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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론을 통한 복음 전도 24:10~16
10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11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12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13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5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16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설득력 있는 바울의 변론 24:17~23
17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18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19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20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21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22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23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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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바울은 고발자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을 다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동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결례를 행했고 전혀 소동 없이 성전에 있었다고 하며, 자신의 무죄를 변론합니다. 총독은 천부장이 올 때까지 재판을 연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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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론을 통한 복음 전도 24:10~16
복음 전도자에게 세상 법정이나 대적자 앞에서의 변론은 복음을 전하는 기회입니다. 총독은 바울에게 변론할 기회를 줍니다. 바울은 하나님만 의지하며 당당하게 자신을 변호합니다. 그는 벨릭스가 여러 해 전부터 유대를 다스렸기에 유대의 상황을 알고 공정하게 재판해 주길 기대합니다. 그는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백성을 선동할 이유도,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다고 하면서 소극적 변론을 넘어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유대인과 같이 자신도 하나님을 믿고, 구약성경을 믿으며,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이단 취급하는 유대인들과 총독 앞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성도의 신앙 고백은 구원의 복음을 들려주는 방편이 됩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은 벨릭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고백했나요?
나의 신앙을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고백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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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력 있는 바울의 변론 24:17~23
바울은 증거를 제시하면서 더둘로가 고소한 내용을 논박합니다. 바울은 유대 민족을 위한 구제 헌금과 성전에 드릴 제물을 가지고 온 것이라고 밝힙니다. 또한 성전에서 결례를 행했기에 자신에게 종교적 책임을 물을 수 없으며, 성전에서 아무런 모임도 가지지 않았기에 어떠한 소동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21절)을 전했을 뿐이지, 로마법을 위반하거나 무리를 선동한 적이 없다고 변론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유대인들도 믿는 바이기에 정죄받을 죄가 아닙니다. 바울의 변론은 설득력이 있었고, 벨릭스는 그의 무죄를 확신합니다. 벨릭스는 판결을 연기하고, 바울을 구금하되 자유를 주고 친구도 만나게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은 더둘로의 고소에 맞서 어떻게 변론했나요?
효과적인 변론과 설득으로 바로잡아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하나님, 복음을 부인하고 왜곡하려는 세상의 악의에 당당히 맞선 바울을 보며 저희의 삶을 돌아봅니다. 복음을 듣는 자리뿐 아니라 복음을 말하는 자리에도 설 수 있는 담대함을 주소서. 어떤 상황, 어떤 사람 앞에서도 예수님이 복음임을 외치며 살아가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84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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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구원과 부활의 소망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바울처럼 그 누구의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있게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변증할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과 준비를 해 나가도록 하자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 없는 삶이 되고,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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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서 유대인에 의해 체포된 사도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하나 로마 점령군인들은 오히려 바울을 보호한다.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의 배려로 470명의 군인에 의해서
한 밤중에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이송이 되었고 헤롯궁에 감금되었는데
5일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과 변호사 더둘로를 통하여 고소를 했고
더둘로는 바울의 고소 내용을 자세히 이야기 했다.
첫째는 전염병(troublemaker)같은 존재다.
둘째는 유대인을 다 소란케 하는 자이다.
세째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다.
네째는 성전을 더럽힌 자이다. 라고 고소를 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자신을 변호내용이다.
먼저 변명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 문을 연다.(10)
앞에서 더둘로가 벨릭스에게 고소할 때에 벨릭스 각하여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선견지명으로 인해 개혁을 가져왔고.... 감사무지하옵나이다하는 아부 발언과는
격이 달리 들린다.
첫번째 고소내용에 대한 바울이 변론하고 논박하는 주장이다.
1.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간지 12일 밖에 되지 않는다.(11)
2. 그것도 내가 예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갔다.(11)
그러므로 결단코 염병같은 존재가 아니다.
두번째 고소내용에 대한 반박이다.
1. 고소한자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12)
2. 회당이나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12)
3. 그러므로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다.(13)
세번째 고소내용에 대한 답변이다.
고소 내용을 반박하는 주장이기도 하지만 바울의 신앙의 고백이기도 하다.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14)라고 말함으로
벨릭스 총독에게 재판의 기회를 통하여 오히려 복음을 전하고 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옆구리를 누르면 CD PALYER처럼 복음이 흘러 나오는 바울 참 부럽다.
바울이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가?
1. 나는 조상의 하나님을 섬긴다.(14)
2. 나는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기록된 성경을 다 믿는다.(14)
3.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듯이 나도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있다.(15)
그 소망이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다.(15)
4.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꺼리낌 없기를 힘쓴다(16)라고 주장한다.
더둘로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바울을 고발했지만
바울은 하나님을 섬기고, 진리를 믿었고, 부활의 소망을 함께 가졌고,
꺼리낌 없는 양심을 가진자로 이단적 변질자가 아니라
믿음에 충실한 자라고 바른 신앙임임을 강조해서 변론한다.
네번째 성전을 더럽혔다는 고소내용에 대한 부인이다.
1. 내가 성전을 더럽히기는 커녕 내 민족을 구제할 구제헌금과 제물을 가지고 왔고(17)
2. 내가 7일동안 성결의식을 행하고 있었고(18)
3. 군중이 모인 일도 없었고 질서가 어지러워진 적이 없습니다.(18)
4.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있었는데(18)
저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여기에 와서 송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
5. 나는 죽은자의 부활에 대하여 너희 앞에서 심문을 받는다라고(21)
한마디 한 것 밖에 없습니다라고 변호를 했다.
벨릭스의 판결이 너무 싱겁다.
벨릭스가 딜레마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알기 때문이다.(22)
그러므로 유죄 선고를 할 수가 없었다.
앞에서 공회에서도 죄를 찾지 못했고(23:9)
천부장도 바울을 죽일만한 죄를 찾지 못했고(23:29)
더둘로는 그 고소내용을 입증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벨릭스는 재판을 연기한다.(22)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호송하라고 했던 천부장 루시아가 오면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22)하고 재판을 연기한다.
다만 조건이 있다. 그런데 그 조건이 아름답다.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들이 필요한 것을 갖다주고 면회하는 것도 허락한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로마시민권자이기도하고 형사범이나 시국사범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벨릭스가 알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가 좋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것도 하나님의 간섭하심이요 은혜이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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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둘로의 고소가 끝나자, 바울에게 변호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바울은 차분하고도 분명하게 논지를 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0절 유대인들이 더둘로를 통해 총독에게 낯 뜨거운 찬사를 돌렸던 반면, 바울은 담백하게 그의 지위를 인정합니다. 이 재판이 변론술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좌우될 것을 알았기에, 마음을 속이면서까지 총독을 높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세상 권력을 두려워하여 비굴하게 자신을 낮추거나, 과도하게 상대를 높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존귀한 신분을 잊지 맙시다.
11~13절 바울은 범법한 일이 없기에 당당하게 자신의 무죄를 변론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바울처럼 세상에 비난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흠 없고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와 공동체 안에 세상의 비난을 받을 만한 흠이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고쳐나갈지 생각해봅시다.
14~16절 유대인들은 바울을 이단으로 단죄했지만,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들과 같은 하나님, 같은 성경, 같은 소망을 가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노력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넌지시 자신을 고소한 유대인들이 오히려 그들의 믿음과 소망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나는 믿음과 삶이, 소망과 태도가 일치합니까?
17~21절 바울은 적극적으로 변론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불법을 목격한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성전에서 자신이 행한 일이 유대 법을 존중한다는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나 공회도 죄목을 찾지 못했다고 변론합니다. 세상의 파상적인 비난과 공격 속에서 교회와 복음을 위해 적극적으로 알려야 할 사실과 변호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22,23절 벨릭스는 무죄가 분명한데도 판결을 유예합니다. 바울을 붙들어 두고 뇌물을 받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한껏 위하는 척, 자유를 주고 친구들의 왕래를 허락했지만, 실은 곤궁한 처지에 있는 약자를 착취하는 악한 권력자의 탐욕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웃의 곤경을 사익(私益)을 취할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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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 바울이 스스로 한 변론으로, 고발자들이 기다리는 것과 같은 부활 소망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양심적으로 행하기를 힘쓴다는 말입니다. 당시 논리적 감성적으로 설득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와는 달리 바올의 변증은 짧습니다. 그러나 매우 설득력이 있었으니, 정직하고 사실에 입각했기 때문입니다. 간략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재판장은 물론 고발한 대제사장을 비롯한 장로들까지 함구하게 만든 것은 그의 언변이 아니라 그의 언행이 진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말을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물론 그 말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기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양심에 비추어 조금이라도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면 스스로 그런 말을 감히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는 그의 선한 양심이 그것을 정당화하고 보증한 것입니다. 양심은 내부 감시인이자 증인입니다. 항상 행동거지가 사람은 옳아야 할 것입니다. 책잡히거나 오해받을 일은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깨끗한 세상이 아닙니다. 그에 따라 음모와 술수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에 연루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양심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사는 삶만이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 없이 행동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우리 개인도 개인이지만 성도라는 영광된 신분과 더 나아가 우리 주님의 거룩하고 순결한 이름에 욕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언행뿐만이 아닙니다. 문서를 작성하거나 보고서를 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적절한 예가 본문 23장에 나오는 벨릭스 총독에게 보낸 천부장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부장이 총독에게 보낸 편지는 진실과 거짓이 혼합된 그래서 신뢰도가 떨어지는 그런 보고서입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모릅니다. 그래서 채찍질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보고서에는 그렇게 쓰지 않으니, 그가 로마시민임을 알고 군대를 동원해 그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심문하기 위해 가죽 줄로 묶었다는 범법 사실은 삭제하고, 자신이 위기에 처해있는 로마시민 한 사람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저자 누가가 그 편지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궁금합니다. 총독 관저에서 어떻게 흘러나왔는지 혹은 총독의 주변 인물이 귀띔해 주었는지는 몰라도 어쨌건 그 사실이 생생히 남았다는 점입니다. 학자들은 바울에게서 들었다고 추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더 궁금증만 가중할 뿐입니다. 죄수가 자신에 관한 공문서를 볼 리 없기 때문이지요.
천부장은 보고서를 쓸 때부터 그렇게 쓸려고 마음먹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쓰다 보니까 자신의 잘못은 감추고 대신 잘한 것을 클로즈업하여 보고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진실이 살짝 왜곡되었던 것이지요. 슬그머니 유혹이 찾아왔고 거기에 이기심이 합세하여 그런 작품을 남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자기 손으로 쓴 문서가 성경에 기록되어 길이길이 후세사람들이 읽으리라는 것을! 우리도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글을 쓰다 보면 유혹도 생기고 일을 하다 보면 이기심도 발동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글과 행동은 얼룩덜룩 진심이 없는 오점투성이가 될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미사여구로 도배할 지라도, 납득할 밖에 없는 상황을 연출할지라도 이미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 되는 것으로, 진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편에 서기를 바랍니다. 매사 진실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판단한 것이 영원히 남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 사실이 이 땅에도 남지만, 저 하늘 나라에서도 보관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거짓 행위는 공소시효가 없습니다. 세상을 속이고 다른 사람에게 진실되게 포장했을지라도 그 사람의 양심과 하늘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생 그 사람 속에 각인되어 있어 그 일로 인해 일생을 묶여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은 죽을지라도 그 사실이 영원히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도 남고 거짓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게 살기를 원합니다.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이 고발 사건은 아무런 물증도 증인도 없는 마녀사냥식 정치 재판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양심에 거리낌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행24:16)
총독도 이 사실을 잘 알고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죄한 것을 알고도 석방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대제사장까지 직접 와서 고소한 사건에 무죄를 선언하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입장은 어땠을까요?
단지 정치적 이유로 당연히 석방될 권리가 무시되는 현실에 억울한 느낌이나 슬픈 마음이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환난이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이고 주께서 항상 자신과 함께 계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결박 당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고,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행20:23),
고난 당할 것도 알고 있었고
,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9:16),
주의 이름을 위해 임금들 앞에 서야 할 줄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그래서 갇혔으면 갇힌 자들에게 자유하면 자유인들에게 주의 이름을 전파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우리도 당연한 권리와 인권이 무시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억울해 할 일도 아니고 슬퍼할 일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19:21)
우리는 살아도 죽어도 주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주 안에서라면 죽음도 복입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14:13)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무서워하며 무엇을 슬퍼하며 억울하다 하겠습니까?
억울한 것이 있으면 주께서 보복해 주실 것이고,
슬픈 것이 있으면 주께서 위로해 주실 것이고,
설사 죽는다 해도 주와 함께 왕 노릇할 것인데, 무슨 후회가 있겠습니까?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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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교회에 위한 이방인 교회의 구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몇몇의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바울과 함께 와서 그들을 위한
일주일간의 정결 의식을 치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있는 것을 보았던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그를 마치 이방인들이 들어가지 못할 성전에 율법에 어긋나게 입장시켰다라고 하는
거짓 모함을 함으로 인해 이 모든 사건이 발단되었는데
그에 대해 증언할 사람은 그 누구도 함께 오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로부터 늘 뇌물을 받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데만 급급했던 벨릭스 총독은
바울이 무죄임을 명확하게 알고도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 판단을 미뤄버립니다.
또한 바울에게 어느 정도 관계의 자유를 허락하여
자신에게 뇌물이 들어올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아무도 모르게 덮을 수 있는 죄처럼 보이지만
여호와 앞에 드러나지 않을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고 단 한순간도 우리를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전심으로 나아가며 부끄럼 없이 살아가는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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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 대”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자신은 지금 로마 황제의 법정에 서 있지 예루살렘 법정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자신은 로마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각하께서도 잘 아시는 대로, 자신은 유대 사람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만일 자신이 나쁜 짓을 저질러서, 사형을 받을 만한 무슨 일을 하였으면,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바울이 지금 목숨에 연연하여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를 문제삼고 있습니다. 자신을 고발하는 이 사람들의 고발 내용에 아무런 근거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자신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넘겨 줄 수 없다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시민이므로 자신의 재판을 로마황제에게 받겠다고 상소합니다. 바울은, 베스도가 자신을 예루살렘의 법정에 세우려 하는 의도를 보이자 즉시 가이사에게 항소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심각한 음모가 기다리고 있음을 능히 알 수 있었습니다(3절23:14-16). 로마 시민은 지방 행정장관의 판결에 불복하여 황제에게 항소할 수 있는 권리를 법으로 보장 받았습니다. 특히 지방 행정관의 심한 압제를 받거나 중대한 재판 문제가 발생했을 때 황제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지방 관청은 그 호소한 자를 로마에까지 호송하여 황제의 재판을 직접 받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 황제는 네로였고 그는 54-68년에 걸쳐 황제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네로는 폭군으로 유명하나 통치 초기에는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와 집정관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등의 영향으로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바울이 황제에게 항소한 때는 네로가 선정을 베풀던 시대였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이용하여 가이사에게 가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이 가이사(황제)에게 항소했을 때 그는 단지 공정한 재판만을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소망했습니다.(19:21) 유대인들이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고자 하는 것이 오히려 바울을 로마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바울의 간절한 소원이 기회를 얻었습니다. 예수님도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해야 할 소명923:11)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여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자신도 로마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로마를 통하여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소원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가이사에게 보내고자 하는 베스도)
“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베스도는 바울이 가이사에 호소하는 내용을 배석자들과 상의하였습니다. 배석자란 배심원 회의의 위원들이며, 의회의 판사들, 법 전문가들, 그리고 총독의 고문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최종적인 결정은 총독이 내리지만 배석자들과 얼마든지 상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과연 바울에 대한 고소가 가이사에게 호소할 만큼의 중대한 것인가를 논의하였습니다. 중대한 소송건일 경우에 그 항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반란 죄로 고소하였고(24:5),
반란죄는 그 무엇보다 중대한 제목이었으므로 바울의 항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반란죄로 고소한 것이 오히려 로마에 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베스도가 무죄한 바울을 석방하지 않고 바울의 항소를 받아들인 것은 유대인들과의 관계 문제가 그에게 많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9절 주석 참조), 이 불편한 재판에 대한 판결을 황제에게 떠넘김으로써 자신이 정치적으로 손상을 입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는 바울이 가이사에게 항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가이샤라를 방문한 아그립바왕)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수일 후에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베스도 총독에게 문안하러 가이샤라로 왔습니다. 아그립바왕은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자 헤롯 대왕의 증손인 마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립바 2세(27-100)입니다. 아그립바 일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고로 벌레먹어서 죽은 자입니다. 아그립바 이세는 어려서 로마의 글라우디우스황실에서 성장하였고 그의 부친처럼 친로마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A.D.44년 그의 아버지가 별세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7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왕이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팔레스틴은 로마 행정관에 의해 통치되었습니다. 그러다가 A.D. 50년경에 글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아그립바 2세는 갈기스의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팔레스틴의 통치자로 부상되었습니다. 그후 글라우디우스는 그에게 더 많은 영토를 맡겼는데, 빌립의 관할 지역, 아빌라, 트라코니티스, 아크라등을 맡겼습니다. 아그립바의 통치지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네로에 의해 갈릴리, 다리게아, 디베랴등에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아그립바는 매우 친로마적이어서 유대인들이 반로마 감정을 가지지 않도록 공작을 하였습니다. 그는 66-70년에 걸쳐 있었던 전쟁 기간에는 더욱 철저히 로마에 충성해서 전쟁 후 더 많은 영토를 부여받았습니다. 이처럼 아그립바 왕은 친로마 관계로 특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로마 총독이 부임할 때마다 예방하여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버니게 여인은 아그립바 2세의 한 살 아래 누이이자 벨릭스 전 총독의 처인 드루실라(24:24)의 언니입니다. 그녀는 일찍이 철학자 필로의 조카인 마르쿠스와 약혼한 적이 있었으나 결혼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후에 그녀는 삼촌인 헤롯과 첫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48년에 남편이 죽자 오빠인 아그립바 2세의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후 그녀는 길리기아 왕 폴레몬과 두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곧 이혼하고 다시 오빠에게 돌아왔습니다. 이때 이들 사이에는 근친상간의 불륜이 저질러졌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었습니다. 버니게는 70년 이후에는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의 아들인 티투스와도 애정 행각을 벌였으나 여론의 악화로 끝내는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베니게가 오빠 아그립바와 함께 베스도의 취임을 축하하러 온 지금은 아마 첫번째 결혼에 실패한 후 오빠 집에서 함께 거할 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재판하지 않았음을 밝힘)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그들이 거기에서 여러 날 지내는 동안에, 베스도가 바울을 두고 소송을 제기한 사건을 왕 앞에 내놓고 말하였습니다.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를 문안한 것이 다소 길어진 듯합니다. 베스도는 아그립바의 명성과 권위로 보아 바울에 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판단하고서 바울 이야기를 화제로 꺼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 직접 유대를 통치하지는 않았지만 글라우디우스 황제가 왕에게 성전의 후견인의 자격과 대제사장의 임명 및 파면권, 그리고 성전 창고와 제사장의 예복을 관리하는 권한을 부여해 주었기 때문에 유대 사회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베스도는 벨릭스가 가두어 둔 바울이 있다고 합니다.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 유대 사람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발하여, 총독에게 유죄판결을 청하였다고 합니다. 베스도는 자기가 겪은 사건의 줄거리를 아그립바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새로운 사실이 제시되는데 그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단지 바울을 고소만 한 것이 아니라(2절),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유죄 판결을 요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그들에게 로마 사람의 관례로서는, 피고가 원고를 직접 대면해서, 그 고발한 내용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를 가지기 전에는, 그 사람을 넘겨 주지 않는 것이 전례라고 대답하였다고 말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억지 주장과 총독 베스도의 법적 공정성이 대조됩니다. 로마의 사법 관행은 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며, 피고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도록 규정되었습니다. 베스도는 사사로운 감정에 매이지 않고(3절) 법을 준수함으로써 로마법의 정의를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베스도의 진술은 자신이 법에 의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했음을 과장하여 강조합니다. 처음에 그가 예루살렘에서의 재판 요구를 거절한 이유는 자신이 가이샤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4절), 재판 과정에서도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9절) 완전히 공정하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무죄를 아는 베스도)
“17.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고소한 종교지도자들이 가이샤라에 같이 왔으므로, 베스도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 다음날 재판석에 앉아서, 바울을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베스도는 8-10일 지나서 재판을 신속하게 열었습니다(6절). 그는 재판을 지연시키면서 직무를 유기하거나 뇌물을 기대하지 않고 공정한 재판을 하였다는 것을 넌지시 강조합니다. 이는 전임자인 벨릭스의 우유부단한 처사와 대조됩니다.(24:22). 원고들이 일어나서 그를 고발할 죄목을 늘어놓았지만, 베스도가 짐작한 그런 악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력한 산헤드린의 의원들이 바울을 고소했을 때,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명망으로 보아 바울이 무엇인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중대한 악행을 범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재판이 열리자 베스도의 짐작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로마법에 의해 유죄에 처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였습니다(7절). 그들이 바울과와 맞서서 싸우는 몇몇 문제점은, 자기네의 종교와 또 죽은 예수가 살아났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베스도는 성전모독에 관한 사항은(24:6) 제외하고 부활에 관한 문제를 말합니다.(24:21) 바울이 부활을 믿는다는 것을 범죄자로 정죄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단순한 부활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주장하였습니다. 부활에 관해서는 바리새인들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예수의 부활만큼은 유대지도자들이 다 반대하였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문제는 로마 법정에서 다룰 성질이 아님은 분명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경우에도 종교적 문제로써 정치적 올가미를 씌우고자 안간힘을 썼을 뿐입니다(눅 23:4, 14).
(가이사에게 호소한 바울을 소개)
“20.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베스도는 이 문제를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 사건으로 거기에서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를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베스도는 자신의 종교 문제에 관한 무지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하는가 물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바울을 석방하지 않고 머뭇거린 것은 무지탓도 있었겠지만 그 배후에는 고소자들이 바울을 무죄로 선언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그대로 갇혀 있게 하여 달라고 호소하므로, 베스도가 그를 황제에게 보낼 때까지, 그를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다고 합니다.
황제는 라틴어 아우구스투스에 해당하는 형용사로서 존엄한, 존경스러운이란 뜻입니다. 또한 이 말은 원래 숭배하다 경외하다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했습니다. B.C. 27년 로마 최초의 황제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헬라어로는세바스토스)라는 칭호를 받은 이후로 이는 가이사와 더불어 로마 역대 황제의 칭호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자 하는 아그립바)
“22.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자신도 그 사람의 말을 직접 들어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 관하여 자세히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도’에 해당하는 표현(also myself)을 사용하여 말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앞에서 다시 한번 증언을 합니다. 예수님이 로마의 총독(본디오 빌라도) 앞과 아그립바의 증조부인 헤롯 안티파스 앞에서 증언한 것과 유사합니다.(눅 23:8)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에게 적대적인 행위를 했던 반면(눅 23:11),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적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베스도가 내일, 그의 말을 들어 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바울을 데려옴)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위엄을 갖추고 나와서, 고급 장교들과 그 도시의 요인들과 함께 공청실로 들어갔습니다. 베스도의 명령으로 바울을 끌어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위엄 있고 호화찬란하게 보이고자 하였습니다.
버니게의 사치와 화려함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 전쟁의 긴장이 감돌던 시기에 그의 오빠 아그립바가 유대인들에게 전쟁을 피하도록 권유하는 순간에도 사치스럽게 치장하고 오빠 옆에 앉아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그립바 남매를 필두로 하여 천부장을 비롯하여 성중의 유력 인사들이 뒤따라 화려하게 들어왔습니다.
접견실은 공개적으로 청취를 하는 공청실을 뜻합니다. 재판은 이미 끝났고 바울의 항소는 받아들여졌으므로 다시 재판을 하는 것은 아니었고 아마 청문회의 형식이었을 것입니다.
가이사랴 최고의 권력자들과 실력자들의 위세와 화려함 앞에 서 있는 바울의 모습이 왜소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에게 복음을 소개하는 목자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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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바울이 총독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재판을 받으면서도 오직 옳은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바울의 변명(변론)
바울을 공격하는 유대인들의 진술이 끝나고 바울이 대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문 변호사를 두고 화려하고 논리적인 말로 바울을 공격하였습니다. 총독에게 갖은 아부를 하면서 오직 바울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진술을 보십시오. 바울은 유대인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변론을 하면서도오직 진리만을 말합니다.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10절) 바울도 수사학을 공부한 사람이기에 그가 어떤 말로 재판장인 총독의 마음에 들게 할 수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총독을 한껏 추켜 세워주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직 사실만을 말합니다. 계속된 그의 진술을 보면 아주 논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아니하였고 그가 소요를 일으킨 적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고 논리정연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논리가 필요한 곳에서는 모든 논리력을 사용하여 일목요연하게 자신의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거짓된 진술이나 거짓을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선한 목적을 위해 거짓 수단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목적이 선하면 수단도 선해야 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공격하는 유대인들을 이기기 위해 아부와 과장이라는 잘못된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진실로 승부를 하고 있습니다.
2.바울의 고백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는 그 와중에도 또 다시 자신의 속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14절)이러한 고백이 그의 재판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중심이며, 또한 그것을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불리할 줄 알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살다보면 때로는 사람들에게 전혀 인기가 없지만 그것이 진리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진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나에게는 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진리라면 그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진리는 좁은 길이 됩니다. 아무리 그 길이 자기에게 해롭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진리의 길이라면 가야 합니다. 그 순간이 내가 죽고 진리가 살아야 하는 순간입니다.
고백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죽음의 길이지만 그것이 진리를 따르것이기에 고백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고백을 하였는지요? 그 때가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신앙고백기회였을지도 모릅니다.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고백해야 할 그 때 진짜와 가짜가 드러납니다.
옳은 것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거짓이 우리안에 자리를 잡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이 재판이라는 참 힘든 길을 가면서도 오직 옳은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옳은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힘들다고 그 때만 옳은 것을 피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때 피하면 우리는 항상 옳은 것을 피한 사람이 됩니다. 힘든 그 때가 옳은 길을 가야 하는 가장 좋은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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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묵상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에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생활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살아가는 이유가 부활에 대한 소망 때문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귀한 세상에서 왜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느냐는 진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바로 부활의 산 소망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소중한 본문입니다.
우선 우리는 이 재판이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더둘로의 송사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피고는 바울이고 원고는 유대인들, 특히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같은 종교적인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 상당한 곤경에 처해져 있습니다. 이유 없이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것도 끌려 다니는 것이지만 자칫하면 목숨을 잃게 될 위기의 순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사람 벨릭스가 누구입니까? 노예 출신의 총독으로서 잔인하고 욕심 많기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만약 아쉬운 소리를 할 가능성만 가지고 말한다면 사도 바울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상반된 모습을 보면서 진실과 아첨의 차이를 보아야 합니다.
3-4절의 더둘로의 아첨과 10절의 바울의 말을 비교해 보십시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이 얼마나 거짓말이며 아첨인가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벨릭스는 태평을 주는 사람도 여러 가지로 개량을 시킬만한 위인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욕심 많고 병적인 열등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간결합니다. 아첨의 말이 없습니다.
저는 여기서 진실과 거짓의 차이를 보았습니다. 원래 진실한 사람은 아첨의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자기를 변호하기 위해서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진실한 사람, 진실한 삶은 그것 자체가 커다란 힘이 됩니다. 그래서 위기의 순간에도 의연할 수 있습니다. 과장적인 말과 행동을 하지 않도록 자기를 잘 지켜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매 순간마다 진실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자기를 과대 포장하고 싶은 욕심, 거짓으로 순간을 모면해 보려는 얄팍한 마음을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진실은 벨릭스와 같은 사람의 눈에도 보이는 것입니다. 그만큼 힘이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진실하다고 하는 것이 예의가 없는 것하고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가끔씩 남성답다는 표현을 무식한 것과 혼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성답다는 것을 예의가 없는 것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처럼 진실하다는 것이 예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갖추어야할 예절은 지키고 있습니다. 벨릭스가 노예 출신으로 총독이 되었든 현재 아주 잔인한 통치를 하고 있는 사람이든 지금 내가 갖추어야할 예절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은 결국 “나도 똑같은 사람이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첨하지는 않지만 적절한 예절을 지켜서 변론을 시작합니다.
정황적인 변론(11-13절, 17-21절)
바울이 제출한 첫 번째 증거는 무엇입니까? 지금 재판정에 서기까지 자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한 시간이 전부 열이틀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바울은 자신이 예배하러 올라갔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더둘로는 시종 바울의 행보를 정치적인 것으로 끌고 갔지만 바울이 말하는 진실은 자신은 예배하러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어떻게 새로운 정치 집단을 만들어서 로마 정부에 반기를 들 수 있겠느냐고 변론하고 있습니다. 그 열이틀 가운데 4일은 붙잡혀서 구류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의 정결례 기간 가운데 마지막 날 잡혔기 때문에 1주일은 성전에 있은 것입니다.
그러면 남는 시간은 하루밖에 없습니다. 도무지 정치적인 행동을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표면적인 날짜 계산은 이렇게 됩니다만 쉴라터라는 학자는 이렇게 12일을 계산했습니다. 1일 예루살렘에 도착(21:17), 2일 야고보를 비롯한 장로들과의 회합(21:18), 3일-9일 7일간의 정결례(21:27) 및 성전에서의 누명(21:28), 10일 공회에서의 증언(22:30), 11일 바울을 살해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23:12), 12일 가이사랴로의 이송(23:32)되었다는 것입니다. 뭐 어떻게 계산하든 간에 뭔가 소요사태를 획책하기에는 빈 시간이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성전에서 무슨 변론을 하는 것이나 회당에서 또는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고소하는 사람들이 본 적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다만 아시아에서 온 어떤 사람들이 성전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만약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었으면 마땅히 나서서 직접 송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 가고 엉뚱한 사람이 고소 자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사건의 시작은 바로 그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충동질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지금 어디로 사라지고 아나니아가 더둘로를 앞세워 고소하고 있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진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행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욱 언성을 높여서 이야기합니다. 만약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지 말하게 하십시오. 아마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말한 그것 때문에 심문을 받는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당신 앞에 내세울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서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벨릭스의 한마디면 자신의 생명이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자칫하면 기가 죽어서 말도 변변히 못할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미 수도 없는 사선을 넘어서 여기까지 온 바울입니다.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서 도우셨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빌립보 감옥에서 찬양하다가 옥문이 열리는 놀라운 기적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조금의 위축됨 없이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훈련된 사람 바울! 그 믿음이 잘 드러나는 순간인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위기의 순간에 평안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믿음이 모든 어려움과 상황을 이기는 힘입니다.
또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믿음이 바울에게 침착함과 용기를 주었다면 진실은 담대함을 주었습니다. 거짓이 없는 진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당당합니다. 진실했기 때문에 거칠 것이 없습니다. 아마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 있다면 그것은 정직과 진실일 것입니다. 이런 바울의 정직함, 진실함은 벨릭스같은 사람의 마음도 움직였습니다.
진실하게 사는 것은 때로 미련해 보이고 때로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회의를 불러일으킬 때도 있습니다. 남들은 불법과 탈법을 통해서 잘도 좋은 차타고 좋은 집에 살고 있는 것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삶은, 정직한 삶은 비록 그런 물질적인 행복, 외적인 만족감을 맛볼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것보다 더 큰 마음의 평안함과 자유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진실한 삶은 떳떳합니다. 사실 그런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 어찌 보면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벨릭스앞에서도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순간순간을 진실하게 살기로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소망과 삶(14-16절)
그러면 무엇이 진실한 삶을 가능하게 합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정황 적인 증거를 아주 논리적으로 열거한 뒤에 “그러나”라고 다음 말을 시작합니다. 이 “그러나”는 다음에 이어지는 말들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이겠습니다. 앞의 정황 적인 증거들이 이렇게 뚜렷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합니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고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기록된 것을 다 믿는 사람입니다.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과 그 예언들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희들, 즉 바리새인들도 기다리고 있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나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소망이 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이 말이 가지는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앞의 정황적인 증거들이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내가 가진 부활의 소망,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영감(靈感)주셔서 기록한 선지자의 말씀을 믿는 믿음 때문에 내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더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고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 위해서 힘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재판장님! 이것을 더 중요하게 보아주십시오.
얼마나 신앙인의 자존심이 묻어나는 말입니까? 나는 정황 적인 증거보다 내가 가진 믿음과 소망 때문에 모든 일에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그것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신앙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삶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그가 얼마나 소망에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에 거리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애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이 있는 사람! 말씀을 믿고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그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 어떤 이원론적인 사고가 자리할 곳이 있습니까? 믿음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하면서 삶을 중요시하지 않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소망,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범사에 하나님과 함께 한 양심, 선한 양심을 가지고 그에 거리낌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삶은 힘이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소망과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이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소망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그 삶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부활의 소망이 내 삶에 모든 영역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장차 유업으로 받을 천국에 대한 소망 때문에 이 땅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사람들에게 빛으로 드러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보아야 하고 꾸어야 하는 꿈은 무엇입니까?
저는 사도 바울에게서 그 꿈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으니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로마의 감옥에서 이렇게 씁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푯대를 향하여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천명합니다. 그 하늘에 있는 시민권 때문에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한 삶을 살라(빌4:8)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바울은 벨릭스 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게 있는 부활의 소망 때문에, 특히 악인의 부활과 의인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범사에, 모든 일에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힘쓰고 있다는 말이지요. 앞으로도 힘쓰겠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소망이 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소망이 있습니까? 그 소망이 나를 진실하게 하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하는 소망입니까? 여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의 삶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소망의 사람들입니다. 양심의 사람들입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에도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소망입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에는 진실이 있습니다. 그 진실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진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통하는 것입니다. 벨릭스에게도 진실은 보여지는 것입니다.
부활의 산 소망 때문에 진실하고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 없는 생활을 하는 오늘이기를, 성도의 평생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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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매 순간 우리를 돌아보시고
우리의 걸음을 지키시는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맡겨주신 사명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하는 주님의 자녀 되길 소망합니다.
세상은 돈과 권력과 명예를 좇아 끊임없는 탐욕으로 나아가지만
우리는 주신 것들을 드리고
그분의 영광 앞에 엎드리는
겸손과 순종의 삶 살도록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가정과 삶,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눈동자처럼 지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전쟁과 기근, 질병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신음하며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위로하시고
회복과 치유의 손길로 덮어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버지를 기쁘시고 그 마음을 시원케 하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