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적 단편소설>
등불이 된 지난이
석야 신웅순
1
겨울바람은 논길과 둑길을 타고 매섭게 몰아쳤다. 하굣길이면 우리는 책가방을 등에 메고 그 칼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학교를 파하고 논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던 삼총사는 둑방길 초입에서 그만 발이 얼어붙고 말았다.
“저기.”
덕호가 외마디를 질렀다.
“지난이다.”
둑길 한가운데 지난이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얼굴이 드러났고, 해질 대로 해진 검은 저고리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그는 우리를 향해 눈이 째지도록 쳐다보았다.
우리는 그만 철렁 주저앉을 뻔했다. 다른 길로 빠질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는 둑길은 외길이었다.
우리는 서로 얼굴만 바라보며 서 있었다. 지난이를 못살게 굴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돌을 던졌던 일, 뒤에서 밀쳤던 일, 때리고 도망쳤던 일. 그때는 그것이 우리에게는 재미있는 놀이였다.
엉겁결에 논으로 뛰어들었다. 신발은 진흙에 젖고 바짓가랑이는 온통 진흙 범벅이 되었다. 발은 쇠덩이처럼 무거웠다.
지난이가 무서웠다.
‘이제 우리는 죽었다.’
누가 먼저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지난이는 장승처럼 서 있었다.
그때 찬바람이 휙 불어왔다. 눈이 따가웠다. 지난이는 우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잠시 눈을 돌렸다. 그 짧은 순간의 눈빛이 어찌나 깊었던지 우리는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갑자기 지난이가 고개를 들었다.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겨울 하늘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이다!”
우리는 후다닥 논둑으로 기어올라 달렸다. 고샅 언덕길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내달렸다. 한참을 달렸는데도 뒤에서 “쿵, 쿵, 쿵” 발소리가 들려왔다.
지난이도 바짝 뒤쫓아 오고 있었다. 우리는 더욱 내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언덕배기에 올라서야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았다.
지난이는 보이지 않았다. 무밭 너머 산등성이로 사라진 모양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숨만 헐떡거렸다.
덕호가 말했다.
“그런디…….”
“왜?”
“지난이가 우리를 잡으러 온 게 아녀.”
“그럼?”
“우리가 뛰니까…… 자기도 누가 쫓아오는 줄 알았나벼.”
침묵이 흘렀다.
우리 셋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우리는 지난이가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지난이를 또 한 번 바보로 만들어버렸다.
2
국민학교를 다니던 여섯 해 동안 지난이는 줄곧 우리 마을에서 살았다. 논에서 피를 뽑다가도 갑자기 일을 멈추고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곤 했다. 그러다 혼자 실실 웃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돌을 던졌다. 때로는 뒤따라가며 툭툭 치고는 도망쳤다. 그런데도 지난이는 한 번도 우리를 쫓아오지 않았다. 돌을 맞고도, 넘어져도, 등을 밀쳐도 우리를 향해 소리치지 않았다. 그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헤헤헤……” 웃을 뿐이었다.
마을에 초상이 나거나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면 지난이는 누구보다 바삐 움직였다. 솥을 나르고 장작을 패고 물을 길었다. 잔칫집 마당을 오가며 시키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하는 날이면 지난이는 따뜻한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사랑방 아랫목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런 날 밤이면 지난이는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평소에는 외양간 한쪽이나 부뚜막, 헛간 구석, 검불더미나 볏짚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잤다.
그에게는 집이 없었다. 부모도, 형제도, 친척도 없었다.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를 떠돌다 이 마을까지 흘러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난이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바보가 아니었다. 언문을 읽을 줄 알았고, 장부에 적힌 한자를 더듬더듬 읽기도 했다. 마음씨도 착했다. 아이들이 짓궂게 놀려대도 화를 내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린아이였고, 지난이는 바보였다. 그래서 마음대로 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생각이었는지는 먼 훗날에야 알았다.
3
나는 고향을 떠났다. 타지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새로운 세상을 보면서 지난이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에서 소식이 전해져 왔다.
지난이가 죽었다는 것이다.
얼어 죽었다고 했다. 한겨울 추위를 피할 곳이 없어 짚더미 속에 몸을 묻은 채 그대로 눈을 감았다는 것이었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은 얼마나 춥고 외로웠을까.
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밤 지난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던 얼굴과 낡은 검은 저고리, 그리고 논 한가운데 서서 먼 하늘을 바라보던 뒷모습이.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난이는 왜 그렇게 자주 하늘을 바라보았을까. 거기서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신만이 알고 있었을 뿐, 나는 더는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지난이에게 돌아갈 집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몸이 아파도 누워 있을 방이 없었고, 마음이 아파도 기댈 사람이 없었다. 추운 날에는 추운 대로 견디고, 배고픈 날에는 배고픈 대로 견뎌야 했다.
어쩌면 그의 죽음은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평생 그를 에워쌌던 외로움과 가난, 누구 하나 제대로 돌아보지 않았던 세상의 무관심이 그를 조금씩 죽음으로 몰아갔는지도 모른다.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나는 가끔 지난이를 생각한다. 기억 속의 그는 늙지 않았다. 여전히 낡은 검은 저고리를 입고 둑길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왕방울만 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먼 하늘로 시선을 돌린 그리고는 웃는 모습이었다.
“헤헤헤…….”
나는 이제 그 웃음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울음을 웃음처럼 삼키며 살아온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얼굴이었으리라.
지난이는 우리를 미워하지 않았다. 미워할 힘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의 모습은 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사람은 가까운 사람만 마음에 남는 것이 아니다. 피를 나눈 사람도 아니고 내 삶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도 아닌데, 오래도록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슬픔이 내 것이 아닌데도 마음 한구석에 늘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
지난이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4
어린 시절의 나는 지난이를 놀려도 되는 만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그가 한 생을 견디다 간 사람임을 안다. 그래서 가끔 그날의 나를 돌아보곤 한다.
논두렁에 숨어 벌벌 떨던 어린아이. 지난이를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놀렸던 아이. 그 철없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반세기 밖에서 그 아이를 바라볼 뿐이다. 그러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미안하다고. 너무 늦게 알았다고.’
세월이 흘러 마을도, 논길도, 사람들의 얼굴도 모두 바뀌었다. 지난이가 살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눈빛 하나는 지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낡은 저고리를 걸치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그 눈빛은 지금도 내 가슴 한구석에 남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등불이라고 불렀다.
지난이는 떠났지만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말없이 살다 말없이 떠난 사람 하나가 남은 사람의 어둠 속에서 오래오래 빛이 되어가는 것.
지난이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 산문시「지난이,1988」,에세이 「지난이 2015」를 거쳐 개작한 자서전적 소설. 2026.10.14. 여여재, 석야 신웅순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