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우리는 어려운 경기 속에서도 ‘구세군 자선냄비’ 등 기부문화 확산으로 훈훈한 세밑을 보냈다. 대한구세군자선냄비본부는 며칠 전 2015년 12월 한 달간 거둔 성금액이 71억원을 넘겨 역대 최고 모금액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미국에서 시작한 구세군 자선냄비는 우리나라에 1928년 처음 등장했다. 당시에는 나무 막대기로 만든 지지대에 가마솥을 매단 형태였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선냄비도 진화했다.
2004년 독일 프리미엄 주방용품회사인 휘슬러코리아에서 기증한 철제 자선냄비로 교체되더니, 2006년엔 신용카드로 기부할 수 있는 ‘디지털 자선냄비’가 등장했다. 최첨단 정보기술(IT)로 무장한 냄비인 셈이다.
2015년엔 한 번 더 발전해 터치스크린 방식의 ‘스마트 자선냄비’, 모바일 앱(응용프로그램) ‘자선냄비 따끈이’ 등이 선보였다.
일상에서 흔히 보는 ‘냄비’에도 우리말의 진화 모습이 담겨 있다. 하나는 ‘이’모음 역행동화 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귀화어’ 흔적이다. 냄비는 순우리말인 것처럼 보이지만 일본말 ‘나베(なべ·鍋)’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과거에 오랫동안 ‘남비’가 표준어였던 까닭도 이 말이 ‘나베’에서 형태를 바꾼 것이기 때문이다. 1989년 새로운 표준어사정 원칙이 나오면서 ‘냄비’를 표준으로 했다.
‘남비’가 ‘냄비’로 바뀐 것은 ‘이’모음 역행동화 때문이다. 이는 쉽게 말하면 뒤에 있는 ‘이’모음의 영향을 받아 앞 음절 발음에 ‘이’음이 첨가돼 나오는 현상이다. 일부 사람들이 가랑이를 가랭이로, 곰팡이를 곰팽이로, 아비를 애비로, 아지랑이를 아지랭이로, 지푸라기를 지푸래기 등으로 발음하는 게 그 예다.
요즘도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은 ‘고기’를 ‘괴기’라 말하고, “얘, 어미야~” 할 것을 “얘, 에미야~”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쓰는 것은 바른 어법이 아니다. 현행 표준어 규정에서는 ‘이’모음 역행동화 현상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앞의 말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냄비’와 ‘동댕이치다’는 예외적으로 ‘이’모음 역행동화가 일어난 형태를 표준으로 정했다. 사람들이 대부분 ‘냄비’ ‘동댕이치다’로 발음하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냄비’에서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우리말 열쇠는 ‘귀화어’이다. 이 말은 외래어이지만 전혀 외래어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랜 세월을 지나며 자연스럽게 우리말 속에 동화했기 때문이다. ‘가방, 구두, 가마니’ 등이 대표적인 귀화어다.
‘가방’의 어원은 네덜란드어 ‘kabas(카바스)’다. 이를 일본에서 ‘가반(かばん·)’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해져 뿌리내린 것이다. ‘구두’와 ‘가마니’ 역시 일본어 ‘구쓰(くつ·靴)’ ‘가마스(かます·)’에서 비롯된 말이다.
가마니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섬’을 썼다. 그런데 ‘섬’은 새끼와 짚을 사용해 곡식을 담기엔 성긴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꼼꼼하게 짜인 가마니에 밀려 섬은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됐다. 하지만 단위명사로는 남아 있어 지금도 가마니와 섬이 함께 쓰인다. 한자어로는 ‘석(石)’이라고도 하며 모두 같은 의미이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