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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에 갈무리된 문화적 원형과 민족문화의 정체성
1. 단군신화와 민족문화의 유기적 인식
신화는 신성한 비롯됨의 이야기다. 엘리아데는 태초에 생긴 사건 곧 성스러운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신화라고 자리매김했다. 따라서 “신화는 늘 ‘창조’를 풀이하며, 어떤 존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존재의 비롯됨를 말하고 있다.”1) 실제로 신화는 태초의 시작 곧 창조에 얽힌 일을 신성하게 이야기한다. 천지창조신화나 천지개벽신화가 중요한 보기이다. 단군신화나 주몽신화와 같은 건국신화도 나라의 창업을 성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신화는 비롯됨의 이야기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 삶과 사유 속에 살아 있는 오늘의 이야기이다. “신화가 인간행위의 모범이 되고, 그 때문에 삶에 값어치와 뜻을 매긴다는 뜻에서 ‘살아 있는’ 사회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2) 그렇다고 하여 오늘의 이야기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살아 있는 사회는 앞날이 있다. 행위의 모범이자 삶에 뜻을 주는 신화의 내용은 미래에도 값어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신화는 태초의 이야기자 오늘의 이야기며, 미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단군신화를 읽는 눈도 마찬가지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신화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민족의 일상생활과 더불어 가고 있는 현실의 생활신화이며, 미래의 문화와 민족적 가치관까지 일정하게 규정해 주고 있는 전망의 신화이다. 그런 점에서 단군신화는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들여다보는 맑은 창이자, 민족문화의 독창성을 비춰 주는 빛의 구실을 감당한다. 그냥 보면 보이지 않는 민족문화의 정체성이 단군신화의 창으로 보면 밝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 논의는 고조선 시대의 민족문화를 읽으려고 단군신화를 눈여겨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비추는 빛으로서 단군신화를 눈여겨보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목적을 이루자면 신화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단군신화를 곧바로 다루기 앞서 신화에 대한 학계의 상투적 인식부터 이겨낼 필요가 있다. 흔히 서구 학계에서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중심으로 신화의 개념을 규정한다. 따라서 신화를 ‘신에 관한 이야기’로 정의해 왔다. 신화의 주인공들이 한결같이 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은 불사불멸이어서 신이라 할 수 있으나, 우리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단군이나 주몽은 사람의 수명을 누리다가 죽었기 때문에 신이라 할 수 없다. 신의 후손이라 할 수는 있어도 사람의 면모를 갖추었기 때문에, 신에 얽힌 이야기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3) 그러므로 우리는 신에 관한 이야기라는 규정에 동의하지도 않고 거기에 얽매일 리도 없다.
신에 얽힌 이야기여서 신성하다고 하더라도 시작의 시간에 관한 내용을 다루지 않으면 신화라 하기 어렵다. 귀신과 도깨비, 조상신, 장군신, 원혼 등 수많은 신의 이야기가 신성하게 이야기되지만, 그 시점이 태초의 시간에 일어난 창조의 역사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신화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른바 종교적 영험담, 동신의 영험담, 제사 영험담 등 신앙과 제의에 얽힌 영험담들은 거의 신성한 이야기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작의 역사를 말하지 않기 때문에 신화로 인정받지 못하고 신앙전설이나 종교전설 또는 민담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이와 달리, 태초의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의 기원에 얽힌 것을 다루기 때문에 신화를 ‘원인론적(aetiological) 이야기’로 규정하기도 한다. 신화의 서술목적이 ‘왜 무엇이 있으며, 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푸는 것’이기 때문이다.4) 실제로 신화는 거의 시작의 역사로서 우주와 사물, 나라와 사회, 제도와 문화 등이 비롯된 기원을 다루는 까닭에 원인론적 이야기라 할 만하다. 그러나 전설과 민담 가운데도 현상의 원인을 푸는 기원담이나 유래담이 적지 않다. 해와 달, 별이 생긴 내력이나 바닷물이 짠 까닭, 새벽에 수탉이 우는 유래 등을 비롯하여, 작게는 각종 지명유래까지 자연물과 현상의 원인을 푸는 이야기가 많지만 결코 이러한 이야기들을 신화라 하지 않는다. 한갓 전설과 민담으로서 유래담일 따름이다.
시작의 역사를 말하는 까닭에 ‘원인론적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그 이야기가 모든 것이 시작되는 태초(in illo tempore)의 내용이5) 아니면 신화로 자리매김되지 않는다. 태초는 천지창조나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성스러운 창조의 시간대를 말한다. 그러나 시작의 역사를 이야기하되, 태초의 상황을 다루지 않은 이야기들이 얼마든지 있다. 전설들은 거의 사물과 유적, 제도, 이름의 유래와 기원을 풀이한다. 이른바 유래담이나 내력담이 모두 다 여기에 든다. 이야기 말미에 유래를 덧붙인 민담들도 많다. 그러므로 신화는 시작의 역사라는 기원의 내용과, 태초의 상황이라고 하는 신성한 시간대, 그리고 사실로 믿는 전승집단의 믿음이 얽혀 있어야 한다.
천지개벽 신화는 우주가 비롯된 태초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이 세워지기 앞의 태고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어느 이야기나 까마득한 옛날이어서 지금의 현실 상황과 거리가 먼 것 같다. 하지만, 신화가 태고적 이야기로서 원초적 상황을 풀이하는 구실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의 삶과 더불어 가고 있으면서 현재의 삶을 특징지어주고 미래 삶의 길잡이가 된다. ‘신화는 살아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신화는 태초에 일어났던 것으로 믿는 이야기인 동시에, 줄곧 누리와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면서 이어지는 이야기다.’6) 그러므로 신화는 아득한 옛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이야기이자 미래의 이야기라는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러한 보기가 종교 신화다. 종교 없는 신화는 있어도 신화 없는 종교는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종교는 신화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모든 종교는 신화를 통해서 신성성을 확보한다. 말리놉스키가 지적한 것처럼, “신화는 신앙을 표현하며 과장하고 성문화(成文化)”하는7) 까닭이다. 따라서 종교생활 속에 신화는 현실의 이야기로 살아 있다. 종교신화를 부인하면 종교활동은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천지창조신화는 진화론에 맞서서 여전히 구약성경 창세기의 창조론을 사실로 믿는다. 미래의 기독교도 그렇게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종교의 교조신화도 선교활동에 적극적인 구실을 한다. 종교 없는 사회라면 모를까 미래사회에도 여전히 신화는 종교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와 같이 고대국가의 건국신화들도 태초의 이야기로 머물지 않는다. 여전히 현실문제와 맞물려 거듭 그 뜻이 되물어지고 있다. 그것은 역사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가 말했듯이,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는 인식에 따른 것만은 아니다. 신화는 하나의 이념을 만들며 문화적 원형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단군신화에서 말하는 홍익인간의 이상은 우리 교육법 1조에 명시적으로 표방되고 있을 뿐 아니라, 민족 동질성과 정치 이념으로 살아 있다. 개천절을 국경일로 정해서 기리는 것이나, 북녘에서 단군릉을 복원하여 해마다 천제봉행 기념행사를 크게 벌이는 것도 이념적 지향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신화는 인간 행위의 신성한 본보기(model)이자 전범(paradigm)으로서8) 되풀이되며 현실생활을 일정하게 지배하고 정치적 정당화의 근거로 작용한다.
그런 까닭에, 단군신화는 고조선 건국 당시의 이야기로 머물지 않는다. 오늘 우리 속에 살아 있는 현실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새로운 문화를 일정하게 빚어내는 문화적 원형으로서 민족사의 운명과 함께 할 미래의 이야기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단군신화가 거듭 이야기되며 후대신화를 창출하는 원형적 서사인 것 못지않게, 우리 삶의 일상 속에 다양한 양식으로 갈무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환웅이 인간세상으로 내려와 깃들어 있던 신단수는 동신이 깃들어 있는 당나무로서 마을의 동수(洞樹) 문화를 이루고 있으며, 곰네가 동굴 속에서 금기했던 3칠일은 아이들의 출산 민속으로서 산모가 3칠일 동안 출입을 삼가는 금기풍속으로 이어져 왔다. 그리고 동굴 속에서 먹었던 쑥과 마늘은 여전히 우리의 중요한 식문화로 이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따라서 단군신화를 그 시대로 되돌아가서 읽는 방법도 있지만 지금 여기의 우리 삶 속에서 찾아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신화 일반이 그렇듯이, 신화를 전승하는 사람들은 신화의 내용을 상기하거나 재연하면서 신성하고 고양된 힘에게 사로잡히게 된다는 뜻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신화를 ‘살고’ 있는 것이다.”9) 그런데 일반 민중들은 물론, 단군신화를 연구하는 학자들까지 단군신화에 따라 우리 스스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한갓 사료나 신화작품으로서 여겨서 분석이나 연구의 자료로 대상화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여전히 단군신화를 살고 있다’는 말은 한갓 개천절을 국경일로 쇤다는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공동체문화는 물론, 일상생활까지 단군신화에서 말하는 생활양식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현재 우리 국민들의 삶 속에 단군신화의 전통이 여러 모로 갈무리되어 있다는 말이다. 자연히 우리문화는 단군신화의 독창적 세계관과 더불어 고유한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이루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단군신화 속에서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새삼스레 찾고, 현재의 민족문화 현실을 통해서 단군신화의 뜻과 기능을 거듭 알 수 있다.
논제를 ‘단군신화에 갈무리된 문화적 원형과 민족문화의 정체성’이라고 내세운 것도 단군신화는 현재 우리문화의 정체성을 빚어낸 문화적 원형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데 근거하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현실문화에서 보이는 겨레문화다운 독창성 속에서 단군신화에 갈무리된 문화적 원형을 집어 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단군신화와 민족문화가 서로를 비추고 되비추어 주는 상호텍스트로서 주목하고 맥락적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일상 삶의 현장 속에서 단군신화가 어떻게 살아있는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밝혀내려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는 길에 단군신화를 둘러싸고 있는 두 가지 일이 새로 잡힐 것이다.
하나는 단군신화가 고조선의 건국신화로서 역사적 기원을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민족문화의 원형(archetype)을 이루면서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얻게 하는 결정적인 구실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연구의 축적에 따라 고조선의 문화적 독자성과 민족적 기원의 해명도 새롭게 할 수 있다. 둘은 신화비평 자료로서 단군신화는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해명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민족문화 해석 일반에 단군신화를 비롯한 우리 신화유산들을 신화비평 자료로 적극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
단군신화가 신화비평 자료로 쓰이려면 단군신화에 갈무리된 문화적 원형을 찾는 일이 긴요하다. 그렇다고 하여 신화적 원형을 그 자체로 추론하게 되면, ‘천부지모(天父地母)’ 사상과 같은 아주 보편적인 논의만 하게 되어 민족문화로서 정체성을 찾기 어렵게 된다. ‘하늘과 땅’의 양항대립 구조나 ‘천지인’의 3재론 등을 통해 일반화의 추상성만 드러날 뿐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민족신화다운 독창적 원형을 밝혀내려면 지금 우리가 전승하고 있는 구체적인 문화현상 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제격이다. 그러므로 단군신화의 귀납적 해석에 의한 연역적 추론과, 일상 속에 널리 전승되고 있는 전통문화의 생생한 현상을 밀도 있게 관련지어야 논리적 추론과 일상의 문화가 겉돌지 않을 수 있다.
2. 단군신화의 식문화 원형과 채식문화의 전통
신화비평은 주로 문예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고대신화의 원형이 어떻게 이어지고 되풀이되면서 재구성되는가 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그것은 작가들의 창조적 상상력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신화적 원형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신화비평가들은 현대작가들조차도 작품활동의 소재를 신화 속에서 취하고 그 서사적 구성도 신화적 원형을 재구성할 따름이라고 해석한다. 그런 까닭에 신화비평은 역사적 환원주의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신화비평은 여러 이론들과 결합되어 있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정신분석학 이론이다. 정신분석학이 인간행동 밑바닥에 숨어 있는 동기를 밝히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면, 신화비평은 그 동기가 투사되어 나타난 상징적 형태나 서사구조를 밝히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자연히 문예작품 속에서 거듭되는 원형적인 패턴의 발견이 신화비평의 분석 과제이다. 그러나 민족문화의 전통을 해명하고 그 정체성을 밝히기 위한 논의는 작가들 개인의 문예작품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전승되고 있는 우리 민족의 공동체문화와 일상의 문화를 대상으로 한다.
문예작품 중심의 신화비평은 정신분석학적 의의를 확인하고 정태적 구조주의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구실은 할 수 있으나,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밝히는 데 일정한 한계가 있으며 단군신화의 전통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지속되고 있다는 현실문화의 뿌리는 실감나게 풀 수 없다. 게다가 분석단위의 개념이 어렵고 해석이 추론적이어서 실증적 연구의 장점도 살리기 어려우며, 작가 개인의 작품을 대상으로 한 까닭에 민족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논의를 넓힐 만한 근거도 마련하기 힘들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려고 민속학적 시각에서 단군신화를 주목하고 전통문화의 구체적 실상을 대상으로 현장론적으로 풀 필요가 있다. 현장론적 관점에서 단군신화 자료와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 자료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다. 전통문화 가운데서도 민중들이 전승하는 공동체문화는 개인적 문예작품과 달리 민족적 정체성이 뚜렷하다. 따라서 우리 삶에서 아주 익숙한 공동체문화를 중심으로 단군신화의 원형을 분석해 보면,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새삼스럽게 찾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여전히 우리 민족은 단군신화의 세계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단군시대의 성모인 곰네처럼10) 먹고 자며 산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이해할 수 있다.
더군다나 단군신화와 같은 민족신화의 연구는 학자들끼리 높은 울타리를 친 채, 마치 내부자거래처럼 일정한 카르텔을 이루여 암호 같은 학술용어로 배타적 논의를 일삼거나, 민족의 주체인 민중을 민족신화로부터 따돌리는 지식인들의 지적 과시에 머물러서는 배운 이로서 자기 몫을 제대로 감당한다고 하기 어렵다. 우리 겨레의 삶과 함께 살아온 민중의 문화적 전통들은 그 뜻과 기능을 누구든 쉽게 알 수 있도록 배려되어야 하며,11) 비록 학술적인 연구 성과들이라 하더라도 민중들이 더불어 가질 수 있도록 쉬운 말로 발표되고 적히는 것이 바람직하다.12)
그렇지 않으면, 단군신화의 해석이 민족의식을 일깨우기는커녕 자신들의 삶과 무관한 서재 속의 지식으로 가두게 되거나, 때로는 외세에 대한 종속의식을 강화하고 서구학자들의 오리엔탈리즘을 실현시키는 데 머물 수 있다. 단군신화의 해석을 학자들의 연구 성과로 묶어둘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이야깃거리로 가져가야 바람직하다. 그러자면, 민중들의 삶 세계와 동떨어진 전문용어와 난해한 추론적 분석체계에 무리하게 끼어 맞추는 고담준론식 논의구조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쉽게 아는 일상의 전통문화 현상을 생생하게 끌어들여서 ‘우리가 바로 단군의 후손이구나!’, 또는 ‘단군신화의 전통이 우리 삶 속에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구나!’, ‘우리는 여전히 단군신화 속에서 살아가는구나!’ 하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도록 쉬운 풀이를 해야 민중과 함께 가는 신화비평의 뜻을 살릴 수 있다. 민주적인 연구 활동은 지식권력으로서 기득권을 누릴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알아들을 수 있는 지식공유의 길을 열어야 한다.
따라서 전문가들만 읽을 수 있는 고문헌의 기록 자료나 고고학적 유물자료가 아니라, 민중들의 일상생활 자료를 대상으로 논의를 펴는 것이 효과적이다. 민중에게 중요한 일상생활은 ‘먹고 자는 일’이다. 삼신께 갓난아이의 건강을 빌 때도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하며 빈다. 특히 민중에게는 나날의 삶 속에서 되풀이되는 일상의 문화로서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챙겨 먹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우리 민족의 식문화 체계 속에서 단군신화가 생생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것만큼 민주적인 공유방법이 없다.
한국인은 누구나 끼니때마다 단군신화를 살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끼니때마다 만나는 음식이 마늘이다. 각종 반찬에 마늘이 양념으로 두루 들어가 있다. 쌈밥을 먹든, 불고기를 먹든, 회를 먹든 마늘은 빠지지 않는다. 곰네처럼 부지런히 마늘을 상식하고 있듯이, 해마다 단오절이 되면 쑥으로 떡을 만들어 절식으로 먹는다. 밥상 앞에 앉아서 마늘을 먹을 때마다, 곰과 범이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서 환웅이 준 마늘을 먹었다고 하는 단군신화의 식생활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봄철에 쑥국과 쑥떡을 먹는 것도, 사실은 쑥을 먹고 사람으로 변신한 곰네의 식생활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단군신화의 곰네처럼 부지런히 쑥과 마늘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먼저 우리 식문화의 하나로 마늘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한국인들은 마늘쪽을 날것으로 즐겨 먹을 뿐 아니라 여러 요리에도 마늘이 빠지지 않는다. 한국 고유의 식문화로 가장 주목받는 김치와 된장찌개, 양념간장은 물론 콩나물무침, 멸치볶음, 육개장, 삼계탕에 이르기까지 어느 요리에든 마늘이 빠지면 제대로 양념이 안 된다. 우리 식문화의 찬거리로는 갖가지 장류와 김치, 나물무침, 찌개, 볶음, 국, 탕, 회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8가지 유형의 요리방식 가운데 마늘이 쓰이지 않는 요리는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므로 가난한 농가의 부엌에도 어김없이 마늘을 엮은 타래들이 빈지에 걸려 있게 마련이다.
된장, 간장, 고추장이 한식의 기본 장류라면, 고춧가루와 마늘, 생강은 한식의 기본 양념이다. 기본 양념 가운데도 마늘이 고춧가루나 생강보다 그 역사적 뿌리도 깊고 쓰임새도 한층 넓다. 생강은 드물게 쓰지만 마늘과 고춧가루는 상당히 일상적으로 쓴다. 고추는 17세기 이후에 들어왔는데, 마늘은 그 앞부터 우리 식품사의 밑자리를 구성하고 있다. 게다가 마늘은 음식을 조리하는 양념 구실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밥상에 오르기도 한다. 마늘을 익힌 것은 물론 날 것 그대로 즐겨 먹는 까닭이다. 나물무침에는 날것을 다져서 양념으로 쓰고 다지지 않은 생마늘쪽을 그대로 먹기도 한다. 그러므로 마늘은 양념인 동시에 고추나 오이, 야채처럼 일종의 채소 구실도 한다.
나물무침이나 콩나물국, 멸치 볶음 등에 고춧가루는 쓰지 않을 수가 있지만, 마늘은 반드시 쓴다. 무국이나 데친 가지나 미나리 무침, 그리고 갖가지 산나물 무침에도 고춧가루는 빠져도 마늘은 빠지지 않는다. 마늘이 들어가지 않으면 나물무침들이 제 맛을 내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만큼 마늘의 비중이 훨씬 크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 음식만큼 요리에 마늘을 많이 쓰는 음식이 없으며, 우리 겨레만큼 마늘을 예부터 지금까지 날것으로 즐겨 먹는 경우도 없다. 따라서 집집마다 마늘농사를 짓고 마늘의 자급체계를 갖출 정도로 마늘은 우리 식문화에서 비교우위를 점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식문화의 정체성을 마늘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이쯤에서 단군신화의 식문화 관련 내용을 구체적으로 읽어보자. 곰과 범이 신단수에 깃들어 있는 천신 환웅을 찾아와서 사람이 되기를 빌자, “신(神, 환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다발과 마늘(蒜) 20 줄기를 주고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13) 곰과 범이 쑥과 마늘을 받아서 먹고 금기를 지켜 3칠일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는데,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 민족의 먹거리로 쑥과 마늘이 뚜렷하게 제시된다. 쑥과 마늘은 예사 먹거리가 아니라 짐승을 사람으로 변신하게 만드는 대단한 효과를 지닌 먹거리다. 문제는 글대로 ‘애(艾)’와 ‘산(蒜)’이 과연 쑥과 마늘인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왜 쑥과 마늘을 먹도록 했는가 하는 문제도 더 따져봐야 할 논의거리이다.
단군신화에서 ‘애(艾) 한 다발[艾一炷]’이라 했을 때, 애는 쑥이 틀림없는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산과 들에 쑥은 야생으로 잘 자라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산(蒜) 20 줄기[蒜二十枚]’라 했을 때, 산은 과연 마늘인가 하는 것은 물음이다. 당시에 지금과 같은 마늘이 있었다고 장담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따라서 흔히 마늘로 번역되는 ‘산’은 융통성 있게 풀이해야 할 것이다. ‘산’은 마늘을 뜻하기도 하지만 달래를 뜻하기도 한다. 달래는 소산(小蒜), 마늘은 대산(大蒜)으로 구별하지만, ‘산’이라고 했을 때는 어느 쪽인지 정확하지 않다.
요즘과 같은 재배 마늘이 고조선 시대부터 자생되지 않았다면 야생 달래로 풀이하는 것이 옳다. 요즘도 여전히 달래를 냉이와 더불어 봄나물로 즐겨 먹는다. 따라서 달래라 하여도 문제될 것이 없다. 게다가 ‘달래’를 먹었다고 하여, 마늘의 식성과 분별되는 것은 아니다. 마늘과 달래의 매운 맛은 거의 같다. 마늘의 매운 맛이 상대적으로 더 강할 따름이다. 마늘과 달래는 모두 알리움(Allium)속에 드는 같은 종류의 식물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다. 따라서 둘 다 ‘산(蒜)’이라고 하는, 같은 한자로 나타낼 뿐 아니라 크기만 대소로 구분할 따름이다. 마늘로 치자면 작은 마늘이 달래이며, 달래로 치자면 큰 달래가 마늘인 셈이다. 그러므로 달래와 마늘을 여전히 즐겨 먹는 우리 식문화 속에 단군신화의 문화적 유전자는 살아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단군신화가 말하는 신성한 식품으로는 마늘과 함께 쑥이 있다. 오히려 쑥이 더 앞서서 제시된다. 마늘과 쑥을 먹기 시작한 역사가 단군신화의 중요한 내용으로 자리잡고 있는 까닭에 식문화신화라 일컬었던 것이다. 쑥 역시 신화 속의 상상의 음식으로 이야기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일상 음식으로 널리 먹고 있는 것이다. 어느 봄철이든 해마다 시장의 봄나물로 쑥이 나지 않는 경우가 없고 봄철 밥상에 쑥국이 오르지 않는 경우가 없다. 시골사람들은 물론이려니와 도시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쑥국을 안 먹어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쑥국은 계절음식의 하나로 오랜 전통을 지니며, 지금까지 지속되고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쑥은 봄철 국거리로서 일상음식의 하나일 뿐 아니라, 떡의 재료로도 널리 쓰이며 쑥차까지 개발되었다. 쑥을 뜯어서 쌀가루를 묻혀 쪄낸 ‘쑥털털이’ 또는 ‘쑥버무리’와 같은 자연스러운 쑥떡이 있는가 하면, 데친 쑥과 불린 쌀을 넣어서 빻아 만든 본격적인 쑥떡도 있다. 쑥털털이는 쑥의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으나, 빻아서 만든 경단과 인절미 또는 절편으로 만드는 경우에는 쑥의 색깔만 도드라진다. 뜻밖에 쑥을 재료로 한 떡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쑥털털이는 평소에도 수시로 해먹을 수 있는 떡이다. 절식으로 먹을 때는 반드시 경단이나 인절미 모양을 갖춘 본격적인 쑥떡을 만들어 먹는다. 쑥떡은 삼짇날에도 먹었으며, 특히 단오절에는 빠뜨리지 않고 챙겨 먹는다. 한가위 절식이 송편이듯이 단오 절식은 쑥떡이라 할 수 있다. 단오를 우리말로 ‘수릿날’이라 하는 까닭에 쑥떡을 더러 ‘수리떡’이라고도 한다. 쑥떡은 곧 단오떡이란 말이다. 단오는 한국의 4대 명절에 든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단오명절과 더불어 해마다 일정한 시기에 쑥을 먹고 살아왔다.
쑥은 쑥국과 쑥떡, 쑥차 등 식용으로 다양하게 쓰일 뿐 아니라, 약용으로도 널리 쓰인다. 식용으로 쓰는 것은 음력 3, 4월에 쑥이 어릴 때 여린 잎을 뜯지만, 약용으로 쓰는 쑥은 음력 5월에 크게 자랐을 때 줄기채로 베어 갈무리한다. 이 때가 바로 단오 무렵인데, 쑥이 한껏 자라서 약쑥으로 쓰기에 알맞은 때다. 따라서 단오날 아침에 이슬 먹은 쑥을 베어다가 다발로 엮어서 그늘에 달아 말린다. 말린 약쑥은 겨우내 가정 상비약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집에는 쑥 타래들이 초가 뒤꼍에 으레 걸려 있게 마련이다. 그만큼 쑥은 우리 삶에서 마늘 못지않게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곰과 범에게 신령스러운 쑥과 마늘을 주면서 먹으라고 했다면 그 이전에는 곰과 범이 쑥과 마늘을 먹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식문화에 쑥과 마늘은 먹거리가 아니었다. 환웅천왕을 따라 비로소 쑥과 마늘을 먹게 된 것이어서, 이 글을 중심으로 보면, 단군신화는 사람들이 쑥과 마늘을 먹기 시작한 기원을 말하는 신성한 식문화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환웅은 처음으로 쑥과 마늘을 먹도록 식생활을 일깨워준 문화영웅이며, 그 내용은 우리 식문화의 원형을 이루는 셈이다.
문화의 기원을 푸는 신화를 ‘문화신화’라 한다면, 단군신화를 홑지게 고조선의 건국신화로만 자리매김할 것이 아니라 산신신화이자14) 또한 식문화신화로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식문화신화로서 단군신화를 주목하고 문화영웅으로서 환웅천왕을 재인식해야 단군신화가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푸는 긴요한 자료로 더 넉넉하게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이 쑥과 마늘을 즐겨먹는 식문화의 원형을 신성한 역사로 서술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우리는 뿌리 깊은 신성한 식문화 원형의 유전자에 따라 여전히 쑥과 마늘(달래)을 즐겨 먹고 있으면서도 우리 식문화의 원형과 정체성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이웃나라와 비교해 보면 단군신화의 식문화 정체성이 우리 민족의 식문화에서 상대적으로 잘 드러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과 지리적 인접성과 문화적 친연성이 가장 두드러진 중국과 일본, 몽골의 식문화를 견주어 보면, 그러한 특성이 잘 드러난다. 중국은 우리와 같은 역법에 따라 양수 명절인 삼월 삼짇날과 5월 단오절을 공유하지만, 이 날 쑥떡을 절식으로 먹지 않는다. 중국에는 쑥떡이라는 음식문화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다. 마늘은 고조선 문화권이라 할 수 있는 산동성 일대에서는 널리 경작하고 식단에도 마늘이 중요 식품 구실을 한다.
그러나 산동지역은 고조선문화권이라고 하는 점을 고려하면 마늘을 먹는 것이 특이하지 않다. 산동성의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 유물에서 아사달 문양이 새겨진 팽이형토기들이 다수 발굴 보고됨으로써, 학계에서는 산동성 지역이 고조선문화권에 든다고 해석되고 있다.15) 아사달 문양은 고조선을 나타내는 가장 상징적인 문양이며, 팽이형토기 또한 기원전 3천년 전반기부터 시작된 유물로서 고조선 지역에 널리 발굴되고 있다.16) 따라서 신용하는 대문구문화 유물을 근거로 산동성 지역을 고조선문화권으로17) 설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같은 고조선문화권에서 마늘의 식문화를 가진 것은 자연스럽다.
산동지역에서 마늘이 많이 생산되고 마늘을 즐겨 먹는다는 사실은, 오히려 고고학적 유물에서 입증된 고조선문화권을 보완하는 자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고조선문화권에 귀속되지 않는 중국의 다른 곳에서는 마늘을 야채처럼 밥상에 올리는 식문화 전통이 보이지 않는다. 마늘을 요리에 넣어서 익혀먹는 수준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마늘을 양념으로조차 쓰지 않는다. 날것은 물론 익혀 먹는 일도 없다. 마늘의 식문화가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쑥은 식용으로 쓴다. 봄에 쑥이 나면 시골에서 쑥떡을 만들어 먹는 풍속은 아직도 그 자취가 조금 남아 있다.
그러나 일본에는 우리처럼 다양한 쑥문화가 없다. 단오절의 절식으로 쑥떡을 먹는 것도 아니다. 센 냄새로 재난을 쫓기 위해 창포나 쑥을 처마에 매달았을 뿐이다. 음력 3월 3일에 풀떡(草餠)을 먹는 관습에 따라 다양한 봄나물을 넣은 풀떡을 만들어 먹었는데, 쑥은 그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결국 쑥떡은 죽순, 고사리, 쑥갓 등을 넣은 수많은 풀떡의 한 종류일 뿐 절식으로서 독점적 지위를 누린 것은 아니다. 에도시대 말기부터 쑥이 풀떡의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일본에서는 쑥과 마늘을 한국에서 전래된 식품이라 한다. 쑥은 식용으로 쓰되, 마늘은 센 냄새와 맛 때문에 일본의 음식문화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나가노현의 아치신사(阿智神社)에서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들에 의해 (마늘이) 숭배되고 있으며,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9~12세기)의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에서는 (마늘을) 약으로 치고 있다.”18) 약재와 식재료의 쓰임은 크게 다르다.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문 위에다 부적처럼 마늘을 달아두기도 한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쑥과 마늘이 전해졌지만, 마늘의 식문화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19)
몽골은 유목문화에 따라 유제품 중심의 육식문화 전통이 세다.20) 여름에는 유제품, 겨울에는 육식을 주로 한다. 풀밭지대라 야채 경작이 어려울 뿐 아니라, 떠돌이삶 때문에 야채가 자라도록 기다릴 수 없다. 따라서 야채는 물론 쑥과 마늘은 먹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지방에서는 야생의 파나 마늘을, 양고기를 넣고 끓이는 국수에 갈아 넣는다.21) 야생마늘을 먹는 식문화는 고조선문화권의 일반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몽골도 중국의 산동성 지역처럼 고조선의 일부였다.22) 몽골은 고조선 후국인 부여족의 일부와 얽혀 이루어었으며 부여와 고구려의 오랜 지배를 받았다.23) 따라서 신채호는 몽골족도 조선족의 한 겨레로 적는다.
몽골에서 야생마늘이 나는 까닭에 마늘을 먹긴 하지만, 한국처럼 일상적으로 모든 요리에 마늘을 쓰지 않는다. 야생마늘을 쓰는 데 한계가 있는 까닭이다. 우선 겨울철에는 먹을 수 없다. 몽골의 겨울은 상당히 길다. 게다가 쑥은 야생으로 자라되 먹지 않는다. 이와 달리, 한국은 쑥과 마늘의 식문화가 두드러진다. 얼마 전까지 시골마을의 집 뒤꼍에는 집집마다 쑥 타래와 마늘 타래들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마늘 타래는 도시의 부엌에도 어김없이 걸려 있었다. 집집마다 마늘농사를 지었을 뿐 아니라, 마늘시장이 따로 서고, 의성마늘은 지역 특산품으로 주목받는다. 마늘 자체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는 물론 마늘잎과 마늘종다리로 만드는 요리도 여러 가지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만큼 마늘요리가 다양하고 마늘을 풍부하게 먹는 식문화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식문화는 쑥이 없는 중국의 식문화, 마늘이 없는 일본의 식문화, 쑥이 없고 야생마늘을 일부 먹는 몽골의 식문화에 견주어 볼 때 매우 대조적이다. 쑥과 마늘의 식문화가 함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식문화의 뿌리가 바로 단군신화에 닿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군신화의 식문화 DNA가 오늘까지 우리 식문화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고 하겠다. 게다가 중국의 식문화는 육식의 비중이 높다. 몽골은 아예 육식이 주류를 이룬다. 일본은 생선이 중요한 비중을 가진다. 상대적으로 우리 식문화는 채식의 비중이 높다.
우리 식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쑥과 마늘을 먹는 식품 자체가 아니라 이 두 식품을 중심으로 채식생활을 주로 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곧 수렵생활이나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정착생활과 농경생활을 하면서 육식이 아닌 곡물 중심의 채식을 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다. 식물의 줄기와 잎, 풀뿌리, 열매 등을 얻는 자연채식에 잘 적응해야 곡물과 채소 중심의 식생활을 하는 정착형 농경생활을 순조롭게 할 수 있다. 그것은 문화적 각성과 민족적 의식으로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생태학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가능한 일이다. 수렵과 유목생활은 기후가 한랭한 초원에서 가능하되, 채취와 농경생활은 강우가 순조롭고 기후가 사철이 뚜렷한 온대지역에서 가능하다.
온대지역에는 쑥과 마늘 말고도 들에서 나는 여러 가지 봄나물이 넉넉하다. 들나물과 더불어 산나물은 가장 오랜 인류의 먹거리 가운데 하나인데, 우리 민족은 쑥과 마늘을 먹는 것처럼 여전히 산나물을 즐겨 먹는다. 봄이면 산나물을 뜯는 것이 오랜 풍속으로 이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저자에는 산나물이 많이 나고 있다. 따라서 봄이면 달래와 냉이, 씀바귀, 쑥 등 들나물과 더불어, 두릅과 취나물, 참나물, 모시대, 원추리, 머위 등 산나물을 먹지 않는 사람이 없다. 제사 때는 고사리나물을 반드시 제수로 쓴다.
관광지 식당 차림표에는 으레 산나물 비빔밥 또는 산채정식이 중요한 자리에 있다. 아마 산채비빔밥과 산채정식을 차림표로 내걸고 일년 내내 산나물을 찬으로 식단을 내놓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한국식당밖에 없을 것이다. 인류의 가장 오랜 먹거리였던 산나물이 지금까지 밥상에 오르고, 정월 대보름의 절식으로, 제사 음식의 고정 차림으로 꼬박꼬박 챙겨지는 식문화는 한국만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산채가 아니라도 반찬에 나물이 빠지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쑥과 마늘(달래)에서 이어지는 산나물 문화야말로 한국 식문화의 정체성이자, 만 년 전의 자연채취 문화를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는 세계 유일의 식문화 전통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음식의 가장 독특한 양식인 비빔밥과 쌈밥도 반드시 나물이 있어야 한다. 나물이 들어가지 않은 비빔밥을 상상할 수 없듯이, 나물 없는 쌈밥도 생각할 수 없다. 비빔밥은 전적으로 밥과 나물의 조합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밥 위에 다양한 나물을 얹어서 각자 비벼먹는 음식이다. 나물을 부식으로 한 밥이자 숟가락으로 먹을 수 있는 밥이 비빔밥이다. 그러므로 산나물을 이용한 산채비빔밥이 비빔밥의 원조가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밥을 주식으로 하지만 젓가락을 쓰는 문화에서는 우리와 같은 비빔밥이 없다. 젓가락으로는 비빌 수도 먹을 수도 없는 것이 비빔밥이다. 따라서 젓가락만 쓰는 일본에서는 비빔밥을 고양이밥이라 한다. 고양이나 비벼 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비빔밥은 잔치음식이자 제사음식이며 농사철에는 들밥으로 널리 쓰였을 뿐 아니라, 식당의 차림표로 빠지지 않는다. 대한항공에서는 기내식으로 비빔밥을 개발하여 외국인들에게까지 인기를 끌었다. 1998년 기내식 세계경연대회에서 비빔밥으로 영화계의 아카데미상과 같은 기내식 최고의 영예인 ‘머큐리 (Mercury)’상을 받았다.
신선한 야채를 손바닥에 펼쳐 얹고 그 위에다 밥과 찬을 놓고 싸서 먹는 쌈밥도 우리 민족만의 득특한 식문화이다. 신선한 나물을 날 것 그대로 즐기는 음식이 바로 쌈밥이다. 밥뿐만 아니다. 생선회나 불고기를 싸먹을 때도 신선한 나물이 빠질 수 없다. 이때 마늘도 곁들여지는 것이다. 밥이든 고기든 신선한 나물에다 싸서 먹는 쌈문화는 한국식 채식문화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쑥은 아직도 중요한 봄나물이다. 시골뿐 아니라 도시 아낙네들도 여전히 쑥을 뜯는다. 마늘 역시 달래마늘로서 봄나물 채취에서 빠지지 않는다. 따라서 ‘단군신화의 쑥과 마늘은 한국 나물 문화의 원형’으로 주목된다고24)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산나물이든 들나물이든 식용으로 하는 나물이 200여 가지나 될 정도로 넉넉하다. 조선조의 선비들이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베개를 베고 자는 일을 청빈한 삶으로 예찬한 것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문화인류학자 마셜 설린스는 '석기시대의 경제학'에서 산나물과 같은 채취문화야 말로 현대문명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탈출구이자 미래문화의 모델이라고 했다.25)
농경생활은 곧 곡물 중심의 채식문화를 형성하게 되는데,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나 갈돌의 유물은 그러한 식생활을 입증하는 유물들이다. 토기는 곡식을 저장하거나 끓이는 도구로 쓰였을 것이며 갈돌은 곡식을 가루로 빻는 데 쓰였을 것이다. 서구사람들은 농경생활을 거치고 산업사회에 진입하면서 진작 나물을 뜯어먹는 채취문화를 잃어버렸는데, 한국인만은 그러한 변화를 함께 겪으면서도 유독 채취시대의 식문화인 나물문화의 전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26) 그것은 곧 단군신화가 말하는 식문화의 규범을 곰처럼 지키고, 쑥과 마늘을 훌륭한 먹거리로 존중하고 있는 까닭이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쑥과 마늘로 대표되는 채식문화의 원형은 단군신화 이래 반만년 동안 이어지는 뿌리깊은 식문화의 전통이자, 민족문화의 정체성으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3. 단군신화의 주거 규범과 정착생활의 주거문화
단군신화를 건국신화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읽으면, 단군신화는 산신신화이자 식문화의 신화일 뿐 아니라, 주거문화의 신화라 할 수도 있다. 사람답게 살려면 어떠한 주거생활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단군신화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해명하려는 시각에서 단군신화를 뜯어보면, 우리 일상생활이나 사유세계를 규정하는 민족문화의 기원을 여러 모로 분석해낼 수 있다. 그럼 단군신화는 바람직한 주거생활의 규범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 주거문화는 식문화의 규범과 더불어 제시되고 있다.
곰과 범이 사람이 되고자 했을 때, 쑥과 마늘을 주면서 먹으라고 한 것은 식문화의 기원이자, 식문화의 규범을 설정한 것이다. 쑥과 마늘이 신령스러운 것은 물론 이것을 먹어야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 것은 식품 재료로서 쑥과 마늘의 가치를 제시한 것이자, 식문화의 규범을 설정한 것이다. 신화는 전승하는 집단의 도덕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을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는 뜻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문화에 봉사하는 활동적 힘이며, 지적 설명이나 예술적 환상이 아니라 원시신앙과 도덕적인 지혜의 실용적인 헌장인 것이다.”27) 단군신화도 이러한 실용적 헌장으로서 규범적 기능을 담고 있다.
이런 시각에서 다시 보면, 쑥과 마늘을 먹도록 하는 대목은 우리 식문화에 관한 3 가지 정보를 함께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이 때부터 쑥과 마늘을 먹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 이전에 범숭배의 예족(濊族)과 곰숭배의 맥족(貊族)은 육식생활을 하다가 천신숭배의 환웅족의 가르침을 받아 비로소 채식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맥족은 잘 적응하여 동화가 되고 예족은 적응하지 못해 일탈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식문화의 기원에 관한 중요한 정보이다.
둘은 쑥과 마늘이 인간이 되게 하는 중요한 식품이라는 것이다. 문화적으로 해석하면, 쑥과 마늘 같은 채식을 해야 인간다운 문화생활을 할 수 있고, 나아가 정착생활과 농경생활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곰과 범처럼 수렵생활을 하며 육식을 해서는 인간다운 생활로 변신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식문화의 가치에 관한 정보라 할 수 있다. 육식문화에 대한 채식문화의 의의는 여전히 유효할 뿐 아니라, 앞으로 더욱 중요한 가치로 재인식될 것이다.
셋은 환웅족이 동맹을 요청하는 예족과 맥족의 식문화를 검증한 것이다. 이미 채식생활과 농경문화를 누리는 선진문화의 환웅족으로서는 아직도 육식생활과 수렵문화에 머물고 있는 두 민족과 동맹을 해서는 문화적으로 합일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채식생활과 농경문화를 동경하며 환웅족과 동맹을 원하는 예족과 맥족에게 쑥과 마늘을 주어 채식생활이 가능한가 검증한 것이다. 그러한 검증을 단기간에 효과적으로 하는 방법은 쑥과 마늘처럼 일상적으로 먹기 어려운 식품을 먹도록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전적으로 육식을 하던 예족은 빠지고 어느 정도 채식을 해오던 맥족은 통과한 것이다.
곰과 범이 먹은 쑥과 달래는 식물이다. 사람이 되자면 육식을 금하고 채식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채식이라도 예사 채식이 아니다. 야생에서 자란 식물을 먹는다는 점에서 채취생활에 의한 채식이지만, 쑥과 달래는 맛이 아주 자극적이어서 쉽게 먹을 수 없다. 이것을 한 끼만 먹기도 어려운데, 백일 동안 먹기를 요구하고 실제로 곰은 범과 달리 3칠일 동안 먹으며 견딘다. 곡물과 채소를 먹는 예사 채식과 아주 다르다. 햇볕이 들지 않는 동굴에 갇혀 사는 것이 지독한 정착생활이듯이, 쑥과 달래만 먹고 지내는 것은 아주 ‘지독한 채식생활’이라 할 수 있다.28)
한마디로, 환웅이 곰과 범에게 ‘지독한 채식생활’을 시켜서 농경문화에 순조로운 편입 가능성을 검증한 셈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정보는 채식생활과 농경문화의 적응 여부를 검증한 통과의례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정보는 다시 세 가지 사실을 말한다. 하나는 고대문화의 발전단계가 서로 다른 세 종족이 고조선 지역에 살았다는 사실이다. 전적으로 육식에 의존하던 수렵문화의 예족, 어느 정도 채식생활을 하던 수렵채취문화의 맥족, 채식생활에 상당히 익숙하고 농경문화를 누린 환웅족이 있었다. 이 가운데 환웅으로 상징되는 환웅족 곧 한족(桓族, 韓族)은29) 바로 고조선의 주류 세력이자, 선진적 농경문화를 창출한 민족이었던 것이다.
둘은 선진적인 농경문화를 가진 환웅집단 곧 환웅족이 중심이 되어 맥족을 연맹체로 끌어들여 고조선이라고 하는 고대국가를 세웠다는 사실이다.30) 이때 수렵문화에 전적으로 기대어 육식생활을 하던 예족은 문화적 검증에서 떨어졌거나, 스스로 뛰쳐나갔다고 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예족은 고조선의 일원이 되지 못한 채, 농경문화에서 나가 그들의 본디 문화였던 유목생활로 되돌아간 셈이다. 초원지대에는 아직도 유목생활을 하는 종족들이 많다.
셋은 채식생활을 주로 하며 농경문화를 누렸던 고조선족은 정착생활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대목은 단군신화의 이어지는 대목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환웅은 곰과 범에게 신령스러운 쑥과 마늘을 먹으라고 했을 뿐 아니라, 햇빛을 보지 말고 굴속에서 온날 동안 지내라고 했다.31) 여기서 바로 환웅족의 정착생활의 기원이 드러난다. 따라서 고조선은 정착문화를 중심으로 이뤄진 나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굴속에서 온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지낸다는 것은 정착문화의 역량을 말한다. 그러므로 미처 그러한 수준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범은 이 삶을 참지 못하고 며칠만에 뛰쳐나가고 말았다. 그러나 곰은 3 칠 동안 참고 지내자 계집으로 바뀌어 사람이 되는 꿈을 이루었다.
범은 원래 육식을 하고 산천을 마음껏 내달리면서 사는 짐승이다. 예사 채식과 정착생활도 견디기 어려운데 지독한 채식과 정착생활을 견딜 수 없다. 그러나 곰은 다르다. 원래 어느 정도 채식생활을 할 뿐 아니라 겨울에는 동굴 속에서 지내는 까닭에, 지독한 채식을 하면서 햇볕 없는 동굴생활도 참고 견딜 수 있었다.32)
쑥과 마늘을 먹으라고 한 것이 지독한 채식생활을 통한 식문화 적응의 검증이라면, 햇빛을 보지 않고 깜깜한 동굴 속에서 온날을 견디라고 하는 것은 지독한 정착생활을33) 통한 주거문화 적응의 검증이라 할 수 있다. 육식생활을 해서는 채식생활을 하는 ‘환웅족’과 연맹하여 국가공동체를 이룰 수 없는 것처럼, 떠돌이 유목생활을 해서는 농경활동을 하며 붙박아 사는 ‘환웅족’과 연맹할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단군신화에서 말하는 고조선은 본격적인 채식생활과 붙박이삶을 중심으로 한 농경문화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유목생활과 정착생활, 육식생활과 채식생활은 지금 대수롭지 않은 생활양식의 차이처럼 보이지만, 당시에는 매우 긴요한 사회체제이자 중요한 이념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생존양식인 채식과 육식의 차이는 마치 요즘의 이슬람주의와 시오니즘의 차이나 그리 다르지 않다. 현실생활에서도 채식주의자와 육식주의자가 부부로 살기 어려운 까닭에 공동체생활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기본적인 식생활의 차이는 공동체생활을 어렵게 만드는 이념 구실까지 한다. 현재도 채식주의자들은 일정한 종교생활과 얽혀 있다.
식문화 체제보다 더 동화되기 어려운 것이 정주방식이다. 유목주의자와 정착주의자는 사회체제를 결정적으로 갈라놓는다. 따라서 붙박이로 터를 잡고 누대로 머물러 사는 사람과 한 해에도 몇 차례씩 옮겨 사는 떠돌이는 더불어 살 수도 없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따라서 주기적으로 옮기며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한 지역에 붙박이로 머물러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기본적인 사회체제가 다르다. 그러므로 유목주의자는 유목사회 체제를, 정착주의자는 정착사회 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유목체제에 익숙한 예족은 환웅족의 농경문화를 동경하긴 했지만, 정착생활을 하는 환웅족의 체제와 이념에 동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연맹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동굴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정착생활을 해왔던 맥족은 사정이 다르다. 이 체제와 이념에 적응력을 발휘한 까닭에 환웅족과 연맹체를 이루어 국가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고조선 시기 정착생활의 문화적 원류를 설명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문화적인 기본 가치를 설정하고 있는 까닭이다. 환웅은 정착생활을 해야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쑥과 마늘을 먹고 굴속에서 햇빛을 보지 말고 100일 동안 살아라.’고 한 것은 유목민들처럼 떠돌아다지지 말고, 한 곳에 붙박이로 머물러 살라고 하는 뜻이다. 이것은 곧 인간다운 주거생활의 규범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따라 곰과 범이 함께 인간이 되고자 견디기 어려운 동굴생활을 했으되, 환웅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랐던 곰만 인간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이 문화적 규범을 지키면 인간이 되고, 지키지 않으면 짐승인 상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단군신화의 이 내용은 정착생활이 인간다운 주거문화의 규범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단군신화가 내놓은 주거문화의 값어치는 고조선 건국시기에 내놓았던 상고시대의 옛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주거생활에서 생생하게 이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 주거문화의 중요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단군신화는 다시 한 번 신화다운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며, 우리 겨레의 식문화뿐만 아니라 주거문화 속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거듭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신화의 본디 기능은 한갓 옛날의 기원을 밝히는 데 머물지 않고 “연이어 사람과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믿어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까닭이다.34)
따라서 단군신화에서 인간다운 문화로 이야기되는 정착생활은 고조선 이래로 지금까지 우리 문화에 영향을 미치며 주거문화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줄곧 다룬 식문화 이야기처럼, 단군신화의 주거문화 이야기도 실제 우리 민족의 주거문화를 결정짓는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주거문화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곰과 범이 지낸 동굴은 붙박이삶 공간이라는 점에서 붙박이로 집을 짓고 사는 것과 같다. 하지만 햇볕을 볼 수 없는 굴속 삶이라는 점에서 예사 정착생활과 다르다. 정착생활도 집안에서 마음대로 움직이고 바깥 나들이도 간다. 그러나 햇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은 나들이를 막은 것이다. 게다가 굴속에서는 움직일 여유도 적다. 굴의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서서 움직이기도 쉽지 않다. 그야말로 감옥살이나 다름없는 주거공간이다. 단군신화의 내용은 ‘지독한 정착생활’ 속에서 예족과 맥족의 정착형 주거생활 적응 역량을 검증한 것으로 역사적 풀이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독특한 주거생활의 규범은 우리 겨레의 현대 주거문화에도 여전히 이어진다는 것은 문화적 정체성을 읽는 현실적 해석의 준거로도 긴요하다.
한국의 주거문화는 오랜 정착생활의 전통을 지니고 있으면서, 세 가지 독창성을 지니고 있어 다른 민족의 주거문화와 크게 다른 특수성이 있다. 하나는 구들을 놓아서 밑면을 따뜻하게 하는 민족 고유의 난방방식인 ‘구들문화’이며, 둘은 앉아서 실내생활을 하는 독특한 ‘앉는문화’이고, 셋은 방이 여러 개 갖추어 있되, 한 방이 여러 기능을 두루 갖추고 있어 종일 한 방에서 살아도 되는 ‘한방문화’의 전통이다. 그럼 단군신화가 규정하고 있는 인간다운 주거문화의 전통으로서 구들문화․앉은문화․한방문화의 특징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첫째 구들문화는 정착생활의 농경문화를 전제로 자란 주거문화이다. 왜냐하면 떠돌며 사는 유목문화에서는 천막생활을 하는 까닭에 난방을 위해서 구들을 놓지 않고 또 구들을 놓을 수도 없다. 유목생활의 주거양식은 어느 민족이나 이동이 쉬운 천막(天幕)이다. 천막이란 말 그대로 하늘을 가리는 막이다. 추운 지방에서도 위와 둘레만 가리는 포장 형태를 이룬다. 천막에는 바닥 설치물이 따로 없다.
천막은 철거와 설치가 간편하여 언제든지 쉽게 뜯어 옮길 수 있는 기동성이 중요하다. 흔히 우리 문화와 친연성을 주장하는 몽골의 천막을 보자. 몽골의 ‘게르(ger)’는 4, 5 명의 가족끼리 30분만에 철거가 가능하고 한 시간 안에 완벽하게 설치할 수 있다.35) 게르 한 동의 무게와 부피는 낙타나 말에 실어서 운반하기에 알맞다. 굳이 게르를 보기로 들지 않더라도, 빠른 철거와 설치, 쉬운 이동이 유목민 주거문화의 특징이다.
구들은 붙박이 삶과 오랜 설치를 전제로 한 반영구적 난방방식이자 정착형 주거양식이다. 강원도 지역에서 ‘구들’은 곧 방을 뜻한다. 구들이 놓이지 않는 실내공간은 방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이동생활을 전제로 한 가옥, 곧 천막에서는 땅바닥에 붙박이로 설치하는 구들을 깔아 밑면 난방을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 자유로운 떠돌이 삶에 구들은 비효율적 난방 방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양식의 천막생활을 하든 천막 안의 난방은 천막 바닥 가운데 설치하는 화톳불이나 난롯불을 쓴다. 구조적으로 이동식 주거에는 구들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몽골의 게르와 같은 전형적인 유목민의 주거 꼴에서는 구들이 쓰일 수 없다. 우선 초원지역이기 때문에 구들장으로 쓸 마땅한 돌이 없다. 구들장으로 쓸 돌이 있다고 하더라도 ‘게르’를 옮길 때, 쉽게 낙타나 말 등에 실어 나를 수 없다. 그리고 구들을 놓으면 물로 진흙을 이겨서 고래를 만들고 구들장을 깐 다음 그 위에 다시 모래흙으로 미장을 해야 하므로, 매우 여러 날이 걸린다. 초원에서 물과 진흙도 귀할 뿐 아니라 추운 날씨에 옮기며 머무는 집을 여러 날 걸려 구들을 놓을 수 없다.36) 유목민들의 천막은 한두 시간만에 칠 수 있어야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
유목민의 주거조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이동의 효율성이자 집의 해체와 설치의 쉬움이다. 그리고 입식생활에 적절한 구조여야 한다. 그런데 구들은 이러한 여러 조건에 전혀 맞지 않다. 붙박이로 사는 것을 전제로 형성된 난방방식으로서 정착생활과 더불어 발전한 주거문화이자 좌식생활에 적절한 주거구조이다. 그것도 한두 해 정도의 정착이 아니라 아예 한 곳에 수 십 년, 또는 누대로 머물러 살 요량으로 집을 지을 때, 비로소 구들을 놓아 집을 짓는다.
왜냐하면 구들은 구조적으로 붙박이식 난방방식일 뿐 아니라, 오래 머물러 사는 데는 매우 효율적인 밑면난방 방식이기 때문이다.37) 유목민의 주거는 파괴와 건축이 아니라 해체와 조립이 기본이다. 구들은 해체와 조립이 불가능하다. 이동하려면 구들을 버려두거나 부수고 다시 설치해야 한다. 구들은 파괴와 건축에 의해 설치되는 것이다. 매트나 다다미도 옮길 수 있으나, 구들은 옮길 수 없으므로 정착형 주거문화에 적절한 구조물이다. 실제로 한옥의 구들은 주거의 바닥에 놓이는 것이자 터잡기나 다름없는 가장 기초적인 공사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이동생활을 하는 유목문화의 주거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난방문화이다.
한국 온돌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다. 한때 온돌을 쓴 때를 고구려 초기로 보았는데,38) 최근 북한에서 발굴된 유적에 따르면 고조선 때에 이미 구들을 썼던 것으로 밝혀졌다.39)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지금과 같은 큰 가마솥을 부뚜막에 걸고 아궁이를 설치한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40) 이 때에 이미 솥을 붙박이로 썼던 것이다. 따라서 상고시대부터 구들을 썼을 뿐 아니라, 구들을 쓴 문화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배달겨레 고유의 문화로 인정할 만하다.
구들을 쓴 정착형 주거생활의 문화적 원형은 단군신화에서부터 비롯되는 까닭에, 온돌문화는 역사적 뿌리도 깊고 지리적 분포도 고조선지역인 만주와 한반도 일대로 한정된다. 게다가 정착생활이 가치의 규범이었던 단군신화의 문화적 유전자가 역사적 전통으로 지속되는 까닭에, 구들문화의 주거생활 양식은 우리의 현대 주거문화를 새롭게 창출하는 발명가 구실까지 하고 있다. 주거양식이 양옥으로 서구화되고 난방방식도 보일러 형태로 크게 달라졌으나, 바닥 난방의 기본 원칙은 고대 이래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 좋은 보기이다.
양옥과 아파트가 널리 보급되면서 전통 한옥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양옥은 유목문화의 주거생활 방식에 따라 화톳불→난로→벽난로에서 라디에이터와 같은 측면난방방식으로 발전되었으나, 대기난방 방식이라는 점에서는 초기 유목민들의 화톳불 난방이나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도 양옥을 수용하던 초기에는 난방도구로 난로와 라디에이터를 두어서 난방방식까지 양옥의 것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구들목에서 좌식생활을 하는 한국인의 주거생활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점차 살림집에는 측면난방의 라디에이터가 온돌보일러나 전기장판, 전기구들과 같은 밑면난방 방식으로 변용되었다.
그 결과, 지금은 살림집 구조가 어떤 꼴으로 바뀌든 고대 온돌문화의 유전자에 따라 난방방식은 바닥난방 구조를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다. 나아가 새로운 땔감과 난방기술에 따라 연탄과 석유, 전기 등을 쓰게 되면서, 구들이 구들보일러로 바뀌고 전기장판, 전기구들(전기판넬)까지 발명하게 되었지만, 구들구조의 바닥난방 원리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마침내 서구에서 들어온 침대까지 바닥난방 구조로 바꿔, 스프링침대와 매트침대를 돌침대 또는 흙침대와 같은 구들구조로 재창조해서 등을 뜨끈뜨끈하게 하는 잠자리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밑면난방의 구들문화 전통이 구들 보일러와 전기장판, 전기구들, 돌침대까지 발명한 셈이다.41)
일본은 누리에서 처음으로 전기담요를 발명해서 상품화했지만, 전기장판은 한국이 처음으로 발명해서 상품화했다. 전기장판은 다양한 옥매트로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물론 구들보일러와 전기구들, 돌침대도 누리의 처음 발명품들이다. 그러나 일본에는 전기담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구들문화를 누리지 못한 사회에서는 전기장판이나 구들 보일러, 돌침대와 같은 밑면난방의 기술을 생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김치문화가 김치냉장고를 발명하듯이 구들문화가 구들 보일러와 돌침대까지 발명한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행복한 상태를 ‘등 따스고 배 부르다.’고 하는데, 절절 끓는 구들목 문화를 모르는 사람들은 깨닫기 어려운 말이다.
(그림 4) 일본의 고다쯔
세계 어느 나라의 주거문화도 구들을 놓아 등을 따뜻하게 해서 잠자리를 하는 경우는 없다. 실내 난방구조 자체가 바닥난방이 아니다. 이동생활의 전통에 따라 천막 가운데 피우던 화톳불을 변형시켜 난로나 화덕을 둔다. 입식생활을 하는 중국은 여전히 난로에 불을 피워 대기난방을 하고, 반좌식생활을 하는 일본은 방바닥에 화덕과 같은 고다쯔(こたつ)를 두어 바닥 중심의 대기난방을 한다. 잠자리에 뜨거운 물을 담은 유단뽀를 이불 밑에 넣어서 난방을 하는 것도 같은 방식이다.
고다쯔는 천막 속에 피우던 화톳불의 변형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화톳불이나 난로와 같은 유목형 난방방식이 구들의 발달로 바닥난방을 하는 정착형 난방방식으로 나아가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바닥난방의 한계를 보완하려고 대기난방 기구로 이동식 화로를 발명했다. 그러나 화로는 어디까지나 보조난방일 따름이다. 이제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랜 난방방식인 구들구조가 점차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므로 최근에는 해외로 온돌 보일러 자재와 함께 이 보일러를 설치한 아파트를 함께 수출한다. 그리고 우리가 발명한 돌침대를 의료용 기구로 외국에 수출하기까지 한다.42)
둘째 한국다운 정착형 주거생활로 좌식문화를 들 수 있다. 좌식문화는 난방방식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바닥이 차가우면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사는 좌식생활을 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러나 바닥이 따뜻하면 몸을 바닥에 붙이고 사는 것이 편리하다. 따뜻함을 가능한 대로 더 즐기려고 몸을 가장 많이 바닥에 붙이는 가부좌 자세로 앉아 산다. 따라서 바닥난방의 구들문화가 한국 고유의 좌식문화를 빚어냈다고 할 수 있다. 구들문화와 좌식문화는 짝을 이루며 함께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랜 유목문화의 전통을 지닌 겨레는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농경생활을 하며 정착문화를 누리게 되었으나, 여전히 야외생활처럼 집안에서도 입식생활을 하고 있다. 정착생활과 더불어 이동용 주택인 천막에서 정착용 주택인 집으로 주거양식이 크게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안에서도 밖과 같이 신발을 신고 선 채로 활동하거나, 아니면 의자에 앉아 지내며, 잠자리에 들 때는 반드시 침대 위에서 잔다. 하루 종일 방바닥에 바로 몸을 붙이는 법이 없다. 방바닥이 밖처럼 차고 더러운 까닭에 반드시 방바닥과 몸 사이에 큰 가구가 끼어 있다. 그러므로 입식문화에서는 방마다 의자와 소파, 책상, 탁자, 침대 등 거대한 붙박이형 가구가 자리잡고 있다.
구들꼴 좌식문화의 주거생활에서는 방에 들어갈 때 신발을 반드시 벗는다. 방바닥이 따뜻한 까닭에 맨발로 방바닥의 온기를 직접 느끼고 몸도 방바닥에 붙여서 온기를 누리며 산다. 방바닥과 몸 사이에 가구는커녕 가능한 몸을 바닥에 많이 붙이는 자세를 취한다. 따라서 방에서의 바른 앉음새는 가부좌형태의 책상다리이다. 명상을 하며 수도하는 자세와 그리 다르지 않다. 방안에서 몸을 붙이고 앉으려면 방바닥이 깨끗해야 한다. 따라서 방바닥은 앉아서 살기에 알맞도록 청결하게 관리된다. 아침저녁으로 방바닥을 비로 쓸고 물걸레로 닦는 청소를 한다. 양옥에서는 풀밭을 실내로 옮겨놓은 카페트 바닥에서 사므로 물걸레 청소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바닥의 카페트에 낀 먼지를 뽑아내는 진공청소기가 쓰인다. 진공청소기는 마치 잔디 깎는 기계와 같다.
한옥의 앉는문화는 몸을 직접 바닥에 대는 까닭에 집의 안과 밖이 엄격하게 나뉜다. 방안은 앉아서 살 수 있도록 청결해야 하는 까닭이다. 방안과 밖 의 적극적인 경계가 문턱이다. 따라서 방문에는 모두 높은 문턱이 있다. 방을 구분하는 방과 방 사이의 문턱은 낮지만, 방안과 밖을 구분하는 문턱은 높은 편이다. 그러한 문턱을 문지방이라 일컫는다. 문지방은 공간적 구분의 경계 구실을 할 뿐 아니라 안팎을 막는 경계 구실도 한다. 그러므로 한옥 출입문의 문지방은 그 턱이 아주 높다. 안팎을 엄격하게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동 가옥인 유목민의 천막에는 구들을 놓지 않을 뿐더러 문지방도 만들지 않는다. 유목생활의 거주문화를 지닌 사람들이 정착생활을 하면서 집을 지어도 여전히 구들을 놓지 않는 것처럼, 출입구에 문지방도 없다. 여전히 밖처럼 신발을 신은 채 입식생활을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한옥의 특징은 구들을 놓고, 문지방을 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문지방만 넘어가면 실내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격적인 한옥은 여러 겹의 경계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마당에서 축대 위에 올라가 댓돌 위에 신발을 벗어두고 툇마루를 거쳐서 비로소 문지방을 넘어 실내로 들어간다. 축대(처막)→댓돌→툇마루→문지방→방안으로 복잡한 절차를 거치도록 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절차 못지않게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좌식과 입식의 차이는 앉고 서는 문제보다 신발을 벗는가 신는가 하는 것이 실내생활에서 더 중요한 요소이다. 신발을 벗지 않으면 좌식생활에 적합한 실내의 청결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건축구조물의 특징만 알 것이 아니라 실내외 차단의 경계 기능을 비롯한 실내생활 양식까지 주목해야 독창적인 문화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우리 주거생활에서 이러한 내외의 경계 기능은, 입식생활에 알맞도록 지어진 양옥과 아파트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양옥에는 구조적으로 문지방이 없으나, 한국의 양옥에는 보이지 않는 문지방이 설치되어 있다. 건물의 형태는 양옥이지만 난방방식은 구들꼴 바닥난방인 것처럼, 겉으로 보면 입식생활을 하는 구조물이지만 집안으로 들어가 보면 좌식생활을 하기에 알맞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문지방 구실을 하는 구조물도 있다. 좌식생활의 기본이 실내에서 신을 벗고 생활하는 것이며, 실내외 구분을 분명하게 하는 것인 까닭에, 아파트 현관 입구에는 신발장을 별도로 두고 모두 신발을 벗게 한다.
게다가 아예 현관 입구바닥을 낮게 하여 거실바닥과 구조적으로 차이를 두었다. 신발을 신고 거실 안으로 진입할 수 없도록, 경계를 분명하게 드러내려고 실내 바닥을 높게 만들어 둔 것이다. 문 없는 문턱이 있는 셈이다. 비록 작은 차이의 높이지만, 과거 한옥의 문지방이나 다름없는 구실을 한다. 신발을 신을 수 있는 공간과 신을 수 없는 공간을 물리적으로 엄격하게 구분해 주는 까닭이다.
신발을 신고 드나드는 현관과 실내 거실 공간을 구분하려고 높이의 차이는 물론, 문을 달아서 그 경계를 한층 분명하게 구분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계와 구분은 입식생활을 하는 서구문화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현관 입구에 신발장을 두는 법도 없다. 신을 신은 채로 거실과 침실까지 들어가는 까닭이다. 신발을 벗는 공간과 신발장을 현관에 둔 것은, 양옥의 실내구조를 한국인의 삶에 맞게 재창조한 독특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양옥이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바닥재도 입식생활에 맞게 카페트 곧 양탄자를 깔았다. 그리고 모두들 거대한 소파를 거실에 들여놓았다. 카페트(Carpet)는 라틴어의 ‘털을 빗질하다’라는 뜻을 가진 Carpita에서 나온 말이다. 유목문화의 유산임을 알 수 있다. 신발을 벗고 앉아 사는 데에는 적절한 바닥재가 아니다. 따라서 지금은 양옥에서도 바닥재를 마루와 자리, 장판과 같은 본디 자재로 바꾸거나, 그런 느낌과 기능을 발휘하는 새로운 바닥재를 개발해서 쓰고 있다. 이런 바닥재는 신발을 신고 활동하는 입식생활에는 알맞지 않으나, 몸을 붙이고 활동하는 앉는 삶에는 더 적절한 재질이다. 그러므로 전기장판이나 구들보일러 시스템처럼 앞으로는 한국형 실내바닥재도 외국으로 수출될 가능성이 높다.
셋째, 한국의 주거문화로서 독특한 것이 집안에서 여러 방을 쓰지 않고 한 방에 머물러 사는 한방문화이다. ‘한방문화’라는 말은 이 논의에서 처음 쓰는 말이어서 상당히 낯설다. 한방이라고 하면 죄수가 감방에서 벌칙으로 혼자 좁은 방에 특별히 갇히는 벌방의 경우를 떠올리거나, 좋게 보아 요즘 도시생활의 원룸시스템을 떠올릴 수 있다. 죄수의 독방 감금은 주거문화라 할 수 없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원룸시스템은 독방문화와 제법 닮아서 견주어 볼 만하다.
원룸은 방 하나로 거실과 침실, 부엌, 식당방을 겸하도록 하는 독립가구 형태의 방이다. 따라서 욕실을 겸한 화장실 외에 다른 방은 아예 없다. 다가구 주택의 경우에도 독립생활공간으로 설계되어 다른 방과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한방문화는 이러한 원룸문화와 두 가지 점에서 크게 다르다. 하나는, 한옥에서 한방문화는 집안에 방이 여럿 있는데, 가족 성원들이 주로 한 방을 차지하고 그 방안에서 모든 삶, 곧 자고 먹고 쉬는 일은 물론, 손님을 맞이하고 독서하는 등 실내생활의 모든 일을 두루 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자연히 한옥의 방은 집안의 다른 방이나 마루 등과 서로 이어져 있으며,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쉽게 오갈 수 있고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옮긴다. 그러므로 다른 방으로 이동 불가능하거나 아예 하나의 방만으로 설계된 원룸의 구조와 전혀 다르다.
둘은 한옥에서 한방문화는 원룸과 달리 절대로 부엌을 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든 음식은 부엌에서 완전히 조리된 상태로 차려 와서 먹는다. 그런 까닭에 부엌과 식당이 구분되어 있다. 한옥에서 부엌은 실내와 실외의 중간적 성격을 지니지만 사실상 실외의 성격이 더 짙다. 따라서 부엌은 문지방과 문으로 경계를 할 뿐 방처럼 댓돌이나 툇마루가 없다. 방처럼 엄격한 내외 경계가 없는 까닭이다. 구들을 놓지 않아서 흙바닥 그대로이며 신발을 신은 채 입식생활을 한다.43) 부엌은 땔감을 저장하고 불을 지펴서 음식을 장만하는 공간인 까닭에 신발을 벗지 않으며 몸을 바닥에 붙이고 앉는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므로 부엌 기능은 좌식생활을 하는 방의 기능과 구조적으로 대등하게 결합될 수 없다.
원룸시스템은 입식생활을 전제로 한 양옥에서 새로 설계한 주거형태이다. 원룸에서는 뒷간이 방과 나뉘어 있긴 해도 사실상 벽을 경계로 붙어 있다. 독신생활에 적합한 도시형 독립 주거구조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쓸 수 있는 별도의 주거공간이 없다. 독점 방식의 배타적 독방체제이다. 그러나 한옥에서 한방문화는 이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각자 제 방이 정해져 있을 뿐 여러 방을 가족들이 함께 쓰는 체제로서 독립성과 공유성이 함께 보장되어 있다. 특히 욕실과 뒷간은 아예 딴 채로 두어서 격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가족들끼리 공유하는 공간이다.
한옥의 한방문화는 방의 기능이 다용도라는 점에서 원룸과 비슷하나 그 구조는 전혀 다르다. 원룸은 양옥의 구조처럼 여러 방의 기능을 조합한 상태이다. 다시 말하면 거실과 침실, 서재, 부엌을 통합해 놓은 상태이다. 따라서 거실용 소파나 의자, 침실용 침대, 서재용 책상, 부엌용 식탁과 조리시설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원룸이지만 가구의 배치에 따라 공간기능이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한옥에서는 거실과 침실, 서재, 식당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 한 방의 같은 공간에서 일상적인 주거생활을 하며 잠도 자고 밥도 먹으며 독서도 한다. 공간기능의 분화가 아니라 공간기능의 변화를 통해서 다용도로 쓰는 체제이다.
따라서 한옥에는 소파나 침대, 식탁, 책걸상 등 방의 기능과 용도를 결정짓는 거대한 붙박이식 가구가 없다. 마치 백지도처럼 가구 없는 빈방인데, 필요에 따라 휴대용 가구나 집기, 살림살이를 들여놓음으로써 방의 기능이 바뀌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랑에 손님이 와서 방석을 내놓으면 거실이자 응접실로 바뀌며, 끼니때가 되어 밥상을 차려오면 식당방으로 바뀌고, 손님이 간 뒤에 서안을 내놓고 책을 읽으면 서재가 되며, 저녁에 자려고 이부자리를 펼치면 침실로 전환되는 것이다. 안방이라고 해서 기능의 전환 방식이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한옥에서는 손님을 응접실에서 맞이하고 다시 밥을 먹으려고 식당방으로 가거나 잠을 자려고 침실로 가는 일은 없다. 남자 어른은 사랑에서, 여자 어른은 안방에서 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독특한 주거생활을 하므로 한방문화라 일컫는 것이다.
자연히 우리의 전통 가구나 집기는 모두 이동 가능하도록 작고 간편하며 쉽게 옮기고 펼칠 수 있다. 사람이 방의 기능에 따라 옮기는 것이 아니라 가구나 집기들을 방으로 내 오도록 되어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손님이 오면 술상이 들어오고 끼니때가 되면 밥상이 들어오며, 잘 때가 되면 이부자리를 꺼내서 펼치는 것이다. 아침에 이부자리를 개서 장롱에 넣어두면 방의 공간은 여러 가지 용도로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한옥의 방들은 제각기 독립적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방이 여러 기능을 두루 발휘하는 다용도 방인 까닭에, 방 하나만으로도 취사활동 외의 모든 일상생활이 된다.
양옥은 이러한 한방문화 양식과 다르게 방마다 기능이 제각각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실에서 밥을 먹거나 식당방에서 잠을 자지 않는다. 방의 기능에 따라 옮기면서 사는 것이다. 이를테면, 손님이 오면 거실에서 맞이하여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다가 끼니때가 되면 식당방으로 모시고 가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책을 읽을 때는 서재에 가며, 잠잘 때는 침실로 가서 침대 에 누워 잠을 자는 것이다.44) 그러므로 아침에 침실에서 일어나 거실에서 살다가 끼니때마다 식당방에 들리고, 특별한 경우 서재나 작업실에서 일을 하며, 저녁에 침실에 드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친다.
하루 종일 필요에 따라 이 방 저 방으로 옮기면서 사는 서구의 입식 주거문화는, 사랑방이나 안방 등 특정한 방에 머물면서 하루 삶의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한옥의 좌식 주거문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앉는 우리 주거문화는 방의 기능이 분화된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바뀌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방을 쓰는 가족에 따라 사랑방과 안방, 아이들방으로 구분되어 있을 뿐 하나의 방이 다양한 기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방의 주인은 자기 방에서 하루 종일 머물러 앉아 정착생활을 해도 별문제가 없어서 한방문화가 가능하다.
이와 달리 입식인 서구 주거문화는 방의 기능이 분화되어 있어 한 방에 머물러 앉아 살 수 없다. 쓰임에 따라 거실, 식당방, 서재, 침실을 끊임없이 오가며 살지 않을 수 없다. 하나의 방이 하나의 기능만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천막과 달리 붙박이로 집을 지어 정착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한옥과 같지만, 실내 주거생활은 근본적인 차이를 지니지 않을 수 없다. 하나의 방이 여러 기능을 발휘하는 한국인의 가정에서는 이렇게 방을 오가지 않는다. 우리 주거문화는 근본적으로 ‘원 소스 멀티 유스’처럼 한 방이 다양한 용도로 쓰임새를 발휘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양옥의 주거문화가 신발을 신고 서서 사는 이동형이라면, 우리 주거문화는 신발을 벗고 앉아서 지내는 정주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주거문화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나는 생업이 달라서 비롯된 것으로 푼다. 따라서 입식 이동형 주거문화가 유목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좌식 정주형 주거문화는 농경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쓰임새에 따라 필요한 방을 찾아다니는 입식형 주거문화가 마치 유목민들이 짐승을 데리고 풀밭을 찾아 끊임없이 옮기는 삶과 같다면, 방에 앉아서 필요에 따라 휴대용 가구와 집기들을 들여오거나 두는 데 따라 방의 쓰임새를 바꾸며 지내는 주거문화는 마치 농경민들이 땅을 일구고 농작물을 가꾸며 정착해 사는 삶과 같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45)
농경생활을 하는 정착문화는 사람들이 터를 잡고 머무는 곳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철 따라 농사를 지어 의식주생활에 쓰일 물적 자원을 확보한다. 한 곳에 집을 짓고 붙박이로 살면서 철 바뀜에 적응하고 자연현상을 이용하는 것이 정주형 농경문화의 특징이다. 그러나 목축생활을 하는 유목문화는 새로운 풀밭을 따라 끊임없이 옮겨 문제를 푼다. 다음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지라도 일단 풀이 없으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조건이 갖추어진 곳으로 옮겨가게 된다.
따라서 유목문화의 전통을 가진 사람들은 집안에서도 입식생활을 하며 하루 종일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돌아다니며 사는 것이다. 하지만 농경문화의 전통을 지닌 사람들은 주거공간 안에서는 좌식생활을 하며, 한 방에 머물러 있으면서 모든 집안생활이 되므로 정착문화다운 면모를 보인다. 환웅이 곰과 범에게 요구하는 인간다운 삶의 양식은 바로 그러한 정착생활이자 채식생활을 하는 농경문화의 양식이다. 환웅은 이미 정착형 농경문화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곰과 범에게 동굴생활을 요구했던 것이다.
따라서 단군신화를 통해서 고조선은 농경문화의 형성 이후에 연맹체가 커지면서 세워졌다고 풀 수 있을 뿐 아니라, 정착형 농경문화가 당시에 가장 주목받았던 선진문화이자 동경했던 대안문화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의 성립과 발전은 기본적인 생태환경과 문화적 유전인자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유목문화를 누렸던 민족은 정착생활로 바뀌어도 실내에서 입식생활과 이동생활을 하며, 정착문화를 누렸던 겨레는 구들문화를 창출하고 실내에서 좌식생활과 정착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문화의 원형은 풀밭의 유목문화가 아니라 온대지역의 정착형 농경문화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밖의 옮김삶이 안에서도 옮김삶으로 이어지며, 밖의 붙박이삶이 안에서도 붙박이삶으로 이어지는 것은 일종의 문화적 프렉탈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프렉탈 현상은 자고 먹는 기본적인 삶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상당히 관념적인 신앙생활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무당의 입무과정은 물론 굿의 양식에서도 유목민들의 샤머니즘과 우리 굿문화는 기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엑스타시(Ecstasy)형인 샤머니즘이 신을 찾아 이계로 여행하는 이동형 유목문화의 굿이라면, 포제션(Possession)형인 우리 굿은 신을 내림받아 모셔두고 굿을 하는 정착형 농경문화의 굿이라 할 수 있다.46) 그러므로 생태학적 조건과 생업양식은 문화적 원형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 정착형 농경문화가 빚어낸 민족문화의 정체성
단군신화와 얽힌, 우리 민족이 자고 먹는 삶꼴을 결정하는 기본적인 생존의 문화를 검토한 결과, 단군신화가 추구하는 규범이나 가치관이 현재의 우리 문화에 고스란히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고대신화가 현대문화를 규정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거꾸로 고대문화가 신화를 생산했을 가능성도 있다. 채식생활을 하며 정착형 농경문화를 누렸기 때문에 그러한 신화를 지어낼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한 신화의 서사는 곧 역사적 전개과정과 문화사의 발전양상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화 발전과 역사의 전개, 신화의 전승이 유기적 연관성을 이루며 줄기를 이어가는 셈이다.
아무리 세 관계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고 하더라도 신화나 역사, 문화 자체의 발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신화가 아무리 문화를 결정하는 규범으로 작용한다고 하더라도, 민족문화의 특수성을 신화의 내용으로만 풀 수 없다. 왜냐하면 신화와 얽힌 문화는 그 자체로 생태학적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발전하는 까닭이다. 실제로 민족문화의 특수성을 신화의 내용으로만 풀 수 없는 것도 많다. 그것은 문화 자체의 논리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신화가 문화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그러한 문화가 다시 새로운 문화 정체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러한 문화현상을 실증적으로 눈여겨 보자.
우리 건축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단층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지하층도 없고 2층도 없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오랜 정착생활의 전통을 지니며 붙박이 주거문화를 누렸지만, 전통적인 우리 집에는 지하실도 없으려니와 2층을 지어서 주거공간으로 쓰는 일도 거의 없다. 지하공간에 견줄 수 있는 것은 대청 밑에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한 마루 밑이 전부이다. 그리고 2층에 견줄 만한 공간으로는 천장 위나 다락이 고작이다. 방과 같은 주거공간을 지하실과 2층으로 설치하는 서구식 가옥구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보다 정착생활이 상대적으로 늦은 유목문화의 전통을 지닌 사람들의 집을 보면 오히려 건축술이 더 발달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하실은 물론 2층, 3층의 다층건물을 지어 다양하게 주거공간으로 써 왔다. 서구의 집이 다층일 뿐 아니라 일본의 전통 살림집들도 2층이 많다. 우리보다 건축술이 발전해서 그런 것일까. 건축재료가 남달라서 그럴까. 법주사 팔상전처럼 옛날에도 목재를 써서 고층건물을 얼마든지 지을 수 있었다. 일본은 목조 살림집이 많아도 예사로 2층집을 지어 살았다. 전통가옥에도 2층집이 적지 않다. 다다미만 깔면 1층이나 2층이나 주거공간으로 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의 소수민족들은 상대적으로 기술문명이 처진다. 그래도 다층집을 지어서 산다. 계림지역 좡족(莊族)의 경우를 보면, 목재로 3층집을 지어서 아래층에 가축 우리, 2층에 주거공간, 3층을 저장 공간으로 쓰고 있다.47) 신발을 신은 채 입식생활을 하며 거실에서는 의자에 앉고 침실에도 모두 침대를 갖추고 있다. 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을 하는 데도 입식생활을 한다. 흔히 다락논으로 알려진 계단식 논을 만들어 경작하며 산비탈에서 집을 짓고 사는 까닭에 대지 면적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다층건물의 집이 상대적으로 발달한 셈이다.
그런데 전통한옥은 한결같이 거의 단층집이다. 왜 그럴까? 단군신화를 준거로 풀 수 있는 단서가 없다. 물론 그 원류는 단군신화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2차적인 특징은 우리 주거문화 자체의 논리에서 원인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전통 한옥이 단층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밑면 난방을 위해 구들을 놓은 까닭이다. 터를 다진 기단부 위에 진흙으로 고래를 놓고 그 위에 넓적한 돌을 깔아서 구들을 놓는 까닭에 단층의 바닥에는 구들을 놓을 수 있지만, 지하나 2층 이상에는 불가능하다. 구들을 놓은 밑바닥을 파서 지하실로 쓰기 어려울 뿐 아니라, 지하실의 천장 위에다 구들을 놓기도 어렵다.
천장 위에 다락을 두듯 2층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다락은 더러 있다. 농가에도 외양간 위에 다락을 두어 농기구와 살림살이를 보관하는 공간으로 쓰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층의 지붕 밑의 빈 공간을 이용한 것일 뿐, 2층을 지어서 온전한 방으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구조적으로 2층에는 구들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구들을 놓는 천장구조는 엄청 튼튼해야 할 뿐 아니라 아궁이와 굴뚝을 낼 수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구들 놓기의 방법과 구들돌의 무게 탓이기도 하지만, 만일 2층에 구들을 놓는다고 해도 아궁이를 밖으로 내고 불을 지필 수가 없다. 그것은 지하실에 구들을 깔 수 없어서 지하방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지하실에는 구들을 놓는다고 하더라도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굴뚝을 내는 일은 예삿일이 아니다. 특히 목조건물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한옥은 아무리 큰집이라도 단층집의 전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구들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정착형 주거생활은 식문화도 결정한다. 우리는 세계 유일의 숟가락문화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식에서 가장 긴요한 도구로 숟가락을 쓸 뿐 아니라, 숟가락을 쓴 역사도 가장 오래여서, 이미 기원전 6, 7 세기의 유적에 골제 숟가락이 캐였다. 숟가락은 뜨거운 밥을 먹는 데는 물론 뜨거운 국물 음식을 즐겨 먹는 데 긴요한 연모다. 다른 음식은 손으로 먹을 수 있으나 뜨거운 국은 반드시 숟가락으로 퍼먹을 수밖에 없다.
젓가락이나 포크로 먹는 음식은 손으로도 먹을 수 있지만, 숟가락으로 먹는 뜨거운 국물은 손으로 먹을 수 없다. 손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는데 쓰는 젓가락과 포크는 손의 연장선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젓가락은 손가락의 기능을 도구화한 것이다. 포크는 손을 무기화한 창의 기능을 도구화한 것이다. 손으로 먹을 수 없는 뜨거운 국을 먹는데 쓰는 숟가락은 손의 기능을 도구화한 것이 아니라 손이 할 수 없는 기능을 도우고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숟가락은 뜨거운 국물요리를 먹는 식문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뜨거운 국물 요리도 구들문화와 얽혀 있다. 구들을 놓고 부엌에 솥단지를 걸어둔 채 오랫동안 국을 끓이거나 음식을 쪄서 먹는다. 고기도 뼈째 우려먹는 곰탕문화가 생겼다. 곰탕처럼 큰 가마솥을 붙박이로 걸어두고 물을 부어 오랫동안 음식을 끓여먹는 전통은 정착형 주거문화의 산물이다. 국물 중심의 곰탕형 요리는, 구워먹는 바비큐식 유목형 요리보다 더 경제적이며48) 건강한 식문화로 평가될 뿐 아니라, 더 문화적인 요리방식으로 해석된다.49)
국이 발달한 한식에서 음식의 수준은 국의 질이 좌우한다. 나물국인가 고기국인가, 고기국이면 어떤 고기국인가 하는 것이 잘 차린 음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국이든 뜨거워야 한다. 국이 식으면 데워서라도 뜨겁게 해서 먹는다. 뜨거운 국물을 떠먹는 데는 숟가락이 제격이다. 국을 권할 때도 뜨거운 국물을 더 드시라고 한다. 밥도 뜨거워야 한다. 그래서 식기 전에 드시라고 권한다. 뜨거운 밥을 먹는 데도 숟가락이 알맞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식은 음식을 싫어한다. 일식의 공기밥처럼 밥을 덜어서 들고 먹는 경우에는 밥이 뜨시지 않다. 젓가락은 보온 기능이 없다. 식은 밥을 먹는 데는 젓가락이 편리하다. 밖에서 도시락을 먹을 때는 으레 젓가락을 주로 쓴다. 그러나 뜨거운 국과 밥그릇을 상에다 놓고 먹는 데는 숟가락이 훨씬 좋다.
숟가락을 우리 민족문화의 독창성으로 주목하고 있는 연구도50) 있다. 또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같은 젓가락을 써도 우리는 오직 쇠젓가락을 쓴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쇠젓가락을 쓰는 까닭에 황아무개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도 가능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우리만 쇠젓가락을 쓰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러 물음을 가져도 풀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 젓가락은 숟가락과 짝을 이룬다. 숟가락이 주이고 젓가락은 종이다. 젓가락은 없어도 되지만 숟가락이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한다. 실제로 전통사회에서 민중여성들은 숟가락만 썼다. 노비들도 젓가락을 쓰지 않았다. 젓가락은 제대로 밥상을 차려 먹는 지배층의 식사도구였다. 예사사람들은 숟가락만으로 충분했다.51) 젓가락은 어디까지나 숟가락에 딸린 짝이다. 따라서 숟가락을 쇠붙이로 만들기 때문에 그에 딸린 젓가락도 쇠젓가락인 것이다. 수저가 한 벌로 짝을 이루므로 재료가 다르면 어울리지 않는다. 쇠젓가락은 숟가락문화가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은 중국과 일본 젓가락과 다른 쇠젓가락의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럼 왜 숟가락은 쇠붙이로 만들었을까? 나무젓가락을 쓰는 식문화는 있어도 나무숟가락을 쓰는 식문화는 없다. 포크와 칼을 나무로 만들지 않는 것과 이치가 같다. 육식을 주로 하는 양식에서 질긴 고기를 자르고 찌르는 데는 쇠붙이로 된 포크와 칼이 알맞은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뜨거운 국을 중심으로 한 우리 식문화는 쇠숟가락이 알맞다. 왜냐하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숟가락은 국그릇에 넣어 걸쳐두게 되어 있다. 나무숟가락은 국물을 빨아들여 불어나게 된다. 그러나 쇠숟가락은 뜨거운 국물에 아무리 오래 넣어 두어도 괜찮다. 국물 없는 음식을 집어먹는 젓가락과 국물을 주로 떠먹는 숟가락이 재료가 다른 것은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런 까닭에 밥그릇도 다르다. 밥그릇은 크고 세로가 더 긴 밥식기 또는 주발이고, 국그릇은 가로가 더 긴 대접이다. 흔히 밥식기와 대접이 놋그릇이나 사발로 짝을 이룬다. 밥과 국이 음식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국이 없는 때는 비빔용 나물 대접이라도 밥그릇 오른 쪽에 자리잡고 있어야 제격이다. 따라서 밥그릇만 차린, 국이 없는 밥상은 갖춘 상차림이라 할 수 없다. 그것도 국그릇이 늘 밥그릇 오른 쪽에 우선적으로 놓인다. 밥을 먹을 때 국이나 된장을 가장 먼저 떠먹는 것이 순서인 까닭이다. 자연히 숟가락은 밥을 먹을 때 늘 국그릇에 걸쳐 놓아야 한다.
일본 밥상에는 아예 숟가락이 없다. 젓가락만 차린다. 밥은 물론 국물을 먹을 때조차 젓가락을 써서 마신다. 일본 된장국 미소시루(みそ汁)는 우리 국처럼 뜨겁지도 않고 우리 된장처럼 짜지 않아서 마실 수 있다. 숟가락을 안 써도 된다. 뜨거운 국은 물론 밥상 위에서도 보글보글 끓고 있는 뚝배기의 된장찌개나 순두부찌개와 같은 뜨거운 요리는 없다. 그러나 우리 한식의 국은 뜨겁고 된장은 짜기 때문에 어느 것이나 마실 수 없다. 숟가락으로 떠 먹을 수밖에 없다. 한식은 국뿐 아니라 모든 음식이 뜨거워야 제격이다. 붙박이삶의 식문화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일본사람들은 늘 왼손에는 밥공기나 국 공기를 들고 오른손으로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하는 까닭에 두 손을 다 쓴다. 오른 손을 쓰지 않을 때도 상 아래로 손을 내려놓지 않는 것이 식사예절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젓가락을 밥상 위에 내려놓으면 식사가 끝난다. 오른 손으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번갈아 쓰는 우리 식문화와 다르다.늘상 왼손에 밥그릇이나 국그릇을 들고 있고 오른 손에 젓가락을 들고 있어서 마치 우리가 밖에서 들밥을 먹는 것과 비슷하다. 그릇을 들고 젓가락으로 먹는 것은 이동의 효율성을 나타낸다. 우리도 밖에서는 밥그릇을 들고 먹으며 도시락은 주로 젓가락으로 먹는다. 한식이 정착형이라면 일식은 이동형이라 하겠다.
중국에도 우리와 같은 밥숟가락이 없다. ‘탕츠(湯匙)’라고 하는 사기로 된 국숟가락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 숟가락과 구조와 기능이 다르다. 국자 모양을 닮아서 국물을 먹는 데만 쓸 뿐 밥숟가락으로는 쓰지 않는다. 탕츠라는 말 그대로 국숟가락일 따름이다. 따라서 국이 없을 때는 탕츠가 놓이지 않고 젓가락만 있다.
그러나 우리 숟가락은 밥상의 필수품이자 국숟가락이 아닌 밥숟가락이다. 국이나 된장, 간장, 김치국물도 숟가락으로 먹지만 어디까지나 ‘밥숟가락’이라 일컫는다. 국자라는 말은 써도 국숟가락이란 말은 쓰지 않는다. 숟가락이 밥을 먹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까닭이다. 철모르는 아이들이 젓가락으로 밥을 먹으면 어른들은 ‘왜놈처럼 먹는다.’고 나무란다. 따라서 국이 없어도 숟가락은 반드시 필요하다. 밥상에 젓가락은 갖추지 않아도 숟가락은 반드시 갖추어야 마땅하다.
중국이나 일본에는 숟가락문화도 없을뿐더러 밥그릇도 우리와 매우 다르다. 주발이나 대접처럼 크지도 않고 밥공기와 국그릇의 모양이 큰 차이가 없다. 다만 들고 먹기에 뜨거우므로 일본에서는 국그릇을 나무로 하고 밥그릇을 도자기로 하는 차이가 있다. 밥공기는 마치 다완처럼 위가 넓고 아래가 좁다. 거의 역삼각형 모양이다. 밥공기 뚜껑도 별도로 없다. 뜨거운 밥을 보온하려는 의도가 없고 젓가락질하기에 편리한 밥그릇 모양을 갖추면 그만인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 밥식기는 뚜껑이 있을 뿐 아니라 위아래의 너비가 같거나 오히려 위쪽이 더 좁다. 어른들의 밥식기는 위가 더 좁은 옥식기를 쓰고 반드시 밥뚜껑을 덮어서 차린다. 보온효과가 높고 숟가락으로 밥을 먹기 쉽다. 그러므로 ‘젓가락과 밥공기’, ‘숟가락과 옥식기’는 서로 짝을 이룬다. 식은 밥을 덜어서 밥공기를 ‘들고 먹기’ 좋은 이동생활 경향의 일식과, 뜨거운 밥을 밥솥에서 밥그릇에 퍼담아 밥상에 ‘놓고 먹기’ 좋은 정착생활 경향의 한식이 빚어낸 주방기구라 할 수 있다.
그 밖의 찬그릇도 대조적이다. 한식은 밥그릇이나 국그릇처럼 오목한 보시기가 중심을 이루는데, 중식과 일식은 모두 평면의 쟁반이나 접시이다. 접시를 주로 쓰는 데에는 양식도 마찬가지이다. 요리를 접시(dish)라고 일컫는 서양식 그릇과 닮았다. 반찬에도 국물이 거의 없는 까닭이다. 젓가락으로 먹기 좋은 음식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므로 생선초밥(すし)과 같은 전형적인 일식은 별도의 접시를 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예 도마 위에다 차려내기도 한다. 식기에다 음식을 담는 것이 아니라 도마에다 얹어놓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쟁반이나 접시와 같은 평면 그릇은 중요하게 쓰지 않는다. 접시에 담은 음식은 숟가락으로 먹기 불편하다. 국그릇이 아니더라도 중발과 보시기, 탕기, 종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밥그릇이나 대접처럼 입체적으로 깊게 생겼다. 접시나 쟁반과 달리 물이 있는 요리를 넉넉하게 담을 수 있는 입체적 구조의 그릇들이다. 숟가락을 주로 쓰는 까닭에 반찬에 국물이 많다. 일식 단무지에는 국물이 없지만, 깍두기에도 국물이 있고 김치에도 국물이 있다. 따라서 단무지는 접시에 담아도 되지만, 깍두기나 김치 국물까지 담으려면 오목한 보시기에 담아야 제격이다.
된장 중발이나 간장 종지는 말할 것도 없다. 국물 있는 반찬도 모두 숟가락으로 먹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한국인들은 상대적으로 짜게 먹는다. 일식이나 중식에는 반찬에 국물이 있는 음식이 적다. 볶고 조리고 튀기는 음식이 많다. 접시에 담아 젓가락으로 먹는 것이 효율적이다. 한식에서도 자반이나 나물 등, 젓가락으로 집어먹을 찬들은 모두 접시에 담는다. 상대적으로 보시기에 비해 접시의 비중은 아주 낮다. 그러므로 숟가락과 보시기, 국물, 뜨겁고 짠 음식이 짝을 이룬다면, 젓가락과 접시, 튀김, 따뜻하고 싱거운 음식이 짝을 이룬다.
맵고 짠 음식은 보다 저장성이 좋다. 따라서 맵고 짠 한식은 정착형 요리라 할 수 있다. 뜨거운 요리나 국물이 많은 요리, 오랜 시간이 드는 요리도 정착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뼈째 우려먹는 곰탕, 설렁탕, 우족탕, 사골탕, 도가니탕 등은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오래 끓여야 하는 까닭이다. 이와 달리 이동생활에 편리한 요리는 즉석요리, 마른 요리, 식어도 좋은 요리다. 김밥과 생선초밥, 도시락 등 휴대 간편한 음식이자 모두 식은 밥을 전제로 한 것이자, 젓가락으로 먹는 음식이다.
양식에서 쓰는 칼과 포크가 유목적 이동성의 전통과 더불어 육식문화를 그대로 이으면서 생겨난 도구라면, 젓가락은 유목적 이동성의 전통을 어느 정도 이으면서 채식문화로 바뀐 식생활에서 창조된 도구라 하겠다. 그러나 숟가락은 처음부터 유목적 이동성과 무관하다. 붙박이로 솥을 걸어 놓고 뜨거운 국물요리를 먹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숟가락은 농경적 정착성의 전통을 지닌 채식문화가 만들어낸 것이자, 한국 식문화의 독창성이라 할 수 있다.
숟가락문화와 같이 가는 것이 큰 가마솥이다. 정착형 구들문화에서 만들어진 솥은 구조적으로 붙박이 형태이다. 취사열과 난방열을 함께 쓰는 까닭에 부엌 아궁이에 큰솥을 2, 3 개 걸어두고 불을 지펴 음식을 한다. 큰솥에는 밥을 짓고 중솥에는 국을 끓이고 동솥에는 된장을 지진다. 어느 솥이든 부뚜막에 걸어서 붙박아 두었으므로 부뚜막을 부수고 솥을 뜯어내지 않으면 들어낼 수 없다. 정착생활의 전통이 붙박이로 건 솥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큰 솥을 움직일 수 없도록 부뚜막에 붙박이로 걸어 둔 주방문화도 한국문화만의 특징이라 하겠다.
부뚜막에 붙박이로 걸지 않고 후라이팬처럼 쉽게 들어 옮길 수 있는 냄비의 구조와 솥은 전혀 다르다. 냄비는 풍로나 화로, 숯불 위에 얹어서 조리하고 쉽게 옮길 수 있는 조리기구이다. 따라서 밑면이 넙적해서 그 자체로 안정적이되, 붙박이로 둘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그러나 솥은 아궁이에 걸 수 있는 걸이가 마련되어 있다. 솥발로 세우거나 솥전에 테두리가 넓게 붙어 있으므로, 부뚜막에 걸쳐서 붙박이로 걸 수 있다. 게다가 밑면이 반쯤 둥글게 생겨서, 밑면이 넙적한 냄비와 달리 곡면인 까닭에 붙박이로 걸어두지 않으면 안정감이 없다. 굳이 솥의 밑면을 불안정하게 반구형으로 만든 것은 평면형 냄비보다 곡면인 솥의 열 효율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아궁이에 붙박이로 걸어두는 솥의 구조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조리구이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는 구들구조의 아궁이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냄비나 후라이팬처럼 수시로 옮겨놓을 수 있는 이동식 조리구를 쓴다. 이동식 조리기구는 모두 밑면이 넙적해야 한다. 그래야 어디든 옮겨 놓아도 안정감이 있다. 후라이팬 요리처럼 물을 쓰지 않고 기름으로 튀기거나 철판에다 직접 익히는 요리는 이동생활에 익숙한 유목문화의 조리법이다. 반대로 붙박이로 걸어 쓸 수밖에 없는 솥과 같은 조리구는 정착형 농경문화의 조리방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겨레의 가장 오래된 유물이라 할 수 있는 빗살무늬토기들은 한결같이 밑면이 타원형이다. 그 크기도 독처럼 상당히 커다란 것이 많은데, 그 자체로 세워둘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한 구조이다. 솥처럼 붙박이로 걸어두고 쓴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토기는 정착문화가 빚어낸 그릇리라는 것이 분명하다. 유목민들에게는 이러한 용기가 불필요하다. 커다란 크기나 불안정성으로 볼 때 이동용 용기가 아닌 까닭이다. 곡물을 오래 저장하거나 음식을 끓이는 데 알맞은 그릇이다. 특히 밑면이 계란처럼 뾰족한 타원형 토기는 음식을 끓이는 데 밑면이 반구형인 솥보다도 훨씬 열 효율성이 높다. 그러므로 정착생활을 하면서 아궁이에 솥을 걸듯이 걸어두고 썼을 가능성이 높다.
자연히 빗살무늬토기는 정착문화를 꽃피운 사람들의 발명품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이 토기는 만주와 한반도를 비롯한 고조선 땅에서 가장 많이 캐이고 또 가장 오래된 것이다. 단군신화가 말하는 정착문화와 구들문화, 높은 열로 불에 구운 빗살무늬토기, 그리고 이 토기의 지리적 분포와 빈도는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빗살무늬토기는 고조선 문화 앞부터 있던 한민족 선사문화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우리 학계는 빗살무늬의 상징이나 기능도 아직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다. 모래에 묻었을 때 마찰을 높이려는 것이라고 궁색하게 기능을 말하는 것이 고작이다. 마찰에 따른 안정감을 높이려면 밑면을 넙적하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인데 왜 굳이 불안정한 모양을 만들어서 뒤늦게 마찰 기능을 하도록 번거롭게 무늬를 넣었을까. 속 시원하한 풀이가 아니다. 이와 반대로, 밑면이 뾰족한 까닭은 모래땅에 묻었다가 파내기 쉽도록 만든 때문이라 한다. 마찰을 부정하는 풀이다. 모래땅에 마찰을 높이는 일과 묻기 쉽게 하는 일은 서로 모순관계에 있다. 모순관계를 알지 못하고 해석의 당착에 빠져 있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다.
이 토기가 주로 발견되는 곳이 모래땅이라는 사실보다 강가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강가에서 주로 정착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토기의 재료가 모래가 아닌 진흙인데, 모래땅을 찾아 정주했다는 사실은 긴요하지 않다. 물을 써서 살려고 강변에서 주거생활을 했을 것이다. 강변에 모래가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토기를 이용하여 식재료와 물을 넣고 오랫동안 끓여서 음식을 조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토기는 열전도율이 낮다. 따라서 열전도율을 높이기 위해 가마솥처럼 밑면을 길게 타원형으로 하고 빗살무늬까지 새겼던 것이다. 타원형의 밑면이 뾰족할수록 불꽃이 많이 닿아서 열효율성이 높고 빗살무늬가 불꽃 방향으로 새겨져 있을 때 열전도율도 더 높다.
< V자형 빗살무늬토기 >
솥으로 쓴 토기일수록 가마솥처럼 크고 밑면이 팽이 모양으로 더 뾰족할 필요가 있다. 밑면이 뾰족한 타원형일수록 불기가 닿는 면이 훨씬 많고 불꽃의 흐름을 모두 감싸 안을 수 있다. 그리고 평면보다 골이 파여져 있으면 불기가 닿는 면이 더 많아지고 열전도율도 높아진다. 빗살무늬 가운데도 불꽃이나 불기의 흐름에 따라 일정하게 새긴 무늬는 그러한 효율성을 더 높이게 된다.
따라서 다양한 빗살무늬가 있지만, 솥으로 쓴 토기의 빗살무늬는 불꽃이나 열기의 흐름을 순조롭게 유도하는 모양이 더 효과적이다. 방향이 서로 얽혀 있는 빗살무늬보다 정교한 V자형 무늬를 첩첩이 정교하게 파서 새겨둔 토기는 열전도율이 더 높아서 음식을 끓이는 조리도구로 쓰기에 좋다. 그러므로 그림과 같은 토기는 밑면의 모양이나 V자형 빗살무늬가 열전도율을 높이는 데 좋아서 솥단지 구실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말에는 아직 솥단지라는 말이 남아 있다. 청동기나 무쇠솥이 나오기 전에는 질그릇 솥을 쓴 까닭이다. 자배기나 단지와 같은 옹기는 물론 토기도 물만 새지 않으면 솥 구실을 충분히 한다. 최근까지 나그네나 등짐장수들은 작은 질그릇 단지를 가지고 다니며 밥을 지어먹었다. 따라서 선사시대의 토기들 가운데 고열로 구어서 물이 새지 않는 토기들은 솥 구실을 하는 데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솥을 일컬어 아직도 ‘솥단지’라 하는 것이다.52)
더군다나 청동기 시기의 유물로 시루가 나타나고 있다. 시루는 김으로써 음식을 익히는 것으로 솥을 전제로 한다. 솥도 정착문화의 산물이고 김을 쓴 시루도 정착문화의 산물이다. 질그릇 솥이 바뀌어 질그릇 시루가 나타났다. 질그릇 솥에 구멍을 뚫어서 만든 것이 시루다53) 빗살무늬토기 아랫부분에 구멍이 나 있는 것도 일종의 시루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시루가 솥보다 앞이라는 전제로 우리 식품사를 간추리면서 먼저 시루에다 떡을 쪄먹다가 뒤에 밥을 지어먹었다는 식으로 밥의 역사 앞에 떡을 내놓는 식품학계의 해석은54) 유물의 물증에 지나치게 묻힌 나머지 논리적 해석 능력을 잃어 빚어진 잘못이라 할 수 있다.55)
불에 직접 구워 먹는 유목문화에서는 솥을 붙박이로 설치한 부뚜막 문화도 찾을 수 없지만, 물로 오랫동안 삶거나 김으로 익히는 식문화도 찾아보기 어렵다. 시루는 “솥으로 물을 끓이는 문화 속에서 김으로써 음식을 조리하는 기술적 방법의 모색 끝에 발명된 것이다. 따라서 이동생활을 하는 유목문화의 전통에서는 발명하기 어려운 것이 시루다. 솥을 걸어 놓고 오랫동안 음식을 고우거나 물을 끓일 수 있는 정착문화의 조리문화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56) 그러므로 시루는 솥단지 뒤에 발명된 정착문화의 전형을 이루는 식문화의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자연히 시루떡은 시루가 빚어낸 한국 고유의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시루떡은 쪄서 먹는 음식의 전형이다. 시루떡 외의 모든 떡도 구운 것이 아니라 쪄서 만든 음식이다. 찌는 것은 떡뿐만 아니다. 서양 사람들이 구워먹는 옥수수나 감자, 고구마, 빵도 우리나라 식문화에서는 모두 쪄서 먹는다. 찐 옥수수, 찐 감자, 찐 빵은 모두 쪄서 먹는 식문화의 전통에서 비롯된 음식이다. 김으로 찌는 요리방식은 삶는 요리보다 더 발전된 조리법이다. 요리삼각형으로 식문화의 발전양상을 체계적으로 푼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도 삶는 요리까지만 다루고57) 김으로 찌는 요리는 다루지 않았다. 많은 현지조사 경험을 했지만, 오랜 정착생활과 구들문화의 전통에서 빚어낸 시루문화, 곧 찌는 요리문화를 겪지 못한 탓이 아닌가 한다.
오랫동안 가마솥에다 고아내는 곰탕과 김으로 쪄내는 시루떡 요리는, 물 없이 불에다 바로 익히는 유목민들의 바비큐형 구운 식문화 유형과 견주어 보면 퍽 대조적이다. 그것은 곧 이동형 유목문화와 정착형 농경문화의 차이를 말한다. 농경문화의 원형을 지닌 우리민족의 식문화는 무엇이든 물을 부어 솥에다 삶거나 김으로써 찌는 식문화가 자라 있고, 그에 따른 조리기구와 식기들이 생겼다. 그러한 대조적 관계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이동생활(유목):난로-프라이팬-굽는요리-바비큐-접시-칼과 포크-구운 빵
정착생활(농경):구들-가마솥-삶은(찐)요리-곰탕-대접-숟가락과 젓가락-시루떡
서구인들이나 중국 사람들도 오래 전부터 정착생활을 하며 농경문화를 누렸지만, 보다 유목문화의 전통이 뿌리 깊어서 여전히 옮겨삶에 따른 문화적 경향성이 짙다. 우리 민족은 단군신화 이래로 정착생활이 사람다운 삶으로 자리매김되어 있고, 그러한 가치관이 이어졌던 까닭에, 상대적으로 정착문화의 경향성이 두드러진다. 그 자체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동성이 센 유목문화의 전통과 견주어 보면 그러한 특징이 보다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단군신화가 규정하고 있는 채식문화와 정착문화는 구들문화와 앉는문화, 문지방문화, 휴대용 가구문화와 같은 독특한 주거문화, 그리고 숟가락문화와 가마솥문화, 시루문화, 산채문화, 곰탕문화, 국문화와 같은 독특한 식문화를 내왔다고 하겠다.
5. 단군신화의 현실적 기능과 문화 창조력
우리 문화는 여러 모로 서구문화와 대조적이다. 그렇다고 하여 중국과 일본 문화와 닮은 것도 아니다. 아시아 여러 문화와 견줘 봐도 퍽 대조적이다. 그러한 민족문화의 정체성은 기원적으로 단군신화가 이뤄진 때부터 형성된 것으로 추론된다. 사람이 되려는 삶꼴로서 채식 중심의 먹거리와 정착형 주거방식을 제시한 단군신화의 내용에서 그러한 문화적 원형을 분명하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군신화에 갈무리된 채식생활 중심의 농경문화와 그에 따른 정착생활은 역사적 전통으로 이어지면서 정착형 농경문화다운 독창성을 갖가지로 창출했다. 따라서 구들문화와 숟가락문화는 정착생활의 바탕 위에 자리잡은 농경문화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일상문화의 전통은 다른 나라 문화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 민족만의 독자적인 문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전형은 단군신화의 지독한 채식생활과 지독한 정착생활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우리는 여전히 단군신화를 살고 있는 것이다. 더 거칠게 말하면 단군신화의 곰네처럼 자고 먹는 삶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므로 단군신화는 한갓 만들어진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도덕적 가치관과 사회적 규범을 세워 주면서 우리 민족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는 가운데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해 주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단군신화에서 말하는 지독한 채식생활과 정착생활은 우리 문화의 역사적 기원이면서, 동시에 창조적 원형(原型)을 이루고 있는 것이자, 현재의 역사와 문화로 살아 있다.
신화가 가지는 기능적이고 문화적이며 실용적인 여러 원칙은 신화 자체의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실제 이야기되고 구체화되며 일상생활과 이어진 관계를 가질 때 비로소 명백하게 드러난다.58)
단군신화가 설정한 사람다운 삶의 원형은 문화적 유전자로 이어지고 역사적 전통으로 살아 있는 까닭에 현재의 우리 삶 세계 속에서 독창적인 전통문화로 계승되면서 끊임없이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뜻으로 볼 때, 우리는 아직도 고조선의 사람들이다. 말을 바꾸면, 단군신화가 지어지던 시대의 사람들과 더불어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고59) 했던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건국신화를 다룬 단행본을 펴내면서 “우리는 아직도 신화시대에 살고 있다.”는 제목의 머리말을 썼다. 그리고 10년 뒤에 이 책을 다시 펴내면서 “우리는 지금 신화시대로 간다.”는 제목의 글을 재판 머리 글로 더 보탰다.60) 우리는 지금 정보화시대에서 나아가 다시 신화의 시대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신화가 태초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지금 여기의 이야기이자, 나아가 미래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침내 신화는 ‘오래된 미래의 이야기’라는 형용모순의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61)
그런데도 우리 학계는 지금까지 단군신화 연구에서 두 가지 방향으로 어긋지게 가고 있다. 하나는 단군신화를 한갓 허구로 여기는 경향이며, 둘은 단군신화의 작품 자체 연구에 묻히는 경향이다. 앞의 경우는 고대사 자료로도 인정하지 않지만, 거의, 연구는 단군신화를 태초의 것이거나 옛것이어서 지금 우리 삶 세계나 현실문화와 아무런 얽힘이 없는 이야기로 여긴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첫째, 단군신화가 실재 사실이 아니라 허구적으로 지어졌다고 여기는 주장은 고조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학자들의 일제강점기 식민사학 이래 이어지고 있다. 그러한 연구경향의 대표적인 보기로, 단군과 단군신화를 ‘만들어진 신화’로 규정하며 사료적 값어치가 없는 허구이거나 실재 사실과 무관한 이야기로 깎아내리려는 풀이를62) 들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환웅천왕이 내놓은 사람다운 식생활로서 곰네처럼 쑥과 마늘을 즐겨 먹고 있을 뿐 아니라, 붙박이 주거생활에 익숙해 있다. 아예 방바닥에 구들을 깔고 앉아 살며 현대적인 구들문화 기술을 갖가지로 발휘하고 있다. 자고 먹는 일상문화의 전통이 단군신화의 삶 세계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의 전통 말고도 민속신앙의 양식과 천지인의 세계관도 겨레의 문화 속에 이어지고 있다.63) 천부지모(天父地母) 사상과, 신성(神性)과 수성(獸性)을 함께 갖춘 사람됨의 본질에 대한 내용도64) 매우 현실적이다. 이 밖에도 현실문화 속에서 분석해 낼 만한 단군신화의 내용들이 적지 않다. 여기서는 식문화와 주거문화만 다루었을 뿐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검토한 우리 겨레의 삶 세계가 허구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단군신화는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우리 생활사와 문화사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군신화는 허구라는 뜻에서 ‘만들어진 신화’가 아니라, 우리의 문화적 원형과 세계관을 잘 갈무리하면서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규정해 주는 훌륭한 준거이자 미래의 지표라는 점에서 오히려 매우 ‘잘 만들어진 신화’라 할 수 있다.
둘째, 많은 학자들은 단군신화의 내용을 고대사의 자료이거나 태초의 신성한 서사 작품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까닭에 고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단군신화의 내용을 근거로 고대사를 되살리는 역사적 연구를 하거나, 아니면 단군신화를 문학작품으로 다루어 서사적 구조와 상징을 분석하고 밝히는 문학적 연구를 한다. 어느 쪽이든 신화의 현재적 기능에 관해서는 문제의식을 하지 않는다.
신화의 내용 자체에 묻혀 있는 까닭에, 관련 자료를 모아서 각편을 견주고 어원이나 요소 풀이하면서 어휘를 정확하게 주석하고 내용을 제대로 읽어서 고대사를 밝히는 데 만족하기 일쑤이다. 그렇지 않으면 작품자체를 구조적으로 현란하게 분석하여 내적 체계의 서사적 형상성을 밝히는 수준이다. 다른 자료를 맥락적으로 다루어도 신화가 놓여 있는 시기의 고고학적 유물에 한정된다. 현실의 삶으로 신화를 끌어오기는 엄두도 못 낸다. 그래도 민속학적 연구는 보다 현재의 민속문화를 눈여겨보면서 방법을 바꾸려 했지만65) 특수한 민속현상을 다루는 데 머물러서 자고 먹는 일상문화나 우리 겨레의 삶 세계와의 깊은 얼개를 찾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현장론적 연구를 하면서 현지조사를 해도 신화를 홑지게 찾아서 적기만 하여 자료화하는 데 머무는 수준이다. 말리노우스키가 집은 것처럼 ‘신화가 일상의 삶과 얼개를 가지게 되는 갖가지 복잡한 방법을 주목하거나, 신화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폭넓은 사회적 문화적 현실을 잡아서 신화의 기능을 연구하는 작업’은 거의 하지 않는다.66) 그런 까닭에 신화의 본질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신화의 현재적 기능을 못 느낀다. 신화는 ‘오래된 미래의 이야기’라는 깨달음은 아예 없다. 자연히 단군신화는 문화창조의 샘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단군신화는 민족문화의 원형으로서 일상문화 속에서 문화적 정체성을 세워 주는 구실을 감당해 왔다. 우리 선조들은 알게 모르게 단군신화의 규범대로 또는 그 문화적 원형을 좇아서 살아온 것이다. 그럼 오늘을 사는 지금 우리는 단군신화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선조들이 전통문화 체제에 맞게 단군신화를 살아온 것처럼, 우리는 현실체제에 맞게 단군신화를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미래의 문화를 단군신화의 내용답게 만들어 가는 일이다.
이를테면 쑥과 마늘의 식문화 전통을 현실에 맞게 적극적으로 되살리려는 구상이 필요하다. 쑥과 마늘을 식품으로서의 장점과 약품으로서의 효능을 갖가지로 분석하는 과학적 연구는 물론, 쑥과 마늘을 우리 식문화로서 가꾸어 나가는 데 힘을 기울어야 한다. 일본의 매실장아찌(梅干:うめぼし)에 대하여, 우리 ‘마늘장아찌’를 한국 고유의 식품이자 건강식품으로 특화할 필요가 있다. 한식의 기본 차림표로 적극 끌어들이는 전략이 기대된다.
지금은 간장으로 만든 마늘장아찌가 주를 이룬다. 간장 말고 고추장, 된장, 젓갈 등으로 만든 갖가지 마늘장아찌 개발도 구상할 만하다. 마늘이 건강식품이라는 것은 이제 널리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마늘장아찌를 한국의 대표 식품으로 개발하면 김치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세계적 건강식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모찌와 중국의 월병처럼, 한국의 쑥떡도 더 효과적으로 상품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쑥의 효능을 생각할 때, 곡류로 만드는 모찌나 월병과 달리 건강식품으로 눈길을 끌 수 있다. 쑥차와 쑥음료를 한국 고유의 건강음료로 만드는 구상도 필요하다. 쑥과 마늘을 소재로 한 일련의 상품들을 세트화하는 것도 시도할 만하다.
쑥떡이든 마늘장아찌든, 신화시대부터 전승되는 신성한 식품으로서 단군신화의 뜻을 매겨야 미래 문화상품으로서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러자면 곰을 사람으로 만들어준 단군신화의 신령한 쑥과 마늘 이야기를 반드시 써먹어야 한다. 상품으로서의 쑥떡과 마늘장아찌보다 단군신화가 보증하는 이야기의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앞으로는 소비자들이 물질적인 상품보다 상품과 더불어 있는 이야기를 찾는 경향이 더 세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품의 진열도 상품의 갈래가 아니라 이야기의 갈래에 따라 늘여놓을 것으로 보인다.67) 미래학자 롤프 옌센(Rolf Jensen)은 아예 미래를 신화의 시대 또는 이야기의 시대로 바라본다.68) 상품 자체보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묻어나는 상품이 더 중요한 시대로 가게 된다.
그러므로 미래에 단군신화는 고조선시대 이래로 쑥과 마늘로 만든 다양한 음식들을 신령한 식품으로 보증하는 이야기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 단군신화를 얼마나 우리 문화 속으로 되불러낼 수 있는가, 단군신화의 바람직한 세계관을 어떻게 우리 삶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가, 그런 힘이 바로 미래문화를 창조적으로 세우는 민족문화의 힘이 될 것이다. 쑥과 마늘을 먹고 구들문화를 누리는 한 우리 겨레는 단군신화와 함께 간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우리 겨레는 단군신화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단군문화 겨레라 할 수 있다.
6. 역사인식의 성찰과 민족문화 기원론의 재인식
지금까지 논의를 중심으로 볼 때 잦아든 연구의 한계를 넘으려면 단군신화와 고대사, 민족문화 연구에 세 가지 혁신이 바라진다. 하나는 단군신화를 허구적인 사료로 비트는 반역사적 연구에 대한 혁신이다. 단군신화가 고대사이자 현대사이며 미래사라고 하는 역사 인식은 단군신화만의 것이 아니라 신화 일반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역사는 왕조사나 정치사가 아니라 민중생활사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생활사는 물론 현재의 민중생활사까지 생생하게 밝히고 있는 까닭에 고대사 사료이자 현대 생활사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단군신화는 현대 민중생활사를 밝히는 자료로서도 매우 정확한 것이자 밝은 준거가 되고 있는데, 단군신화시대의 생활사를 푸는 데 사료 구실을 하지 못하는 허구적 자료라고 하는 것은, 일부러 식민사관을 따르려들지 않고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둘은 우리 민족문화의 원류를 시베리아에서 찾는 이른바 시베리아 기원설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 시베리아기원설은 으레 시베리아지역 각 민족은 물론 몽골문화 및 유목문화 기원설과 이어져 있다. 적어도 고조선 건국시기의 우리 겨레 문화는 정착형 농경문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는 초원지역의 유목문화와 여러 모로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 문화적 원형과 뿌리도 다르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증적으로 단군신화와 현실의 일상문화가 그러한 갈래 차이를 여러 모로 견주어 보여주는 것과 더불어, 우리 고대문화를 적은 중국의 사서에서도 한결같이 동이족은 토착민이며 비단옷을 입었고 농사를 지었다고 하여, 정착문화와 농경문화의 내용을 두루 적고 있다.69)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 문화는 북방문화며 근본적으로 유목문화라는 전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70)
단군신화 자체가 농경문화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데도 북방문화 전래설에 묻혀 있으면 유목문화를 우리 문화의 원류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환웅이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펼쳤다는 것은 농경문화를 둘러말한다. 유목문화라면 풀밭에서 신시를 펼쳐야 할 것이다. 게다가 비바람 신은 모두 농경을 관장하는 신이다. 더 곧바른 내용은 “곡식․인명․질병․형벌․ 선악 등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였다”고71) 밝혀 두었다. 환웅이 땅에서 가장 먼저 곡식에 관한 일을 주관하였다는 것은 농경활동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음을 말한다.
환웅이 관장했던 일 가운데 곡식을 맨 먼저 말한 것으로 보아 그 때 농업이 가장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바람과 구름, 비는 기후와 관계가 깊은 것으로 농업사회에서 중요한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환웅시대는 농업사회였으며 농업을 바탕으로 붙박이 삶에 들어간 것임을 알 수 있다.72)
그러므로 자생적 농경문화의 원형을 부정하고 유목문화로부터 민족문화의 원형을 찾는 논의는 문헌사료와 실증사료를 함께 부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풀밭의 유목문화에 우리처럼 쑥과 마늘을 늘 먹는 식문화는 물론, 구들을 놓고 앉아 지내는 정착형 주거문화가 없지 않은가.
셋은 역사인식의 한계를 혁신해야 한다. 현재 우리 학계가 안고 있는 역사인식의 한계는 크게 3 가지이다. 첫째, 역사는 왕조사처럼 시대에 따라 끊기고 흐름이 교체되며 흐름이 다 바뀐다는 단선적 교체와 끊김의 역사에서 벗어나, 문화사나 민속사처럼 시대가 지나도 이어지고 쌓이며 자라는 복선적 이음과 쌓임의 역사로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시대구분론도 이와 같은 논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연히 연대기적 작업에서 위상적 작업이 긴요하다.73) 이러한 역사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단군신화의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다.
둘째, 인류의 역사는 생태학적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인식이다. 생태학적 조건이 생업을 결정하고 생업에 따른 생산양식이 문화를 결정하는 긴요한 구실을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생태학적으로 풀밭에 사는 민족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목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프리카 밀림 속에 사는 소수민족들의 문화는 인류학자들에게 원시사회 또는 원시문화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진화론의 한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역사발전 단계에 따라 역사가 발전되지 않고 있는 현상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화상대주의에 따라 대등하게 문화적 가치를 인정할 때에도 가장 비중 높게 고려하는 것이 생태학적 조건이다.
그렇다면 생태학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지리적 인접성을 중심으로 전파론을 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몽골의 문화가 티베트의 그것과 많이 같은 것은 땅이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생태학적 친연성 때문이기도 하다. 농경생활이 어려운 풀밭에서는 유목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문화생태학적 현실이다. 몽골과 러시아는 한국이나 일본보다 중국과 땅이 가깝지만, 중국의 한자문화나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는 생태학적 조건에 맞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므로 풀밭의 유목문화를 근거로 온대지역 농경문화의 자생설을 부정하며 전파주의적 해석을 하는 것은 비판적으로 넘어야 할 대상이다.
셋째, 역사학이 역사를 연구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역사학은 사료를 연구할 따름이다. 역사와 사료가 같은 개념이라면 모를까, 지금까지 모든 역사학은 사료를 분석하고 푸는 일에 머물렀다. 사료연구를 곧 역사연구로 환원하는 것은 사료와 역사의 혼동을 스스로 인정할 따름이다. 달리 말하면 사료를 연구하는 학문은 사료학이지 역사학은 아니다.74)
문헌의 글이나 역사 유적과 유물은 사료일 뿐 역사 자체는 아니다. 실제 역사는 일정한 때의 공동체생활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 신라사는 신라사람들의 공동체생활의 통시적 흐름이라 해야 마땅하다. 신라사 전공자는 신라시대의 사료로 신라사 곧 신라인들의 공동체삶을 추론할 뿐이다. 어떤 신라사 전공자도 신라사를 곧바로 다루지 못한다는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사료보다 실제 삶을 근거로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긴요하다. 그것이 될까. 안 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헛된 이상이다.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역사인식의 한계 때문이다. 역사는 끊기고 다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고 쌓이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사정이 달라진다. 우리가 아직도 단군신화를 살고 있다고 여기면, 단군신화시대의 역사연구를 지금의 우리 생활사 속에서 풀 수 있다. 쑥과 마늘의 음식사는 단군신화시대의 역사자 현실의 역사다. 정착형 주거생활사도 단군신화시대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의 역사가 이어지며 바뀌고 있는 것이 오늘의 민족사이자 민중생활사다.
현실의 민중생활사 속에 신라사와 고려사, 조선사는 물론 고조선의 역사도 살아있다. 그러한 문화적 유전인자와 역사적 지속성을 찾는 눈이 있어야 한다. 시베리아와 몽골 문화 속에서는 현재의 우리문화와 같은 점을 찾아 성급한 전파론을 펼치면서, 왜 우리 역사와 문화 전통 속에서는 고대사와 고대문화의 뿌리를 찾지 못하는가.
왜 신라 금관의 뿌리를 신라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찾지 못하고 시베리아 샤먼에서 찾는가. 통시적 흐름의 시간적 맥락을 찾는 것이 역사학의 역량이자 장점인데, 오히려 그러한 장점을 발휘하지 못한 채 전파주의에 빠져 공간적 연관성을 찾는 지리학적 풀이로 만족하는 것이 고대사 연구의 근본적인 문제다. 그러므로 역사연구의 성찰과 역사인식의 혁신 없이는 우리 고대사와 고대문화의 주체적 풀이는 바라기 어렵다. 민속학 전공자가 주제넘게 역사학의 기본적인 한계를 안고 뒹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주제어: 단군신화, 식생활, 주거생활, 정착생활, 온돌문화, 농경문화, 채식문화, 민중생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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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초록>
Cultural Archetype and Identity of National Culture
on Viewing the Myth of Dangoon
Lim, Jae-Hae
A myth is recognized the story of the beginning of the world, but actually that is both a current story and a future story. Because a myth not only tell us a sacred history, but also function a divine model and paradigm of human behavior. The case of the Myth of Dangoon also don't cease from the birth myth of nation of Gochosun, alive as an barometer example of Korean culture in real currency life.
The most representative example are a eating life and a housing life. In the Myth of Dangoon, bear and tiger pray to Hwanwoong which would be a human being. That time Hwanwoong say that don't see any sunshine and live in the cave, eating only wormwood and garlic. A wormwood and garlic means a vegetable diet centered eating culture and 100 days cave life means a settlement centered housing culture. Therefore the Myth of Dangoon show a peculiar eating culture eat a wormwood and garlic and archetype of a peculiar housing culture use bottom heating system, reflecting settlement agricultural culture.
Actually our eating life carry on a cultural tradition that eat a wormwood and garlic differently a neighborhood country. If we compare our country with other one in the cultural relationship, the identity of our eating culture is remarkable. In our country we eat not only wormwood and garlic but also wild edible greens, but Mongol don't eat both wormwood and garlic and Japanese don't eat garlic, and Chinese don't eat wormwood. A vegetable diet culture tradition of the Myth of Dangoon alive as identity of modern eating culture.
A housing life of our people is also peculiar. In the Myth of Dangoon a desirable housing life is not nomadic life but settlement life. That is to present a criterion of desirable human life, on relating with a vegetable diet culture. The Ondol culture of korean tradition is caused from settlement housing life. Ondol culture create a bottom seating life, and invent a electronic capet, Ondol boiler, electronic Guduel, Ondol bed.
A eating life and housing life that the Myth of Dangoon present as a criterion is not only alive in our modern folk life history, but also continue in the future. We need to seize a cultural creation power of the Myth of Dangoon and grope for a load of re-creation. We can look forward to find strategy that develop wormwood and garlic to modern eating culture goods and re-create the Ondol culture to new heating system in the modern housing life.
A vegetable diet centered eating culture and a settlement centered housing culture is a identity of our national culture, and its archetype is found in the myth of Dangoon. Therefore the myth of Dangoon was made in the temperate regions in the era of a settlement agricultural life. The cultural archetype of Gochosun is also found in cultural archetype of the myth of Dangoon. Consequently If we overcome a prejudice that our culture is originated from a nomadic culture in Siberia or Mongol, we can find the desirable identity of our culture.
Key-words : the myth of Dangoon, eating culture, housing culture, settlement life,
Ondol culture, agricultural culture, a vegetable diet culture, a folk life history
* 이 글은 단군학회 봄학술대회(동북아역사재단, 2007, 6. 2.)에 내놓고 말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