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 이호성(李好誠)이 졸(卒)하였다. 이호성은 성주(星州)사람으로서, 태어나면서 골격(骨格)의 모양이 보통 사람과 달랐는데, 장성(長成)함에 미쳐 여력(膂力)이 남보다 뛰어나고 궁술(弓術)과 마술(馬術)에 뛰어나며, 자못 독서(讀書)할 줄 알아서 병법(兵法)에 밝았다. 정미년(丁未年)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사복시 직장(司僕寺直長)에 제배(除拜)되었고, 벼슬을 여러 번 옮겨서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에 이르렀다가, 거제 현령(巨濟縣令)으로 나가서 읍(邑)을 옮기고 성(城)을 쌓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오랑캐를 방비한 공이 있었으므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승진되었고, 공조 참의(工曹參議)와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역임하였다가 다시 들어와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는데, 부모가 늙었음으로 인하여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 경상우도 처치사(慶尙右道處置使)에 제수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졸(卒)하니, 나이가 71세였다. 이호성은 성품이 경직(勁直)하고 청렴결백(淸廉潔白)하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고, 이치(吏治)에도 또한 통달하였다. 일찍이 최윤덕(崔潤德)을 따라 북정(北征)에 참여하여 편비(偏裨)가 되었는데, 향(向)하는 곳마다 대적(對敵)이 없어서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리었는데, 20여 년 동안이나 변방에 머물면서 수위(戍衛)하여 산천(山川)의 험이(險易)를 잘 알므로 공격하고 수비할 때에 그 꾀하는 바가 실책(失策)이 없었다. 그리고 부모가 늙었으므로 19년 동안 남방(南方)에서 벼슬할 적에도 나라를 근심하며 봉공(奉公)하는 것이 지성(至誠)에서 나와서, 무릇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에도 일찍이 강병 비변(强兵備邊)으로써 우선을 삼지 않은 적이 없었고, 전함(戰艦)의 건조와 목장(牧場)의 설치, 적(賊)을 방어하는 등과 같은 이민지책(利民之策)을 건명(建明)한 바가 많았으며, 벼슬을 살면서 직분(職分)을 지켜서 추호(秋毫)도 범한 것이 없었고, 산업(産業)을 일삼지 아니하여 의복(衣服)에 두터운 갖옷[重裘]이 없었다. 병이 몹시 위독하여 시첩(侍妾)이 호곡(號哭)하니, 이호성이 분연(奮然)히 말하기를,
“예전에 이르기를, ‘남자는 부인(婦人)의 손에서 죽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고, 마침내 그 시첩을 물리쳤다.
시호(諡號)를 정무(靖武)라 하였으니 몸을 삼가고 말이 적은 것을 정(靖)이라 하고, 성품이 강직하며 사리가 곧고 바른 것을 무(武)라 한다.
그러나 이호성이 적처(嫡妻)를 소박(疎薄)하였으며, 아들 이거인(李居仁)이 있어 무예(武藝)에 능하였으므로 그 가세(家世)를 이었다.
【원전】 8 집 62 면
【분류】 인물(人物)