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의 상황
주(周)나라(기원전 11세기~8세기)의 봉건체제가 붕괴함에 따라 기존의 사회질서는 붕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찾는 지적 활동이 왕성해졌다.
주의 봉건제는 가족적 유대를 체계화한 종법제(宗法制)를 근간으로 유지됐다. 동일 종족 내의 부자관계와 같이 수직적인 세대의 차이에 따른 차등관계나 수평적으로 촌수를 따지는 친소(親疎)관계 및 가문과 작위의 세습관계에 대한 질서를 규정한 종법제는 왕과 봉건제후의 관계를 맺어 주는 근본 원리로 작용했다. 이때 적자와 서자의 차이는 장자와 차자의 관계와 함께 세습의 권리에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주나라 후반기에 들어 철기의 발달과 화폐의 유통으로 농업 생산력을 포함한 사회 전반의 경제력이 급격히 향상됐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로 말미암아 기존 사회질서가 그대로 유지될 수 없었다.
또한 중앙정부와 봉건제후 간에 유지됐던 종법제가 붕괴하고 말았다. 이제 봉건제후는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면서 지방분권화 현상이 심화됐다. 오히려 누가 더 강력한 무력을 보유하느냐에 따라 제후 간의 위계질서가 형성됐다.
따라서 제후 간에는 끊임없이 전쟁이 발생했고, 약육강식의 원칙에 따라 영토확장 경쟁은 물론 새로운 국가가 갑자기 등장하고, 기존 국가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전쟁이 국가를 만들고, 국가가 전쟁을 일으키는 시대였다.
이렇듯 중국 전체로는 지방분권이 심화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각 제후가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갖게 됐다. 중국 대륙에는 수많은 작은 제후국가들이 서로 자웅을 겨루고, 지방의 권력이 천자의 황실을 능가하였다. 그러면서 수많은 작은 제후국가 내의 권력질서는 대단히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개편됐다.
점차 일사불란한 명령체계의 관료제와 유사한 통치체제가 형성되고, 동시에 문자화된 법을 통해 국가조직이 유지되는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이전에 예(禮)라는 불문법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성문법 체계가 확립된 것이다.
중앙집권적인 국가체계의 등장은 이제 중국이 다시 봉건체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과학기술과 생산력의 발달로 새로운 병법과 무기가 발달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이제 개인적 무술 역량을 바탕으로 한 무사귀족의 필요성이 절감된 데서 연유했다.
대신 소규모 토지의 사유재산을 바탕으로 가족 노동력을 주로 사용하는 농민들이 등장함에 따라, 이들 비직업적인 농민군이 군사행동의 주축을 이루게 됐던 것이다. 따라서 백만 대군을 운운할 정도로 군대와 전쟁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면서, 활쏘기나 칼싸움 같은 군사기술을 구사할 능력을 지닌 소수 엘리트는 더 이상 쓸모가 없기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춘추전국시대(기원전 8세기~3세기)의 사회적 특징은 끊임없는 전쟁과 강력한 국가체제 형성이라는 두 가지 현상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변동으로 중국인들은 극도의 정신적 혼돈을 맞보게 됐다. 하루하루를 전쟁의 불안감을 가지고 보내면서 눈에 보이는 성문법적 질서가 아니면 안 믿게 되는 새로운 불신의 시대를 살게 됐다.
자연 그러한 상황에서 중국인들의 주된 관심의 대상은 인간의 본성, 인간과 사회의 관계 및 국가의 본질로 모아졌다. 약육강식을 되풀이하는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인간이란 도대체 착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개개인의 역할과 위치는 무엇인가? 갑자기 등장한 국가란 무엇이며, 국가와 나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으로부터 다양한 학파의 철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난세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지식인들은 노력했다. 그 결과 중 문화의 르네상스라 부르는 찬란한 문화 부흥기가
[출처] 1-1 춘추전국시대의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