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요한 6,44)
구세주께서는 승천하신 후 제자들의 믿음이 약했으므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죄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자신들의 무력함을 알고 영원한 아버지께 간청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루카 성인이 우리에게
“제자들은 한 마음으로 무거운 쇠사슬을 풀어주시어
자신들의 어두운 지옥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사슬을 풀어주시고 감옥에서 꺼내시어
그들에게 진리를 가득 채워줄 성령의 학교에 집어넣어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밧줄’을 이용하시어 그들을 ‘여섯 번’이나 꺼내셨습니다.
‘첫 번째 이끄심’은 ‘주님께서 연민의 눈으로 제자들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이는 결코 평소와 같은 자비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특별한 자비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피조된 것들을 이용하시어
즉 사람들의 영혼의 빛 안에 모습을 드러내시어 사람들을 이끄십니다.
토마스 성인은 어떤 이방인들은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께서 머물러 계실 때 창조주 하느님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께 경의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을 통하여
사람들을 이끄시고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뿐만 아니라 사람들 안에서
사람들이 모르는 진리의 말씀을 하시면서
영혼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자신의 지식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영원한 법을 통하여 알게 된 진리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암브로시오 성인(St. Ambrose)이
“진리가 무엇이든 누가 말했든 모두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하고 말했듯이
진리를 말하는 모든 사람들도 성령으로부터 나온 진리를 말합니다.
따라서 영혼이 깊이 생각하게 되면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느끼게 되는데
주로 새벽 무렵에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걱정하시거나
벌을 주시기 위해 느끼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당신께 맡기고
당신의 거룩한 뜻에 따라 자기를 버리고 세상 것들을 버리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만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런 다음 영원한 아버지께서는
피조물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것을 아시게 되면
특별히 당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그를 이끄십니다.
이렇게 이끄시는 것을 ‘일치(union)’
또는 ‘끌어안으심(embracing)’이라고 부릅니다.
이 ‘선물’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과 땅과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 땅에 오시어 겸손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지극히 좋으신 주님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옳은 길로 인도하시려고 하기 때문에
인간은 하늘나라의 영광이나 이 땅의 영광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을 이끄시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사랑스런 눈으로 보시게 되고
기쁘거나 슬프거나 제자들이 당신을 찾게 만드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답하기 위하여
기쁘거나 슬프거나 하느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뜻을 따르도록 하셨으므로
제자들은 충실히 하느님의 길로 따라갔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길로 따라가게 되면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물을지 모릅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서는 특별히 배려하시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전혀 배려하시지 않습니까?”
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왕이 접견실로 다른 사람들보다는 귀족들을 부르려고 하듯이
하느님께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어떤 사람에게 특별히 사랑을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이를테면 하느님 마음대로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하느님의 초대에 진심으로 응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특별히 이끄셨는데
제자들이 진심으로 용서를 바라며 기도하는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사랑하는 스승님께서 그들과 함께 지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가치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진심으로 슬퍼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거룩한 삶과 비참한 죽음과 무한한 사랑과
자신들을 위하여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모두 버리신 것을 생각하고는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배은망덕함을 경멸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성찰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 손에 맡기고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도록 하느님께 애원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겸손하게 하느님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특별히 그들을 사랑하시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요한 15,5)에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고는 제자들이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하느님을 맞을 준비를 할 수 없었다고 반박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을 이 정도로 준비하게 하시고 당신께로 이끄신 것은 바로 하느님이었습니다.
나는 우리는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착한 일을 전혀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은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몫도 있게 마련입니다.
성령(聖靈)을 저버리지 말아야 하고 자기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원하지도 않는 사람을 성화(聖化)시키시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빛이 비쳐도 우리는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합니다.
아무리 태양이 밝게 빛나도 두꺼운 천으로 눈을 가리게 되면 보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영원한 아버지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빛을 비추실 때
제자들은 눈가리개를 떼어버리고
그들과 아버지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을 치워버렸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도와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특별히 제자들을 당신께로 이끄신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드님께서 진심으로 이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빛으로 모든 장애물을 통과하게 하시고
제자들을 깨달을 수 없게 만드는 장애물들을
모두 치워버리셨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끄심’을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이 이끄심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自己)를 완전히 버리고
당신의 첫 번째 이끄심에 응할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었습니다.(마태 10,9-10).
이런 강력한 이끄심에 순종하려면
모든 육적(肉的)인 편안함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이끄심은 우리에게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세 번째 하늘 너머까지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던져버리도록 가르쳐 주는
영원한 빛의 학교에 들어가게 부르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이 뿐만 아니라
뭔가를 소유하고픈 마음이 드는 곳이면 가지 말아야 했으므로
폭풍을 피해 즉 불완전한 외부 활동을 중단하고
자신들의 마음 속 깊이 들어가 조용히 쉬는 법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거기서 어둠을 밝혀주는 태양 빛과 달빛과는 다르게
영원히 밝게 빛나는 영원한 빛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이기도 한
편협함과 저속함과 불안에서 벗어나고
모든 육적(肉的)인 것에서 벗어나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니모 성인(St. Jerome, 340-420)이
“돌이 천사의 지혜를 가질 수 없듯이
하느님께서는 유한한 생명을 가진 것들과는
대화를 하실 수 없습니다.”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을 주시어 당신께로 끌어들이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슬픔을 주시어 끌어들이시는데,
하느님께서는 이들 중 누구를 제자로 삼으십니까?”하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답은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있습니다.
우리의 구세주의 일행 중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도
매우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쁨을 주시지 않고
슬픔을 주시어 끌어들이셨습니다.
특히 제자들은 스승께서 참혹하게 죽으신 후에
모든 집착을 버리기 전까지는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와 같이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으로
괴로움을 겪고 나서야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슬픔을 주시어 이끄시는 것이
기쁨을 주시고 이끄시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이끌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성인(St. Gregory)은
“네 곁에서 천 명이, 네 오른쪽에서 만 명이 쓰러져도
너에게는 닥쳐오지 않으리라.”는 시편(91,7)의 말씀을
“여러분이 슬퍼하거나 박해를 받을 때에는 천 명만 도와주면 되지만
기쁠 때나 번창할 때에는 만 명이 도와주어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하고 해석했던 것입니다.
슬픔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그리스도의 모든 삶과 죽음의 길과 너무나 같습니다.
성경(요한 묵시록 3,19)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슬픔을 주시는 것은
더 사랑하신다는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주님 가까이에 있긴 했지만 자기(自己)를 버리지도 못하고
은총만 받았다는 것을 알고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의 고통을 덜어주시자마자
더 힘든 다른 곳으로 파견하셨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항상 이렇게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끝까지 고통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어
예수님의 이름이 욕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기쁘게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세 번째 이끄심’은 제자들로 하여금 육신을 취하시고 계시던
‘인간 그리스도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주님께서 새로이 태어나신 것처럼
예전에 주님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영광스런 성령의 학교에 들어가려면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이에는 네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지금까지 진리와 사랑에 대하여 배워왔지만
엄밀히 말하면 진리와 사랑은 형체가 없습니다.
세상의 어느 화가가 겉모습이든 안 모습이든
진리와 사랑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
누구나 사랑한다고 하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사랑일 뿐
진짜 사랑은 아니며 진리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성령의 학교에서도 책에 있는 것과 같은
그림이나 모습으로 가르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내면으로만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형체가 없기 때문에 말이나 그림으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프란치스코 성인(St. Francis)은 형제들에게
열심히 책만 보지 말고 자신의 행동을 보고 배우라고 했습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면 읽는 법을 배우려고 하지 말고
성령을 받아 자신의 영혼 안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진심으로 기도하게 하십시오.
세 번째로 ‘마음에서 그런 이미지와 모습을 없애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학교에서는 지혜를 겸손을 통해서 배우고
침묵을 통해서 말을 배우고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배우고
망각을 통하여 지식을 얻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영원한 지혜의 원천을 바라보면서 자고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정신을 잃고 영원한 진리를 쳐다보면서도
자신의 영혼이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제자들이 성령 학교에 들어가려면
이와 같이 아무 이미지도 갖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네 번째로 마음이 이미지들로 꽉 차 있게 되면
이 이미지들이 계속하여 작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학교에서는 그렇게 되면 안 되므로,
이미지도 없어야 하고 틈을 주어도 안 되고,
오로지 하느님만이 섬광보다 더 빠르게
영혼을 움직이시고 깨닫게 만드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성인(St. Gregory)은
“성령께서는 놀라운 명장(名匠)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거처를 어부 안에 마련하시면 어부를 강론가로 만드시고,
당신의 거처를 잔인한 박해자 안에 마련하시면
그를 온 나라의 스승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거처를 세리(稅吏) 안에 마련하시면
그를 선교사로 만드십니다.”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명장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성령께서는 한 번만 잠깐 만나시면
기쁘게 모든 것을 영혼에게 가르치십니다.
이 네 이유를 알면 제자들의 영혼이
모든 이미지와 허상들을 없애버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렇게 이끌렸으면서도
바오로 성인이 정신을 잃고 세 번 째 하늘로 갔을 때처럼
제자들은 모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노 성인(St. Augustine)이 생각한 것처럼
바오로와 모세는 산 위에서 하느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느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는데
아직도 자신들의 몸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는 하느님의 빛이 넘쳐 흘러
바오로 성인과 같이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확실하게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는 있었습니다.
‘네 번째 이끄심’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제자들을
‘이기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를 버리고
이기심을 버리게 하시어 이타적으로 만드셨습니다.
제자들을 비난할 이유는 전혀 없게 되었으며
제자들은 죽을 정도로 괴롭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첫 이끄심을 통하여 제자들이 완덕을 갖추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아버지께서 제자들을 성화(聖化)시키시는데
방해가 되는 제자들의 본성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이끄심으로 제자들이 하느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제자들의 영혼 안에 하느님의 거처를 마련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일치를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배우게 되어
하느님처럼 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자기(自己)를 버린 것은 당연한데
이기심은 하느님의 뜻과 사랑과 고귀함과는 상반(相反)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허상들과 이미지들이 제자들의 마음에서 사라졌으므로
제자들은 이제 본성에 따라 살지 않게 되었나요?
이제 본성은 완전히 죽어버리고 없는가요?”하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아닙니다 제자들의 본성은 죽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버림으로써 예전보다 본성이 훨씬 더 진실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영혼의 본성이
진실하지 않다고 판단하시면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구약 성경에서 지팡이가 뱀으로 변했다는 것은
본성이 바뀌었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나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긴 것을 보면
제자들의 본성이 아주 진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의 본성은 죽지 않고 가장 순수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제자들은 허상과 이미지들을 예전보다 덜 가졌을 뿐이었으며
이러한 생각들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지도 않았고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게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제자들이 모든 이미지를 버렸다고 한 것은
그들의 영혼 안에 정오의 태양 빛 아래
촛불처럼 빛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촛불은 여전히 빛을 내지만 햇빛 속에 흡수되었을 뿐입니다.
제자들이 갖고 있던 이미지들과 본성은
하느님의 빛 속에서 아무 구실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하느님의 빛만 이용하게 됨으로써
본성이 더 순수하게 되고 새로운 이미지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제 ‘다섯 번째 이끄심’에 대하여 생각해봅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 이끄심을 통하여
자기를 버리고 세상 것들을 멀리하고 있는 제자들의 영혼이
비교적 당신 가까이로 가서 하나가 되려는 것을 발견하십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가시면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이제 제자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순종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할 몫을 다했으므로 하느님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께서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聖父)와 성자(聖子)께서도 힘을 합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자(聖子)로부터 지혜를 얻는 것처럼
성령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려면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도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제자들이 모두 하느님만 생각하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겼으므로 모든 제자들이 다 같은 정도의 사랑을 받고
다 같은 정도의 거룩함을 얻게 되었는지 물을 것입니다. 내가 답하리다.
제자들 모두 집착을 버렸지만 하느님께로는
저마다 다른 정도의 사랑과 열정으로 다가갔습니다.
하느님을 속이지 않은 천사들처럼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지만
저마다 다른 정도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서도 이에 걸맞게 사랑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선물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졌지만
똑 같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사도 요한은
주님을 더 간절하게 바라보았으므로 선물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은총을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 강림 대 축일 뿐만 아니라
다른 날에도 자주 개별적으로 성령을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성의 대 스승인
성 빅토르의 리처드(Richard of St. Victor, ?-1173)와 다른 스승들은
하느님께서 성화(聖化)의 은총을 자주 주실수록
더 자주 성령을 받게 된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성령강림절 전에도 개별적으로 여러 번 성령을 받았으나
집착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여 성령을 충만이 받지는 못했습니다.
즉 성령께서 계속하여 제자들 안에 머무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자들은 성령강림절에
처음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을 성령 학교로 ‘여섯 번째로 이끄신 것’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특별한 깨달음’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 학교에서 이 은총을 받고
몰랐던 성경 말씀을 알 수 있게 되었고 하느님의 진리도 알게 되어
모르는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통하여 처음으로 하느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게 되고
자녀로서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하는 선물을 받게 되어
평생 동안 간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선한 일을 하는 힘을 얻게 되고
하느님의 불굴의 정신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법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아버지와 자녀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버지께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지식의 은총을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빛과 이성(理性)의 빛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하느님의 피조물들에 대하여 알게 되고
그들의 차이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해의 은총도 주시어
예전의 수행(修行) 정도와 현재의 수행 정도를 비교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지혜의 선물을 주시어
당신과 하나가 되어 당신과 같은 삶을 사는 법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성령학교에서 가르쳐 주시는
성령칠은(聖靈七恩)으로 칠성사(七聖事)를
충실히 수행(遂行)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여러분은 인간의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제자들이 성령학교에서 모두 배웠느냐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지식이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그렇습니다.
그들은 천문학부터 가장 사소한 지식까지 모두 배웠습니다.
그러나 영혼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배우지 않았고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거나 성숙되지 못하게 하는 것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합니까?
하느님만 알고 다른 것은 전혀 모르는 사람은 얼마나 복됩니까?”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알고 모든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행복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 저희를 도우시어 이런 행복을 누리게 해주소서.
하느님, 저희를 성령께 인도해주시어
저희의 영혼에 당신의 진리의 빛이 비치도록 해주소서. 아멘.
<성령강림 대축일의 여섯 번째 강론>
첫댓글 강론이 너무나 좋아 출판을 생각하고 있는데 워낙 분량이 많아(1,000쪽 이상) 고민입니다. 그리고 이미 출판한 묵상집 두 권은 자비로 출판하였지만 이 강론집은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하므로 가톨릭 계통의 출판사에서 출판해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론은 독일어로 하셨지만 저는 영어로 번역된 책을 재 번역하고 있습니다. 도움을 주십시오. 평신도가 원고를 들고 가면 출판계획이 모두 잡혀 있어서 출판을 할 수가 없다고 말하며 돌려보냅니다. 반 정도 번역을 끝내었으며 저작권은 없는 책입니다. yongdae_kim@naver.com
개신교에서는 127개 강론 중 22개를 골라 <완덕의 길>로 출판했습니다.
정말 큰 일을 하시고 계시네요! 이렇게 귀한 글을 읽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소원성취하시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