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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코리안들이 신대륙을 발견했다! 원문보기 글쓴이: 오두
<해달과 배달의 물길>
강원도 정선 용소(龍沼)우물 수중동굴과
우물은 바다로 통한다고 믿은 신라인들
-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은 "우물 안으로 들어가 바다로 가는 용"의 반대말 -
- 우물에서 마신 한 바가지 물은 용이 되어 바다로 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 -
- 선덕여왕이 세운 첨성대(첨성대)는 도리천(忉利天) 선덕여왕릉과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한 세트로 해석되어야 -
넘치는 정치 경제 사회 기사들 사이에서 나는 역사 문화 그리고 자연 관련 기사들을 찾아다닌다. 오늘 인터넷으로 본 <연합뉴스> 기사들 가운데 강원도 정선에서 발견된 '한국 최대 길이의 우물 동굴'에 관한 최근 기사가 눈에 띈다.
전국적으로 이러한 우물 동굴이 적어도 1천개 이상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과연 삼국시대 사람들은 이와같은 우물동굴을 보고 우물에 대한 신화적인 특별한 신앙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우물을 통하여 용이 바다를 왕래한다는 믿음이다.
폭포 아래 선녀탕이나 십자소와 같은 아주 깊은 소(沼)라든지 강물에도 절벽 아래에 깊은 소(沼)에는 "명주실을 한 꾸리를 풀어넣어도 바닥에 닿지 않는다"는 등의 말과 함께 "용이 사는 용소(龍沼)"라는 말이 꼭 붙어다녔다. 이번에 정선에서 발견된 우물 동굴도 용소(龍沼)라고 하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용소(龍沼)라면 단연 미국 미시시피 강 인근에 많다. 필자가 가 본 미국의 동굴들에는 거대한 수중동굴들이 상당히 존재한다. 특히 미조리주에는 빅 스프링을 비롯하여 거대한 강물이 흘러나오는듯한 생물이 수십 마일 동굴을 통과하여 흘러나온다. 스쿠버 다이버들이 이러한 미조리주 수중동굴을 탐험하여 물이 흘러들어간 곳으로 들어가 반대편으로 나와 탐사를 마친 것은 물론이다.
캔터키주 메머드 케이브 동굴처럼 물이 흘러나오는 동굴에 배를 타고 들어가는 동굴들이 제법 있다. 아이오와주 스쿠프 케이브도 그 하나다. 오래곤주 스프링 케이브(Spring Cave)는 물이 철철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동굴이다. 미네소타주 사립 동굴인 나이애가라 케이브는 그 끝에 높은 폭포가 있다. 테네시주 챠타누가에 있는 루비 폭포(Ruby Falls)은 가장 높은 동굴 폭포이기도 하다.
그런 미국의 동굴들 이야기에는 필히 인디안들의 신화와 전설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미조리주 메라멕스 동굴에 가면 동굴은 인디안들에게서 "용이 빠져나간 길"로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동굴들도 마찬가지로 "용이 나온 곳"이다. 특히 제주도의 용천굴처럼 동굴 속에 물이 있으면 용천 또는 용정으로 불린다.
한국동굴연구소와 네파 익스트림 스쿠버팀에 의하면 12월 10일(2012년) 그곳 강원도 정선군 화암면 백전리 용소굴은 국내 육지에서는 가장 길고 깊은 수중동굴이라고 언급하면서 "산골마을에서 오랫동안 작은 우물로 알고 있던 곳이기도 하다"라고 발표했다.
정치와는 달리 자연관련 뉴스들은 팩트 이외에 그 어떤 해설이나 비평이 따라 붙지 않는다. 나는 그런 해석과 비평을 붙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한 사람이다. 이 글에서처럼 나는 '우물' 글자 두 자만 써놓고 두 시간 동안 강연을 하는 사람이다.
자연을 보면서 단순히 동물적 감각으로 현상으로만 보는 것을 넘어 역사적 사회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아는 것은 영화로 말하면 3D로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은 지적 심미적 문화적 이해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강원도 정선군 화암면 백전리 용소굴은 그 지역 주민들이 우물물로 사용했다. 용소굴이 최대 길이의 수중동굴의 성격을 넘어 '우물 동굴'이라는데에 필자는 주목한다. 이 글을 쓰게 된 중요성 또한 용소굴이 그 지역 주민들에 의하여 우물물로 사용했다는 것의 역사 문화적 가치가 지대함을 주장하고자 함이다.
신라인들처럼 그랜드캐년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나바호 인디안들은 우물 속으로 들어가면 바다로 간다고 믿었다. 메소아메리카 인디안들의 유명 피라미드들은 그 밑이 자연 우물 동굴들이었다. 그 우물들은 바다로 통한다고 믿었다.
우물은 여신의 심벌이다. 용녀가 우물로 들어가 바다의 용왕의 딸로 돌아간다는 신앙은 우물과 여성의 신화를 바탕하고 있다.
*강원도 정선에서 발견된 용소(龍沼) 우물 수중동굴. <NEPA 익스트림 스쿠바팀 제공>
옛사람들에게 '우물은 바다로 통하는 길'로 여겼다.
*강원도 정선에서 발견된 용소(龍沼) 우물 수중동굴.
정선에서 국내 최대규모의 수중동굴이 발견되었다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 한국사에서 역사문화적 해석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있다. 특히 이번에 발굴된 수중동굴이 그 지역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해온 '우물'로 여겨온 곳이기 때문이다.
우물인데 그 깊이가 30m가 넘고 길이가 무려 140m 이상이 된다는 것은 옛 우리 조상들에게는 어떤 생각을 하게 했을까? 바다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지질학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시대 사람들에게 우물은 특히 자연 우물은 바다물에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역사 문헌을 통하여 나나타는대로 삼국시대 신라시대 사람들은 우물을 바다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정선에서 발견된 우물에 대한 기사 내용을 좀더 살펴보자.
현재까지 최대 수중동굴로 알려진 경북 울진군의 천연기념물 제155호 성류굴은 길이가 85m 정도이다. 흥미롭게도 국내 수중동굴 최대 1,2위 동굴들이 동해안권이라는 사실이다. 동해바다로 이어지는 생각을 해온 옛 우리 조상들의 생각에 이어지는 현상이다.
탐사팀은 정선 용소 우물 굴이 더 탐사를 하게 되면 그 길이가 더 긴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집 뒤안에는 동네에서 가장 깊은 우물이 있었다. 지금은 뚜껑을 덮어 펌프물로 바꾸었지만, 두레박을 내려 퍼올리는 우리집 뒤안길 우물 물은 차겁기로 유명하여 여름에는 동네 건너편 사람들도 개울물을 건너 우리집까지 올라와 우물물을 주전자에 퍼가기도 했다.
그런 연고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우물에 대한 사고를 많이 하게 되었다. 우물은 지하수 물길이 서로 연결되어 물이 솟아난다는 것은 쉽게 상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 우물 속의 물길은 어디로 이어져 있을까 하는 상상력은 나중에 역사 문헌 속에서 "바다로 통한다"는 기록들에서 나에게 많은 상상력을 더하게 해주었다.
우물 속에 들어가면 "닭우는 소리가 들리고 마을이 있다"고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은 우물에 연관한 바다로 통하는 신화적인 이야기들에서 비롯한 것이다.
칠월칙석 이야기는 사실상 우물 이야기다. 보름달이 뜨는 밤 직녀가 폭포 용소에 내려오고 나중에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린다든지 견우는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구조는 모두 '우물' 이야기다.
직녀는 사실상 하늘이 아니라 산상 옥녀봉(玉女峰)에서 폭포로 내려온 것이다. 옛 신화에서 '하늘'은 산상을 의미했다. 옥녀(玉女)의 폄하된 칭호가 직녀(織女)이다.
신라의 첨성대(瞻星臺)는 서라벌에 있는 옥녀봉(玉女峰)과 한 세트로 해석되어야 제대로 풀린다. 옥녀봉에서 첨성대와 발월성은 해돋는 대왕암과 일직선상으로 이어지며 그 사이에 첨성대를 지은 선덕여왕의 왕릉이 있다.
서라벌의 반월성(半月城)은 옥녀봉에서 옥녀가 첨성대 우물로 물을 긷는 두레박이다. 반월은 두레박을 상징한다. 첨성대 안에는 바다 물이 있다고 상정되어 있으며 그 깊숙한 곳에는 선덕여왕 왕릉이 있다.
선덕여왕은 살아생전 '도리천(忉利天)'에 묻히고자 했다. 그것은 첨성대 우물 안으로 들어간 바다의 '용궁'을 의미한다. 문무대왕은 선덕여왕 왕릉을 '도리천(忉利天)이라 여겨 그 앞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선덕여왕을 '용왕여신'으로 섬겨 그곳 사천왕사 앞에서 문두루비법을 행했다.
신라 왕들이 사는 반월성은 그 자체가 견우가 들어간 두레박이며 신화적으로 첨성대(瞻星臺) 우물 안으로 늘어트려 선덕여왕이 사는 '도리천'에서 거룩한 바닷물을 퍼올리는 상징이 된다. 문무대왕은 견우가 되어 선덕여왕의 도리천을 향하여 첨성대 안으로 두레박을 드리우는 상징적 행위가 그의 문두루 비법을 선덕여왕 왕릉을 모시는 사천왕사 앞에서 행한 것이다.
선덕여왕이 첨성대(瞻星臺)를 만들었던 배경은 이러한 신라인들의 신화와 서라벌의 유적들의 일련의 연결을 통하여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따라서 서라벌의 첨성대는 바닷물에 이어진 하늘길로 올라가는 우물이다.
견우직녀 이야기에서 '한 두레박'의 물은 직녀가 목욕을 할 물을 넘어 견우가 직녀를 만날 수 있는 '승천 엘리베이터'라는 중요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두레박은 바가지를 말하며 한 바가지 물은 한 두레박 물이다. 폭포에서 견우가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용소(龍沼)에서 용이 승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물에서 마신 한 바가지 물은 용이 되어 바다로 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가 있다.
바이블 구약성서에는 샘물에서 물을 마실 때에 손으로 물을 퍼서 마시도록 하고 입을 샘물에 직접 대고 마시지 못하게 했다. 샘물이 신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인들에게도서 우물에서 물을 퍼오게 하여 마신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김유신 장군의 우물에서 퍼온 바가지 물을 마신 이야기는 유명하다.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하는 전쟁터에 나가면서 부하에게 일러 장군의 집 우물인 재매정에서 물을 한 바가지 퍼오게 해서 마시고는 출정했다. 이미 앞선 글에서 해석한 바 있지만, 전장에서 죽어 바다로 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 숨어 있다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문무대왕처럼 김유신은 스스로를 바다에서 온 용으로 여겼다. 고래나루에 고래장을 하여 외적을 지키는 해중대룡이 되겠다고 한 문무대왕도 그렇듯이 김유신은 전장에 나간다는 것은 죽어서도 바다로 가서 외적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이때 김유신 장군이 마신 그의 우물물 한 바가지의 물은 바다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강원도 정선 용소 우물 동굴 물을 그곳 주민들이 퍼다 마셨다는 것은 바다로 가는 신성한 의미의 동굴 우물인 것이다.
석탈해가 우물물을 마시는 이야기는 좀더 원대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우물과 바다의 연결은 바다에서 온 석탈해신화에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삼국유사> 탈행왕편에는 다음과 같이 요내정(遙乃井)이라는 우물 물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토해(吐解, 석탈해를 말함)는 동악(東岳)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떠 오게 했다. 백의(白衣)는 물을 떠 가지고 오다가 중로에서 먼저 마시고는 탈해에게 드리려 했다. 그러나 물그릇 한 쪽이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백의는 맹세하였다. "이 뒤로는 가까운 곳이거나 먼 곳이거나 감히 먼저 마시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물그릇이 입에서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는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東岳) 산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세상에서 요내정(遙乃井)이라고 부르는 우물이 바로 이것이다." <삼국유사> 탈해왕편.
요내정 우물물은 석탈해가 온 "왜국 동북 1천리" 즉 오호츠크해 또는 베링해 고래바다에서 온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추운 겨울날 금속성 그릇에 물을 마실 때에 입술이 붙은 문제를 해결한 석탈해의 경험을 통하여 석탈해가 추운 먼 바다에서 온 '용(龍)'임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우물과 바다 이야기는 신라시조 알영신화에도 반영되어 있다.
알영정(閼英井) 우물가를 무대로 설정했지만 내용상은 바닷가라는 것이 드러난다. "갑자기 용이 나타나 죽었다. 용(고래)의 배를 갈라 나온 여아"가 알영이라고 <삼국유사>가 기록한 것은 우물과 바다의 연속성을 그 무대로 한 것을 보여준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이 '우물 옆에서 나왔다'는 것은 모두 바다에서 용으로 왔다는 뜻에서만이 제대로 신화를 해석할 수 있다. 필자는 신화 연구를 위하여 오랜 세월 많은 투자를 해왔다.
박혁거세가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옆에서 발견되었고, <삼국유사>는 박혁거세 어머니를 '해척지모(海尺之母)'라고 했다. 박혁거세 부인 알영은 용의 배를 갈라 나왔다고 했는데 그 곳이 알영정(閼英井) 우물이라는 것은 바다에서 온 용녀(龍女)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원효대사가 당나라 유학을 간다는 것은 서해 바다를 건너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원효대사는 서해바닷가에 당도하기 전에 어느 동굴에서 밤을 유숙한다. 그때 그의 유명한 '해골바가지 물' 이야기가 나온다.
원효에게서 그의 동굴은 우물을 의미하며 해골바가지 물은 견우의 두래박이며 석탈해의 요내정 바가지 물이다. 마시고 바다를 건너간 용이 아니라 이튿날 해골바가지인줄 알고 토해버려 이땅에 남게 된 셈이다.
원효와는 달리 의상대사는 당나라 유학을 했다. 그의 우물은 선묘정 이야기로 부석사에 남아 있다.
부석사 선묘정(善妙井)이라는 우물이 있다. 사람들은 부석사의 선묘(善妙) 신화에서 선묘정(善妙井) 우물이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수가 많다.
부석사의 선묘정(善妙井)은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올 때 의상대사를 흠모하던 혀지의 선묘(善妙) 처녀가 서해바다까지 따라와 떠나가는 의상대사의 배를 향해 바다에 뛰어들어 용이 되었다. 그리하여 부석사 그 용은 의상대사가 창건한 무석사에 와 있다는 것을 부석사의 선묘정(善妙井)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선묘 처녀(善妙)는 용이 되어 선묘정(善妙井) 우물 안으로 올라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선묘정(善妙井) 우물은 선묘(善妙) 여신이 서해바다에서 온 신룡 즉 '용녀(龍女)'였다는 것을 새겨주는 선묘정(善妙井) 우물이며 언제든지 선묘 여신은 다시 그 우물 안으로 들어가 서해바다로 돌아갈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선녀는 바다에서 왔다는 신화에서 선녀와 결혼한 남편이 선녀를 따라 가기 위하여 우물에 몸을 던진 몽정차(蒙頂茶)의 설화도 중국에 남아 있다. 작제건의 부인 용녀가 우물 속으로 들어가 바다로 갔다는 것과 같은 맥락의 바다의 여신 숭배 잔흔이다.
용정(龍井)이라는 이름의 우물은 전국적으로 깔려 있다. 우물에서 용이 나온다는 것은 바다에서 용이 우물로 통하여 왕래한다는 신라시대 신화를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우물 동굴에서 용이 발견된다는 것은 거대한 용이 아닐 수도 있다. 이번에 발견된 정선의 용소 우물 동굴에는 도룡뇽과 무척추 동물인 연가시도 발견되었다. 도룡뇽이 작다고 할지 모르나 옛사람들에게 이들 우물 동굴 동물들은 '용'으로 여겼다. 우물 속의 물고기는 용으로 여긴 예는 신라시대 사람들 의식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분황사의 삼용변어정(三龍變魚井) 전설에서 우물 속의 용이 물고기로 변했다가 다시 용으로 되돌아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삼룡번어정(三龍變魚井) 신화는 <삼국유사> 38대 원성대왕편의 기록이다. 신라 제26대 진평왕이 지은 동천사(東泉寺) 절의 청지(靑池)라는 우물은 동해(東海)의 용(龍)이 왕래하는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당나라 사신이 주동하여 신라의 우물 용을 물고기로 바꾸어 바다에 놓아버리려던 음모가 발각되어 다시 용으로 우물에 살도록 했다는 줄거리다. 불교에서 말하는 '물고기 방생'이란 물고기가 용으로 다시 환신하여 살아가도록 풀어준다는 의미이다.
용이 된 물고기는 다시 우물로 돌아온다고 믿었다.
용소(龍沼)라 함은 글자 그대로 용이 나오는 곳을 뜻한다. 정선 용소 우물 물을 마시는 사람들은 바다에서 용이 용소 우물 동굴을 통하여 나온다고 믿어 왔을 것이다.
감은사를 지은 신문왕은 해중대룡이 된 아버지 문무대왕이 감은사 금당 아래 용구(龍溝) 구들고래로 매년 돌아온다고 여겼다. 감은사 금당은 문무대왕이 대룡이 되어 돌아오는 '우물'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물과 바다의 연결의 기본 선이해(pre-understanding)이 없이 역사적인 우물 해석을 할 수 없다.
신라시대 사람들은 용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다시 용이 된다고 여겼다. 바다로 돌아가 해중대룡이 된다고 말한 사람은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이다. <삼국유산> 어산불영 편에는 다음과 같이 용(龍)이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은 죽어 굴 속의 대룡왕(大龍王)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에 여래(如來)가 세상에 있을 때에 이 용이 소 치는 사람이 되어 왕에게 소의 젖을 올렸는데, 올리다가 잘못하여 꾸지람을 받자 속으로 분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 돈을 주고 꽃을 사서 부처님에게 공양했다. 그리고 솔도파(솔堵婆)에게 수기(授記)하기를, '부디 악룡(惡龍)이 되어 나라를 깨뜨리고 왕을 해치게 해 주시오'하고는 석벽(石壁)에 가서 몸을 던져 죽자, 드디어 이 굴 속의 대룡왕(大龍王)이 되어 악한 마음을 일으켰다." <삼국유산> 어산불영
석벽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것은 낭떠러지에서 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절벽에서 투신자살한다는 것은 우물 속으로 들어가서 바다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은 바다의 용왕의 딸 용녀와 혼인했다. 용녀는 마지막으로 작제건과 헤어질 때 우물 속으로 들어가 바다로 돌아간다고 하며 우물로 들어가 사라졌다.
신라인들 가운데는 여인들이 자살할 때 우물에 몸을 던진 예들이 있다. 예를 들어 <화랑세기>에는 낭두(郎頭) 대남보(大男甫)의 딸은 우물에 자살했다. 필자는 <역사산책> 경주국립박물관 신라 우물 안의 인골은 누구였나? 및 <오두의 역사산책> 신라 우물 동물뼈에 대한 제의적인 배경 에서 "경주국립박물관 신라우물 인골 주인은 대남보(大男甫)의 딸"이라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대남보(大男甫) 딸은 태종무열왕 아버지 풍월주 용춘공(龍春公)의 연인으로 버림받자 우물에 몸을 던졌다. 근년에 발굴된 경주국립박물관 부지의 우물에서 발굴된 유골은 대남보(大男甫) 딸의 유골이라는 것을 필자는 여러 각도에서 증명했다.
대남보의 딸이 우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는 것은 바다에 몸을 던진다는 것과 같은 신화적 믿음이 있었다. 심청이가 바다에 몸을 던진다는 것은 우물에 몸을 던지는 것의 연장선에 있다.
<삼국유사> 원성대왕편에는 꿈에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간 꿈 해몽을 '궁궐에 들어가는 의미'로 풀이하는 내용이 나온다. 용궁을 의미하는 것이다. <심청전>에서 심청이 빠진 인당수는 우물의 연장선에 놓이며 그 인당수 아래에는 수정궁이라는 고래뼈로 대들보로 삼은 용궁에서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심청은 용녀 신화의 한 파생인 것이다.
우물은 바다의 여신숭배에서 나왔다. 첨성대는 바다와 하늘로 여신이 왕래하는 길의 의미로 서라벌에 만들어졌다. 첨성대는 선덕여왕이 만든 것이라는 것 자체가 하늘 우물의 의미로 만들었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우물 형상의 첨성대
선덕여왕이 바다와 하늘로 통하는 길로 만든 첨성대.
필자의 관련글: <신화 이야기90> 첨성대(瞻星臺)는 기우제를 위한 우물 제단이었을까>
*김유신 장군 집터에 있는 재매정 (財買井) 우물. 사적 264호
땅 속으로 박힌 첨성대 모양이다.
*재매정 우물 상단부
*알영정(閼英井) 우물지를 돌로 덮어 둔 모습.
우물과 바다의 왕래 신화는 왕실 외에 평민들의 가정에도 존재했다.
우물이 없는 모든 집에는 '우물'을 상징하는 곳이 있다. 그곳이 부엌이며 물두멍이다.
집안의 '우물' 역할을 하는 부엌을 '정지'라고 했다. 그 정지는 한자로 '井地 또는 井池'의 의미를 가진다.
'정지(井地)'란 첨성대와 같은 우물 형상의 이미지를 가지기에 그 구조가 집터보다 더 낮게 파고 그 천정 또한 높게 하였으며, 천정과 벽이 닿는 부분은 첨성대처럼 연기가 빠져 나가도록 열린 창틀을 만들어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집 키친룸에는 천장에 네모진 채광창이 있다. 나는 그 채광창을 볼 때마다 '정지(井地)'의 첨성대 우물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정지(井地)'란 일종의 첨성대와 같은 하늘 우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첨성대와 같은 정지에서 아궁이는 첨성대의 '아궁이'와 같은 창문의 의미가 있다.
아궁이로 불을 때면 굴뚝으로 연기가 올라가는 것은 '구들고래'다. 감은사 금당 아래 구들고래로 해중대룡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것이 모든 온돌집의 구들고래의 의미이다.
아궁이는 '井'자처럼 만들었다. 아궁이는 '정지(井地)'의 옆구리 구들고래이다.'井'자 아궁이는 첨성대의 '옆구리'로서 태양 빛이 들어오는 뜨거운 햇볕이 들어오는 창문인 것이다.
아궁이는 일종의 동굴인 것이다. 수중동굴들은 물길 동굴을 지나 하늘로 올라가는 동굴이 있다. 그 입구가 아궁이라 할 만한 것이다.
샘물 우물은 용이 들어가 사는 곳이라는 것은 바다로 왕래한다는 의미이다. 용이 땅 속으로 들어갔다거나 땅 속에서 나왔다는 곳은 그곳이 용이 나온 우물이라는 용정(龍井)이 되고 좀더 넓으면 용이 사는 늪이라는 용소(龍沼) 또는 용연(龍淵)이 된다는 뜻이다.
<삼국유사> 만파식적 편에서 신룡이 왕에게 바친 옥대 이야기가 있다. 그 옥대에는 용이 새겨진 여러 쪽편들로 되어 있는데 "옥대의 왼편 둘째 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금새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곳은 이내 못이 되었으니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불렀다"라고 쓰고 있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은 "우물 안으로 들어가 바다로 가는 용"의 반대 의미에서 나온 말이라고 나는 풀이한다. 개구리는 뱀에게 먹힌다. 개구리는 우물에 들어가도 바다로 가지 못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물 속에서 물길을 따라 바다로 갈 수 있다고 믿은 옛 사람들에게 우물은 용이 드나드는 바닷길이었다. 이 글이 길어지기 전에 여기에서 단락을 지어야겠다. 정선 용소굴 우물 동굴은 나에게 그 의미를 설명하자면 몇 시간이고도 모자란다. 우물과 바다 이야기는 특히 우물을 통하여 세계로 뻗어간 코리안 조상들의 물길 이야기에서 중요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정선 용소굴은 그저 우물 동굴 안으로 들어가 도룡뇽이나 '가느다란 용'이라 할 연가시만 살고 있지만, 그 용소굴의 신화적 역사 문화적 의미는 석굴암이나 로마의 판테온에 이어지는 역사 문화적 맥락이 있다. 새벽 우물물을 사발에 담아온 정화수(井華水)에 비치는 하늘의 샛별 이야기는 우물과 용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필자의 앞선 글 <오두의 문화비평> 포석정은 신라인들의 '세례(洗禮)' 장소였을까?에서 논했지만, 정화수(井華水)는 우물물의 바다 즉 우주성을 의미하고 있다. 첨성대가 선덕여왕의 정화수를 퍼올리는 직녀의 우물이라면 석굴암의 본존불은 석굴암 궁륭부가 우물이며그 안에 앉아 있는 '대룡왕(大龍王)'의 위치에 있다고 필자는 풀이한다. 궁륭부는 첨성대처럼 본래 뚜껑이 없는 '우물 형'이었다. 로마의 판테온(Pantheon) 신전의 궁륭은 건축사에서 뚜껑없이 하늘의 태양빛과 별빛이 비쳐들어오는 채광창이며 '우물' 입구였다. 판테온이 기독교 교회로 사용되기 이전 로마 토속적인 신을 섬긴 신전이었듯이 석굴암은 본래 용왕신을 모신 곳이었다는 것을 필자는 <신화이야기 168> 석굴암과 로마 판테온의 전방후원 건축양식 비교 에서 그리고 <신화이야기 167> 석굴암 동굴 자리 불교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에서 밝혔다. 별빛과 햇빛이 석굴암의 일부였었다.
필자는 석굴암과 로마의 판테온은 서로 역사적 연맥이 닿아 있다고 생각하며 역사적 전형은 선사시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그 원형이라고 최초로 주장했다. 서울 암사동 선사시대 주거형태는 음택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양택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전방후원 주거형태는 에스키모들의 이글루(Igloo)에서도 드러난다.
*우물 안을 닮은 석굴암 내부 궁륭부분. '우물 뚜껑'이 보인다.
석굴암 안에는 감로수 샘물이 밑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석굴암은 로마의 판테온 신전과 구조가 일치한다.
*로마의 펜테온. 궁륭 천장이 뚜껑이 없다. 햇빛 별빛이 신전의 일부다.
서양 건축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정표 건물이라고 평가되어 왔다.
판테온(Pantheon). 기독교 이전 신전이었다가 한때
성 마리아와 증인들의 교회(Church of St. Mary and the Martyrs)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교회가 아닌 신전으로 관광지가 되어 있다.
*로마 판테온의 구조 단면도. 전방을 2단으로 한 것부터 석굴암을 닮아 있다.
석굴암은 로마의 판테온 건축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석굴암 구조 단면도. 로마 판테온 구조를 닮아 있다.
*서울 암사동 선사시대 주거형태
음택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양택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누이트인들의 이글루(Igloo).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양택.
앞은 네모지고 뒤는 둥글다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은 간단히 말하자면 구석기시대 선사인들의 주거지인 둥근 천정의 띠집과 그 입구의 네모진 모양이 프로토타입인 것이다.
선덕여왕에 세운 첨성대는 전방후원 형식의 '전방'에 속한다. 후원은 어디일까? 그것이 선덕여왕릉 '도리천'이다.
*선덕여왕릉. '도리천'
전방후원(前方後圓)의 '후원' 부분이다.
*선덕여왕이 세운 첨성대.
선덕여왕릉이 '후원'의 위치라면 첨성대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전방'에 해당.
동짓날 해돋는 방향으로 첨성대와 선덕여왕릉은 대왕암으로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으로서 석굴암은 그 이전의 역사를 바탕하고 만들어진 것이다. 석굴암은 단순히 '서역 풍'으로 해석하는 것을 넘어 고대 신화시대의 우물과 용신화의 신앙을 불교적으로 융화시킨 것이다.
석굴암은 감로수 샘물이 나오는 일종의 '수중동굴'의 하나이다. 그곳에 불상을 모시기 전에는 용이 나오는 '우물'이었다.
<삼국유사> 어산불영 편에는 용이 사람으로 변하여 왕을 모시다가 죽어서 대룡이 되고 석굴에 거하는 대룡왕(大龍王)이 되었다고 했다. 그 대룡왕을 부처가 굴복시켜 그 석굴에 들어앉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석굴암의 전신 신앙이 용왕신 이야기이다.
석굴암을 단순히 외래종교인 불교문화만 강조하는 것보다 이러한 전래의 신화를 포함시켜 강조할 때 오히려 불교 유적은 더욱 민족적인 유적으로 보호되는데 일조할 것이다.
필자의 강연이나 강의를 들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아마도 함석헌 선생이나 이어령 선생보다 필자의 강의가 내용상에서나 흥미상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미있는 강연이 아니라고 자부한다. 이렇다할 명망있는 현직 교수들이 필자의 글을 도용해서 자신의 주장인양 발표하는 것을 멀리 미국에서 바라만 보아야 하는 것은 참으로 무상하다는 것을 넘어 한국의 지성들의 실력은 커녕 그 양심의 바닥을 보는 듯하여 씁쓸할 뿐이다.
필자가 지금 쓰고 있는 이런 글 한 편은 한 자리에 앉은 채로 쓰기도 한다.겸허를 떠나 필자의 온 오프라인을 통하여 문화 역사 비평에 대한 열성과 내공은 그만큼 평가를 받아왔다고 자부하는 바이며 필자가 한국에 나가면 크고 작은 강연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글도 끝까지 읽어보면 한국에서 필자만큼 내용을 갖춘 인문학을 재미있게 강의하는 사람도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필자는 미국 주류사회에서나 한인 커뮤니티에서 전국에 걸쳐 영어로 그리고 우리말로 대중강연의 경력을 쌓아왔다. 필자의 글은 보다 대중성있게 개방해 왔으며 인터넷을 통하여 문화 역사 신화 문화인류학 관련 검색어를 치면 필자의 글로 연결되는 그 퍼센티지는 가장 높은 빈도수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다.
이러한 인문학적 키워드로 검색해야 할 내용이 있다면 검색어에 필자의 필명 '오두'를 함께 치면 필자가 생각하는 해당 검색어에 대한 글이 나타날 확률은 아주 높다.
<워낭소리>의 워낭의 유래에 대하여 필자를 김환 아나운서와 박미선이 진행하는 <국민고시>에 출연시키면서 SBS 작가가 필자에게 전화로 "문화인류학의 전문가"로 치켜 세운 것은 그만큼 필자의 온 오프라인의 활동과 그 내용을 충분히 검토한 뒤의 판단이라고 했다는 것은 필자의 피나는 연구와 현장 탐방 답사 노력이 결코 남다른 고투의 길을 밟아온 결과의 한 반응이기도 하다.
강원도 정선군 화암면 백전리 용소굴은 한국 최대 길이의 수중동굴 의미보다 한국 최대의 '우물 용소'라는 사실을 강조할 때에 역사신화적인 명승지가 될 것이다. 동해바다의 용이 드나드는 곳으로 '용소 우물 동굴'이라 하면 더욱 의미가 깊은 명소로 알려지게 될 것이다. (12/10/12 오두 김성규 코리안신대륙발견모임 )
*필자의 관련글들:
<신화 이야기90> 첨성대(瞻星臺)는 기우제를 위한 우물 제단이었을까
<신화 이야기92> 원효대사의 하늘기둥과 선덕여왕의 하늘우물, 첨성대(瞻星臺)
<문화비평> 포석정은 신라인들의 '세례(洗禮)' 장소였을까?
<역사산책> 경주국립박물관 신라 우물 안의 인골은 누구였나?
<오두의 역사산책> 신라 우물 동물뼈에 대한 제의적인 배경
<오두의 문화비평> 포석정은 신라인들의 '세례(洗禮)' 장소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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