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를 찾아서 �___박경숙
칠궁1)을 아십니까
박경숙
사적 149호로 지정된 칠궁은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내에 자리잡고 있다. 약 300여 년 역사를 간직한 칠궁에 대한 관심은 그동안 건축학자들이 발표한 몇 편의 논문이 있을 뿐이고 그나마 역사적인 관점 보다는 건축학이라는 좁은 범위에 머물러 있는 까닭에 칠궁七宮을 소재로 한 단행본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칠궁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가치에 비하여 평가도 미흡하고, 인지도도 떨어져 있다는 안타까운 현실은 이제 시각을 달리하여 제대로 된 평가와 인지도가 필요 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칠궁을 이야기 하기 전에 먼저 궁宮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궁에 대한 인식은 왕과 왕비가 생활하는 거소와 정치 집무의 활동공간으로 여겨지고 있다. 임금이 머무는 장소에 따라 잠저潛邸나 별궁別宮 행궁行宮이라 하는데, 잠저는 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던 집을 이르는 말로, 『주역』의 잠룡潛龍에서 유래된 것이다. 용이 연못에서 승천昇天을 하였으니, 용은 곧 임금이요, 연못은 임금의 옛 집이니 곧, 잠저인 것이다. 왕실 소유로 있으면서 왕실에서 필요에 의해 계속 사용하는 것을 별궁이라 하며, 왕이 행차할 때 군·현·관아에 숙박 하는 것을 행궁이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궁은 어떤 쓰임이 있었을까? 다시 말하자면 어떠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는 칠궁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점을 고려하여 영조의 잠저 창의궁彰義宮을 예로 들어보겠다.
영조 2년(1726) 병오년 4월 22일의 영조실록을 살펴보면 창의궁의 노예가 금리와 쇄장을 구타한 일에 관한 신노의 상소문에서 ‘창의궁彰義宮은 곧 임금의 잠저이다’라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후에 잠저는 원묘原廟나 초상화를 모신 사당으로 관리하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영조의 잠저인 창의궁이다. 창의궁은 영조의 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신주神主를 봉안 하였던 곳이다.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에게 자손을 볼 수 없었던 영조는 그의 나이 35세에 어렵사리 정빈 이씨에게서 경의군을 얻었다. 경의군은 효장세자로 책봉 된지 3년 만에 요절하고 마는데 그의 나이 겨우 10살이었다. 영조는 ‘삼종의 혈맥’2)을 가슴에 묻고 그 천혼天魂을 창의궁에 옮겨 친히 예조에 교지를 내려 후속 조치를 취하였다. 영조 7년(1731) 1월 3일의 영조실록에서 창의궁이 사당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금이 효장궁孝章宮 담사에 곡림哭臨하였다. 오시午時에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신주神主를 창의궁彰義宮으로 옮겨 봉안했는데, 임금이 친히 보내고 예조에 명하기를,
“혼궁魂宮과 빈궁殯宮 소속은 백모白帽·포대布帶로 담사 때의 변복變服하는 절차를 하라.”
영조는 실제로 임오화변이 일어났던 영조 38년(1762) 이후에는 창의궁에 나아가 머물러 유숙하는 예가 잦아졌는데 이는 효장세자의 사당이라는 점에서 더욱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영조 50년(1774) 4월 25일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 효장묘孝章廟에 친히 잔을 부었는데, 왕세손이 어가御駕를 따랐다. 집례執禮와 대축大祝은 모두 준직準職을 명하고, 승지 이하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주도록 하였다.
특이한 점은, 창의궁에서 나아가 『대학大學』을 주강하기도 하였다는 점이다.
·영조 48년(1772) 임진 2월 12일
임금이 다시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궁은 이처럼 왕실의 소유로 잠저가 가지는 의미뿐만 아니라 사당의 기능과 강학의 장소로 다용도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칠궁七宮은 어떤 곳일까?
칠궁에는 영조 원년(1725) 12월 23일에 자신의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으로 세운 숙빈묘淑嬪廟만 있었다. 숙빈묘는 영조 20년(1744) 3월 7일에 육상묘로, 영조 29년(1753) 6월 25일에 육상궁毓祥宮으로 개칭되었다. 대한제국 융희隆熙 2년(1908) 7월 23일에 제사 제도의 칙령에 의하여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을 경내에 합사하여 육궁六宮이라 하였다가, 1929년 7월 11일 덕안궁을 옮겨 오면서부터 칠궁으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
간략하게 다시 정리 하여 보면 영조대에는 육상궁, 대한제국 때에는 육궁六宮으로 불리다가 일제강점기인 1929년부터 칠궁七宮이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칠궁의 명칭이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지고 오늘날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숙고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칠궁은 조선시대 왕이 사친私親을 추모하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유교 윤리의 실천 장소인 왕실의 사당의 역할을 수행하는 공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칠궁에 모셔진 일곱 후궁은 아래와 같다.
조선 왕실은 고종 7년(1870) 왕실의 여러 사당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별묘의 형태로 잘 있던 사당을 한 곳에 모으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점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제사를 모실 후손이 4대가 지난 것을 친진親盡이라 하는데 이러한 경우 땅에 묻는 매안埋安의 의례를 하게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왕실 사당을 한 곳에 모아 제사를 한 번에 지내려는 것에 있었다. 즉, 왕실의 재정을 절약하려는 의도였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과정은 어땠을까? 주관한 부서는 어디였을까? 그 궁금증을 해갈하기 위하여 실록으로 돌아가보기로 한다.
·『고종실록』 7년(1870) 1월 2일
대代가 지나가면 신주를 옮기는 것은 어길 수 없는 제도이며 역시 옛날부터 전해오는 제왕들의 가법이다. 그런데 유독 의소懿昭의 사당祠堂3)만은 아직도 신주를 옮기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사실 미처 손을 쓰지 못한 일이다. 그리고 각 궁에 따로 사당을 세운 것은 당시로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하여 그렇게 된 것이지만 오늘에 와서 어느 한 곳에 있는 다른 사당에 합쳐 모시는 것이 사리에 부합되는 것이다.
인빈 김씨, 영빈 김씨, 화빈 윤씨의 신주는 경우궁 안에 있는 다른 사당에 함께 모시고 희빈 장씨, 정빈 이씨, 영빈 이씨, 의빈 성씨의 신주는 육상궁 안에 있는 다른 사당에 함께 모시며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신주는 의소묘懿昭廟 안의 다른 사당에 옮겨다 모셔야 할 것이다. 제반 의식 절차는 호조와 예조의 당상관이 대원군에게 문의하고 집행하게 할 것이다.
고종은 당시로서는 사당을 따로 두는 것은 안 될 일이지만, 오늘에 와서는 사당에 합쳐 모시는 것이 사리에 부합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제는 어제의 기준이 있고 오늘은 오늘의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맞추자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주목 할 점이 있다. 첫 번째는 현재 칠궁에 모셔져 있는 인빈 김씨가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와 정조의 후궁이였던 화빈 윤씨와 함께 수빈 박씨의 사당인 경우궁 안에 함께 모셔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제반 의식 절차를 집행하는 기관은 호조와 예조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순종실록』 1년(1908) 대한 융희隆熙 2년 〈개정한 제사 제도〔享祀釐正〕〉의 칙령을 반포한다. 이때 대대적으로 제사제도를 간소화시키거나 국유화 시킨다. 선농단先農壇, 선잠단先蠶壇의 신위를 사직단社稷壇에 배향하고 산천단山川壇 등의 단壇과 사祠의 터는 국유로 이속시키거나 제사를 폐지한다. 지방 관묘는 해당 지방 관청에 넘겨 백성들의 신앙에 따라 따로 관리할 방법을 정하며 역대의 묘, 전, 능, 사 및 지방에 설치한 사직단과 문묘는 모두 정부의 소관으로 하였다.
고종 34년 광무光武 원년(1897) 육상궁 별묘에는 연호궁과 의빈궁 만이 남게 되었지만, 순종 1년 융희隆熙(1908) 7월 23일에 개정한 제사 제도 칙령 발표에 의하여,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에 봉안한 신위는 육상궁 안에 각별히 신주의 방을 만들어 합사하였다. 제사는 1년에 두 번 지내고, 대한제국 황실 땅에서 나라의 땅으로 이속시킨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생모 의빈궁만 특별히 매안埋安하고 황실소유로 그대로 남아 국유에서 제외 되게 된다. 이는 왕실 소유의 안국동 별궁과 가깝게 있었다는 점에 있었다.
안국동 별궁安國洞別宮은 고종 17년(1880)에 세자의 가례嘉禮를 치르기 위해 현 풍문여고 자리에 건립하였다. 1882년에는 순종과 순명효황후, 1907년에는 순종과 계비인 순정효황후의 국혼國婚이 행해진 장소이다. 현재 건물 일부인 경연당慶衍堂과 현광루懸光樓를 충남 부여군에 있는 한국전통문화학교로 이전하였다.
한편, 육상궁毓祥宮은 아쉽게도 고종 19년(1882) 8월 1일 화재로 신주가 소실되었다. 목조라는 재질의 특성에 따라 화재가 났다하면 걷잡을 수 없이 대형 화재로 이어지고 만다. 궁궐 역사에서도 대화재로 궁궐이 전소되었던 때가 몇 차례 있어 왔다. 그래서 근정전 월대에 동서東西로 가마솥을 두었다. 드므라 부르는 이 솥에 물을 담아두고, 실제 화재가 날 때를 대비하는 것과 동시에 화마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놀라 도망하도록 하는 주술적 의미를 담고 있다. 육상궁毓祥宮의 화재로 신주가 소실하자 대노한 고종은 담당하던 내시(次知中官) 이유정을 파직하고 수직관守直官 박윤진을 태거시켰다.4) 이듬해 “고종 20년(1883) 6월 24일 관리들에게 상을 내렸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이때가 준공 시점이지 않을까 추정할 수 있다.
■제자리를 잃은 하마비와 하마석
이곳 칠궁에는 ‘大小人員皆 下馬’,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비下馬碑가 세검정과 효자동을 잇는 도로 옆에 있다. 하마비 뒷면에는 ‘계유초추립癸酉初秋立’를 각자하여 세워진 시기를 알려주고 있다. 지금은 오고 가는 선비들의 말고삐를 멈추게 하였던 위풍당당한 위세도 더 이상 볼 수 없고 외삼문과도 어울리지 못하니 이래저래 옹색하다. 아마도 눈 여겨 보지 않는다면 눈에 띌 일이 없어 보인다. 늘 단짝이던 하마석下馬石마저 재실 마당에 가 있으니 얼마나 외롭겠는가! 한겨울 흰 눈을 소복히 뒤집어 쓴 모습이 쓸쓸하기 그지 없다. 노듯돌이라 부르는 하마석은 옛 것은 아니다. 하마비가 말에서 내리라는 안내문이라면 하마석은 하마下馬를 할 때 디디고 내리는 디딤돌이다. 옛 주인을 잃었다 하더라도 관람객들이 밟고 올라가 모델처럼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어대기도 하고 다리 아픈 노인의 의자가 되기도 하는데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하마비와 하마석을 세워 두는 이유는 신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무조건 말에서 내려 예禮를 다하라 것이다. 이러한 설치물들은 궐문이나 종묘, 서원, 문묘, 관청 등 그 밖에 중요한 건물 앞에 세우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복궁景福宮을 예로 들자면, 하마비와 하마석은 해태와 함께 있었다 한다. 해태가 광화문 앞 육조거리 서편 예조, 중추부 다음에 있었다 하니 오늘날 세종문화회관을 못미쳐이니 대략 정문으로부터 약 2~300m 정도 거리이다.
■칠궁으로 가는 길 외삼문外三門
외삼문 진입로는 청와대 주차장과 세검정, 효자동을 잇는 대로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왼쪽으로는 로마교황청대사관과 무궁화동산이, 오른쪽에는 청와대 주차장이 있다. 1권역 육상궁과 2권역에서 균형을 잃고 오른쪽으로 온통 무게 중심이 쏠려 있다. ‘칠궁’이라는 이정표 하나 없다보니 눈앞에 두고도 무슨 건물인지 알지 못한다. 또한, 특수한 지정학적 조건으로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여 접근이 쉽지 않다. 그래서 일까? 근대화의 새바람 속에서 칠궁의 이전, 축소, 변형은 불가피한 선택이 되었다. 시대의 선택이였던 것이다.
박경숙 / 국민대학교 대학원 역사학과 조선후기사를 전공했으며 칠궁 문화유산해설사(2009년 12월~ 2011년 9월), 7대 서울시문화관광해설사 회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