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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기행 2 – 거지출신, 곰보에 천하의 추남인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 능에서
기행문 1편 ‘강동을 아십니까’를 읽고 한 분이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강동’을 ‘강좌(江左)’로 했다고 알려주시군요. 북쪽에서 본 왼쪽이니 강좌가 강동입니다. 지도를 거꾸로 보면 재미납니다. 일제시대 동경으로 가는 걸 상경이라고 했지요. 부산에서 서울 가는 걸 상경이라는 건 자연스러운데 옛날 평양에서 서울 오던 것도 상경이라 하지 않았나요? 권력자가 있는 곳이 항상 기준이니까요.
9월 7일(목)에서 오후 2시 경 남경에 닿았습니다. 중국과의 시차가 1시간이라 1시간을 벌었지만 박물관이나 남경대학살 기념관 등 구경할 곳들이 5시에 문을 닫으니 시간은 별로 없더군요. 남경대학의 저녁식사 겸 간담회 시간에 맞추기 위해 명(明) 태조 주원장(朱元璋) 능을 보고 공자를 모신 부자묘(夫子廟)를 스치듯이 지났을 뿐입니다. 남경대학살은 비디오로 수차례 보았고 또 중국의 선전물에 심취할 기분이 아니었지요. 요즘 학살이나 전쟁의 잔인한 현장을 보는 것도 섬뜩하구요. 부자묘는 원래 밤에 배를 타고 야경으로 볼 계획이었지만 취소했지요. 그런데 유교와 불교에 심취한 우리의 가이드 최주화(崔周華)씨가 부자묘는 꼭 보아야 한다고 강권하기에 밖에서 건성으로 보고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먹었습니다.
주원장(1328-1398)은 어릴 때부터 나의 머리 깊숙이 박힌 인물입니다. 제가 고성국민학교에 입학할 때 같이 이 학교에 교편을 잡으신 어머니는 4학년이 되자 더 이상 아들을 옆에서 볼 필요가 없다면서 고성여중으로 옮겼습니다. 여기에서 수학을 제외하고 모든 과목을 가르쳤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집에는 온갖 교과서와 참고서들이 있었지만 국어와 동양사 책들에 끌렸습니다. 읽을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이들 교과서와 참고서를 여러 번 보았지요. 국어교과서에는 청산리 대첩, 원술랑(유치진의 희곡인 듯) 등이 있었고, 동양사에는 ‘관우가 형주에서 전사하고’ 등의 표현을 기억날 정도이니 상당히 상세한 참고서였던 것 같습니다. 쿠빌라이의 설득을 끝까지 물리치며 남송의 멸망과 같이 한 충신 문천상(文天祥, 1236-1283)도 초상화와 함께 길게 나왔습니다.
이 중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주원장의 초상화였습니다. 정말 못나고 괴팍하게 그려져 있더군요. 온 얼굴이 곰보인 것은 어릴 시절 주변에서 흔히 보던 것이라 치더라도 턱이 옆으로 튀어나고 눈썹이 위로 올라간 게 괴물 같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황제라니.... 주원장보다 못생긴 인간도 있을까요? 그런데 이 못난이 주원장의 초상화가 바로 주원장의 능 앞에 있는 사당에 버젓이 걸려 있는 겁니다!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신언서판(身言書判)으로 인물을 판단했지요. 신은 풍채와 용모일 것이고 언은 말주변, 서는 서예 글씨나 필력, 판은 판단력이나 세상을 보는 능력을 말할 겁니다. 저는 이게 거꾸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이성적 판단력이 으뜸이고 용모는 마지막 평가 대상이 되어야 할 게 아닌가요? 글씨 잘 쓰는 것은 또 뭐가 중요한가요? 물론 서예만이 아니라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치국에 관한 논문을 쓰는 능력이니 조금은 꼽아 줄 수 있겠지요.
저는 여자대학에서 근무했지만 애들에게 ‘예쁘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을 잘 한다, 머리가 좋다, 영리하다, 답안을 잘 썼다, 혹은 그림, 음악, 수학, 스포츠 등 분야에 보인 능력으로 칭찬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쁘다’는 것은 모욕적으로 기분 나쁘게 받아들인다는 건 지나친 희망일까요? 풍채나 용모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요즘 젊은 여성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죠. TV를 보면 ‘예쁘다’가 너무 평범한 표현인지 한술 더 떠서 ‘섹시하다’고 해야 흐뭇한 표정을 짓더군요. 비주얼 시대에 살다 보니 용모가 사회적 자산임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신랄한 비판도 있습니다. 원문을 그대로 둡니다. Beauty is a form of power... What is lamentable is that it is the only form of power that most women are encouraged to seek. This power is always conceived in relation to men. It is not the power to do but the power to attract. It is a power that negates itself.(Susan Sontag)
조조의 용모도 별로였던 것 같습니다. ‘삼국지’ 드라마에는 항상 수염이 덥수룩하고 험상궂은 얼굴로 나오지요. 조조는 위왕(魏王)이 되었지만 황제는 되지 못합니다. 아들 조비(曹丕) 때에 이르러 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獻帝)를 몰아내고 황위에 오르면서 아버지 조조를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추존합니다. 조조가 스스로 황제가 될 수 있는 능력과 기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에 오르지 않은 이유는 여럿 있지만 용모가 별로였다는 것도 그 하나로 꼽힙니다. 이건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조조는 북방 유목 돌궐에서 사신을 왔을 때 잘생긴 최염((崔琰)(?)을 왕좌에 앉히고 자기는 그 옆에 시립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한 무제에게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그만큼 옛날에도 용모가 인간을 평가하는 주요한 기준이 되었다는 겁니다.
주원장의 초상화는 여러 개 있습니다. 공식 초상화는 용포를 입은 근엄하고 인자하게 잘 생긴 얼굴이죠. 수많은 화공을 불러 초상화를 그리게 했는데 실물과 꼭 같이 그리면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겠죠. 그래서 또 그리고 또 그리게 했답니다. 마음에 들지 않은 그림을 내놓으면 죽였다고도 하지만 이건 과장인 듯합니다. 한 영리한 화공이 얼굴 윤곽은 비슷하게 하면서 표정은 화기가 도는 인자한 모습으로 그렸더니 대단히 만족하여 사본을 여러 개 만들어 자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 초상화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날 우리가 본 것은 못생긴 것이었습니다. 그의 사당에 왜 못난이 초상화를 두었을까요? 주원장 같이 못생겨도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공산 중국이 노동자-농민들에게 보여주어 이들의 기를 살리기 위해서 일까요? 모택동도 잘 생긴 얼굴은 아니죠. 설마 모택동이 자기가 주원장 보다 잘 났다면서 이 초상화를 내걸게 한건 아니겠죠?
주원장은 회하(淮河) 연안의 호주(濠州, 안휘성 봉양현,鳳陽縣) 출신입니다. 원래 집안은 한 고조 유방과 같은 강소성 패현(沛縣)이랍니다. 아명이 중팔(重八)인 것은 8번째 아이란 말이랍니다.(아들은 네 명이라는데) 부잣집 소를 키우고 거지노릇을 하고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서 동냥하는 탁발승(托鉢僧) 경력을 가진 빈민 출신입니다. 이런 최 빈민 계층을 elements declassé라고 하죠. 계급으로도 분류될 수 없는 사람들이란 말일 겁니다. 중국 황제들 중 주원장처럼 출신배경이 하찮은 인물은 없습니다. 굳이 꼽으라면 같은 고향인 패현(沛縣)에서 정장(亭長) 노릇을 한 한고조 유방(高皇帝 劉邦) 정도일 겁니다. 그래도 정장이라면 하급이지만 관리입니다. 주원장의 전기에 의하면 그는 판단력, 특히 정치적, 군사적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대응하는 순발력이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자연히 인물들이 주변에 모여드는데, 중국 역사상 최고의 책사 중 하나로 꼽히는 유기(劉基, 1311-1375)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원 말기 홍건적(紅巾賊)이란 농민 반란군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북송의 수도였던 하남성 개봉(開封)까지 진격하지만 원의 반격으로 흩어집니다. 주원장은 각지를 전전하다가 홍건적 부대인 곽자흥(郭子興)의 휘하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곽자흥의 양녀 마수영(馬秀英, 1332-1382)과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됩니다. 이것이 주원장이 출세하는 디딤돌이 되죠. 마씨는 당태종 이세민의 장손(長孫)황후와 함께 중국사에서 가장 지혜로운 황후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당시 여자들은 전족(纏足)을 하여 발을 작게 만들어야 예쁘다고 했는데 마수영의 발을 그대로 두어 별명이 ‘큰 발’, ‘마대각(馬大脚)’이었다고 합니다. 주원장이 혼인 첫날 밤 마씨의 발이 크다고 놀라자 ‘나는 당신의 못생긴 얼굴을 보고도 좋아했다’고 응수고 드라마에서 단골로 나옵니다. 참 대단한 인물이죠.
나는 주원장이 ‘성벽을 쌓고 양곡을 모우고 왕은 천천히 되라’는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인 걸 가장 인상 깊게 느낍니다. 군웅들이 할거하던 시대 모두가 왕이 되고 싶어 하며 몇 개의 성을 얻으면 왕이나 황제로 스스로 칭하죠. 그러나 왕이 되면 주변 세력들의 질시와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특히 원(元) 중앙정부의 토벌대상이 됩니다. 주원장은 실력이 충분히 갖추어질 때까지 발톱을 숨겼다는 말입니다.
명분도 충분히 이용합니다. 초(楚)의 귀족 출신인 항우는 초 회왕(懷王)의 자손이라는 양치는 목동을 데려다가 왕으로 추대하는데 후일 의제(義帝)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러나 항우는 전국을 통일하고 초패왕으로 등극한 후 의제를 거추장스럽게 여겨 다른 곳으로 옮기는 도중 배에 구멍을 뚫어 침몰시켜 죽입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전형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의 역사에도 영향을 미치죠. 연산군 시대 첫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의 발단을 제공한 것이 바로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 의제를 조문한다는 글이라는 건 잘 아실 겁니다. 연산군은 김종직 등 영남 사림파들이 단종을 몰아낸 세조를 항우에 비유했다는 구실로 제거한 것입니다. 주원장은 역시 송(宋)의 후예이며 홍건적 출신인 소명왕(小明王) 한림아(韓林兒, -1366)를 받듭니다. 이민족 국가인 원을 몰아낸다는 구실로 송의 소명왕을 앞세운 것이죠. 그리고 오왕 등 작호를 받습니다. 그러나 주변을 평정한 뒤 소명왕을 수도인 남경으로 모셔오면서 강물에 빠뜨려 죽입니다. 역사의 반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흡사합니다. 항우와 주원장, 두 사람이 한 짓은 비슷하지만 성공과 실패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난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여기에서 <삼국연의>의 저자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을 등장시켜 볼까요? 주원장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 준 것은 진우량(陳友諒, 1320-1363)과 싸운 강서성 파양호(鄱陽湖) 전투입니다. 나관중은 이 전투를 관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또 다른 반군 지도자인 장사성(張士誠, 1321-1367) 밑에서 종군했다는군요. 당연히 출세할 수 없었죠. 주원장은 장사성을 마지막으로 죽이고 황위에 오릅니다. 파양호 전투에서 주원장은 전선의 크기나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합니다. 뭔가 연상되지 않습니까? <연의>에서 묘사한 적벽대전은 파양호 전투가 모델이었다고 합니다. 작은 배를 이용하여 결사대를 조직하고 화공으로 덩치 큰 적선을 대파하여 승리한 것이 동일합니다. <연의>라는 소설은 7할이 역사적 사실이고 3할이 픽션인데 적벽대전은 3할이 진실이고 7할이 허구라고 하니 나관중에게 파양호 전투는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는 좋은 실마리가 되었을 겁니다.
나관중은 훌륭한 주군을 모셔 성공적인 업적을 남기고 싶어 했습니다. 여기서도 연상되는 게 있지 않은가요? 바로 제갈공명입니다. <연의>에서 나관중을 왜 그토록 제갈공명을 띄웠을까요? 제갈공명에게서 자신을 발견하고 대리만족을 찾으려 했다는 해석입니다. 제갈공명의 신출귀몰하는 묘책들은 대부분이 나관중의 창작입니다. 신야성을 불사르고, 화살 10만개를 빌려오고, 동풍을 부르고, 사마의의 공격 앞에 성을 비운 채 성루에서 태연히 거문고를 타는 공성계(空城計) 등 제갈량의 계략은 모두 나관중의 창작물입니다.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도 제갈량의 출사표에 한마디 나옵니다. ‘삼고신어초려지중 자신이당세지사’(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라, ‘선제 유비가 세 번이나 신을 초옥을 찾아 신에게 당세의 일을 물으시니’, 이것이 ’삼고초려‘의 역사적 근거라는 겁니다. 사서(史書) <삼국지>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하군요. 이 한마디를 두고 나관중은 지루하지만 아름다운 ‘천고의 미담’을 만들어 세상에 남긴 겁니다. 중국사에서 군신 간의 관계를 가장 이상적으로 그렸다는 것이죠. 그로서는 제갈량이 북벌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까웠던 겁니다. (2017.9.17.)
사진 1. 사당에 걸린 주원장의 초상화 (사진이 흐려 구글에서 같은 걸 찾아 싣습니다.)
사진 2. 인자한 모습의 초상화
첫댓글 중국사 속에서 주원장은, 몽고족의 손에서 중화족의 중국을 빼앗아서 명을 세운 것입니다.만주족에서 청을 빼앗아 중화민국을 에운 손문에 비유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