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대선이 스무날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최대변수가 야권후보 단일화라는 진단이 있습니다.
지난 연말부터 인터넷에서 야당 대표가 밝힌 "'무운을 빈다'고 해서 아직까지 유효합니다.
이게 뭔 소리? 검색창이 난리 났다고 합니다.
'무운'이 '한자어'이다 보니 읽는 이마다 해석이 구구했기 때문일 겁니다. .
일부 젊은이들이 '무운(武運)'을 '운이 없음[무운(無運)]'으로 이해하고,
올림픽 여자 양궁 '9연패(連霸)' 기사를 두고 댓글에 '왜 연패라고 하느냐'고 한다지요?
문제가 심상치 않은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원인을 '한자 교육 중단'에서 찾는 건 정확하지 않습니다.
'한글전용에관한법률'이 제정된 건 1948년이었지만,
1963년에서 1971년까지는 교과서에 국한문을 섞어 썼습니다.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라는 단서 규정에 따라서지요.
2005년 '국어기본법'이 제정되며 '한글전용에관한법률'은 폐지되고,
해당 규정은 국어기본법으로 이전되며 약간 보완되었습니다.
국어기본법은 완전한 한글전용이라기보다는 보조어 병기를 일정 부분 허용합니다.
또 이 법은 사적 문서의 한글전용을 강제하지는 않습니다.
한글전용이 정착하면서 일간지에서 한자를 쓰지 않게 된 것은 1988년 창간된 <한겨레신문>부터였습니다.
어느덧 35년 가깝지만, 한글전용 <한겨레>에서 기사 읽기가 불편하다는 독자는 거의 없습니다.
국어기본법의 "국어란 대한민국의 공용어로서 한국어를 말한다"는 조항을
"국어란 대한민국의 공용어로서 한글과 한자로 표기되는 한국어를 말한다"로 바꾸자는 개정안이었습니다.
국어를 정의하는데 난데없이 중국 문자를 들먹인 까닭은 그래야 한자를 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거든요.
'모국어' 개념을 정의하는 데 다른 나라 글자를 불러온, 이 법안에 서명한 이는 22명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현재 현역 국회의원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그 '다른 나라 글자'는 1천 년 넘게 국자를 대신한 문자이긴 했고요.
그러나 한글만으로도 완벽한 문자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지금,
다시 '한자의 보조'를 국어의 정의에 명시하자는 제안은 얼마나 몰 주체적입니까?
한글로만 써서 "올바른 이해와 표현에 어려움이 있었나?
문장력과 사고력이 저하되었나? 세대 간 의식 차이가 심화되었나?
한글학회의 반문에 이들은 아무도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합니다.
십년 전 (2012년) 학부모와 대학교수, 한자·한문 강사 등이
"공문서의 한글전용 작성을 규정한 국어기본법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으나,
2016년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이 법 규정을 합헌으로 결정했습니다.
국립국어원이 2010년에 발간한 '숫자로 살펴보는 우리말'에서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표제어 약 51만 개 가운데 한자어의 비율은 58.5%입니다.
고유어는 25.5%로 한자어의 절반 이하랍니다. 물론 고유어보다 한자어가 많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게 한자를 배워야 하는 근거가 되는 건 아닙니다.
실제로 이미 귀화어가 되어 한자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한자어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훈(訓)으로 뜻을 새길 수 있는 한자어도 제한적입니다.
비근한 예로 '선생(先生)'과 '제자(弟子)'는 각각 '먼저 태어난 사람', '아우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치매(癡呆)'도 '어리석다'라는 뜻 두 개가 겹치는 구조이고요.
즉, 개별 글자의 훈을 묶어서 낱말의 의미를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자 공부가 도움이 된다고 믿는 이들은 낱말 의미의 인식에서 한자 뜻을 새기는 과정이 '선행'하는 것으로 상정합니다.
이를테면 '학교'라는 낱말은 '배울 학, 집 교'를 묶어서 뜻을 파악한다는 것인데요.
그러나 우리는 낱말의 뜻을 그렇게 분절적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개별 글자의 훈보다는 낱말 덩어리 채로 기억 속에 이를 저장하기 때문입니다.
낯선 어휘는 글과 대화의 맥락을 살펴서 그 뜻을 새깁니다.
정작 한자 뜻을 새기는 것은 부수적인 확인 과정일 뿐이지요.
필자는 교과서에 국한문을 섞어 쓴 1960년에 학교를 다녀 한자가 낯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자어의 훈으로 낱말의 뜻을 살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성인이 된 뒤였습니다.
빛깔을 가리키는 '연두'나 '고동'은 한자로 '연두(軟豆: 완두콩처럼 연한 콩)', '고동(古銅: 헌 구리)'으로 씁니다.
우리는 대체로 이들 낱말의 뜻을 한자와 상관없이 기억하고 인식할 뿐입니다.
'연두'나 '고동'의 뜻을 일러주면 사람들은 그게 한자였냐고 반문합니다.
한자를 몰라도 연두나 고동의 빛깔을 분명하게 알듯,
한자와 상관없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낱말을 알고 있습ㅈ니까?
우리는 새로운 낱말을 만나면 사전을 뒤져 그 뜻을 새기는 게 아니라,
그 낱말이 쓰인 맥락을 살펴서 그 내밀한 뜻을 새기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에 대한 선험적 지식도 그 뜻의 이해를 돕기는 합니다.
형식적 표지에 불과한 한자의 훈에 의존한 낱말 뜻의 파악이 일면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한자에 익숙한 50대 이후의 기성세대에게는
한자가 친숙한 문자 체계고 그 함의를 통해 어휘력을 늘려온 경험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걸 전혀 다른 문자관(文字觀)을 익히며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에게 강요할 일은 아닙니다.
이제 아이들에게 한자는 영어나 프랑스어처럼 외국어가 된 것이 아닐까요?
'무운(武運)'을 '무운(無運)'으로 잘못 읽거나, '갹출(醵出)' 앞에 얼어붙는 이유는
한자를 배우지 않아서가 아니라, 언어생활이나 독서 경험 등으로 그 낱말을 겪고 써보지 못해서입니다.
'N빵'이나 '가부시키 (株式, 일본어로 '나눠 내기')'를 알아듣는 것도 그게 생활 속에서 습득한 낱말이기 때문입니다.
낱말은 말과 글로 씀으로써 온전히 화자의 것이 된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번 대선에서 온전히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려면 누구의 무운을 빌어주는 것이 되면 곤란할 겁니다.
고맙습니다.
-우리말123^*^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