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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가이사랴로 이송됨 23:31~35
31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32 이튿날 기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내로 돌아가니라
33 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34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35 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변호사 더둘로의 고발 24:1~9
1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2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3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6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6하반~8상반 없음)
8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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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가이사랴에 이송된 바울은 총독 앞에 서고, 대제사장이 장로들과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와서 바울을 고발합니다. 더둘로는 바울을 전염병 같은 자요, 흩어진 유대인들을 소요하게 하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더둘로가 바울을 심문하라고 요청하자, 유대인들도 이에 합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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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가이사랴로 이송됨 23:31~35
하나님은 사람의 악한 계략을 통해서도 그분 뜻을 이루십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 결사대로 인해, 한밤중에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이송됩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는 약 100km, 안디바드리까지는 약 56km입니다. 중간 지점인 안디바드리에서 470명의 군인 중 400명이 예루살렘 영내로 돌아가고, 기병 70명이 바울을 호위해 가이사랴까지 안전하게 호송합니다. 벨릭스 총독은 바울이 로마 시민이기에 함부로 처리할 수 없어, 자신의 재판 관할 지역에 있는 사람인지 확인한 후 그를 헤롯궁에 가둡니다. 이곳은 총독의 관저이기에 바울은 정식 재판 때까지 비교적 괜찮은 곳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 더 깊은 묵상
가이사랴 헤롯궁에 감금된 바울은 고발자들이 오기 전까지 무엇을 했을까요?
하나님 뜻을 신뢰하며 내가 잠잠히 준비할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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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더둘로의 고발 24:1~9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더둘로와 함께 가이사랴에 도착하자 재판이 시작됩니다. 더둘로는 로마법에 정통한 이방인 변호사입니다. 재판이 로마법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은 로마법에 정통한 변호사를 대동한 것입니다. 더둘로는 먼저 벨릭스를 향해 극진한 찬사를 쏟아 내면서 그의 환심을 사려고 합니다. 이어서 바울이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선동하기에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임을 부각합니다. 또한 성전을 더럽게 했다는 종교적 죄목을 덧붙입니다.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5절)라는 표현은 당시 복음이 빠르게 확산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더둘로의 고발은 사탄이 세상 앞에서 성도를 고발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대적자의 거짓 고발에는 담대히 진리로 맞서야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더둘로는 바울을 무슨 죄목으로 고발했나요?
거짓 고발이나 거짓 험담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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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위에서 보는 시각
한동안 저는 “주님과 동행하려면 고난의 길을 가야 한다.”라는 말이 싫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누가 그 길을 가려 할까?’라는 염려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D. L. 무디가 쓴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한 노인이 친구들과 함께 산에 오르게 되었는데, 미처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안내원에게 ‘그만 포기합시다. 다시 산 아래로 데려다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안내원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곧 폭풍 위로 올라갈 것입니다.’ 그 말을 믿고 계속 걸어갔더니 정말 여름날의 저녁과도 같이 고요한 장소에 도달했습니다. 골짜기 아래에서는 무서운 폭풍이 휘몰아치고 천둥이 치며 번개가 번쩍거렸지만, 산꼭대기는 안내원의 말처럼 모든 것이 고요했습니다.”
사탄의 훼방 때문에 사방이 캄캄하게 보여도, 하나님 말씀의 길로 계속해서 올라가면 그 어두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바라보면서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은 사실은 매우 복되고 기쁜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 주리고 목마르고, 고통의 눈물을 쏟는 시간은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분 뜻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이런 믿음의 눈이 뜨이면, 고난이 왔을 때 오히려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하심을 보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주님이 친히 이루실 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수 소망 / 유기성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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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 사도행전 24장 5~6절
바울은 적대자들로부터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로서 사람들을 선동한다고 고발당합니다. 복음밖에 있는 사람에게 '복음'은 사람의 마음을 선동하는 메시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 있는 사람에게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메시지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거룩한 삶의 열매로 물들여야 합니다.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세상을 전염시키는 참된 복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관하심을 믿는 신앙이야말로 성도가 가져야 할 불가결의 자산이다. - 팀 켈러
오늘의 기도
하나님, 당당하게 거짓을 진리라 말하는 인간의 악함을 봅니다. 시대의 악함에 편승해 거짓을 다른 거짓으로 이기려는 무모한 싸움을 피하게 하소서. 저희의 주인이신 진리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하시고, 삶으로 하나님의 옳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549 내 주여 뜻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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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가 복음을 들고 이 땅에 올 수 있게 해 주시고, 그들 가운데 적잖은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실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 주님께 모든 발걸음을 맡겨 드리고, 주님께서 친히 우리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시고, 인도자가 되어 주셔서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해 주실 것을 굳게 믿으며 나아가도록 하자
- 내 자신의 부족함을, 미흡함을 너무나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인데, 앞으로 더 잘 준비하고, 더 지혜롭게 대처를 해서 다음 발걸음을 잘 내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
-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내려놓고, 좀 더 구체적이고, 세밀한 계획들을 세우고, 지혜롭게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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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왜 벨릭스 총독이 그리스도의 도에 대하여 더 알고 싶어 했을까요? (벨릭스 총독에 관한 것은 다름 시간에 알아볼 것입니다.) 벨릭스가 그리스도의 도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복음에 대한 바울의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엄청난 환난과 고소를 받고 있었지만 바울의 모습에서 드러난 복음의 실재와 능력 때문에 그리스도의 도에 대하여 더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드러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예수님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우리(교회)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이 복음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일들이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닷새가 지나 바울의 입을 치라고 했던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그를 지지할 장로들과 변호사까지 데리고 가이사랴에 내려왔습니다. 더둘로는 유다는 로마에 의해 평화가 유지되고 있고 유대의 총독으로 세워진 벨릭스가 을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지혜 있는 자라고 아부를 하면서 그의 말을 시작합니다.
로마는 여전히 유대를 압박하여 많은 세금을 거두고 그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고 있으며 그 로마의 군대에 의해 추후에 철저히 무너질 성전과 예루살렘의 성벽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도록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통치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들은 사람의 권력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고아와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묶여 있고 고소당한 채로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한 주인으로 받아들였고 더럽혀진 하나님의 성전, 곧 죄로 물든 모든 인생의 영육을 진정으로 개혁하고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이의 뜻을 담대하게 행하는 종이요 증인으로 담대하고 평안하게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누구를 따르고 어디에 서 있는가가 결국 우리 인생의 가치를 반영합니다. 오직 여호와 앞에 전심을 다하고 주신 사명에 따라 겸손과 순종으로 나아가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거짓 고발에 맞서는 힘, 진리에 기초한 믿음”
천부장은 바울을 가이샤라까지 이송할 보병과 기병과 창병을 준비하게 하고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 보냅니다.
벨릭스 총독은 유대지방의 총독으로 악명 높고 부패한 총독입니다.
벨릭스는 바울이 길리기아 출신의 로마시민권자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바울을 확인하고 헤롯 궁으로 보내 그를 지키게 합니다.
바울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2년 넘겨 지내지만 믿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바울을 찾지 않습니다.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합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팔십이 넘은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가아사랴까지 100Km가 넘는 곳까지 이동해 와서 바울을 고발합니다.
벨릭스 총독은 유대인을 심하게 차별하고 부패한 총독임에 불구하고 더둘로는 온갖 미사어구를 동원하여 그를 높이고 찬양합니다.
더둘로는 바울을 전염병 같은 자로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소요하게 하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이고 성전을 더럽힌 자라고 선동하며 비방합니다.
그리고 바울을 심문하면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 곳에 모인 많은 유대인들은 더둘로의 거짓말이 옳다고 힘을 실어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할 때 사탄이 거짓증언자들을 앞세워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오늘 하루도 담대하게 흔들림 없이 복음을 전하며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의 주님!
어떤 거짓 앞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옵소서!
진리를 거짓이라고 말하고 거짓을 진리라고 가르치는 세대를 본받지 않게 하옵소서!
거짓을 일삼는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고
진리를 왜곡하는 인간들이 성공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오직 진리의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이 말씀을 날마다 믿음으로 붙잡고 살아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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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 바울에 대한 더불로의 고소 내용으로, 이는 식민지 치안을 맡은 총독에게 그 직무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발언입니다. 전염병을 막지 못해 많은 인적 자원을 잃게 되거나, 반란이 일어나 로마를 대적하게 하거나, 종교적인 분쟁으로 식민지 지역이 시끄럽게 되는 것은 모두 다 총독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변호사이지만 오늘날 검사와 같은 일을 하는 자입니다. 총독이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그런 말들만을 골라 총독을 충동질하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악한 변호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바울을 제대로 평가합니다. 다른 의도로 말하긴 했지만, 바울의 참모습을 그가 밝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대단합니다. 가는 곳마다 개종자들이 생기고 교회들이 세워진 것입니다. 적어도 그의 영향력은 소아시아 지역과 마케도냐 지역 즉, 2개 대륙을 섭렵한 것입니다. 그때 세워진 교회만 해도 거의 스무 군데입니다. 그는 과연 전염병을 퍼트리는 자 같습니다. 당연히 유대인 사회에 소요가 일어납니다. 믿는 이들은 바울을 지지하며 따르고, 믿지 않는 자들은 바울을 대적하며 싸운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 사회를 소동케 하는 더둘로의 말대로 이단의 우두머리 같습니다.
전염병을 현대말로 한다면 영향력, 소요는 변화, 그리고 우두머리는 그것의 주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들의 별명이 전염병이고, 소요케 하는 자이고, 그것의 주범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도들의 발 닿는 곳마다 변화가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이나 집단에 영향력을 행세하고, 변화를 일으키고, 그리고 그 일들을 리드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이 말로 되는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나타날 때, 본을 보일 때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군대 생활을 할 때 생각이 납니다. 우리 부대에서 이등병서부터 상병 때까지 줄곧 사역병 집합에 선착순으로 뛰어간 병사가 있었습니다. 사역은 잡일로,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일입니다. 이등병은 할 수 없이, 일등병은 이등병에게, 상병은 일병에게 미루는 것이 그 일입니다. 하지만 그 병사는 그 일을 도맡아 놓고 했습니다. 부대장이 한 말이 생각이 납니다. ‘너는 진짜 교회 다니는 애 같다’
하기 싫은 일을 남을 위해서 할 때 사람들은 감동 할 수 있습니다. 황금연휴나 명절에 당직이나 휴가를 바꿔 줄 때 감탄할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철에 열심히 땀을 흘리며 번 돈, 불행한 사고를 당한 이웃에게 선뜻 내놓을 때 사람들은 감격할 수 있습니다. 그런 데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고,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양보하고 살면 좋겠습니다. 손해나더라도 남을 위해 희생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보다도 행동이 앞서는 하루를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전염병 같은 사람들이고, 소요케 하는 자들이고, 그것의 주범들입니다.
8월17일 인천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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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장로들과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가이사랴 총독 관저에 와서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행24:5~8)
그런데 이런 재판에 대제사장이 직접 온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고, 함께 온 장로들은 금방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의 유대의 실력자들이었기에, 총독은 유대인의 협조가 필요한 입장에서 정치적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실력 있는 유명한 변호사 더둘로까지 왔습니다 세상은 늘 이런 것들을 앞세웁니다 권력, 돈, 학벌, 영향력, 전관 변호사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따위 것들에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인지 아닌지, 선인지 아닌지, 그것만 보면 됩니다 그래서 만약 어떤 사람이 거짓되다면 전혀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허탄한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을 보았은즉 내가 너희를 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13:8)
그러나 어떤 사람이 진실되다면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잠2:7~8)
바울은 유대인 최고 권력자 아나니아와 영향력 있는 장로들과 최고 법률가 더둘로에 의해 홀로 우겨쌈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천만인이 우겨싸더라도 두려워하거나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시3:6~8)
주께서 우리를 지키시니 사람들과 상황들에 우겨쌈을 당할 때에도 두려워하거나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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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가이사랴의 총독에게로 호송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총독에게로 득달같이 달려가 바울을 고소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31,32절 바울을 안전하게 가이사랴로 이끌어 가십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 거리가 100킬로미터에 달했고, 사방에 바울을 죽이려는 적대자들이 도사리고 있었기에 호송 과정은 험난했습니다. 다행히 호송 부대는 순적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주께서 ‘바울이 로마에 가기까지’(참조. 23장 11절) 신실하게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위기를 넘게 하시는 주님의 보호의 손길을 묵상해봅시다.
33절 바울을 총독 앞에 세우십니다. 바울의 운명은 총독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주님 뜻에 붙들려 좌우됩니다. 총독은 바울을 로마로 보내시려는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뜻밖의 만남’도 주님이 계획하신 ‘뜻깊은 만남’일 수 있습니다. 일상의 매 순간, 매 사건이 성령의 역사가 되도록, 항상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질문하며 기도합시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24장 1~4절 유대 기득권 세력들이 적대감과 위기의식 때문에 바울 죽이는 것을 사명처럼 여깁니다. 그들은 유능한 변호사 더둘로를 고용하여 가이사랴로 내려가 바울을 고발합니다. 그리고 더둘로의 입을 통해 최고의 찬사와 감사를 침략국 총독에게 돌리면서까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고 애씁니다. ‘기득권 유지’가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 앞서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24장 5~9절 바울은 ‘소요’를 일으키는 이단의 우두머리이며 성전을 더럽히는 자라고 고발당합니다. 전자는 총독의 법정에서 바울을 단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죄목이었고, 후자 역시 유대 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이었습니다. 그러나 천부장이 증언한 것처럼(23장 28,29절) 바울에게 씌운 이런 혐의는 전혀 근거가 없었습니다. 사실은 세상이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소동을 일으킨 것이고(참조. 19장 23~41절), 유대인들이 성전을 더럽힌 것입니다(참조. 누가복음 19장 45,46절). 그리스도인은 악한 세상을 소동하게 하고, 타락한 종교를 들끓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
어떤 상황에서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 -
천부장의 명을 받은 보병들에 의해 바울은 무사히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총독 벨릭스에게 인계됩니다. 총독은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직접 고발한 사람들이 오면 재판을 하겠다 합니다. 닷새 후에 고발자들이 도착을 했고, 그들이 고발한 이유를 설명하자 함께 왔던 유대인들도 합세하여 사실이라고 주장합니다.
절망의 한숨만이 있는 현장에서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31~35절).
천부장의 명을 받은 대로 그 날 밤에 군인들은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로 데려갔습니다(31절). 안디바드리는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의 중간에 있는 도시로 가이사랴까지 약 40km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울 한 사람을 호송하기 위하여 천부장의 병사 470명이나 동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400명의 군인들은 예루살렘의 영내로 복귀하고, 기병 70명이 바울을 호송하여 가이샤라에 도착을 합니다. 도착한 그들은 벨릭스 총독에게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준 서신을 전달하고, 총독 앞에 바울을 세웠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읽고 난 후 바울이 길리기아 출신임을 확인하고, 자기의 관할권이라는 사실을 알고 고발한 사람들이 오거든 바울의 말을 들어 보겠다 합니다(34~35절).
바울의 삶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삶이었습니다. 또한 억울하게 고초를 겪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는 하지만 본인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를 죽이겠다며 암살단까지 조직이 된 상황에 있었지만 하나님은 기가 막히게 그의 삶을 역전시켜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삶을 계획하신 일을 변함없이 이루어가십니다. 절망의 한숨만이 있는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신 목적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역을 감당해 나아가야 합니다.
거짓과 비양심이 있는 현장에서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1~4절).
5일 후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장로 몇 사람과 더둘로라고 하는 변호사와 함께 내려 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합니다(1절). 더둘로는 먼저 벨릭스 총독에 대하여 아첨하는 말로 시작합니다(3~4절). 그는 벨릭스가 총독으로 부임하여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른 철저하게 아첨하는 말입니다. 오히려 벨릭스는 매우 포악하고, 잔인한 통치자로 유대인들의 미움을 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더둘로는 오직 사리사욕만을 채우기 위해 꾸며낸 간교한 언사요 거짓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거짓이 난무하고, 비양심적인 행동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보이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공동체나 교회 공동체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줄서기를 잘 하면 승승장구 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좀처럼 파고들어 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은 변함없이 당신의 나라를 세워 가십니다. 내 자신이 도구로 쓰임받기를 소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내 자신의 양심과 진리의 법인 하나님의 말씀에 내 자신을 비추어 검증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주는 더 깊은 은혜 속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진실이 호도되고 있는 현장에서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5~9절).
더둘러는 이제 본격적으로 바울의 죄목을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전염병 같은 자라는 것(5절)입니다. 그 근거로 그가 가는 곳마다 소요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소요를 일으킨 사람은 바울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들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바울이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5절b)라는 것입니다. 한 때 스스로 왕이라고 자처했다가 처형된 나사렛 예수의 사상을 계승하여, 유대인을 선동하여 로마에 반역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유대인들을 선동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세상의 왕으로서의 예수를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전을 더럽혔다(6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전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의 소문과 추측에 의해 바울을 현장범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순수성이 많이 오염이 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잘못된 권력을 바로 잡기 위한 몸부림이 아닌, 세상의 권력의 손아귀에서 진리를 상실한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진실만을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변함 없이 일하고 계시는 신실하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삶이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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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릭스
자, 그럼 시선을 총독 벨릭스에게로 옮겨 보겠습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벨릭스에 대한 정보는 극히 미미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 벨릭스에 대한 됨됨이를 알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행24:26-27절에는 벨릭스의 모습이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그려져 있습니다.
돈을 받을까 바라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도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바울을 부르는 목적이 돈을 받고자 함입니다.
또 바울을 잡아두는 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입니다.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역사적인 자료에 의하면 이 벨릭스라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열등감이 많은 사람이었으며 잔인한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이 사람의 본명은 안토니우스 벨릭스로 아주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뭐가 그렇게 입지전적이냐? 원래 이 사람은 노예였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황제 클라우디오 때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아마 많은 돈을 들였을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많은 시간 동안 한을 씹으면서 돈을 모아야 했을 것입니다. 원래부터 노예였는지 어떤 일로 노예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는 노예였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유인이 되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욕망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 사람이 유대를 다스리는 총독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계기가 있어야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형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의 형인 팔라스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형이 네로 황제의 신임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노예출신의 벨릭스는 일약 로마령의 유대를 다스리는 지방장관, 즉 총독이 된 것입니다.
역사상 노예로서 지방장관이 된 유일한 사람이 벨릭스였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벨릭스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노예 정신으로 왕의 특권을 행사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중요한 말이 “노예 정신”으로입니다. 그러니까 로마 정부의 특혜를 얻어서 유대 총독이 되었지만
그를 지배하고 있는 사고방식, 정신세계는 노예적이었다는 말입니다.
노예의 정신을 가지고 사람들을 다스렸다는 말입니다.
노예를 총독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그래서 신분은 바뀌었지만
그는 평생을 이 사고방식의 노예였습니다.
그래서 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이 필요했고 쉽게 화를 내야 했으면 잔인해져야 했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 시대에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인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 칠천인 가운데 저와 여러분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울러 더둘로는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염병이라고 했습니다.
흑사병처럼 퍼져나가는 기독교!! 제대로 말씀을 들은 사람이면
반드시 변하게 만드는 복음의 능력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복음은 변화요, 능력입니다.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듭니다. 이 복음은 전염성이 강한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 세우심을 입었습니다
이 사실을 함께 기억하는 가운데 힘을 내어서 우리에게 맡겨진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사시는 오늘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로마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이렇게 불의해 보이는 방법으로 진행 중이라는 것을 말씀할 뿐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각자의 유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그런 그들을 통해서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를 향한 사도 바울의 여정은 이런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통해서 느리지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 삶을 대하는 우리의 믿음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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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2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이튿날 기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내로 돌아가니라"
군인들은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가이샤라에 있는 벨릭스 총독에게 호송하고 있습니다.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렀습니다. 안디바드리는 예루살렘과 가이사랴 사이에 있는 도시로 본래의 이름은 카바르 - 사바였습니다. 헤롯이 이곳에 도시를 건설한 후 그의 부친 아티바터의 이름을 따서 이처럼 명명했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북서쪽 유대 구릉의 끝에 있는 현재의 라스엘-아인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안디바드리까지가 56km 이상을 강행군하였습니다. 바울은 안디바드리까지 무사히 도착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추격전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더이상 중무장한 군대의 호위를 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홀가분하게 빠른 속도로 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으므로 마병을 제외한 나머지 군대는 철수하게 했습니다.
(바울을 헤롯 궁으로 보냄)
33-3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웠습니다. 안디바드리에서 가이사랴까지의 39km를 기병들에 의해 바울은 무사히 호송되어 루시아가 보낸 편지와 함께(26-30절) 벨릭스에게 직접 인도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재판정 앞에 출두시켰습니다.(롬 14:10).
총독은 바울이 길리기아 사람인 것을 알고 바울을 헤롯궁에 두고 지키게 하여 재판을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벨릭스는 어느 영지 사람이냐고 물은 것은 일종의 예비 심문을 행한 것입니다. 영지는 지배하고 통치하는 곳을 의미합니다. 벨릭스는 황제의 직할지인가 아니면 지방 총독의 속주인가를 바울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그의 출신지를 묻는 이유는 바울의 출신지에 따라 재판 관할권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바울의 출신지가 지방 총독의 관할권이라면 그를 그 지역의 총독에게 보내 재판을 받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길리기아 출신이라고 대답하자, 그곳은 로마의 직접 통치 지역이었으므로 벨릭스는 자기가 재판을 담당하기로 결정하고서 바울을 송사하는 자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게 합니다. 헤롯궁은 본래 헤롯 대왕(B.C. 37~A.D. 4)이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가이사랴에 크게 지은 궁전이었는데 후에는 로마 총독의 관저 및 본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총독의 관저로 사용될 때의 명칭은 브라이도리온입니다(막 15:16). 대개의 고대 궁전이 그러하듯이 헤롯 궁도 요새의 역할을 하고 재판 장소로도 사용되었으며 지하에는 감옥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을 이 지하의 감옥에 가두어 두었는지 아니면 따로 방을 하나 주어 그곳에 머무르게 하면서 감시하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 시민이었고 재판도 받지 않은 상태이고 루시아의 편지 내용이 바울의 무죄를 암시하였으므로(29절) 벨릭스는 바울을 죄수 취급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마 바울은 가벼운 구금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고발)
“1.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바울이 가이샤라에 있는 헤롯궁에 갇혔을 때였습니다. 닷세 후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변호사 더불로로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가이샤라로 내려와서 바울을 고발하였습니다. 닷새 후는 바울이 가이사랴에 도착한 후부터 닷새 후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여기서도 그의 집요한 악함이 드러납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이 전통적인 유대교 신앙을 떠났다는 종교적 이유로 고발했습니다. 그 외에도 바울에게 저주를 당한 것에 대한(23:3) 개인적 증오심 때문에 가이사랴까지 찾아와 바울을 끝까지 해치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로마 법정에서 바울에게 불리한 판결을 확실히 하기 위해한 변사 더둘로까지 동원하였습니다. 변사는 유대교의 법과 로마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두루 갖추고서 뛰어난 언변을 구사할 줄 아는 변호사를 가리킵니다. 아나니아는 로마법의 절차를 잘 아는 변사를 데리고 와서 바울을 고소하고자 하였습니다. 변사의 뛰어난 언변으로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어가고자 하였습니다. 이 변사의 이름 더둘로는 당시 로마 세계에서 널리 쓰이던 이름입니다. 아마 그는 헬라계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에 대해 특별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 특히 사두개인들(23:6-9)도 사적으로 온 것 같습니다.
(아첨하는 더둘로)
“2.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3.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벨릭스 총독이 바울을 법정으로 부르자 더둘로가 바울을 고소합니다. 아나니아 일행의 고소가 접수되었고, 바울이 법정에 불려나옴으로써 원고와 피고가 한자리에 모였고 재판장 벨릭스가 자리에 앉음으로써 재판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더둘로의 바울에 대한 고발 논고가 시작됩니다.
더둘로는 벨릭스 각하에게 크게 감사합니다. 더둘로의 논고는 의례적으로 재판장을 존중하는 차원을 넘어 낯간지러운 아첨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의 아첨의 요지는 벨릭스의 뛰어난 통치력으로 민족이 개혁되었고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벨릭스의 통치에 대해서 언제 어디서나 환영하며 감사하여 마지않는다는 것입니다. 더둘로의 이 말은 아첨 이상의 어떤 진실성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 말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총독 벨릭스의 상습적 잔혹 행위는 그 당시에 널리 알려졌던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벨릭스는 총독으로서의 특권을 이용하여 뇌물과 여색을 탐하는 등 온갖 악행을 도모하였습니다. 특히 자신의 비위를 거스리는 자들은 암살자를 동원하여 살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타키투스에 의하면 당시에 많이 일어났던 소요를 진압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강도떼들을 부추겨 약탈하도록 하여 그 약탈물을 나누어 가졌다고 합니다. 나중에 벨릭스가 총독에서 물러나 로마로 소환되었을때, 이런 일들에 대해 유대인들이 탄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무니없는 찬사를 늘어놓는 더들로의 의도는 당시에 벨릭스가 가지고 있던 반유대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입니다. 벨릭스의 호감을 살 수 있는 거짓 찬사를 통해 자기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 내려는 것입니다.
그는 총독을 괴롭게 하지 않고자 대강 말한다고 합니다. 그는 실질적으로 할 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총독 벨릭스를 불편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간단하게 중심 내용만 말한다고 합니다. 당시 관례적으로 법정에서 재판장에 대한 예의로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더둘로의 변사로서의 노련한 언변을 구사합니다. 그는 통독의 통치 업무를 방해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대강 짧게 말한다는 말은 필요한 부분만을 베어내는 것, 또는 필요한 부분 외의 것을 베어내 짧게 한다는 뜻입니다
(소요죄와 성전 모독죄로 고발)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6.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7. (6하반-8상반 없음) 8.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더둘로는 벨릭스를 칭찬을 한 후에 바울에게 소요 죄와 성전 모독죄로 고소하였습니다. 여기서 성전 모독죄는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문제요. 소요죄만이 로마법정에서 바울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더둘로는 바울을 전염병과 같은 자라고 합니다. 염병은 흑사병과 같이 전염성이 강하고 일단 감염이 되면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전염병을 말합니다. 형편없는 사람에 대한 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옘병할 놈이라는 욕이 있습니다. 더둘로는 바울이 전한 도가 급속도로 퍼져나가며 그것이 마치 흑사병과 같이 사람들에게 해가 된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바울을 염병이라고까지 부른 것은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매우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 나갔음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복음의 전파자가 되어야합니다.
그는 바울을 소요케 하는 자라고 합니다. 사회소란죄를 적용하였습니다. 아나니아 일행이 상당히 치밀한 준비를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소요죄로 벨릭스의 분노를 유발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정치적 혁명 세력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벨릭스는 유대를 통치하는 동안 여러 가지 소요 사건들에 직면하여 그 주동자들은 물론 추종자들까지도 십자가에 처형시키는 방식으로 강경하게 진압했습니다. 그는 로마의 평화를 깨뜨리는 어떤 소요에 대해서도 즉시 잔인하게 진압했습니다.
더둘로는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이단은 정통교리에서 어긋나는 파당을 말합니다. 더둘로가 로마에 저항하는 집단으로서의 도당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예수를 따른 자들을 가리켜 나사렛당이라고 부릅니다. 나사렛당은 본래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었기 때문에 예수 이름 앞에 나사렛을 덧붙여 불렀습니다. 우두머리는 지도자 수장을 말합니다. 더둘로는 바울을 정치범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당하신 모함과 상당히 유사합니다(눅 23:2). 누가는 주께서 당하신 고난을 제자도 당하고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바울이 성전을 더럽게 하였다고 합니다. 성전 즉 종교에 관한 것은 로마 법정에서 죄의 유무를 판결하는 자료가 되지 못함을 저들도 알고 있기 때문에 매우 간략하게 말합니다. 만약 여기가 유대교 법정이었다면 가장 먼저 중요하게 고발해야 할 제목이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고 반로마적인 행위에 관한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예수를 죽이기로 결심하게 만든 것이 성전 정화 사건이었습니다.(막11:15-19) 바울이 결정적으로 거짓 고발한 성전 모독입니다.(27-30) 그런데 이들은 로마법정에서는 정치범으로 고발합니다. 주님과 제자 바울이 고소 받는 것이 공통됩니다. 변사는 총독이 친히 바울을 심문하시면 고발하는 것을 모두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더둘로는 사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처럼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궤변적, 허위적 자신감이 나타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가세)
“9.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유대인들도 대제사장의 고소를 옳다고 하였습니다. 아나니아 일행이 예루살렘을 떠나올 때 장로들 외에 다른 유대인들도 데리고 왔습니다. 자기들의 위세를 과시하고 많은 증인이 있음을 보여주어 자기들의 의도대로 판결을 끌고 가려고 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생각과 지식과 비교할 수 없는
섭리와 지혜로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 가신 길을 좇아 담대함으로 걸어가는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군대들이 보호할지라도 여호와의 지키심이 없이는
한순간의 생명도 허락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닫고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결단으로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주시고 돌보아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신음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손길로 덮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좇아가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온전히 쓰임 받도록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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