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일어난 지 올해로 74년이 흘렀지만, 전쟁의 후유증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친정아버지도 고 백선엽 장군의 통역장교로 1군사령부에서 근무하셨다. 아버지는 평양에서 대지주의 외아들로 태어나 장성해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셨기에 영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와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 등 언어에 탁월하셨고, 그래서 군에서 통역장교로 복무하게 됐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전쟁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들려주시곤 했다.
최근 집 부근 공원에서 최 장군이라는 분이 6·25전쟁에 참전했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나서 친정아버지 이야기를 전하였더니, 바로 선친이 나의 직속 부하였다면서 마치 선친을 만난 것처럼 얼마나 반가워하시는지, 몰라 하셨다. ‘참, 이런 인연도 다 있나’ 싶어 장군님을 모시고 평양냉면은 대접하면서 아버지 노 대위에 대한 옛 추억을 끄집어내는 시간을 가졌다.
최 장군님은 미국에서 한국 사람으로서뿐 아니라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삼성장군, 쓰리 스타이셨고, 그래서 아직도 국내의 유명한 감독들이 전쟁 영화를 만들려고 찾아온다고 하셨다. 또한, 아직도 세계 각국의 참전 스타들이 모인다고 하시면서 최근엔 책도 집필 중이고, 거의 완성단계라고 하셨다. 또 아버지 노 대위는 키가 크고 유도로 단련된 군인이었던 데다가 영어가 능통했고, 그래서 백선엽 장군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통역으로 공을 많이 세웠다고 전해주셨다.
당시 통역장교는 고학력자들을 모집해 급하게 1년 정도 훈련한 뒤 장교로 배출하는 과정으로, 13명만 임관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전역 뒤 절대로 정치도, 관료로서의 길도 가지 않으시겠다면서 교육자로서 삶을 선택하셨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최 장군님은 “가장 잘 살다 가신 분은 너의 아버지”라고 귀띔해 주셨다. 또한, “출세한 몇 분은 감옥에도 가고 해외로 도피도 했는데, 네 아버지는 소신대로 교육자로 생을 마감하셨으니, 아직도 제자들의 기억 속에 노 대위는 남아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또한, 아버지 노 대위는 젊은 날 고뇌로 늘 마음이 편치 않으셨다고 하셨다. 나라 잃은 설움에 독립운동으로 또래들이 목숨을 잃고 어렵게 살아가는데, 아버지는 일본에서 유학을 하게 되니 늘 괴로워 하셨다고 하셨다. 그 시절에는 부모님 말씀을 절대로 거역해서는 안 되는 게 정서여서 지금은 부모님 뜻대로 살지만, 나중에 마음대로 살 수 있을 때 꼭 가치 있는 일에 몸담고 싶어 하셨고, 또 가난하지만 정의롭게 살고 싶으셨다고도 하셨다. 그 길만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고, 나라에 빚을 갚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얼마나 사무치게 그립다.
어린 시절의 나는 영양실조로 늘 얼굴에 버짐 꽃이 피어 있었다. 하지만 늘 배고팠던 형편에도 아버지께서는 가난한 제자들의 등록금을 대주셨고 축구나 바둑, 유도 등을 통해 제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신 따뜻한 참 스승이셨고 멋쟁이셨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아버지 산소에는 제자들이 꽃을 두고 간다는 사실에 난 아버지의 삶이 결코 불행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께서는 당시 통역장교 출신인 데다 학벌과 배경으로 얼마든지 출세하실 수 있었지만, “지금 살아온 길이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다만 가족들이 고생한 것은 너무도 미안한 마음”이라고 하셨는데, 아버지께서 유산으로 물려주신 건 없지만, 정직하게 살아오신 것, 그리고 신앙을 유산으로 주셨기에 난 그것으로 충분하고, 또 가장 중요한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늘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는 내 영혼을 깨어 있게 해주신 정신적 지주이셨다.
그러고 보니, 6·25전쟁 발발 74주년도 막 지났다. 하지만 지구촌은 전쟁으로 혼탁하고, 평화로 가는 길은 멀다. 러시아의 침략으로 우크라이나에서 3년째, 하마스의 테러로 이스라엘 가자 지구에서 9개월째 참혹한 전쟁이 계속 이어진다. 언제나 이 전쟁이 끝날지, 마음이 아프다. 일전에 “가톨릭에서 예수님의 승천은 땅이나 영토의 포기”라는 한 성서신학자의 말을 들었는데, 굉장히 공감이 가는 말이다. “이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나, 사용하다 버리고 갈 뿐”이라고 하던 한 스님의 말씀도 생각난다. 땅을 둘러싼 민족들의 갈등, 그리고 그에 따른 전쟁의 한 복판에서 우리는 언제 욕심을 버리고 끝없는 형제애로 나아갈지, 기도에 기도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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