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은 공관 복음이 공통으로 전하는 말씀에 따른 것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날이다. 이 축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에서 사십 일 앞서 지낸다. 교회의 전승에 따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사십 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다. 1457년 갈리스토 3세 교황이 보편 전례력에 이 축일을 받아들였다.
본기도
하느님,
외아드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때에
율법과 예언서의 증언으로 신앙의 신비를 밝혀 주시고
저희를 자녀로 삼으실 것을 미리 알려 주셨으니
하느님의 종인 저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소서.
제1독서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7,9-10.13-14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10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3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복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2-10
그 무렵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은총만으로’와 ‘성경만으로’가 서로 모순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변모하십니다. 주님의 변하신 모습을 보는 것은 은총입니다.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멈추면 큰일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은총만이 아닌 말씀이 필요함을 아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정받는 것에만 목을 매면 그 기쁨에만 머물러있게 됩니다. 내가 인정받기에 합당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은혜를 잃어버립니다. 빈센트 반 고흐나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자살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나의 가치는 내 행위로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치를 높이는 행위란 그리스도를 닮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려면 그분을 마치 ‘거울’처럼 보아야 합니다. ‘금쪽이’에 한 아이는 거울을 보며 자기 모습을 보니까 말썽부리던 자기 모습을 버리고 착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은총만을 바라는 이상한 상태가 됩니다. 이것을 ‘은총중독’이라고 불러도 될 것입니다.
은총중독은 ‘말씀 빈곤’으로 갑니다. 말씀 묵상은 하지 않고 기도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사례가 많습니다. 미사 때 강론은 무시하고 성체만 영하면 된다고 믿습니다. 얀세니즘은 17세기에 등장했습니다. 네덜란드 신학자이자 이프르(Ypres)의 주교인 코르넬리우스 얀센(Cornelius Jansen)의 신학적인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얀센주의는 원죄, 인간의 타락, 신성한 은혜의 필요성, 예정론을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완전히 부패했으며 선택된 소수만이 은혜와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도덕성과 종교적 실천에 대해 매우 엄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떠한 행위를 할 때, 그 목적이 오직 즐거움(영적 즐거움 포함)이라면 그런 행위는 모두 죄가 됩니다. 얀세니즘이 엄격해서 이단이 아닙니다. 은총만을 강조하니까 자연히 예정설을 주장하게 되고 말씀의 역할이 약화하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제10권 제33장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가 성가의 말씀(가사)보다는 목소리에 더욱 감화될 때, 나는 벌받을 죄를 지은 것이고,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음악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고백하나이다.”
이와 비슷한 ‘정적주의’도 있습니다. 은총에서 오는 마음의 평화를 깨지 않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싱입니다. 정적주의는 17세기에 발생했으며 스페인 신부 미구엘 데 몰리노스와 관련이 있습니다.
정적주의가 왜 이단일까요? 말씀의 실천 동안엔 마치 운전할 때 기름을 줄어드는 것처럼 은총도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기름을 채웠으면 운전을 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때 은총이 줄어들고 마음의 평화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이 은총과 말씀의 균형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영성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수도원을 개혁하는 데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기도에서 얻어진 에너지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거기에 쏟아부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은 아드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듣도록 은총을 내려주셨습니다. 성가는 노래 부르는 이의 목소리나 멜로디도 중요하지만, 가사를 음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개신교처럼 ‘말씀만으로’라고 한다면 이는 말씀의 씨를 키우는데 태양과 비는 소용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은총만으로’라고 한다면 씨를 뿌리는 일은 안 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어떤 것만으로 구원이 된다고 말할 때 서로 모순을 보일 수 있습니다. 저는 하.사.시.를 읽으며 매일의 나의 방향을 잡습니다. 방향은 잡혀있지만, 도로를 벗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 하.사.시.입니다. 그렇다고 성체조배를 하지 않을까요? 성체조배와 말씀 읽기는 병행되어야 합니다. 차를 위해선 기름도 필요하고 운전 능력도 필요합니다. 영혼이 은총이라면 몸은 말씀입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법정 스님은 생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에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
지난 7월에 튀르키예, 그리스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가진 해외 성지순례였기에 많은 기대를 했지만, 낮 기온이 44도에 달하는 엄청나게 더운 날씨에 지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한국에서 44도가 되면 돌아다니지 않고 그냥 집에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지순례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저를 포함한 모두는 일정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순례에 임했습니다.
순례를 모두 마치고서 불행하다고 생각했을까요? 땀을 비 오듯 흘리고, 뜨거운 햇빛을 피해서 그늘을 찾아가면서 ‘쉬고 싶다’라는 마음이 가득하기도 했지만, 순례를 마쳤을 때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고생했기에 더 행복도 크게 느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편하고 쉬운 것만이 행복을 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 많은 것을 가지고 높은 자리에 올라야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전해집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에 베드로가 나서서 이 타볼산에 초막을 지어 머무르자고 이야기합니다. 그 영광 안에서 큰 기쁨을 느꼈고 이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참 행복은 편하고 쉬운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더 큰 기쁨과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하늘의 구름 속에서 들렸던 소리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뿐이었습니다. 우리도 세상 것을 가지려고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면서, 이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자기에게 필요 없는 것들을 하나하나 줄여나가면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친구란 무엇인가? 두 개의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다(아리스토텔레스).
사진설명: 주님의 거룩한 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