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100년전 중국 한나라 경제의 황릉 (한 문제와 두태후의 아들)
1996년 고속도로 공사중 발견되었으며 현재 기술로는 발굴이 힘들다고 판단하고 본격 발굴을 30년 뒤로 미뤘으나 20여개가 넘는 갱도중 일부만 발굴하였다. 진시황릉처럼 황릉 전체는 미개봉인 상태이다.
황릉 주변의 많은 갱도 모형으로 발굴한 갱도는 빨간 선으로 표시했다.
갱도에서 발견된 토용의 크기는 약 60cm정도이고 진시황릉보단 규모가 작다.
풍요를 상징하는 동물 토용이 묻힌 갱도.
원래는 비단 옷을 다 입혔으나 2100년이 흐르다보니 옷이 다 삭아없어지고 흙이 엉켜있다.
팔은 나무로 만들었는데 세월때문에 다 삭았고 몸통만 남았다. 2100년이 넘는 세월에 채색도, 옷도 다 사라진 셈이다.
주방용품이 발굴됐다. 이 숟가락은 현대 중국에서도 쓰이고 있다.
한나라때의 비단 방석.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은 바닥에 앉는 입식 풍습이 있었다.
중국 한나라 황실에서 쓰던 박산향로.
향로는 도교, 불교와 연관이 깊다.
중국 향로는 베트남, 동남아, 아라비아, 페르시아, 일본, 우리나라 등 여러 나라에 전파되었고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후기까지 향로가 있었다.
중국 향로는 춘추전국시대때 나와서 한나라때부터 널리 사용되어 졌다.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때까지 계속해서 중국 황실의 애용품으로 사용했다.
60년대 ~ 70년대 문화대혁명으로 수천년의 중국 향로 문화는 맥이 끊겼고 현재 중국은 향로 전문가들이 거의 없다. 문화대혁명때 죽거나 박해당했기 때문이다.
지붕을 덮기 이전의 항공사진으로 보이며 사진 하단부의 기자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비교하면 전체 크기를 알 수 있다.
봉분과 나무를 심지 않은 역사 기재 그대로의 무덤이다. 전체가 750 평방미터 정도 된다고 하니까 규모가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의 무덤은 이보다 엄청나게 크지만 사실 묘가 안치된 중요 지역을 보면 1200평방미터로 예측한다고 하니까 사실 규모가 절대로 작은 것은 아니다.
이미 안정적 발굴과 도난 방지 등을 위해 천정을 치고서 발굴을 진행 중이다. 중국답지 않게 워낙 유명한 사람의 무덤이다 보니 신속하게 진행이 됐다.
무덤의 입구로서 깨진 벽은 원래 무덤 입구를 막는 금강장(金刚墙)이라고 한다.
명의 13릉 중 장릉의 처녀 발굴에서도 이 금강장이 나왔는데 실제로 무덤의 입구를 단단한 벽돌 즉, 전돌을 쌓아서 메꾼 것으로서 석회와 쌀을 이용하여 공기가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고 안쪽에 실제로 촛불이나 등을 켠 후 금강장으로 메꾸면 산소가 없어져서 부식 부분을 방지하기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옛 사람들의 관념은 죽어서도 영생불사하리라는 믿음 때문에 무덤 내부에 등불을 밝혔지만 사실 사람과 같이 등불도 산소가 없으면 유한한 것이다보니 명 장릉 발견에서는 기름까지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통상적으로 고고학 발굴을 할 때 내부에 어떠한 장치를 한지 알 수 없고 진시황과 같은 황제는 무덤 내부에 수은 강을 설치했다고 하니 이러한 내부 공기다 부패한 물질의 가스 등이 나와서 무덤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조심해서 진행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무덤은 이 금강장을 깨서 열면 "훅"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 그리고 빠른 처리를 하지 않으면 바로 유물들이 부식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무덤의 전실로서 주요 통로이다. 이전 편에서 말한 대로 甲자형의 가운데 선의 길이 된다.
측면 방들의 입구
내용은 위 무왕이 자주 사용하던 극(삼지창과 비슷한 창의 일종)이라는 말로서 앞에는 거의 부식이 되어 없어진 극이나 검 등이 같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돌베개, 위의 석규와 마찬가지로 장례를 위한 그리고 사자의 베게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각종 소형 석비들
마찬가지로 글씨는 알아보기 어려우나 석규의 다른 한 형태이다.
문양이 그려져 있는 석판으로 조조 무덤에는 더 발굴을 진행하여야 알겠지만 일단 1차 조사로는 벽화는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이 부분은 여러가지 문양을 한 석판은 좀 특이한 유물로 보인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규모 상당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