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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과 멋이 넘치는 보배로운 땅
전남 보성에 가다 | |
순천시와 장흥군, 화순군, 고흥군으로 둘러싸인 전남 보성. 푸릇한 녹차와 구성진 소리, 쫄깃쫄깃한 참꼬막으로 이름난 보성은 남도 지역이 그렇듯이 맛과 멋으로 똘똘 뭉친 곳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지는 곳에서 어느새 흥얼흥얼 소리꾼이 되어 갑니다. 어느새 까탈스런 입맛 내세우는 미식가가 되어 갑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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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깃쫄깃한 겨울 참꼬막의 유혹에 빠지다 “워메 내 새끼 꼬막 무치는 솜씨 잠 보소. 저 반달겉은 인물에 손끝 엽렵허기가 요리 매시라운 니는 천상 타고난 여잔디. 금메, 그 인물 아까워 어쩔끄나 와. ”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 무당 월녀는 딸 소화의 야무진 요리 솜씨를 이렇듯 걸쭉한 사투리로 풀어놓습니다. 소화의 손에서 맛나게 변신하는 재료는 바로 보성군 벌교읍의 꼬막입니다. 꼬막은 참꼬막과 피꼬막, 새꼬막 이렇게 3종류가 있는데, 그중 참꼬막의 맛을 최고로 친다 하죠. 참꼬막은 쫄깃쫄깃하고 적당히 간간한 맛이 일품입니다. 요리법도 꽤 다양해요. 여러 번 박박 씻은 다음 찜통에 삶아 그대로 먹거나 양념장에 무쳐서 먹을 수 있고, 초고추장에 새콤달콤하게 무친 회도 맛이 있지요. 꼬막을 다져 넣어 전도 부치고, 무와 함께 말갛게 국물을 끓이기도 합니다. 누구라도 입맛 다실 만한 매력적인 재료이지요. 겨울의 냉랭한 기운에 이마가 찡해 오는 어느 날, 꼬막잡이를 보기 위해 드디어 갯벌로 떠났습니다. 짱뚱어가 활개를 치던 갯벌에 추위가 닥쳐오면 비로소 참꼬막의 무대가 펼쳐지기 때문이에요. 본격적으로 기온이 떨어지는 11월경부터 추위에 살이 오그라들며 육질이 좋아진다고 하니 때를 놓치면 1년을 꼬빡 기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마음 급하다고 무작정 나설 수는 없다하더군요. 꼬막은 한 달에 보름 정도 물이 빠졌을 때 채취할 수 있고, 그나마도 정해진 날짜에만 공동 작업을 하니까요. 약속한 날짜에 꼬막잡이를 보겠다는 일념하에 새벽 어둠을 뚫고 달려서 도착한 벌교읍의 대포리. 아뿔싸,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답니다. 아침 일찍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아주머니들은 ‘워쩐디야, 물때를 잘못 맞차버렸구만’ 하며 휑하니 돌아서는 게 아닙니까. 수소문 끝에 알아 온 물때 시간이 틀렸던 모양이에요. 꼬막잡이는 물때에 따라 작업 시간이 매일 달라지고, 일하지 않는 날도 많은데…. 드라마틱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우여곡절 끝에 옆마을 장암리에서 한차례 작업을 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갔답니다. 외지에서 어렵게 찾아온 젊은이들이 행여라도 헤맬까 싶어 길에서 만난 아주머니들은 손짓 발짓을 해 가며 길을 알려 주시더군요. 내 엄마 같고 할머니 같아서 바라만 봐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걸 느꼈어요. 그렇지만 길찾기에는 요즘 말 그대로 ‘대략난감’이었어요. 그분들은 첫 동네니, 조금만 가면 뵌다느니 하며 막연한 설명으로 일관하셨고, 어딜 가나 비슷비슷한 시골 마을 모습에 가슴은 두근두근했습니다. 드디어 도착한 곳은 장암 1구. 우리나라에서 꼬막잡이라면 대포리와 함께 최고로 치는 유명한 곳이지요. 쥐 죽은 듯 조용한 마을 안으로 들어가 마을 회관을 찾았습니다. 백발성성하신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들이 마실 나와 계시더군요. 꼬막 잡는 게 뭐 볼 거 있어서 멀리까지 왔느냐고 하면서도 다들 참꼬막이 제일 맛있다고 은근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열댓 살의 파릇파릇한 나이에 신랑 얼굴도 모르는 채 시집와 여태 살아간다는 할머니들, 그 얼굴에서는 젊은 시절의 고생스러움과 황혼의 쓸쓸함이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들의 여생은 전라도 사투리대로 ‘깝깝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었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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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땀방울로 벌교 갯벌은 뜨겁다 물이 빠지면서 드러나는 갯벌은 낯선 이에게는 미지의 대상이기도 하고, 두려운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모래 섞인 곳과 달리 차지고 깊은 진흙뻘이기 때문에 잠시도 서 있지 못한다는 벌교 갯벌은 국제 협약에 의해 보전 습지로 등록될 만큼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문득 태안 지역의 기름 유출 사건이 떠오르면서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람들에게 베풀기만 하는 자연이 고맙다는 생각도 잠시 해봤습니다. 오후 3시 30분이 가까워지자 체크무늬의 챙 넓은 모자와 가슴께까지 올라오는 고무 물신, 빨간색 고무장갑으로 완전무장한 장암 1구의 동네 여인네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널을 갯벌 가장자리에 가져다 두고, 모닥불 가까이로 다가갑니다. 스무 명 남짓한 여인들은 물이 완전히 빠지기를 기다리면서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모닥불에 몸을 덥힙니다. 살을 에는 바닷바람과 다리가 쑥쑥 빠지는 갯벌에 맞서며 살아가는 그들. 어쩐지 그들에게서는 ‘날것’이 주는 싱싱함이 느껴졌습니다. 글쎄요, 삶의 최전방에 나선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생생함이라고 할까요. 그들은 느긋해 보였지만 눈빛은 비장했고, 입은 야무지게 앙다물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갯벌 속에 깊이 박혀 있는 꼬막은 무슨 의미일까. 한 바구니 캐면 손주 녀석 손에 쥐어 줄 용돈이 나오고, 두 바구니 캐면 젊은 시절 속 꽤나 썩혔던 영감탱이에게 뜨신 점퍼 하나 사 입힐 수 있는 보물 창고였겠죠. 내 몸 부리는 만큼 살림은 펼 수 있으니 몸 아낀다고 주저하지 않았을 겁니다. 스스로 신명을 불어넣으며 열심히, 열심히 보물을 캐며 살았을 겁니다. 빼꼼하게 드러나는 여인들의 볼은 빨갛게 얼음이 박혀 있었고, 손은 찬물에 수도없이 담갔다 빼서 아무리 로션을 발라도 더 이상 매끄럽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지요. 그래도 다행이다 싶은 건 벌교 참꼬막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참꼬막 생산량의 65%를 차지한다니 상당하지요. 참꼬막은 맛뿐 아니라 영양 면에서도 우수한 식품입니다. 단백질과 철분, 비타민이 듬뿍 들어 있으니까요. 벌교에 가서는 주먹 자랑을 하지 말라는 말은 바로 영양 많은 참꼬막 때문에 생겨났을 정도랍니다. 눈 깜짝할 사이 동네 여인들은 널을 잡아 타고 갯벌 안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갑니다. 널 위에 바구니를 핸들 삼아 양손으로 잡고, 왼쪽 다리 무릎을 굽혀 얹습니다. 오른쪽 다리는 마치 배의 노를 젓듯이 갯벌 위를 가볍게 밉니다. 겨울바람을 가르며 스르륵 스르륵 멀어져 가는 동네 여인들의 모습이 점점 작아집니다. 꼬막은 원래 손으로 잡아야 좋습니다. 왜냐하면 손길을 피해 꼬막이 입을 다물기 때문에 뻘이 들어가지 않거든요. 물론 이제는 커다란 빗처럼 생긴 채취기로 갯벌을 긁어낸 다음 비스듬하게 세워서 바구니 안에 붓습니다. 바구니에 꼬막이 한가득 쌓이면 미리 들어와 있던 배에서 크기별로 선별 작업을 해 그물망에 담습니다. 갯벌에 머무는 서너 시간 동안 몸을 녹이느라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 외에 잠시도 손놀림을 쉬지 않습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그때가 바로 퇴근 시간. 출발했던 길을 따라 그들은 다시 돌아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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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밭과 소설의 배경지가 살아 숨쉬는 곳 아침 일찍 회천면의 율포 해수욕장으로 달려가 일출을 보았습니다. 동해가 아니어서인지 붉은 기운은 덜했지만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지요. 귀가 떨어질 듯 쨍한 칼바람을 헤치며 달려간 곳은 차밭. 회천면에서 보성읍으로 가다 보면 봇재 고개를 만나게 돼요. 지금이야 기생오라비마냥 반질반질한 길이 닦여 있지만, 옛날 사람들은 지팡이 하나 의지하며 이 고개를 넘었다 합니다. 남도의 판소리라 불리는 서편제는 보성에서 시작이 되었는데, 수많은 소리꾼들이 봇재 고개를 오갔다고 해요. 한을 담아 내지르던 소리꾼의 걸진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멀리 영천 저수지와 득량만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기분입니다. 봇재 고개 아래쪽에는 영화와 CF 촬영지로 유명한 대한 다원이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입구까지 700m나 이어지는 삼나무 길을 따라 오르니 겨울 차밭이 시원스레 펼쳐집니다. 햇살에 온몸을 내맡긴 녹차 잎들은 여전히 초록의 빛깔을 머금고 있더군요. 사람들은 차밭 사이사이를 걸으며 생경한 풍경에 눈을 빼앗깁니다. 고요한 아침, 간간히 들리는 새소리와 어우러지는 차밭은 참으로 평온하고 정갈합니다. 눈이 즐겁고 콧속이 황홀해지는 기분, 귀마저 호사스러운 잠깐의 휴식으로 마음은 한껏 행복해졌습니다. 하지만 욕심 많은 여행자는 툴툴 털고 일어나 또 다른 길을 향합니다. 밤을 새워 읽던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된 자리, 그 곳을 찾아가야 하니까요. 소설은 해방 후 첨예한 사상 대립으로 굴곡진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소화다리나 남도 여관, 김범우의 집 등은 이야기의 무대가 되었지요. 신경 쓰지 않으면 쉬이 지나치는 길목길목마다 반가운 장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등장 인물이 살아 움직이며 나타나지 않을까 내심 기대가 되고, 잊지 못할 장면을 떠올려보는 즐거움이 쏠쏠했습니다. 하루 전날 보성에 도착했을 때 조금 놀랐습니다. 구도로들이 한켠으로 밀려나고 고속도로처럼 쭉쭉 뻗은 도로들이 군데군데 차지하고 있었거든요. 여행자가 갖는 이기적인 마음이 슬그머니 들더라고요. 가슴으로 기억하고 있는 예전 모습 그대로 영원히 남아 있어 주었으면 하는…. 꼬불꼬불하고 둥글둥글했던 그 모습으로요. 그곳 사람들이라고 신식을 싫어할 리 없는데 말이죠. 편리한 걸 마다할 리 없는데도요. 그저 조금 덜 다치게 해 달라고 빌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언젠가 내 살던 곳을 떠나 또 한번 발걸음을 할 곳이기에 바람은 더욱 간절했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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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과 멋이 넘치는 보배로운 땅
전남 보성에 가다 | |
순천시와 장흥군, 화순군, 고흥군으로 둘러싸인 전남 보성. 푸릇한 녹차와 구성진 소리, 쫄깃쫄깃한 참꼬막으로 이름난 보성은 남도 지역이 그렇듯이 맛과 멋으로 똘똘 뭉친 곳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지는 곳에서 어느새 흥얼흥얼 소리꾼이 되어 갑니다. 어느새 까탈스런 입맛 내세우는 미식가가 되어 갑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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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깃쫄깃한 겨울 참꼬막의 유혹에 빠지다 “워메 내 새끼 꼬막 무치는 솜씨 잠 보소. 저 반달겉은 인물에 손끝 엽렵허기가 요리 매시라운 니는 천상 타고난 여잔디. 금메, 그 인물 아까워 어쩔끄나 와. ”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 무당 월녀는 딸 소화의 야무진 요리 솜씨를 이렇듯 걸쭉한 사투리로 풀어놓습니다. 소화의 손에서 맛나게 변신하는 재료는 바로 보성군 벌교읍의 꼬막입니다. 꼬막은 참꼬막과 피꼬막, 새꼬막 이렇게 3종류가 있는데, 그중 참꼬막의 맛을 최고로 친다 하죠. 참꼬막은 쫄깃쫄깃하고 적당히 간간한 맛이 일품입니다. 요리법도 꽤 다양해요. 여러 번 박박 씻은 다음 찜통에 삶아 그대로 먹거나 양념장에 무쳐서 먹을 수 있고, 초고추장에 새콤달콤하게 무친 회도 맛이 있지요. 꼬막을 다져 넣어 전도 부치고, 무와 함께 말갛게 국물을 끓이기도 합니다. 누구라도 입맛 다실 만한 매력적인 재료이지요. 겨울의 냉랭한 기운에 이마가 찡해 오는 어느 날, 꼬막잡이를 보기 위해 드디어 갯벌로 떠났습니다. 짱뚱어가 활개를 치던 갯벌에 추위가 닥쳐오면 비로소 참꼬막의 무대가 펼쳐지기 때문이에요. 본격적으로 기온이 떨어지는 11월경부터 추위에 살이 오그라들며 육질이 좋아진다고 하니 때를 놓치면 1년을 꼬빡 기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마음 급하다고 무작정 나설 수는 없다하더군요. 꼬막은 한 달에 보름 정도 물이 빠졌을 때 채취할 수 있고, 그나마도 정해진 날짜에만 공동 작업을 하니까요. 약속한 날짜에 꼬막잡이를 보겠다는 일념하에 새벽 어둠을 뚫고 달려서 도착한 벌교읍의 대포리. 아뿔싸,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답니다. 아침 일찍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아주머니들은 ‘워쩐디야, 물때를 잘못 맞차버렸구만’ 하며 휑하니 돌아서는 게 아닙니까. 수소문 끝에 알아 온 물때 시간이 틀렸던 모양이에요. 꼬막잡이는 물때에 따라 작업 시간이 매일 달라지고, 일하지 않는 날도 많은데…. 드라마틱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우여곡절 끝에 옆마을 장암리에서 한차례 작업을 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갔답니다. 외지에서 어렵게 찾아온 젊은이들이 행여라도 헤맬까 싶어 길에서 만난 아주머니들은 손짓 발짓을 해 가며 길을 알려 주시더군요. 내 엄마 같고 할머니 같아서 바라만 봐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걸 느꼈어요. 그렇지만 길찾기에는 요즘 말 그대로 ‘대략난감’이었어요. 그분들은 첫 동네니, 조금만 가면 뵌다느니 하며 막연한 설명으로 일관하셨고, 어딜 가나 비슷비슷한 시골 마을 모습에 가슴은 두근두근했습니다. 드디어 도착한 곳은 장암 1구. 우리나라에서 꼬막잡이라면 대포리와 함께 최고로 치는 유명한 곳이지요. 쥐 죽은 듯 조용한 마을 안으로 들어가 마을 회관을 찾았습니다. 백발성성하신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들이 마실 나와 계시더군요. 꼬막 잡는 게 뭐 볼 거 있어서 멀리까지 왔느냐고 하면서도 다들 참꼬막이 제일 맛있다고 은근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열댓 살의 파릇파릇한 나이에 신랑 얼굴도 모르는 채 시집와 여태 살아간다는 할머니들, 그 얼굴에서는 젊은 시절의 고생스러움과 황혼의 쓸쓸함이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들의 여생은 전라도 사투리대로 ‘깝깝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었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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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땀방울로 벌교 갯벌은 뜨겁다 물이 빠지면서 드러나는 갯벌은 낯선 이에게는 미지의 대상이기도 하고, 두려운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모래 섞인 곳과 달리 차지고 깊은 진흙뻘이기 때문에 잠시도 서 있지 못한다는 벌교 갯벌은 국제 협약에 의해 보전 습지로 등록될 만큼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문득 태안 지역의 기름 유출 사건이 떠오르면서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람들에게 베풀기만 하는 자연이 고맙다는 생각도 잠시 해봤습니다. 오후 3시 30분이 가까워지자 체크무늬의 챙 넓은 모자와 가슴께까지 올라오는 고무 물신, 빨간색 고무장갑으로 완전무장한 장암 1구의 동네 여인네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널을 갯벌 가장자리에 가져다 두고, 모닥불 가까이로 다가갑니다. 스무 명 남짓한 여인들은 물이 완전히 빠지기를 기다리면서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모닥불에 몸을 덥힙니다. 살을 에는 바닷바람과 다리가 쑥쑥 빠지는 갯벌에 맞서며 살아가는 그들. 어쩐지 그들에게서는 ‘날것’이 주는 싱싱함이 느껴졌습니다. 글쎄요, 삶의 최전방에 나선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생생함이라고 할까요. 그들은 느긋해 보였지만 눈빛은 비장했고, 입은 야무지게 앙다물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갯벌 속에 깊이 박혀 있는 꼬막은 무슨 의미일까. 한 바구니 캐면 손주 녀석 손에 쥐어 줄 용돈이 나오고, 두 바구니 캐면 젊은 시절 속 꽤나 썩혔던 영감탱이에게 뜨신 점퍼 하나 사 입힐 수 있는 보물 창고였겠죠. 내 몸 부리는 만큼 살림은 펼 수 있으니 몸 아낀다고 주저하지 않았을 겁니다. 스스로 신명을 불어넣으며 열심히, 열심히 보물을 캐며 살았을 겁니다. 빼꼼하게 드러나는 여인들의 볼은 빨갛게 얼음이 박혀 있었고, 손은 찬물에 수도없이 담갔다 빼서 아무리 로션을 발라도 더 이상 매끄럽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지요. 그래도 다행이다 싶은 건 벌교 참꼬막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참꼬막 생산량의 65%를 차지한다니 상당하지요. 참꼬막은 맛뿐 아니라 영양 면에서도 우수한 식품입니다. 단백질과 철분, 비타민이 듬뿍 들어 있으니까요. 벌교에 가서는 주먹 자랑을 하지 말라는 말은 바로 영양 많은 참꼬막 때문에 생겨났을 정도랍니다. 눈 깜짝할 사이 동네 여인들은 널을 잡아 타고 갯벌 안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갑니다. 널 위에 바구니를 핸들 삼아 양손으로 잡고, 왼쪽 다리 무릎을 굽혀 얹습니다. 오른쪽 다리는 마치 배의 노를 젓듯이 갯벌 위를 가볍게 밉니다. 겨울바람을 가르며 스르륵 스르륵 멀어져 가는 동네 여인들의 모습이 점점 작아집니다. 꼬막은 원래 손으로 잡아야 좋습니다. 왜냐하면 손길을 피해 꼬막이 입을 다물기 때문에 뻘이 들어가지 않거든요. 물론 이제는 커다란 빗처럼 생긴 채취기로 갯벌을 긁어낸 다음 비스듬하게 세워서 바구니 안에 붓습니다. 바구니에 꼬막이 한가득 쌓이면 미리 들어와 있던 배에서 크기별로 선별 작업을 해 그물망에 담습니다. 갯벌에 머무는 서너 시간 동안 몸을 녹이느라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 외에 잠시도 손놀림을 쉬지 않습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그때가 바로 퇴근 시간. 출발했던 길을 따라 그들은 다시 돌아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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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밭과 소설의 배경지가 살아 숨쉬는 곳 아침 일찍 회천면의 율포 해수욕장으로 달려가 일출을 보았습니다. 동해가 아니어서인지 붉은 기운은 덜했지만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지요. 귀가 떨어질 듯 쨍한 칼바람을 헤치며 달려간 곳은 차밭. 회천면에서 보성읍으로 가다 보면 봇재 고개를 만나게 돼요. 지금이야 기생오라비마냥 반질반질한 길이 닦여 있지만, 옛날 사람들은 지팡이 하나 의지하며 이 고개를 넘었다 합니다. 남도의 판소리라 불리는 서편제는 보성에서 시작이 되었는데, 수많은 소리꾼들이 봇재 고개를 오갔다고 해요. 한을 담아 내지르던 소리꾼의 걸진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멀리 영천 저수지와 득량만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기분입니다. 봇재 고개 아래쪽에는 영화와 CF 촬영지로 유명한 대한 다원이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입구까지 700m나 이어지는 삼나무 길을 따라 오르니 겨울 차밭이 시원스레 펼쳐집니다. 햇살에 온몸을 내맡긴 녹차 잎들은 여전히 초록의 빛깔을 머금고 있더군요. 사람들은 차밭 사이사이를 걸으며 생경한 풍경에 눈을 빼앗깁니다. 고요한 아침, 간간히 들리는 새소리와 어우러지는 차밭은 참으로 평온하고 정갈합니다. 눈이 즐겁고 콧속이 황홀해지는 기분, 귀마저 호사스러운 잠깐의 휴식으로 마음은 한껏 행복해졌습니다. 하지만 욕심 많은 여행자는 툴툴 털고 일어나 또 다른 길을 향합니다. 밤을 새워 읽던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된 자리, 그 곳을 찾아가야 하니까요. 소설은 해방 후 첨예한 사상 대립으로 굴곡진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소화다리나 남도 여관, 김범우의 집 등은 이야기의 무대가 되었지요. 신경 쓰지 않으면 쉬이 지나치는 길목길목마다 반가운 장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등장 인물이 살아 움직이며 나타나지 않을까 내심 기대가 되고, 잊지 못할 장면을 떠올려보는 즐거움이 쏠쏠했습니다. 하루 전날 보성에 도착했을 때 조금 놀랐습니다. 구도로들이 한켠으로 밀려나고 고속도로처럼 쭉쭉 뻗은 도로들이 군데군데 차지하고 있었거든요. 여행자가 갖는 이기적인 마음이 슬그머니 들더라고요. 가슴으로 기억하고 있는 예전 모습 그대로 영원히 남아 있어 주었으면 하는…. 꼬불꼬불하고 둥글둥글했던 그 모습으로요. 그곳 사람들이라고 신식을 싫어할 리 없는데 말이죠. 편리한 걸 마다할 리 없는데도요. 그저 조금 덜 다치게 해 달라고 빌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언젠가 내 살던 곳을 떠나 또 한번 발걸음을 할 곳이기에 바람은 더욱 간절했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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