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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난석재예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蘭石齋주인
[이 글은 아래의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여러 자료를 취합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太祖 10卷, 5年(1396 丙子 / 명 홍무(洪武) 29年) 9月 24日(己卯) 2번 째 기사
성 쌓는 일이 끝나자 인부들을 돌려보내다. 8대문의 이름
○ 築城役訖, 放丁夫。其春節所築, 有因水湧頹圯者, 以石城築之, 間以土城; 雲梯爲雨水所衝, 以致圯毁處, 復築之; 又置雲梯一所, 以分水勢, 石城有低下者, 加築之。又作各門月團樓閤。正北曰肅淸門, 東北曰弘化門, 俗稱東小門。正東曰興仁門, 俗稱東大門。東南曰光熙門, 俗稱水口門。正南曰崇禮門, 俗稱南大門。小北曰昭德門, 俗稱西小門。正西曰敦義門, 西北曰彰義門。
【태백산사고본】 3책 10권 5장 B면 【영인본】 1책 96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군사-관방(關防) / *건설(建設) / *재정-역(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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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10권, 5년(1396 병자 / 명 홍무(洪武) 29년) 9월 24일(기묘) 2번 째 기사
성 쌓는 일이 끝나자 인부들을 돌려보내다. 8대문의 이름
성 쌓는 역사를 마치고 정부(丁夫)들을 돌려보내었다. 봄철에 쌓은 곳에 물이 솟아나서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석성(石城)으로 쌓고 간간(間間)이 토성(土城)을 쌓았다. 운제(雲梯)도 빗물로 인하여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다시 쌓고, 또 운제(雲梯) 1소(所)를 두어서 수세(水勢)를 나누게 하고, 석성(石城)으로 낮은 데가 있는 데는 더 쌓았다. 또 각문(各門)의 월단누합(月團樓閤)을 지었다. 정북(正北)은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이니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 하고,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하고,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10권 5장 B면 【영인본】 1책 96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군사-관방(關防) / *건설(建設) / *재정-역(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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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문(都城門)과 그 문루(門樓) 개설
한양의 백악산·인왕산·목멱산·낙산의 내사산(內四山)을 연결하는 59,500척의 도성에는 숭례문·돈의문·숙정문·흥인문의 4개 대문과 소덕문·창의문·홍화문·광희문의 4개 소문이 설치되어 있어 대체로 저녁 10시경의 인정(人定)에 모든 도성문을 닫고 새벽 4시경의 파루(罷漏)에 도성문을 일제히 여는 통행금지 제도가 실시되었다. 따라서 도성과 성문은 수도 방위에 필요불가결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성의 치안을 유지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막중한 역할을 하였다.
이 성문은 1396년 1월 제1차 축성공사 때부터 도성 축성과 동시에 성문도 같이 건설하기 시작하였으나 성문은 특별한 기술을 요하는 공사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으므로 1396년 1월 9일부터 2월까지 49일 간에 끝난 1차 축성공사에는 완성치 못하고 동년 6월부터 9월까지 49일 간에 실시한 제2차 공사 때에 대체로 완성하였고 성문의 명칭도 모두 명명되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정북을 숙청문, 동북을 홍화문 속칭 동소문, 정동을 흥인문 속칭 동대문, 동남을 광희문 속칭 수구문, 정남을 숭례문 속칭 남대문, 남서를 소덕문 속칭 서소문, 정서를 돈의문, 서북을 창의문[註]」 그런데 이 8개의 성문의 규모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알 수 없으나‘우작문월단누각(又作門月團樓閣)’[註]이라고 한 것을 보면 창축 당시 8개의 문에는 모두 아치와 문루가 설치되어 있어 통행에 편리하고 관망하기 좋게 건축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도성 자체도 처음 축조한 지 25년 후인 세종 4년에는 대대적인 개축이 있었고 여기에 따라서 성문도 대개 개축되었으며, 그 위치와 명칭도 많이 변경되었다. 또한 세조 때 와서는 이 8개의 문과는 별도로 광희문 남쪽에 남소문이 개설되기도 하였던 것이니 이상의 성문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四大門>
<1>. 正東; 興仁之門(東大門)
흥인지문(興仁之門, 흥인문, 속칭 동대문)
흥인문은 수도 서울의 동쪽 관문으로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방위하기 위하여 도성을 축성할 때 함께 건설된 문이다. 태조 5년(1396) 9월 건설되어 현재까지 600여 년 간 내려오는 동안 수차에 걸친 수축과 개축이 있었으나 그 원형만은 현재까지 보전되어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이 흥인문 부근은 지형이 낮고 습한 곳이므로 도성을 축조할 때부터 역군들이 많은 고난을 겪었다. 이곳에 축성을 하려면 먼저 말뚝을 박고 돌을 채운 다음 성을 쌓게 되어 공력이 다른 데보다 배나 들었다. 그러므로 이곳의 축성을 담당하였던 경상도 성주· 안동 역군들은 10여 일분의 공역을 남겨 둔 채 귀향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다른 곳은 성이 다 완성되었는데 이곳만은 완성치 못하였다가 동년 9월 2차 공사 때 완성하였고 흥인문도 이때에 건설되었다. 흥인문은 다른 문과는 달리옹성(甕城)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은 곡성(曲城)또는 치성(雉城)이라고 하며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게 성문을 둘러쌓은 작은 성으로서 적을 방어하고 지키기에 편리한 것이다.
태조 6년(1397) 1월 27일에 태조가 친히 동대문에 나가서 옹성의 기지를 보고[註]동년 4월 28일에 왕이 흥인문에 나가서 옹성을 보고 성을 돌아 동소문까지 갔다가 돌아왔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註]동대문의 옹성은 태조 6년 1월에 착공하여 4월에 완공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조가 동대문에 한하여 옹성을 쌓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대문 부근의 지형이 낮을 뿐만 아니라 동대문 북쪽의 낙산도 낮고 평탄하여 적을 방어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므로 이 옹성을 쌓아서 적을 방어하기에 부족한 자연조건을 인공적으로 보충하려 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세종 4년(1422) 도성을 개축할 때에 서전문(西箭門)에 옹성을 쌓기 위하여 특별히 평안도 역군 1,000명을 계정(計定)하였으나 이 역군으로 옹성을 쌓지 않고 서전문보다 남쪽에 서전문을 옮기고 그 문명을 돈의문(敦義門)이라고 하였으며[註]성종 10년(1479)에 숭례문을 개건할 때에 좌승지 김승경이 중국에는 역참(驛站)의 성문에도 모두 옹성이 있으니 이 예에 의하여 숭례문도 옹성 쌓을 것을 건의하였으나 성종은 우리나라는 국력이 부족하여 일일이 중국을 본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이 숭례문까지 쳐들어온다면 그 때는 이미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이니 옹성이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註]라고 하여 거부하였다.
이와 같이 돈의문과 숭례문은 옹성을 쌓지 않았으므로 옹성이 있는 성문은 오로지 흥인문이었다. 흥인문을 창건한 지 50여 년이 지난 문종 원년(1451)에 다시 개건하였다. 이때의 경기· 충청· 전라도의 수군을 동원하여 도성을 수축하였는데 공사가 예정보다 일찍 끝났으므로 그 군정(軍丁)을 나누어서 동대문과 동소문을 수리하였다니[註] 그 동대문 개건이라는 것은 소규모의 보수였던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또한 단종 원년(1453) 4월에 사헌부의 논계(論啓)에「근래에 국가의 일이 많아 두 능(세종과 문종)의 역사가 서로 이어 있는데 또 흥인문을 개작하고 그 역이 끝나자 또 수문을 개축하니 민력이 다하였습니다.[註]」 이때에 건축한 흥인문은 2층 우진각기와지붕다포(多包)집으로 하층 정면은 5칸(72.5척), 하층 측면은 2칸(24.1척)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흥인문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이 그대로 있으나 그 기능은 옛날의 기능이 아니다. 그것은 흥인문 좌우의 성벽이 헐리고 도로를 개설하여 모든 통행을 이 도로로 하고 있으니 흥인문은 도로의 한가운데 우뚝 서서 그 위용을 자랑할 뿐이며 홍예문은 굳게 닫힌 채 파루에 문을 열어 모든 사람을 통행시키고 인정에 문을 닫아 모든 사람의 통행을 금지시켜 수도 방위와 치안을 담당하였던 그 중대한 기능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일제 침략자들은 우리 민족의 혼이 서린 문화유적인 도성을 도시계획에 의하여 철거하겠다고 하여 우리 민족이 이에 항거하자 소위 ‘성벽처리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1907년에는 남대문 부근의 성벽을 철거하였고 융희 2년(1908) 3월부터는 동대문 북쪽과 남쪽의 성벽을 철거하기 시작하였으며 동년 9월에는 서소문(소의문) 부근의 성벽 77칸과 남대문 부근의 성벽 77칸을 철거하였으며 그들의 소위 도시계획에 저촉되는 것이면 모조리 철거하였다[註]. 이와 같이 성벽이 철거되고 성문이 개방되었고 광무 3년 5월 17일 서대문∼청량리간 전차가 개통되었다.[註]
그런데 흥인문이 흥인지문으로 언제 개칭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현재는 흥인지문이다. 철종 말까지의 실록에는 흥인지문이란 명칭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종 때에 개건하고 흥인문을 흥인지문으로 개칭한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으로 동대문의 건축 양식을 살펴보자.
동대문은 무사석으로 적석하여 축대를 만들고 그 중앙에 홍예문을 내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문에는 철갑을 씌운 커다란 두 쪽 판문(板門)을 달았다. 홍예문 상의 천장은 남대문처럼 하고 역시 채회(彩繪)하였다. 이 축기(築基) 전면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돌아가다 왼쪽 일부를 터놓은 평면의 옹성이 부설되어 있다. 옹성의 상면에는 전후여장(女墻)을 쌓고 중앙에는 성로(城路)를 내었는데 여장에는 총안(銃眼)을 내어 외적을 방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옹성의 벽도 무사석으로 축석되었다.
문루는 남대문과 같이 아래층 전부를 개방하고 바닥에 흙을 깔고 중앙 칸에만 마루를 깔았으며 상층 주간에는 판문을 사방으로 쭉 달고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들였다. 공포(慊包)의 수법도 그 골격은 남대문과 큰 차이 없으나 세부의 수법은 그와 다르다. 아래층의 공포는 내3출목, 외2출목으로 짜여 지고 위층의 그것은 내외3출목으로 하였는데 그 솜씨는 대단히 섬약하며 쇠서같은 것은 극히 나약하고 각각 조각 부분을 첨가하여 남대문에서와 같은 견실감은 잃었다.
가구(架構)는 남대문의 우고주(隅高柱)가 생략되고 상층의 병연주들은 대량(大樑)위에 놓이도록 되었다. 그 외의 수법은 남대문과 비슷한데 대량이 단척물(短尺物)로 고주(高柱)몸에 합장되고 고주가 치솟아 종량(宗樑)을 힘 있게 받은 점과 종량에 짜여진 중도리 밖의 내목도리짜임 등은 남대문과 다르다. 천장도 남대문과 같은 연등천장이고 처마도 겹처마 각 마루에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像)을 배치하고 사래에 토수(吐首)를 끼는 수법도 그와 같다.
단청은 반초머리의 모루단청, 3층 판문에는 쌍파문(雙巴文)을 그리고 장화반(長花盤)에는 호접형(胡蝶形) 당초문(唐草文)을 부각하고 그에 따라 채색하였다. 이 문은 태조 창건 시부터 짓는데 고심을 한 건물이다. 지대가 상습(常濕)하여 지반이 침하할 우려가 있어 기초 공사에 상당히 주의하여야 되었고 축대를 쌓는 데 있어서도 그 점에 집착되어 재건 시에는 남대문처럼 잡석을 넣고 회반죽 하여 방아 찧어 다지는 적심층(積心層)을 만들지 않고 장대석(長臺石)을 엇매껴 쌓는 방법을 썼다. 남대문이 초기적인 소박한 미를 갖는 반면에 동대문은 정교하고 전자가 경직한 느낌인데 후자는 섬약하다.
<2>. 正西; 敦義門(西大門)
돈의문(敦義門, 속칭 서대문)
돈의문은 도성의 서쪽 대문으로서 태조 5년(1396) 9월 도성의 제2차 공역이 끝나고 도성 8문이 준공되었을 때에 함께 준공되었다. 그러나 태조 13년(1413) 6월 풍수학생 최양선(崔揚善)이「장의동의 창의문과 관광방(觀光坊)의 동령(東嶺)에 있는 숙청문은 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과 다리 같으니 길을 내어 지맥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 하여 문을 막고 통행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숙청문과 창의문을 폐쇄하고 길을 막고 거기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는 동시에 같은 이유로 사직동 고개에 있던 돈의문도 폐쇄하고 그 남쪽에 새로 문을 내어 서전문(西箭門)이라 하였다.[註]」
라고 한 것을 보면 태조 5년에 건립된 돈의문은 오늘날 사직동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태종 13년에 건립되었다는 서전문(西箭門)도 그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태종이 의정부에 명하여 새로 서문을 세울 만한 곳을 찾아보게 하였는데 안성군 이숙번(李叔蕃)의 집 앞에 있는 구로(舊路)를 따라서 문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숙번이 인덕궁(仁德宮) 앞에 작은 동(洞)이 있는데 길을 새로 내어 문을 설치할 만한 곳이라고 하여 그가 말하는 곳에 서전문을 세웠다.[註]」라고 한 것을 보면 서전문은 경희궁(구 서울고등학교 자리)이 있던 서쪽 언덕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세종 4년(1422) 도성을 수축할 때에 서전문에 옹성을 쌓기 위하여 특별히 평안도 군인 1,000명을 계상(計上)하였으나 옹성을 쌓지 않고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그 남쪽의 마루턱에[註] 새로 문을 세우고 문명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고 하였다.[註] 서전문을 헐고 새로 돈의문을 건립한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서전문이 있던 곳은 지대가 놓고 험하여 통행하기가 불편하였으므로 보다 편리한 곳으로 문을 옮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현재 돈의문이 있던 위치와 서전문이 있던 위치를 살펴보면 돈의문의 위치가 서전문의 위치보다 통행에 훨씬 편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숙종 37년(1711) 9월 예조판서 민진후(閔鎭厚)의 건의에 의하여 광희문을 개건할 때 돈의문과 함께 건립하라는 왕명이 있었던 것을 보면[註] 돈의문도 숙종 때에 재건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태조 5년(1396)에 도성의 서쪽에 대문으로 건설되었던 돈의문은 태종 13년(1413)에 그 남쪽으로 건립하고 서전문이라고 하였으며 세종 4년(1422)에는 다시 그 남쪽으로 이건하고 본래의 명칭대로 돈의문이라고 하였다. 이 돈의문은 서북쪽의 관문으로 410여 년 간 인정(人定)에 닫고 파루(罷漏)에 열어 행인을 통제하고 또 유통하였으나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한 도로 확장이라는 구실로 철거되고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3>. 正南; 崇禮門(南大門)
숭례문 (崇禮門, 속칭 남대문)
숭례문은 현재 국보 제1호로서 가장 중요시하는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도성 8문 중 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인데 그것은 문화재적 가치에 의한 것 이외에도 수도의 위치상으로 경복궁의 남쪽에 있어 도성의 관문일 뿐만 아니라 교통 상으로도 가장 중요한 곳에 있기 때문이다. 남대문을 건축하기 시작한 것은 태조 5년 1월 도성을 쌓을 때부터이다. 월단(月斷)과 문루는 모두 기술과 시일을 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대체로 완성한 것은 동년 9월이었다. 그런데 1962년 남대문을 중수할 때 남대문 상량일자를 묵서(墨書)한 대들보 셋이 발견되었다.
첫째는 태조 때 창건 당시의 대들보요, 둘째는 세종 때 개수 당시의 대들보요, 셋째는 성종 때 개수 당시의 대들보이다. 태조 때 창건 당시의 대들보에는‘홍무이십구년병자시월초지일상량(洪武二十九年丙子十月初之日上樑)’[註]이라고 묵서되어 있다. 홍무 29년은 태조 5년에 해당하는 것이다.
태조 5년 도성의 제2차 공사를 완료한 것이 9월 24일이니 축성공사를 끝낸 지 12일 후인 10월 6일에 상량하고 2년 후인 태조 7년 2월 8일(乙酉)에 준공하였던 것이다.[註]따라서 숭례문은 태조 5년에 창건하였고 2년 후에 다시 개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태조 7년(1398)에 개건한 남대문은 세종 4년(1422) 도성을 개축할 때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고, 세종 30년(1448)에 개축하였다. 개축한 이유에 대하여 세종 15년(1433) 7월에 세종이 영의정 황희(黃喜)와 좌의정 맹사성(孟思誠) 및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한 권진(權軫)을 불러 여러 가지 국사를 의논할 때 세종은 다음과 같이 남대문 개축의 의사를 표현하였다.
「경복궁의 오른 팔의 산세는 낮고 확 트여서 포국(抱局)이 없는 까닭에, 남대문 밖에 못을 파고 문안에 지천사(支天寺)를 세운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남대문이 저렇게 낮고 평평한 것은 처음에 땅을 파서 편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 땅을 높게 돋우어서 산맥에 연(連)하게 하고 그 위에 문을 세우는 것이 어떤가.[註]」
이에 의하여 세종은 남대문이 기울거나 퇴락하여 개축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지대가 낮아서 볼품이 없고 또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에 구애되어 남대문의 지대를 높여서 남산과 인왕산의 산맥에 연결시켜 경복궁의 포국을 아늑하게 형성하자는 데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황희 이하 모든 대신들이 다 찬성하므로 곧 공사를 착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때 남대문 공사뿐만 아니라 강녕전의 개축, 경회루의 보첨 개수, 궁성의 북문 건축, 누각(漏刻)의 관후실(觀候室) 조성, 소격전동의 착지(鑿池), 혜정교천의 이착(移鑿), 가각고(架閣庫) 서변 개천의 석축(石築), 장의동의 착지, 내사복(內司僕) 오지(汚池)의 개착(開鑿), 남대문 외지(外池)의 석축 등 수많은 공사를 병행하게 되었으므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일시에 기공하는 것을 반대하고 풍년이 들 때에 하나씩 기공하여 민력을 휴양할 것을 청하므로 남대문 개축공사는 뒤로 미루어 15년 후인 세종 29년(1447) 8월에 착공하였다.
이때의 공사는 좌참찬(左參贊) 정분(鄭蓬)이 담당하였는데, 남대문의 문루와 석문을 완전히 헐어내고 기지를 높게 돋우어 양쪽 산맥에 연결시킨 다음 그 위에 새로 석문을 쌓고 문루를 건축하였으므로, 보수나 중수가 아니라 완전한 개축이었다. 그러므로 실록에도 ‘신작숭례문(新作崇禮門)’[註]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공사는 세종 29년 8월에 시작하였으나 그 해 11월에 일기가 매우 추우므로 사헌부의 계(啓)에 의하여 일시 공사를 중지하고[註]이듬해 즉 세종 30년 봄에 다시 공사를 계속하였는데 1962년에 발견된 대들보 가운데 ‘정통십삼년무진삼월십칠일손시입주상량(正統十三年戊辰三月十七日巽時立柱上樑)’[註]이라고 묵서한 것이 곧 이때의 대들보로서, 세종 30년 3월 17일에 상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준공일자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세종 30년(1448) 5월 12일 (丙申)에 한재(旱災)로 모든 공사를 혁파할 때 남대문 공사는 이미 완성을 고하게 되었으므로 혁파하지 아니하였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써 이 해 5월에 준공된 듯하다.[註]
요컨대 남대문은 태조 5년에 창건한 뒤 그 지대가 낮아 볼품이 없고 또 풍수지리설에 구애되어 세종 15년 (1433)에 그 지대를 돋우고 문을 높게 건축하려다가 여러 가지 공사로 곧 착수하지 못하고, 세종 29년 8월에 비로소 착공하여 겨울에 공사를 쉬고, 다음해 즉 세종 30년 봄에 공사를 계속하여 3월 17일에 상량하고 5월에 준공하였다.
그 후 32년을 지나 성종 10년(1479)에 이르러 남대문이 기울어졌기 때문에 또다시 개축하였다. 세종 30년에 남대문의 기지를 흙으로 높게 돋우고 그 위에 석문과 문루를 건축하였으므로 기울어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종 9년 (1478) 3월 20일의 야대(夜對)에서 우승지 박숙진(朴叔蓁)이 아뢰기를
「고인이 말하기를 백성을 부릴 때에는 시기를 가려야 한다고 하였으며 춘추에도 불시에 백성을 부리는 것을 비방하였습니다. 지금부터 농사가 한창인데 남대문을 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문이 크게 기울어지지도 아니하였으며 또 공사를 일으킬 때도 아닙니다. 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다만 이 문이 심히 기울어졌기 때문에 개작하라고 한 것이다. 명일 다시 조사하여 만일 심히 기울어지지 아니하였다면 정지하겠다.[註]」
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성종 9년(1478) 3월에 남대문이 크게 기울어졌으므로 바로 개작을 명하였으나 우승지 박숙진이 농시(農時)를 이유로 반대하고 또 다른 공사도 있으므로 마침내 개작을 중지하고,[註]이듬해 즉 성종 10년(1478)에 개작하였는데 실록에는 이해 1월 17일 동부승지 채수(蔡壽)의 말 가운데 근일 장차 숭례문을 중수한다는 말이 있을 뿐이고[註]착공 및 준공에 대한 기사는 없으나 1962년 발견된 대들보가운데 성화십오년기해사월초이일묘시입주상량(成化十五年己亥四月初二日卯時立柱上樑)이라고 묵서한 것이 있음으로써 성종 10년(성화 15년) 4월 2일에 입주(立柱) 상량한 것이 확실하니 준공은 5월쯤 될 것이다. 이 때 채수와 좌승지 김승경(金升卿)등이 남대문을 중수함과 동시에, 중국의 예에 의하여 남대문 밖에 옹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였으나 채택되지 아니하였다.[註]
성종 10년에 건축한 남대문은 1961년까지 약 500년 간 존속하였다. 그러나 500년을 지나는 동안 월단의 석재 가운데 풍화작용으로 부서진 것이 많이 생기고 목재도 썩은 것이 많아 무너질 위험이 있으므로 1962년 문루와 홍예(虹霓)를 헐어서 중수하였다. 그러나 부서진 석재와 썩은 목재만 새 것으로 갈고 다른 것은 모두 옛날 것을 그대로 사용하여 옛날의 설계 그대로 복원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숭례문은 도성 8문의 가장 중요한 문의 하나였던 그 옛날의 숭례문은 아니다. 그것은 이 문의 서쪽에 연결되어 있던 도성이 일제 침략자들에 의하여 1907년부터 헐리기 시작하였고 그 후 도시계획이라는 이름하에 문의 서쪽의 성곽을 완전히 헐어버리고 넓은 도로를 개설하였으므로[註]숭례문은 도로 한가운데 양 날개를 잃은 새 모양으로 남아 있다. 또한 이 문은 폐쇄된 채 그 옛날과 같은 도성의 남쪽 관문의 기능은 찾아볼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주위에는 현대식 고층건물이 하늘 높이 솟아 있기 때문에 왜소하고 초라한 모습은 국보 제1호라는 문화재적 가치를 의심케 한다.
그러나 그 문화의 척도는 외형의 대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전통적인 정신세계에 있는 것이니 1936년 10월 준공 이후 몇 번의 개축을 하였으나 오늘날까지 600여 년을 지켜 온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특출한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좀 더 완전하게 보존하여 자자손손 영원히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숭례문이 불타기 전의 자료]
<4>. 正北; 肅靖門(北大門)
숙청문(肅淸門, 肅靖門)
숙청문은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고 있는 도성의 북문으로서 이 문도 다른 도성의 문과 같이 태조 5년(1396)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그 18년 후인 태종 13년(1413)에 풍수학생 최양선이 백악산 동령(東嶺)과 서령(西嶺)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동령에 있는 숙청문과 서령에 있는 창의문을 함께 폐쇄해야 한다고 상언하여[註] 이에 따라서 숙청문은 항상 닫아 놓고 통행을 금지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 숙청문은 최양선의 건의가 아니더라도 자연적으로 폐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그것은 숙청문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백악산의 산맥으로 산이 높고 험해서 통행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 산을 넘으면 또 북한산맥이 앞을 막고 있으므로 이 문을 통과하여 다른 데로 연결되는 도로가 없었다. 이 문을 통과하여 오른쪽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면 경원가도(京元街道)로 연결이 되나 경원가도는 숙청문에서 훨씬 남쪽에 있는 혜화문(惠化門)으로 연결되어 있고 이 혜화문은 거의 평지에 위치하고 있으니 경원가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쉽고 편리한 혜화문을 이용하지 않고 불편한 숙청문을 이용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폐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한재(旱災)가 심할 때는 숙청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았으며 장마가 심하면 이 문을 닫고 숭례문을 여는 풍속이 전하였으니 그것은 태종 16년(1416) 예조에서 마련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의하여 시작된 것으로서, 한재가 심하면 먼저 종묘· 사직과 명산· 대천에 기우제를 거행하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아니하면 숭례문을 닫고 숙청문을 열며 시장을 옮기고 인정과 파루를 알리는 종루의 종을 치지 않고 쟁(錚)을 치고 비가 오면 숭례문을 열고 숙청문을 닫으며 그 외의 모든 것을 환원하였다.[註] 이것은 북은 음(陰)이요 남은 양(陽)인 까닭에 한재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에서 나온 것이다.[註]
<四小門>
<1>. 東北; 弘化門(東小門)
혜화문(惠化門, 弘化門, 속칭 동소문)
혜화문은 도성의 동북쪽에 위치한 도성 4소문 중의 하나로서 태조 5년(1396) 9월 도성의 창축과 함께 건설되었는데 이때의 문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註] 그러나 성종 14년(1483)에 세운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문이라고 명명하였으므로 이 창경궁의 동문 이름과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하여 중종 6년(1511)에 홍화문을 혜화문이라고 개칭하였다.[註] 그리고 《영조실록》에 영조 20년(1744) 8월 庚戌 條에‘혜화문은 전에는 문루가 없었는데 어영청(御營廳)에 명하여 건립하였다.’[註]라고 한 것을 보면 혜화문도 처음 건립 당시의 문루는 언제인가 없어졌고 석문만 남았던 것을 영조 20년에 어영청에 하명하여 문루를 건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혜화문은 도성의 소문 중의 하나이지만 도성의 대문에 못지않은 기능을 갖고 있었으니 그것은 경원가도(京元街道)가 이 문과 연결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 문으로 통행했으며 또한 북대문인 숙청문이 항상 폐문되어 있었으므로 동소문인 혜화문이 북대문의 역할까지 하였다. 현재의 위치로는 혜화동로터리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있었는데 일제의 도시계획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인들 손에 의하여 문루(門樓)는 1928년에 헐리었으며 홍예로 된 석문마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註] 그 후 1994년 원래의 위치보다 북쪽에 웅장한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2>. 小北;
소덕문(昭德門, 昭義門, 속칭 서소문)
소덕문은 도성의 서남쪽 숭례문과 돈의문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였고 도성의 4소문 중의 하나로서 태조 5년(1396)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건설되었다.[註] 그러나 성종 3년(1472) 소의문(昭義門)이라고 개칭하였는데 그 이유는 성종이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章順王后)에게‘휘인소덕(徽仁昭德)’이라는 시호를 추존하였는데 이 시호와 소덕이라는 문 이름이 같으므로 이것을 피하기 위하여 소덕문을 소의문으로 개칭하였다.[註]
소덕문도 태조 5년(1396) 건축 당시에는 다른 성문과 같이 문루가 있었으나 언제 없어졌는지 그 시기를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문루가 없었던 것을 영조 19년(1743)에 금위영에 명하여 동년 8월에 문루를 건축하였다.[註] 도성내의 시체는 광희문과 소의문으로만 나갈 수 있었으므로 도성 내에서 서쪽으로 나가는 시체는 모두 이 문을 통하여 나갔다.[註] 500여 년을 내려오던 이 소의문은 일제 때인 1914년 도시 계획이라는 구실로 모조리 철거하였고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서소문동이라는 동명만이 남아 그 옛날의 소의문을 연상케 한다.
<3>. 東南; 光熙門(水口門)
광희문(光熙門, 속칭 수구문)
광희문은 도성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도성 4소문 중의 하나로서 태조(太祖) 5년(1396) 다른 문이 설치될 때에 함께 건축되었다.[註] 광희라는 문 이름을 붙인 것은 광명(光溟 8의 문을 의미하는 것이며 수구문이라는 속칭은 그 위치가 개천수구(開川水口)에 가까운 곳에 있고 또한 남산의 동북 기슭 일대의 물이 이 문의 부근을 통과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되거니와[註] 한편 이 문으로 시체가 많이 나간다고 해서 시구문(屍口門)이라는 속칭도 있었다.[註]
광희문은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에 있는 남소문(南小門)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 문 이외에 별도로 남소문이 있었다. 별도로 남소문을 설치한 것은 세조 때이며 그 이유는 한강 나루를 통하여 남쪽으로 가려면 광희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것이 거리가 멀고 불편하므로 한강 나루터를 도성에서 곧바로 통과하여 나갈 수 있는 문을 하나 새로 설치하자는 건의가 있었고 세조도 남산 동쪽에 한강 나루로 바로 통할 수 있는 문을 설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세조 3년에 남소문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남소문은 설치된 지 12년 만인 예종 1년(1469)에 임원준(任元濬) 등의 건의에 의하여 폐지되었는데 경연도상(經筵度上)에서 예종이 남소문을 막는 데 대한 의견을 묻자 임원준은
「도읍을 정하고 시설을 할 때에 살피고 생각하지 않아서 이 문을 설치하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이 문이 설치되었어도 수레가 통하지 못하여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음양가(陰陽家)에서 손방(巽方)을 매우 꺼리기 때문에 처음 이 문을 설치할 때에도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과연 그 후에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음양설은 믿을 것이 못되는 일이지만 이 문은 막는 것이 가합니다.[註]」라고 하여 폐문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남소문은 세조 3년(1457)에 설치되었다가 음양학적(陰陽學的)인 면에서도 좋지 않고 또한 실용적인 면에서도 큰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그 12년 후인 예종 1년(1469)에 폐문되었다.
그 후 명종·숙종 때에 다시 남소문을 개통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풍수금기설(風水禁忌說)에 의한 반대론에 부딪쳐 끝내 개통을 보지 못하였다.[註] 이와 같은 남소문의 설치로 광희문이 남소문으로 오용되기도 하였으나 남소문은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한 시기를 알 수 없고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며 광희문은 서울특별시가 복원하여 지금도 광희문은 1915년경 문루가 자연 붕괴된 이래 홍예(虹霓)만 남아 있었는데 1966년에는 문 북쪽의 성곽 일부를 철거하고 도로를 확장하였다.
그 후 1975년 서울 성곽을 다시 옛 모습으로 수축할 때 홍예석축을 해체하여 남측으로 15m 이전, 복원하고 멸실된 문루 12평을 원칙대로 복원하며 주위 200평을 녹지화하는 조경사업을 실시했다. 광희문 공사비 4,600만원과 보상비 1,810만원을 합하여 도합 6,410만원을 들여 1974년 12월 11일 착공 1975년 11월 17일 준공 복원되었다.
<4>. 西北; 彰義門
창의문(彰義門)
창의문(彰義門)은 도성의 4소문(四小門) 중의 하나로서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조 5년(1396) 도성을 축조할 때에 함께 건축되었다. 태종 때에 와서는 한때 폐문이 되었는데 폐문의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숙청문 설명에서 기술한 바 있으므로 중복을 피하거니와 태종 13년(1413) 최양선의 지리도참설에 의하여 폐문하였다.[註]
태종 16년(1416)에 태종은 흥천사(興天寺)와 흥복사(興福寺)에서 기신재(忌晨齋)를 설할 것을 명하면서「전에는 기신재(忌晨齋)를 장의사에서 행하였는데 지금은 장의동문(藏義洞門)을 폐하였으니 수미(輸米)와 왕래의 폐가 많아서 성내에 있는 2사에서 설행(設行)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註]」고 한 것을 보면 이 때에도 창의문은 닫혀 있었으며,
또한 세종 4년(1422)에도 숙청문과 창의문 두 문을 열어서 군인의 출입통로로 하였다[註]라는 기록이 있으며, 세종 28년(1446)에도 술사(術士) 이양달(李陽達)이「일찍이 창의문은 경복궁을 누르고 또한 해를 끼치므로 그 곳을 통로로 하여 인적을 남기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여 길에다 소나무를 심고 항상 문을 닫아 두고 열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은 늘 사람이 통행하여 불편하니 지금부터 왕명을 받은 사람만 출입시키고 그 외는 항상 문을 닫아 두십시오.[註]」라고 하였고,
광해군 9년(1917)에 수성도감(修城都監)에서는「지금 이궁(離宮)과 북장(北墻) 축조는 그 주위가 넓고 멀어 대석(臺石), 잡석(雜石)의 운반 역사가 매우 큰데 만약 지세의 편하고 가까움을 취한다면 공력이 생략될 것이니 궁장(宮墻)을 완축하는 동안에는 창의문을 개폐하여 연입(連入)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건의하여 광해군은 이것을 허락하였다.[註]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창의문은 태종 13년부터 항상 닫혀 있었으나 궁장 축조와 같은 국가의 대역이 있을 때에는 역력(役力)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창의문을 열어서 통행을 허락하기도 하였다.
영조 16년(1740)에 훈련대장 구성임(具聖任)이「창의문은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에 의로운 군대가 유입한 곳이니 개수하여 표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여 영조는 다음해 봄에 이것을 개수하라고 하명하였고[註]영조 17년(1741) 1월에는 구성임이 성문을 개수하려고 하면서 문루도 개축할 것을 청하여 영조는 이것을 허락하였다.[註]그리고 이때에 인조반정시 공을 세운 김류(金臘)· 이귀(李貴)· 이괄(李适)· 원두표(元斗杓) 등의 1등 공신에서 3등 공신까지의 공신명이 기록된 현판을 만들어 걸었는데 이 현판은 지금도 보존되어 온다.
1956년에 창의문을 보수하였는데 이때에 영조 17년에 창의문의 문루를 건립하면서 기록하여 둔 묵서(墨書)가 장여(長茹)에서 나왔다. 이 묵서는 ‘건륭육년신유유월십육일오시상량(乾隆六年辛酉六月十六日午時上樑)’이라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현재에 있는 창의문의 문루는 영조 17년(1741) 1월 구성임의 건의에 의하여 그 해 6월 16일에 상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창의문도 그 서쪽으로 도로가 개설되어 통행로가 되었으므로 항상 닫힌 채 그 모습은 변함없이 49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다음 창의문의 건축 양식을 살펴보자. 창의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重層) 우진각기와지붕으로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같은 양식의 축대를 조그만 규격으로 쌓고 그 위에 단층의 문루를 지었다. 건물의 양식이나 수법은 소문(小門)을 대표하던 소의문(昭義門)과 동일하다. 문루가 소규모여서 고주(高柱)를 사용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것을 생략하고 대량(大樑)을 전후평주(平柱)위에 큼직한 주두(柱頭)를 놓고 받았다. 대들보위에 바로 첨차화된 화반형(花盤形) 부재를 놓고 그것으로 종량(宗樑)과 중도리 짜임을 받았다. 중도리는 도리와 도리받침 장혀로 짜여졌다. 종량상제형(梯形)에 가까운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뜬창방· 장혀· 도리로 짜여 진 종도리를 받았다. 측면 가운데 기둥 위에 휘어 오르는 충량(衝樑)은 방량(方樑) 몸에 짜여 졌고 천장은 연등천장, 경복궁 신무문이나 건춘문에서와 같은 쪽 천장이 여기엔 없다.
처마는 겹처마, 지붕물매는 나지막하고 각 마루에는 양성을 하고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像)을 두었으며 사래는 토수(吐首)를 끼었다. 소의문 축대 사우(四隅)에는 광화문처럼 사수형물(四獸形物)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없고 커다란 나무지네를 조각하여 매어 달았었다고 한다. 창의문은 서울 성곽 4소문 중 잔존하고 있는 완형의 유일한 유례이다. 목조문루(木造門樓)는 튼튼하고 정교하며 석문은 아담하다. 문에는 지금도 성벽의 일부가 연속되어 있다.
첫댓글 와 이런 좋은 글감을 사진을 첨부하여 이렇게 보여주시다니 감사하고 부러울 뿐입니다. 부처가 따로 없네요.... ^^
선생님! 감사합니다. 꾸~~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