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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 앞에서 당당한 바울 22:30~23:5
30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기지를 발휘하는 바울 23:6~11
6 바울이 그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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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공회에서 바울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고, 바리새인인 자신이 부활 때문에 심문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 부활이 있다는 바리새인 사이에 분쟁이 생깁니다. 그날 밤 바울 곁에 서신 주님이 담대하라 하시며, 그가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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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 앞에서 당당한 바울 22:30~23:5
바울은 자신을 적대시하는 이들 앞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가 공회 앞에서 당당한 이유는 매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공회는 71명(의장 포함)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 의결 기구입니다. 바울은 심문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복음 전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공회 앞에서 심문받는 바울은 공회 앞에서 심문받으신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바울이 변론을 시작하자 공회 의장인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합니다. 바울은 말을 막는 그를 ‘회칠한 담’(3절)이라고 하며 반박합니다. ‘회칠한 담’이란 겉은 아름답게 보이나 속은 더러운 상태로, 그가 지도자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했음을 뜻합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이 대제사장을 향해 ‘회칠한 담’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적대적인 세력 앞에서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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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를 발휘하는 바울 23:6~11
하나님이 바울에게 위기를 모면할 지혜를 주십니다. 바울은 무리 중 일부는 사두개인, 일부는 바리새인임을 알고 기지를 발휘합니다. 당시 유대 공회는 다수의 사두개인과 소수의 바리새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사사건건 대립했고, 여러 신학적·정치적 주제로 갈등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대립 구도를 이용합니다. 그는 두 계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주제인 ‘부활’에 관해 언급합니다. 사두개파는 죽은 자의 부활과 천사와 영을 다 부정하지만, 바리새파는 그것을 다 인정합니다. 그러자 두 계파 사이에 큰 다툼이 생깁니다. 이에 천부장은 바울을 안전한 영내로 피신시킵니다. 바울에게 지혜를 주신 하나님은 그날 밤에 그를 위로하시며 앞으로의 사명도 알려 주십니다.
● 더 깊은 묵상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무슨 주제로 다툼을 벌였나요?
내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기지를 발휘할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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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통해 하나님 만나기
한절묵상:사도행전 23장 10~11절
계속되는 분쟁과 위기로 바울은 로마 군영에 잡혀 있습니다. 석방의 시기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바울의 마음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바울을 격려하시며 로마에서 복음을 증언해야 하는 그의 사명을 다시금 말씀해 주십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길에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낙심하며 포기하기 쉽고, 때로는 불평과 원망에 휩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재확인하면 다시 사명의 길에 설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전도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방법이 아니라 복음을 분명하게 전하는 것이다. - 오즈월드 체임버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완전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찾고 의지하게 하소서. 견고한 반석이신 주님께 제 생명의 닻줄을 내리게 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주님을 생각하는 믿음을 주소서. 겉사람뿐 아니라 속사람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성숙한 신앙인 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575 주님께 귀한 것 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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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시대 이전부터 유대인의 공회는 각 분파별 종교 지도자들이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도 그들의 세력 다툼을 반복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오히려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의 핵심을 알고 있었고 자신을 고소한 이 소동도 쉽게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두었기에 오히려 그들 사이의 부활 논쟁에 대해 불을 붙여 이 사태를 우선 정리하고 다음의 걸음으로 나아가려고 ‘그 소망(6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결국 더 큰 논쟁이 일어나 자신이 데리고 있던 ‘로마 시민 바울’이 죽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 천부장은 결국 가장 안전한 병영 안으로 그를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그가 처음부터 받은 마음처럼 ‘로마‘에서도 증인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담대함을 주시는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죄와 악의 문제로 갈필을 잡지 못하고 소동하고 비판하며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하지만 믿는 자들의 삶은 그와 구별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는 이들은 늘 담대하고 주님의 평강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음성에 따라 매 순간 우리의 걸음을 수정하고 저는 다리가 고침을 받는 복된 시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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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하여 종교를 이용하는 대제사장처럼 살고 있습니까? 자신과 같은 신념과 신앙의 색깔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요. 오늘 하루도 말씀을 통해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기를 결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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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7일 동인천역 지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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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인원을 알고 자신은 부활의 문제로 신문을 받고 있다는 바울의 호소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을 포함하여 71명으로, 크게 3부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 장로들, 그리고 서기관들입니다. 제사장 그룹은 부활과 천사 등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이고, 서기관 그룹은 부활과 천사나 영 등을 인정하는 바리새인들입니다. 바울은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이 바리새인임을 밝힙니다. 꼼수를 핀 것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분명하게 선한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바리새인의 지지를 얻어 진리를 조금이라도 증거 할 수 있을지 모르는 까닭입니다. 그것의 화두는 다름아닌 부활의 문제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부활이 있다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지지를 받습니다. 혹시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면 자신들은 그를 나무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분쟁이 일어납니다. 부활, 천사, 영 같은 예민한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회의는 끝나고 맙니다. 천사 발언을 한 서기관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날밤 부활하신 주님이 바울에게 나타난 것을 말입니다. 바울에게 오신 이는 천사도, 영도 아닌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바울 곁에서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주님을 증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로써 바울은 두 가지 중 하나는 완성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역입니다. 주님이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사역은 한 가지로, 로마입니다. 친히 나타나셔서 두 가지를 말씀하시고 그 중 한 가지를 승인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원래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나 장했던지 주님께서 직접 바울을 찾아오셔서 그 노고를 치하해 주셨던 것입니다. 영광입니다. 하늘에서 받아야 할 것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한밤중 감옥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그리고 고난을 맞았을 때 주님이 그렇게 나타나시면 좋겠습니다. 불행과 사고를 당해 앞이 캄캄할 때 주님이 그렇게 찾아와 해결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해를 사거나, 소외되거나, 억울한 일로 잠 못 이룰 때 주님이 그렇게 위로해 주면 우리는 울고 말 것입니다. 바울은 목숨까지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다합니다. 주님이 나타나지 않아도 아마 그는 그 길을 갔을 것입니다.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인정과 위로는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괜찮습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나타나지 않으셔도 주님은 주님입니다. 그 주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셔 우리에게 믿음의 길을 가게 하십니다.
바울이 심하게 맞고 난 후에 옥터에 지진이 일어납니다. 고린도 유대인들의 심한 박해 뒤에 주님의 격려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독한 살해 음모 뒤에 주님의 지지가 있습니다. 먼저 나타 나실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것은 그것이 믿는 자가 가야 할 길, 믿음의 길이라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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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처음으로 꺼낸 말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입니다. 앞에 있는 자들에게 부끄러움이 없고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양심은 우리가 두 가지 의미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양심이 절대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고전 4:4,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럼에도 바울이 유대인들 앞에서 양심을 언급한 것은 그들 수준에서 책망받을 어떤 일을 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세상 가운데서 딜레마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즉 세상과 믿음이라는 양 다리를 거치는 양심이 돼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우리가 구할 것은 성령입니다(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오직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 깨끗한 양심으로 인해 갈등하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2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기록에 의하면 탐욕스럽고 오만하며 위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인간성답게 바울이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 입을 치라고 말합니다. 이에 바울은 그를 회칠한 담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아마도 당시에 대제사장이 제사장복을 입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정황상 아나니아가 특별한 인물인 것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당당하게 대제사장의 오만을 나무랐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어느 상황, 어느 누구 앞에서든지 당당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늘 말씀에 붙잡혀 살아왔기에 그동안 어떤 일에 대해서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도 당당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의 주는 위협, 예컨대 직위나 명예 그리고 사업상 이익의 손해 등이 예상될 때 사람은 위축될 수밖에 없지만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사람은 세상의 것으로 위협할 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께서 마음 한가운데에서 주장하심이 있기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성도들은 모두가 세상에서 바울처럼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독단적이고 불법을 행하며, 특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 대해서 굽신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모든 일에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했던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8년 후 피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핍박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때론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마음을 돌이켜 동역자를 만드시기도 하십니다. 원수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에 우리가 원수까지 용납하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 시대에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개인들이나 현대인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은 절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듣고 보고 만지지 못했어도 부정할 수 없는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공기의 존재는 믿으면서도 살아계신 그리스도는 믿지 않습니다. 모두 영적인 장님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다멕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바나바와 자신의 눈을 안수하여 멀었던 눈을 뜨게 한 아나니아, 그리고 사도들과 같은 살아 있는 증인들을 통해서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바울에게 부활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성경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면,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우리의 책임이 아닙니다. 우리의 책임은 전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한 사람이 전도를 받아서 예수를 믿게 되는 횟수는 평균 20회를 들어야 믿음의 확신이 서게 된다고 합니다.
19번의 무의미하게 들렸던 복음이 저와 여러분이 전할 때 20번째의 의미 있는 소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첫 번째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담대하게 전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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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바울이 로마의 천부장과 산헤드린 앞에서 재판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1.시민으로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산헤드린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당함을 말합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Ac 23:1) 이것을 이렇게 직역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바로 지금까지 나의 모든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시민으로서 살아왔습니다."(NAC) '섬기다'라는 단어는 직역하면 '시민으로 살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어떤 면에서는 삼중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이요 로마 시민권자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그는 그러한 시민으로서 무엇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볼 때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습니다. 양심으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왔습니다.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살아왔습니다. 비록 그가 이전에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기독교를 핍박한적도 있지만 그는 어느누구에게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비록 겉모습은 붙잡힌 몸이지만 여전히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부르심의 직분에 따라 충실하게 순종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가 부름을 받은 직분이 증인이어서 힘들고 고달펐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시민으로서 그것도 충실히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Ac 23:11)
바울은 선교를 하면서 안디옥에서 고린도(1년 반)로 고린도에서 에베소(3년)로 거점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거점이 있다면 바로 로마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에 가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예루살렘에서 붙잡힌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바울이 로마에 가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도 증언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지금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로마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처럼 로마에도 죄인의 몸으로 가서 재판을 받으며 지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참 고달픈 직분이었습니다. '사슬에 매인 사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슬에 매인 사신이어도 그 직분에 신실하게 순종하였습니다.
2.대제사장으로
바울을 죽이기 위해 힘을 쏟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Ac 23:2–3) 산헤드린의 의장인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역사가의 기술을 통해 살펴보면 매우 잔인하고 포악하고 로마에 아부를 하면서 이스라엘에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몇년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에 무장봉기가 일어났을 때 그들에게 살해당할 정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병사를 시켜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하였습니다. 재판을 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입을 치라고 명하는 것일까요? 죄가 드러난 것이 아닌데 그는 자신의 감정대로 멋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대제사장을 보고 바울은 겉모습은 대제사장의 옷을 입고 있어 멋있고 하나님과 사람의 중재자로 있는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악마의 탈을 쓴 사람과 같아서 '회칠한 담'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바울의 비난을 듣고 있던 산헤드린의 다른 사람들이 말하였습니다.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Ac 23:4–5) '하나님의 대세자장에게 욕하느냐'는 책망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다' 말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혹자는 바울이 눈이 안 좋아 대제사장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아니면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난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도 산헤드린에 속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입니다. 산헤드린이 모이는 장소에서는 대제사장은 입는 옷도 다르고 서 있는 위치도 다릅니다.
지금 모인 장소는 비록 예루살렘에 있는 로마의 성채(안토니아 성채)라 할지라도 분명히 대제사장은 어느 정도 따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바울이 '알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풍자적'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대제사장인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대제사장적인 행동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그는 재판중에 죄가 드러나지 않은 사람을 '치라'하였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불법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에서 행하고 있는 많은 불법도 바울은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직분에는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는 말로 존중을 표합니다. 그
러나 대제사장의 개인적 잔인함과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면서 행하는 폭력이 아닌 개인적 감정으로 행하는 폭력에 대해 부당함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제사장은 지금 겉보기에는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고 화려하게 살고 있지만 그는 하나님의 시민으로서 낙제점이었습니다. '회칠한 벽'이었습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의 직분을 아주 잘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힘든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과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움이 없도록 잘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된 사람입니다.
반면에 대제사장은 대제사장이라는 화려한 직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직분에 맞게 대접을 받을 가치도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직분은 그것에 순종함으로 빛을 발휘합니다. 순종하지 못하면 직분은 아무 의미도 없으며 오히려 화만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의 길에 잘 순종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 직분의 겉모습은 사명의 겉모습은 많이 다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사명이냐가 아니라 그것에 얼마나 잘 순종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힘들어도 잘 순종하고 있다면 최고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잘 순종하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이 힘든 길인데도 잘 순종하고 있다면 더욱더 최고의 모습입니다.
최고의 길을 가면서도 주눅들어 있는 사람을 가끔 봅니다
주눅들어 있지 말고 최고의 길을 바울처럼 최고의 자긍심과 기쁨으로 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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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천부장은 무슨 일로 고발하는지 알려고 공회를 모아 바울을 그 앞에 세웠습니다 사실 이러한 고난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막13:9)
그러나 우리는 저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들이 온전히 연합한 것 같지만쇠와 진흙의 연합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쇠와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단2:43)
그래서 저들이 바울을 치기 위해 한 마음으로 모였지만,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일부는 바리새인인 것을 보고, 나는 바리새인이요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심문을 받노라 하자, 저들이 즉시 서로 나뉘어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바리새인은 부활을 믿었지만 사두개인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피차 연합할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지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잠11:21)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키시는 주께서 저들을 요란하게 하시고 서로 치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크게 요란하게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슥14:13),
"각각 그의 동료의 칼에 엎드러지리라"(학2:22)
그래서 자기들끼리 미워하고 불사를 것입니다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계17:16)
그래서 저들의 군대가 아무리 많아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지만, 우리는 사망과 굶주림과 환난에서 건지심을 받을 것입니다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시33:17~19)
그러므로 주만 따르기 원합니다 주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자 없기 때문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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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이튿날 천부장은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고소하는 이유를 알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인이었고 로마법에 의하면 고소한 사람이 있어야만 심문할 수 있었으므로 고소자가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함부로 바울을 심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지금 벌어진 사태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원인 규명을 해야 했고 또 그 문제가 종교적인 것이었으므로 산헤드린을 소집한 것입니다. 천부장이 바울 사건에 대해서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이나 흥분된 군중에 의한 여론 재판을 피하여 유대 민족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에서 사실을 규명하려 하였습니다.
사실상 산헤드린은 바울을 적대하고 그를 죽이기까지 하려는 무리들이 가득한 반(反) 기독교 집단이었습니다. 바울이 거기에서의 심리(審理) 받는 것은 불리할 것이 자명하였습니다. 바울이 산헤드린에 서게됨으로써 사건은 또다른 방향으로 전개됩니다(23 장). 바울은 로마시민임을 이용하여 채찍을 피하였습니다. 더 나가서 이제 그는 공회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는 뱀처럼 지혜롭고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결론 사도바울을 변화시킨 예수님)
사도 바울을 변화시키신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하십니다. 특히 우리에게 캠퍼스 지성인 복음화를 맡겨주셨습니다.
사도행전 22장 강해 이부 로마 시민된 자를 채찍질 하느냐
23장 11절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주의자들과 충돌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투옥되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지만 바울은 이를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습니다. 바울은 공회 앞에서 복음을 변론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사이에서 바울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자 주님께서 밤에 바울에게 나타나 로마에서 증인이 되리라고 용기와 믿음을 심습니다. 광신적인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자 로마 천부장이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가이샤라로 이송합니다. 바울은 가이샤라에서 헤롯가문의 분봉왕과 로마 총독 앞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이용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하고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련 속에서 바울을 보호하시고 그 시련을 통하여 복음의 진보를 이루십니다.
(양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긴 바울)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천부장은 바울을 공회 앞에 세우고 정식 재판을 받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공회를 주목하며 말합니다. 바울의 변론 직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는 것과 그것에 대하여 바울이 즉각 강경하게 맞서는 것을 볼 때, 바울의 변론에 앞서 그에 대한 여러 가지 고소가 있었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바울에게로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의 고소 장면을 의도적으로 생략합니다. 바울에 대한 고소는 그가 율법과 하나님을 거역하였다는 식의 내용을 담고 있었을 것입니다(21장 28).
여하튼 바울은 공의회의 증언대에 섰고 그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자들 앞에 조금도 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변론에 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담대히 공회를 주목하였습니다. 주목하였다는 것은 노려보며 담대히 똑바로 바라보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이런 담대하고 강한 태도는 3절에서 대제사장을 책망하는데도 잘 나타납니다. 바울은 공회원을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이전에는 부형들이락 부르고 이제는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공의회와 같은 공식석상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일반적인 인사말을 쓰고 있습니다. 공의회에서는 회원들을 존중해 주는 정중한 인사를 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4:8). 바울이 그것을 알면서 형제들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모임이 공식적인 회의가 아니라 비공식 모임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이 모임이 공식적인 모임인데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당당하게 형제들이라고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어설픈 권위나 무력에 의해 굴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은 공회 앞에서 나는 양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선한 양심(good conscience, RSV)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바울은 양심을 따라 섬겼다고 말함으로 바울의 전날 자신에게 덮어 씌워진 고발에 대해(21:28) 무죄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적어도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 흠이 없었습니다.(빌 3:6) 또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분명한 자의식(自意識)과 책임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율법적으로 흠이 없이 살고자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무지로 인하여 예수님 믿는 자를 핍박한 것입니다. 섬겼노라는 시민으로서 행하다, 어떤 원리나 규책대로 살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또 복음의 원리에 따라 생활했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책망함)
2,3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 곁에 있는 자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하였습니다. 아나니아는 네데배우스의 아들 아나니아로 48년에서 58년까지 대제사장으로 군림했으며 잔인함과 탐욕으로 유명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분반 제사장들로부터 십분의 일 세를 몰수하여 재산을 축적했습니다. 로마 고관들에게는 아낌없이 뇌물을 바쳤습니다. 이렇듯 아나니아는 탐욕적이고 술수에 능한 자였습니다. 그는 친로마 정책으로 인하여 유대인 국수주의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66년에 로마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아나니아의 집은 국수주의자들에 의해 방화되었습니다. 아나니아는 헤롯 대왕의 궁전으로 피신하여 궁전 뜰에 있는 도수관 속에 숨어있다가 그의 형 히스기아와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인 아나니아는 바울의 당당한 태도에 즉각적으로 흥분했습니다. 곁에 섰는 사람들은 그곳에 있던 시중이라고 봅니다. 누가복음 19장 24의 예를 볼때 대제사장 시중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시중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재판정에서 뺨을 맞은 일이 있습니다.(요한복음 18장22).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뺨이나 입을 때리는 행위는 사람의 인격을 극도로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폭력적(暴力的)이고 잔인한 자였습니다. 바울은 대제사장을 회칠한 담이라고 책망합니다. 바울은 아나니아의 불법적이고도 인격 모독적인 행위에 대해 조금도 굴하지 않고 강력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회칠한 담이여라는 표현은, 일찍이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회칠한 무덤이여(마태복음 23장 27)라고 맹렬히 질책한 것과 같습니다. 회칠한 담은 위선자에 대한 질책입니다. 회칠한 무덤이 겉은 깨끗한것 같으나 속은 썩어빠진 상태를 뜻합니다. 회칠한 담은 기반이 안정되어 있지 못해 흔들거리자 겉에 흰 회를 칠해서 튼튼한 것처럼 꾸미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너를 치실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단지 아나니아의 위선을 질책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그에게 저주를 선언하기까지에 이릅니다.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는 형식이 율법에 기록된 저주 방식입니다.(신명기 28장 22). 어떤 사람은 바울의 이 말을 단순히 관용적인 저주의 선언이 아니라 하나의 예언으로 보기도 합니다. 아나니아가 66년에 살해당한 것을 감안한다면 이 견해도 일리가 있습니다.
바울은 대제사장이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하면서 율법을 어기고 바울을 치느냐고 담대히 책망하였습니다. 바울은 아나니아의 위선을 비유를 사용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법대로 판단한다고 하는 자가 법을 어기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운 꼴입니까! 재판은 법에 따라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하며(레위기 19장15), 유죄가 확정될 때까지는 형벌이 집행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죄도 정치 않는 상태에서 바울의 인격을 모독하는 처벌을 명하였으니 그것은 명백히 율법을 어긴 행위였습니다.
(대제사장을 존중하는 바울)
4-5절을 보십시오.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
주위 사람들은 바울이 대제사장을 욕하느냐고 대제사장 편을 들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대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대표자로서 대단한 권위와 존경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 누구도 감히 대제사장의 권위에 맞설 수 없었습니다(신명기 17장12). 이런 종교적 풍토 속에서 살고 있던 그들로서는 바울이 대제사장에게 맞서는 것이, 그 내용에 관계없이 제사장을 욕되게 하는 행동으로 여겼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당당하게 대답한 것이 불손한 행위로 간주되어 매를 맞으셨습니다.(요한복음18장22), 바울의 저주 선언은 매우 불리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형제들아라는 정중한 어투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출애굽기 22장28), 그리고 그의 신앙적 인격으로 보아 바울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변증에 너무나 열중했기 대문에 자기의 입을 치라고 명한 사람을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모인 공의회는 정기적인 산헤드린의 모임이 아니라 로마 관리에 의해 긴급히 소집된 회의이므로 대제사장이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는 옷을 입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공식 좌석에도 앉아있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가 대제사장임을 모르고 욕하였다고 변명하였습니다. 자신도 대제사장을 공경하라는 말씀을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22장 28을 인용한 것으로 바울이 저주를 선언한 인물이 대제사장인 것을 정말로 몰랐으며 또한 그가 율법을 잘 알고 있으며 그 율법에 충실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말입니다.
(자신이 바리새인임을 말하는 바울)
6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는 그곳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당시 상당한 종교적 영향력을 가진 집단으로 그 기원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때 유명했던 대제사장 사독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두개인들이 구체적인 집단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하스모니안 시대 때(B.C. 166-63) 부터입니다. 이들은 순수 유대적 전통만을 고수하고 이방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전승 문서들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이라든가 영적 세계, 천사와 마귀 등도 전통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요소라 하여 배격하였습니다. 이들은 철저히 현세지향적이고 친로마적이고 체제유지적인 귀족 집단이었으므로 보수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민중들의 생활과는 유리되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 역시 사두개파와 쌍벽을 이루던 종교적 귀족 집단이었습니다. 에스라로부터 시작된 유대주의에 충성하는 한 부류가 마카비 시대 때 바리새인으로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하시딤 하시디안으로 불리어진 경건 집단 바리새파였습니다. 이들은 사두개파와 달리 모세 오경 외에도 각종 구전, 전승을 동일하게 권위 있는 정경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 천사나 마귀와 같은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였습니다. 이들은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권만을 인정하는 그들의 신앙에 배치된다고 보아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과 선조들의 전통에 충실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개혁하고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임을 밝히고 바리새인들이 믿는 부활의 소망으로 심문을 받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과의 뜻이 담겨 있는 바울의 변론(5절)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바울에 대한 적대 행위가 더욱 노골화되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는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산헤드린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양자 사이에는 신학적인 견해 차이가 있다는 것도 잘 알았습니다. 바울은 이를 이용하여 논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바울이 노련한 수를 썼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6에 언급된 소위 뱀 같이 지혜로운 행동이었습니다. 바울은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고, 또한 그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11절) 자기가 감당해야 할 막대한 사명을 위해서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이 취한 행동은 단편적인 시각에서가 아니라 그가 장차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넓은 안목에서 행한 것입니다. 더욱이 지금 일어난 사건이 그의 로마행의 한 동기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습니다.
그는 예수의 부활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부활 소망을 가졌습니다(고전 15:16-58).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공회원들에게 부활과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였습니다. 단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에서는 바리새인과 같은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부활 신앙이 예수의 부활에 근거한 반면 바리새인들의 부활 신앙은 예수와 관계없이 전승되어온 신앙에 근거했다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차이점을 갖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몸이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는 부활을 믿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의 다툼)
7-9절을 보십시오.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큰 분쟁이 생기니”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하는 자들이므로 이것을 믿는 바리새인들과 나뉘어서 서로 싸웠습니다. 바울의 발언은 즉시 효과를 나타내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사이에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다툼은 놓다, 또는 두다의 뜻에서 유래한 세움을 의미합니다. 서로 다른 입장을 옳다고 주장하면서 맞세우는 것입니다. 이 두 종파는 기독교에 대해 그토록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저들 간에 대립되는 신학적 노선에 있어서는 첨예한 분열상을 드러내었습니다. 이들은 비본질적인 문제를 두고 기회만 있으면 논쟁을 일삼는 소위 비신앙적 신학자들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사두개인들은 합리적이고 현세지향적이며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내세에 대한 희망을 갖지 않았습니다. 특히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복음서에서도 예수와 부딪히는 논제로 등장합니다(마태복음 22장23).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부활, 천사, 영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주제들은 두 집단이 가장 첨예한 대립을 보인 부분이었습니다. 이 두 집단 사이에는 신학적 차이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감정적 대립이 있었기 때문에 논쟁은 필요 이상으로 격화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믿었습니다. 사두개인은 바리새인의 견해를 완전히 부정하며 자신의 삶을 영위할 개인의 자유애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천사와 마귀의 계층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두개인은 천사도 없고 마귀도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인간 평등을 주장하면서 다방면에 걸쳐 순수한 민족적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사두개인은 자신들의 이해 득실에 민감하여 현상 유지에만 급급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크게 떠들었습니다. 떠들다는 말은 비명을 지르다 울부짖다란 뜻에서 유래한 말로 큰 외침이나 고함 소리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사이의 논쟁이 매우 격렬해졌습니다. 바리새인은 영이나 천사가 바울에게 말할 수 있다고 바울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서기관은 율법 전문가를 가리키는데 바리새인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영이나 천사가 바울에게 말했다면 그것에 대해 어떻게 반박할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여기서 영이나 천사가 바울에게 말했다고 할 때 그것이 다메섹에서의 체험을 말하는 것인지(22장6-10), 아니면 그후 성전에서 기도할 때 주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22:17-21)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바울을 옹호하는 쪽으로 돌아선 몇몇 바리새인은 본문에 등장하는 자들 중 일부입니다. 바리새인들 중에 일부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적어도 관대한 입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 중 다수는 그 생활 양식에 있어 다른 유대인들과 별로 상충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영내로 옮긴 천부장)
10절을 보십시오.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 죽을까봐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갔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보호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험악해지고 말았습니다. 찢겨질까는 깨뜨려 버리다 산산조각을 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천부장이 특별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바울의 신상에 큰 위험이 있었을 상황이었음을 말해줍니다. 빼앗아라는 표현도 사두개인들이 바울을 붙잡고 폭력을 가하려 했기 때문에 강제로 떼내어 데려가야만 했던 상황을 현장감 있게 묘사합니다.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주님)
11절을 보십시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그 날 밤에 주님이 바울에게 나타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주님이 처음으로 로마 선교를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일찍이 생전에 제자들에게 담대하라는 말로 위로했었습니다(1장18요 16장33 참조). 이제껏 바울은 그의 생을 통해 많은 환상을 보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16:918:922:1727:23, 24) 고린도 교회에서도 환상중에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말씀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이 지금처럼("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가깝게 느껴지도록 묘사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곁에 서서 말씀하신 것은 현재 시점의 긴박성을 시사합니다.
그는 일찍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에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비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19:21) 예루살렘에서의 고난도 이미 각오한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20:2321:10-13), 실제로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게 되자 그의 심정은 적잖이 당혹감에 사로 잡혔을 것입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주님은 그에게 나타나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고 로마 선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공해주셨습니다. 사도행전 22장 21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는 말씀이 여기서는 로마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이제 로마로 가는 것은 단순한 바울의 바램이 아니라 주님이 부여해 준 사명임이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지금 그에게 매우 가깝게 감지되는 격려의 말씀은 이후 2년간에 걸친 로마 전도 여행에서 많은 위험이 따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풍랑을 만나서 죽음의 위협 가운데 있을 때도 예수님은 네가 가이사에게 서야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뱀의 위험과 파선의 위험을 당할 때 의연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바울과 같이 로마선교를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당시에 로마는 세계의 중심지입니다. 로마에 복음이 전해져야 세계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계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크신 뜻 가운데 바울을 한 걸음씩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명을 마치기 전까지는 죽지 않습니다. 사명인은 사명을 마치기까지 죽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의 진리입니다.
“당당하고 지혜롭게 복음을 전하는 증인” 김주환 목사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안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기 위하여 결박당한 바울을 풀어주고 제사장들과 유대지도자들을 공회에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웁니다.
바울은 산헤드린공회 앞에서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오늘까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하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고 명합니다.
바울은 회심하기 전까지 범사에 양심에 따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살았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바른 양심도 진리와는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위선에 가득 찬 회칠한 담 같은 자여
하나님이 너를 치실 것이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고 하느냐고 아나니아에게 항변합니다.
그러자 겉에선 사람들이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고 나무랍니다.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
바울은 아나니아가 부패한 지도자였지만 대제사장인 줄 몰랐다고 그를 인정하고 바로 사과를 합니다.
바울은 공회에 모인 사두개인파와 바리새인파가 뒤섞여 있는 것을 알고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로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고 아수라장이 됩니다.
바리새인 편에 있는 몇몇 서기관들이 일어나 이 사람은 악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며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면 어찌 하겠느냐고 변론합니다.
이렇게 큰 분쟁이 생기자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에게 명하여 무리 가운데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갑니다.
천부장의 군대들은 바울을 두 번이나 위기에서 구해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 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의 주님!
바울처럼 겸손한 마음을 주옵소서!
비록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부패한 지도자였지만
모든 권위를 세우신 하나님 때문에 그를 인정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이 온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통치하고 계심을 믿게 하옵소서!
더 나아가 아무리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어도
“담대 하라. 너는 반드시 로마에 가서 사명을 이룰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거하는 바로 이곳이
주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의 땅이요,
복음을 선포할 파수꾼의 망대이며,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할 안전한 도피성이 됨을 깨달아
평강과 담대함으로 걸어가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맹주와 구별되는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오늘도 세상 가운데 살아가며
거룩한 증인으로 부끄럽지 않도록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구원의 놀라운 소식 증거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기름 부으시고
하늘의 창고를 열어 채워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와
고통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크신 은혜와 긍휼을 알아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넘쳐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