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어느 봄날이었다. 의기양양하게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책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오늘따라 서두르며 엄마부터 찾는다.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다음 달에 수학여행을 간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소풍만 간다 해도 미리 날짜를 꼽으며 잠을 설치던 아이들인데,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으니 그 기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엄마를 보자마자 너무도 기쁜 아이는 대뜸
“엄마, 우리 다음 달에 경주로 수학여행가요. 다음 주까지 여행비 가지고 가야 되요”
“여행비가 얼마라던?”
대답을 하시는 엄마의 목소리에 왠지 힘이 없었고, 살짝 내뱉는 한숨소리도 들렸다.
“109원요.”
힘주어 대답을 하고선 어머니를 다시 힐끗 쳐다보면서 학교에서 받은 수학여행 안내통지문을 가방에서 얼른 꺼내 엄마에게 내밀었다. 잠시 고민하다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엄마는 아이에게 나직이 타이르듯 말했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너거들 수학여행만큼은 꼭 보내줄라 했는데, 지금은 당장 때꺼리도 없어 굶을 판이니 이번 수학여행 안가믄 안되겠나”
엄마의 아픈 마음과 집안사정을 헤아릴만큼 철이 들지 않은 아이에게 엄마의 미안한 부탁이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엄마, 일생에 한 번 있는 졸업수학여행인데 제발 보내주세요. 형 누나들 다 보내주면서 왜 나만 갈 수 없어요. 나 수학여행 가고 싶어. 우리 반에서 나 말고 수학여행 안가는 애는 아무도 없단 말이야…”
떼를 쓰며 울었으니. 지켜보는 엄마는 속으로 더 안타까이 울고 계셨을 것이다.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고 옷소매에 눈물을 찍어내는 아이의 손을 살며시 잡고선, 엄마는 젖은 눈자위를 훔치며 잔뜩 골이 난 아들을 타이르시듯 설득하려고 애를 쓰셨다.
“니도 생각해봐라. 형 누나들 모두 밀린 등록금도 몇 개월째 못 내고 있는데, 넌 우째 그리 철이 없노. 형 누나 등록금 때문에 친척들에게 벌써 몇 차례나 손을 내밀었는데, 무슨 염치로 또 부탁을 하겠노. 엄마도 이젠 더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엄마 얼굴 봐서 이번만 좀 참아라. 나중에 우리 형편 풀리면 내가 더 좋은데 구경시켜주께...”
지금으로 치자면, 그까짓 109원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영화관의 입장권이 10원, 공책 한 권에 1원하던 시절이었으니, 당시 형편으로는 결코 작은 돈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이는 그 109원이 없어 평생 단 한 번밖에 없는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갈 수 없는 집안 처지와 부모님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아이가 국민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집안 형편이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곧 군수발령을 눈앞에 두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공직을 퇴직하시고, 가까운 지인과 손을 잡고 사업에 뛰어 들었다. 하지만, 얼마 안있어 집안형편은 걷잡을 수 없이 기울고 말았다. 오랜 기간 안정적인 공직에 몸담으신 아버지 덕분에, 우리 가족은 정원이 무척 아름답던 대궐 같은 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었다. 아버지 사업에 난항이 계속되면서 온 식구들의 아름다운 추억이 구석구석 살아 숨쉬던 집도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
집을 팔고 겨우겨우 전세집을 얻었지만 그마저도 지탱하지 못하고, 급기야는 허름한 셋방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아이가 서럽게 울고 있는 오늘이 바로, 온 식구들이 이 셋방으로 옮겨온 지 불과 일주일밖에 되지 않는 날이었다. 한없이 서럽게 울고 나니, 아이의 마음은 오히려 조금은 진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아쉬움이 온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엄마의 아픈 마음이 아이의 마음에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던 모양이었다.
눈물은 과연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역설의 선물임에 틀림없다. 슬픈 눈물의 카타르시스효과때문이었을까. 아무쪼록 아이는 긴 울음을 그치며 이내 평상심을 회복했다.
이 아이는 여태껏 여러 악성 병치레를 하면서 무던히도 엄마의 속을 까맣게 태웠었다. 생후 한 달도 되지 않을 때부터 잔병들이 끊이질 않아, 엄마는 수없이 몸과 마음 고생을 겪으셔야 했다. 경기발작, 홍역, 수두, 관절염, 결핵, 늑막염, 복막염, 장티푸스, 눈병 등을 앓으며 허구한 날 엄마랑 수 없이 학교대신 병원을 드나들어야 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울 때 실컷 울다보면, 우는 동안 내면의 아픔과 슬픔을 돌아보며 자신을 이겨내는 놀라운 회복력이 꿈틀거리는 것 같다. 몇 시간을 실컷 우는 동안,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아이는 엄마에게 찾아가서 먼저 말을 꺼냈다.
“엄마, 걱정마요. 나 이번 수학여행 안 갈께요. 울면서 생각해보니, 엄마가 그동안 나 때문에 병원비도 많이 쓰고 속도 많이 썩으셨자나요. 대신, 수학여행기간 동안 엄마랑 저랑 같이 영화나 한편 봐요.”
아이도 엄마에게 이렇게 얘기를 내뱉고나니 속이 좀 후련해지는 모양이었다.
“아이고, 우리 대장 잘 생각했다. 장하다. 그렇게 하자.”
엄마도 아이의 결정에 무척 고마워하며 아이의 영화구경 제안에 흔쾌히 동의해 주셨다. 이리하여, 그 아이는 결국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이후에도 당시의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내면에 잠재되어있던 아쉬움과 설움이 복병처럼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며 기분이 가라앉곤 했지만, 더 큰 철이 나면서부터는 당시의 어려웠던 가정형편을 생각해서 수학여행 안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끼니도 굶을 판인데 형제들을 제쳐두고 나만 즐겁겠다고 여행을 갔다 왔더라면 오히려 두고두고 미안할 일이 될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외국에 건너와 바쁘게 살다보니, 그나마 그루터기나 옹이로 남아있었던 이런저런 추억들마저 세월의 풍력과 침식에 대부분 희석되고 말았다. 그러나, 세월의 강줄기를 따라 멀리멀리 떠내려 간 줄 알았던 초등학교 수학여행의 아픈 기억들이 오늘 아침에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당시 급우였던 한 친구가 그 당시 수학여행가서 찍은 사진들을 온라인 게시판에 올렸기 때문이다. 지나간 긴 세월만큼이나 아주 빛이 바랜 흑백사진들이었지만, 당시의 풋풋한 동심이 그대로 전해져오는 정겨운 옛 급우들과 담임선생님의 모습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수학여행을 함께 가지 못했던 당시의 아쉬움을 상쇄하고도 남을 반가움과 짠한 감동이 밀물처럼 밀려와 팍팍한 생활에 메말라 있던 내 마음을 모처럼 촉촉히 적셔주었다.
게시판에 올라온 그 어느 수학여행 사진에서도 내 얼굴을 찾을 순 없었지만, 켜켜이 쌓인 세월의 지층속에 묻혀있었던 어린시절 친구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을 다시 만난 기쁨에 오히려 모처럼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무리 아프고 슬픈 기억들도 세월의 필터에 여과되면 아름답게 되살아나는 묘한 것이 우리들의 추억인 듯 싶다.
첫댓글 저는 충청도 천안의 산골에서
지금의 보령시 대천으로 국민핵교 5학년 때 전학 갔는데
6학년(1968년) 때, 온양온천으로 1박 2일 수학여행을 갔다 온 기억은 있는데
수학여행비를 얼마 냈는지는 기억이 없어요.
온양 현충사와 온양온천에서 온천욕을 한 기억만이.....
저랑 같은 해에 수학여행 가셨으니, 아마도 경비는 엇비슷했겠지요.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가람과 뫼 1956년생, 원숭이입니다.
@박민순 반갑습니다. 갑장님^^
이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찰랑찰랑..
꿀꺽 참고 있습니다.
나중에 저도 졸업여행에 관련한
글 쓰고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졸업여행과 관련하여 다들 많은 사연과 추억들이 있을 거란 짐작을 해봅니다.
애잔한 추억이 담긴글
잘 읽었습니다.
어린마음에 엄마 위로해드리고
형제들 생각하는 마음에
저도 울컥 했네요~
영화관람비 10원
군것질값 5원
잠시 그때 기억이 떠올라
한참 추억여행 다녀왔습니다~^^
함께 추억여행하면서 공감하시고
따뜻한 흔적 남겨주셔서 고맙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장합니다. 그런 시련을 이겨내서
수도 없이 어려운 고비를 넘긴 나는
잘알아 들었습니다.
모든 것은 추억이라 생각하고 아름답게
살아가기 바랍니다.
공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추억의 마법으로 힘들어도 큰 티를 내지않고 열심히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늘 긍정적인 마인드로 무장하고 살아가겠습니다.
우리들 마음엔 참 많은 보석들이 추억이란 이름으로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담을 땐 분명 아픔으로 담았던 일도 세월 지나고 꺼내보면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가람님의 수학여행 추억에서도 반짝반짝 맑고 영롱한 빛이 납니다.
밤하늘 별처럼 초롱초롱 우리들 가슴에 박혀있는 그 추억들이 반짝이며 노년을 살아가는 힘의 원천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너무도 아픈 추억 그러나 훌쩍 성숙하게 해준 추억 그래서 더 열심히 사셨겠지요
아픈 추억들이 있기에, 좀더 겸손해지고 남을 배려하는 안목도 키워나갈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돌이켜보니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새삼 와닿는 것 같습니다. 귀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정말 초등학교 수학여행은 최고로 설레임이었지요
친구들만 있는 흑백사진 아득히
본인의 모습을 그리며 지금도 안타까운데 경주에 집 몇채쯤 사버리세요
그러면 그 아쉬움이 사라질까?
이밤 궁금해 하며 잠자리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