의 상징은 물론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매달기 위해 만든 장대입니다.
뱀에 물린 사람들은 구리뱀을 보면 나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리뱀이 상징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만 보면 낫게 된다는 뜻일까요?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우리도 같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누군가를 낫게 하려고 나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닮을 수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고 맙니다.
하늘로 들어가는 문은 십자가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누군가의 죄를 씻어주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십자가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노고가 누군가의 죄를 씻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십자가가 되려면 하나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미국에서 디디 블랜차드와 집시 로즈 블랜차드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엄마 디디는 딸 집시를 포함해 모든 사람에게 백혈병, 근이영양증, 정신 장애 등 다양한 건강 문제와 장애가 있다고 믿도록 속였습니다.
디디는 딸의 질병과 장애를 홍보하여 기부, 여행 및 기타 혜택을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거짓말에 버티다 못한 집시는 온라인에서 만난 남자친구 니콜라스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 살해를 계획하고 실행하면서 상황은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렀습니다.
집시는 어머니의 속임수와 자신이 겪었던 학대의 정도를 깨닫게 되었고, 어머니를 죽이는 것만이 그녀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느꼈습니다.
어쩌면 디디는 집시를 키우기 위해 자신은 최선을 다한다고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집시를 자신의 십자가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피 흘림은 깨끗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기의 의지로 피를 흘렸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영국에서는 리사 헤이든과 존슨의 사례가 있습니다.
리사도 존슨이 음식 알레르기, 뇌성마비, 낭포성 섬유증 등 다양한 건강 문제를 앓고 있으며 휠체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헤이든은 자기 아들이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부터 수년에 걸쳐 약 325번의 불필요한 치료와 시술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의료 전문가들을 속여 아들이 중병에 걸렸다고 믿게 했고, 이에 따라 영양 공급 튜브 장착을 포함한 일련의 불필요한 개입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녀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아들을 대신하여 수많은 상과 선물, 재정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왕족과 다른 고위 인사들을 만났고, 기부금으로 휠체어 이용 가능 차량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거짓말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어머니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초콜릿 바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한 보건 방문자가 알아차리면서 이러한 속임수가 드러났습니다.
이 관찰에 따라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리사는 다른 많은 형태의 의학적 학대와 속임수 중에서도 알레르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음식 공급 튜브를 통해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그녀는 집에서 의료기기를 조작해 결과를 위조하고 의사들에게 아들이 중병에 걸렸다고 설득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사건은 사회와 의료인의 동정과 지원을 가장하여 아동에게 가할 수 있는 심각한 학대의 극명한 예입니다.
디디나 리사 모두 아이를 키우는 일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나름대로 노력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피 흘림은 오히려 아이들을 안 좋게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을 씻어줄 수 없는 더러운 피였습니다.
그 이유는 엄마들 자신이 아이들을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 지심의 이유가 아버지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아버지 때문에 흘리는 피가 아니면 자녀를 위해 흘리는 어머니의 피는 오염됩니다.
자아가 죽어서 흘리는 피가 아니라 자아가 커지기 위해 나를 고생시켜 흘리는 피입니다.
자아를 죽이는 창은 오로지 ‘순종’밖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아이를 잘 키워낸 부모는 분명 소명을 가지고 키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피 만이 자녀를 깨끗이 씻어줄 수 있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생각해 봅시다.
많은 군인이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희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라이언에게 가치 있게 살라며 죽어갑니다.
라이언은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평생 열심히 삽니다.
만약 그들이 나라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라이언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적진 깊숙이 뛰어들 수 있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나의 피가 누군가를 변화시키려면 나의 피는 그를 사랑하는 이에게 순종하여 내어주는 피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 스스로 흘리는 피가 됩니다.
사실 그것은 자아의 피가 아닙니다.
십자가에는 뱀이 매달려야 합니다.
자아가 매달려야 합니다.
자아는 자기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흘리는 피는 반드시 보상을 요구합니다.
상대를 이용하기 위해 흘리는 피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피 흘림은 누군가의 죄를 사해줄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명령에 순종하여 흘리는 피만이 깨끗하여 그 사람의 죄를 씻어줄 수 있습니다.
남편 때문에 자녀를 사랑해야 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하며, 사제도 주님께서 파견하셨기 때문에 신자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피조물의 한계상 온전한 사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십자가가 다가올 때마다 즉시 십자가상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십자가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십자가라는 것, 생각할수록 묘하고 신비스런 그 무엇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존재 자체가 무거운 십자가의 연속인 분들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삶 자체가 힘겨운 십자가인 분들도 계십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치 성냥개비 두개를 교차시켜 만든 듯한 가벼운 십자가, 잠자리 날개처럼 초경량급 십자가가 살짝 주어졌음에도, 세상 끝난 것처럼 난리를 치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감당하기 벅찬 천근만근 무게의 십자가를 매일 지고가면서도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기쁘게 살아갑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십자가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산고를 겪고 있는 엄마는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하늘을 찌르는 것처럼 극심하지만, 잠시 후 태어날 새 생명을 생각하며 기꺼이 견뎌냅니다.
선두에서 단독 질주 중인 마라톤 대회 우승 후보자는 40킬로 미터 지점쯤에서 느끼는 육체적인 고통이 엄청납니다.
그러나 잠시 후 결승선에서 누리게 될 영예와 성취감을 생각하며 기쁘게 달려갑니다.
우리 모두 불완전한 인간 존재로서 불완전한 이 세상 안에 살아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다양한 무게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십자가 하나를 잘 극복했다 생각하면, 어느새 또 다른 십자가가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의 어깨 위에는 별의별 유형의 십자가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얹혀 있어서 제대로 걸어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평생의 과제는 숙명과도 같은 십자가를 평생 친구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겁다, 괴롭다, 여기며 도피하지 말고, 이왕 지고 갈 십자가 큰마음으로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 한 가지!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인간적인 눈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영적인 눈으로,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입니다.
결국 매일의 십자가에 대한 지속적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부단히 십자가의 신비를 묵상하는 일입니다.
세상 울적하고 괴로운 얼굴이 아니라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우리 가톨릭에서는 십자가를 절대로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성당에 오면 십자가를 말끔히 없애준다고 외치지도 않습니다.
대신 십자가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라고 강조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있는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를 지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바로 그 십자가에서 위로받게 하고 힘을 얻게 합니다.
오늘 우리의 작은 십자가들에 반드시 의미가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십자가가 다가올 때마다 즉시 예수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십자가를 잘 지고 갈 때, 십자가 그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부활의 영광을 끝까지 희망하며 그렇게 살아가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십자가는 이론이 아니라 삶이다>
1) 십자가는 이론이 아니라 ‘삶’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말로’ 아주 잘 설명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십자가를 생각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살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을 때부터 우리의 ‘십자가의 길’은 시작되었습니다.
충실한 신앙인의 신앙생활 자체가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어렵고 힘들 때도 있고, 편하고 쉬울 때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간에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생활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2) 십자가는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키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을 받으셨습니다(루카 23,26).
신앙생활은 공동체와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십자가의 길도 혼자서 고독하게 걸어가야 하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고, 수호천사가, 성모님이, 주보성인이,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3) 십자가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부활로 가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의 십자가도 생명을 얻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십자가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방법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부활, 구원, 생명입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십자가를 만날 수 있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정은 과정일 뿐입니다.
과정이 힘들다고 걸어가기를 포기해버리면, 처음부터 출발하지 않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겪고 나면,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1베드 5,7.10)
신앙인으로서 사는 것이 힘들더라도, 그것은 ‘잠시’ 겪는 고난일 뿐이며, ‘영원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라는 말씀은 14장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구리 뱀’을 언급하신 것은 모세가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백성들을 구하려고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 뱀이(민수 21,9) 당신의 십자가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들어 올려져야 한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은 악한 일이고 범죄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악에서도 선을 이루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라고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8)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신 말씀입니다.
십자가 수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라는 말씀은 요한 1서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요한 4,9-10)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오직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만을 바라신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곧 그 ‘응답’입니다.
무슨 거창한 신심 행위나 예물 봉헌 같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큰 기쁨이 되는 일이고, 하느님께도 큰 기쁨을 드리는 일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합시다” 십자가 예찬 - 한반도의 십자가>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십자가 경배시 사제와 회중이 주고 받는 아름다운 곡이 생각납니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가톨릭 교회의 전례가 참 고맙습니다.
9월부터의 가을은 수확의 계절임과 동시에 기도의 계절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로사리오 성월, 11월 위령성월에 이은 대림시기, 그러다보니 1년이 성큼 지난듯 합니다.
참으로 깨어 간절히 기도해야할 총체적 난국, 총체적 위기의 시대를 맞이한 한국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 참 반갑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기도 중 가장 짧으며 가장 좋은 기도가 <가톨릭 기도서> 맨처음에 나오는 성호경일 것입니다.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십자 성호를 그으며 바치는 성호경 얼마나 좋습니까?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게 되었고, 황제는 이를 기념하고자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곁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합니다.
그 뒤로 십자가 경배는 널리 전파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축일은 9월 14일로 고정됩니다.
오늘 역시 집무실에 들어오자 마자, 그리스도의 십자고상과 그 아래 태극기를 바라보며 성호경과 영광송 기도후 만세육창을 하고 성가처럼 애국가 1절을 부른후 하루를 시작했고 이어 쓰는 매일 묵상글 강론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참 절박한 기도입니다.
어제 모 일간지에서 미국 캔자스 대학 역사학과 교수이자 저명한 군사전략가인 에이드리언 루이스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공감했습니다.
“한국은 다극주의 강대국에 둘러쌓여 있다.
미국이 한쪽 편을 들라고 강요하더라도 이를 맹목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다.
기억할 것은 한국은 주권국이란 사실이다.
균형을 갖춘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하면 쉽지 않은 결정이라는 것을 안다.
자국의 안보를 동맹에 의존하는 것은 최근 세계 각국의 외교안보 전략 접근법이 아니다.
미국은 아프카니스탄에서 지켜준다고 약속하고선, 나중에 전황이 불리해지자 철수했다.
미래에 한국에서 미군 철군과 같은 상황이 오는 것을 완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에 모든 걸 의존하는 것은 온당치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미국을 온전히 믿지 마라.
심각한 실수가 될 수 있다.
미국과의 관계는 중요하다.
하지만 다른 문도 열어놓아야 한다.
초강대국이 개별 국가의 안보를 대리해주는 시대는 1950년대가 마지막이었다.
자국의 안보를 다른 나라에 맡길 수는 없다.
미국은 전쟁하는 나라다.
지난 200년간 역사에서 단 16년만 전쟁을 하지 않았다.
최대 무기 생산국이자 최대 무기 수출국이다.
미국의 연간 군사비는 중국, 러시아를 포함한 나머지 2-10위 군사비 합한 것보다 훨씬 많다.
미국에게 전쟁은 비즈니스이다.
미국 외교-국방 기조로 볼 때, 앞으로도 절대 평화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이래서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도우심뿐이 답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참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십자가 주님의 지혜와 보호 은총이 각별히 요청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궁극의 답은 기도뿐이요 고맙게도 계속되는 기도의 계절 가을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며 기도할 대상인 십자가의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분단된 한반도의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우리가 지고 가는 한반도의 무거운 십자가를 주님께서 함께 지고 가심이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느님과 모세에게 대들며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불신의 벌로 불뱀들에 물려 죽어가자 모세는 기도했고, 이어 그들은 모세가 만든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납니다.
기둥 위에 달린 구리 뱀이 상징하는 바, 우리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한결같이 일편단심 사랑하고 바라봐야 할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며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이 늘 삶의 중심에 모시고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은 답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삶의 좌표가, 삶의 이정표가 됩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십자가의 주님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공허하고 허무하겠는지요!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 십자가의 도상에서 우리의 영원한 인도자이자 도반이 되십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표지가 되고, 희망의 표지가 되고, 영적승리의 표지가 됩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다시 용기백배 힘을 내어 살게 됩니다.
절망은 사라지고 희망이 샘솟습니다.
백절불굴의 믿음도 십자가 예수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주님은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 하늘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니코데모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대로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내려 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은 바로 십자가의 주님을 믿음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임을 천명하십니다.
참으로 우리가 평생 사랑해야할 십자가의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대로 화해와 평화의 상징도 됩니다.
어제 저녁성무일도중 콜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 중 마지막 대목이 생각납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콜로 1,19-20)
이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절정의 표현이요 가톨릭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전 인류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시야를, 이해 지평을 하느님 수준으로 넓혀야 함이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행복이 선택이듯, 믿음도, 구원도 선택입니다.
날마다 십자가의 주님을 선택하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늘 사랑하고 선택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야 할 십자가의 예수님이십니다.
세상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있는, 믿음의 선택으로 누구나 갈 수 있는 구원의 문, 구원의 길,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바로 다음 복음 중의 복음이 더욱 십자가의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새삼 십자가의 예수님은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온 세상, 온 인류에 주신 구원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더불어 이 거룩한 “미사” 역시 온 세상,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성사임을 깨닫습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늘 바쳐도 늘 새롭게 느껴지는 제 좌우명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집트 탈출 이후 광야에서 벌어진 한 사건과 연결하여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설명하십니다.
높이 들어 올려진다는 것은 영광에 싸여 윗자리로 영전 받는 것과 다릅니다.
누군가의 폭압적인 손길에 의해 모두의 눈 앞에서 벌거벗긴 채 수치와 모욕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 섭리 안에서는, 처참히 매달린 누군가가 구원의 의지를 가지고 바라보는 이에게 생명을 선사합니다.
모세의 구리뱀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내주신 아버지의 목적은 세상의 구원입니다.
그만큼 아버지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지요.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세상이 외아드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예수님께는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세상의 죄를 속량하는 길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다인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인 십자가"(1코린 1,23 참조)를 기꺼이 선택하셨지요.
제1독서인 민수기 속 광야 일화에서 우리는 기도의 순수성을 배웁니다.
불편하고 힘들다고 하느님과 자신에게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인간적 분노나 실망감을 내비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보내신 징벌 앞에서 그들이 간청하자 별 생색도 원망도 없이 기도의 소명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기도를 즉각 들어주셨지요.
문득 '욥의 기도'가 떠오릅니다.
삶의 찬란했던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락에 떨어졌던 욥에게 와서, 짧고 현학적인 주장으로 도리어 욥을 괴롭혔던 세 친구를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 주님은 그 무례하고 무도한 친구들에게 "나의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간청하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어 너희의 어리석음대로 너희를 대하지 않겠다."(욥 42,8)고 하셨지요.
그리고 욥이 세 친구를 위해 기도드리자 주님은 욥의 운명을 되돌려 주십니다.
당신을 모함하고 음모를 꾸며 사형에 이르게 한 이들을 위해 바친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 역시 맥을 같이하지요(루카 23,34 참조).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모든 죄악과 패덕을 순순히 받아들고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가장 위대한 기도를 완성하셨지요.
예수님의 기도, 모세의 기도, 욥의 기도에서 자신을 적대하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올린 순수한 기도라는 공통점이 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십자가는 어찌보면 유다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걸림돌입니다.
또 다른 민족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어리석음입니다.
세상은 경쟁하고 따지고 소송하고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쪽으로 자꾸 치달아가는데, 배알도 자존심도 없는 사람처럼 들어 주고, 받아 주고, 토닥여 주다가, 나를 해하는 이를 위해 생명까지 다 내놓고 기도해 주니 말입니다.
그럴수록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 여기 있으니, 나만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불평하지 말고 따지지 말고 당신이 걸어온 길을 따르라고, 입이 댓발 나올 만큼 억울하고 지치면 그냥 멈춰서 당신을 바라보라고요.
무죄하신 하느님이 죽어 매달려 계신 십자가에 "네 무게를 얹고 잠시 쉬렴." 하십니다.
그렇게 주님과 십자가 길동무를 하면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더욱 깊어가고 두터워집니다.
네 고통인지 내 고통인지 모를만큼 서로의 고통에 민감해지고 또 그만큼 제 고통에 무뎌지면서, 둘은 더 깊은 일치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십자가는 그분과의 일치, 하나됨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자신의 십자가를 그분 십자가에 합하여 봉헌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내 십자가가 힘든 줄 아는 우리는 그만큼 남도 힘든 줄 알지요.
그러니 우리, 기도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거룩한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걸어갑시다.
서로 보이지는 않지만 말씀으로 연결된 우리기에, 서로의 순수한 기도가 분명 큰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함께 바라보고 있을 무수한 길벗들을 기억하고 힘을 냅시다.
동행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여행 중에 교우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운명처럼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저는 모태 신앙이기에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학문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신학교에서 신학과 성서를 배울 때였습니다.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사제가 된 후 몇 번의 좌절과 시련을 겪은 다음입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기도할 때, 길을 걸으며 묵주를 돌리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먹구름 뒤에는 밝은 태양이 있듯이 시련과 좌절이 지나가면 주님께서 그 시간에 함께 하셨음을 알았습니다.
배우자와 결혼하면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무교였지만 배우자의 신앙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는 배우자를 보내 주셨고, 배우자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예수님을 만났으니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한 자매는 홀로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편하고 어려움이 없을 때는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녔는데,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있게 되면서 예수님을 더욱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혼자 있는 것도 외롭지 않고, 낯선 타국에서의 생활도 두렵지 않다고 합니다.
문병란 시인은 ‘희망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맛 향기를 지닌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한 고비 지나면 구름 위 태양은 다시 뜨고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 길 멈추지 말라.
인생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시련과 좌절의 표상인 십자가는 신앙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첨탑에는 십자가가 있고, 성당의 제단 뒤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시면서 하느님께 이렇게 청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괴로웠지만 행복했던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셔야 할 일을 잘 아셨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전에는 치욕과 모욕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지고가심으로써 속죄와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을 외부에서 찾은 적이 많습니다.
‘성공, 명예, 업적, 능력’이 내가 해야 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정말 해야 할 일은 나의 깊은 내면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눔, 헌신,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하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알았고, 최선을 다했던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은 예배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렸습니다.
첨탑이 저리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드러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가장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나라로 손꼽히는 일본, 싱가포르, 한국, 독일, 영국도 마찬가지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콜롬비아 등을 비롯해서 국제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이 의외로 행복 지수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관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강력한 가족 유대감이나 지역 사회의 연대감 등 서로 지지하고 연결하는 관계가 사회 분위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행복감을 얻게 되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예를 들어, 덴마크인 중 93%는 사교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친구들과 교류하고, 다른 사람을 지지하고, 그들 자신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지받을 수 있는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유지하면서 행복 지수를 높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3년 동안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개인주의가 훨씬 더 커졌고, 동시에 행복도는 크게 내려갔습니다.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계속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관계를 끊는 데에만 노력을 쏟는다면 우리의 행복은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문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주님과의 관계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채워주시는 주님, 어렵고 힘든 것을 모두 치워주는 주님, 꼴 보기 싫을 정도로 미운 사람을 가뿐하게 치워주는 주님 등 나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워줄 주님과의 관계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몸소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입니다.
이 십자가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편안함과 쉬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를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의 상징이고, 또 죽음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과 정반대의 것입니다.
그 안에는 무한한 사랑과 평화가 있었으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강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금 순간의 만족과 안락함만을 추구하면서 십자가의 주님과 관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없게 됩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깊은 묵상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서만 구원이 있다는 것, 그러나 그 십자가는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가치가 들어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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